나눔의 광장

강론 말씀 성령 강림 대축일-서공석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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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경 [klara1617] 쪽지 캡슐

2007-05-27 ㅣ No.1721

Holy Spirit

 
 
J.S. 바흐 - 미사 b 단조 BWV 232 중에서
"거룩하신 주 성령" (토마스 헨겔브로크 / 지휘)
 
Johann Sebastian Bach (1685 ~1750)
Messe h-moll  BWV 232 
Gloria: "Cum Sancto Spiritu"
Balthasar-Neumann-Chor
Freiburger Barockorchester
Thomas Hengelbrock (Conductor)
 

 

 

 

 

성령 강림 대축일    2007년 5월 27일


요한 20, 19-23.  사도 2, 1-11.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에 우리는 사도행전이 전하는 이야기를 제1독서에서 들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발족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하느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말하는 구약성서의 표현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과 교회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알립니다. 신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는 말로써 오늘의 사도행전은 모든 신자들에게 오신 성령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거센 바람’, ‘소리’, ‘불꽃’ 등은 하느님이 오셨다는 것을 알리는 구약성서의 표현들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체험한 바를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구약성서의 표현들을 빌려서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자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각자 자기네 지방 언어로 알아듣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11장이 전하는 바벨탑의 이야기와 정반대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사람들이 강자 밑에 모여 모두가 같은 말을 하며,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쌓아 올려서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강자 밑에 뭉쳐 하나가 된 인간이 하는 일은 인간의 위력을 나타내고 자랑하는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나타난 현상은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강자 밑에 뭉쳐서 모두가 같은 말을 하며 살지 않고, 각자가 자기 소신대로 말하고, 자기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오시자 신앙인들은 자기 말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횡포를 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창세기(2,7)에 보면 하느님이 진흙을 빚어 사람 모상을 만드시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니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성령을 주셔서 그들이 이제부터 예수님의 숨결로 사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예수님이 사셨던 그 생명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셨듯이 죄를 용서하는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입니다. 긍정적으로 말한 것을 뒤집어서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여 앞에서 긍정한 것을 강조하는 화법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용서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숨결로 사는 제자는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사명이 죄의 용서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이 복음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1,29)이라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죄의 용서라고 요약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사람들에게 씌워놓은 죄의 멍에를 벗기는 일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그런 것이라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주신 성령과 사명도 당연히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선포한 것을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사람을 단죄하는 행위는 사람을 죽이는 마귀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 8장에 유대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회당에서 율법의 이름으로 단죄하며 돌로 치려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그들의 마수에서 구해 놓고, 사람을 용서하고 살리는 일이 하느님의 진리(8,40;45)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제자들이 할 일이고,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실 때 그분 안에 살아계셨던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도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선포하는 제자이면서 사람을 죄인으로 단죄할 수 없고, 성령을 받은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절망하고 자포자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사람이 자기 죄를 찾아내고 그것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길이 아닙니다. 죄를 면밀히 성찰하고 그것을 피하는 법을 배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겠다는 수작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계시게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용서하고 살리신 예수님의 일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시고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남을 단죄하면서 우리 자신을 의인으로 착각하는 우리의 관행에서 벗어나,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참다운 자유를 누리는 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지킬 것 지키고, 바칠 것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상을 받겠다는 마음은 자유를 모르는 노예의 마음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이 백성을 억압하며 그들에게 강요한 마음이고,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율법을 빙자하여 요구하던 마음입니다. 흔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신앙인들에게 요구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숨결로 사는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는 그런 마음에서 자유롭습니다. 


성령강림은 성탄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일을 완성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면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하느님의 일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 후에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 안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보여주신 하느님의 나라를 실천하며 사는 이들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 안에 일하신 성령은 그들 신앙인들 안에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고, 나자렛에서 자라고, 갈릴레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골고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장소들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예수님의 모습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합니다. 그것은 섬기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숨결로 사는 사람도 요란하지 않고 소박합니다. 그의 삶에 돋보이는 것은 섬김입니다. 성령이 그의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창립된 교회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도 섬김과 용서가 돋보여야 합니다. 교회는 군림하지 않고 섬기며, 어떤 사람도 죄인을 만들지 않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선포합니다. 성령은 신앙인 각자에게 오셨습니다. 신앙인 각자는 창의력을 동원하여 섬김과 용서를 실천합니다. 기적이나 심령기도와 같이 일상생활을 벗어난 일들 안에 성령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베풀고 섬기며 용서하는 가장 일상적인 우리의 일들 안에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각자가 자유롭게 실천하는 하느님의 일 안에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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