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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예수회성인축일표)♬Qui tollis-Antonio Vival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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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7-31 ㅣ No.1295

 

Apotheosis of St Ignatius-BACICCIO.

c.1685.Oil on canvas, 48 x 63,5 cm.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축일: 7월 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St. IGNATIUS of Loyola
Sant' Ignazio di Loyola Sacerdote
Loyola, Spagna, c. 1491 - Roma, 31 luglio 1556
Born:1491 at Loyola, Guipuzcoa, Spain as Inigo Lopez de Loyola
Died :31 July 1556 at Rome
Beatified:27 July 1609 by Pope Paul V
Canonized:12 March 1622 by Pope Gregory XV
Ignazio = di fuoco, igneo, dal latino
Emblema: IHS (monogramma di Cristo)
예수회(Society of Jesus)창설자

 

 

 

예수회의 설립자인 이냐시오는 1491년 스페인 로욜라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군인으로서 높은 명성과 행복을 누리고 있을 때 1521년 팜플로나 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다리를 다쳤다.

 

그는 회복기 동안 소설 대신에 그리스도의 일생과 성인전을 읽으면서 큰 감명을 받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의 양심은 크게 자극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전환이 시작되었다.

환상 속에서 성모님을 뵙고 난 다음, 몬세라트에 있는 성모님의 성지로 순례를 떠났다.

거의 일 년 동안 만레사 근처에 머물면서 때로는 도미니코회수사와 함께, 또 어떤 때는 극빈자 수용소에서,

혹은 언덕의 동굴 속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카다란 마음의 평화가 있은 후로는 망설임이라는 무서운 시련이 거듭되었다.

기도,단식,성사,고행 등 그 어떤 것에서도 위안을 얻지 못하던 그의 마음에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다.

그때가 바로 그의 가장 위대한 저서인 "영신수련"을 저술하기 시작했던 때로서 전환의 시기였다.

 

 

 

대부분 만레사에서 쓰여진 영성수련은 신비체험을 통해 얻은 그의 영성적 통찰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로마와 예루살렘을 탁발 여행,스페인으로 돌아가기 전에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바르셀로나의 어린 학생들에게 문법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유럽의 여러 대학을 다니며 어렵게 공부하여 마침내 파리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524-1534)

 

 

1534년,그와 다른 여섯 명-그 중 한사람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였음-은

자선과 청빈의 생활을 하며 성지로 갈 것을 맹세했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교황의 사도적 봉사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하비에르)Francisco Xavier (Spain, 1506).

First Jesuit Missionary,India,East Indies,Japan,1540-1552 :축일:12월3일,게시판783번.1504번)

 

후자가 선택되었고 4년 후에 이냐시오는 영구적인 단체를 만들었다.

이 새로운 예수의 단체(예수회)는 1540년 바오로 3세에게서 인준을 받았으며,

이냐시오가 초대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예수회 회원들이 교황에 의해 여러 포교지로 파견되었을 때 이냐시오는 고아,입교자,참회자를 위한

집을 짓고자 모범적인 일을 새롭게 강화하면서 로마에 머물렀다.

그는 로마 대학을 설립하였으며 그 목적은 그 사회의 다른 모든 단과 대학의 모범이 되는 것이었다.

또한 저술과 제자 교육으로 훌륭한 사도직을 수행하였고,

영신수련을 위한 복음 묵상과 영적 지도로 하느님 나라 건설에 헌신하였으며

그 제자들은 교회 개혁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삼위일체,그리스도,성체성사 등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기초위에서 영성 생활을 했다.

그의 영성 생활은 예수회의 좌우명인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Ad Majorem Dei Gloriam)"속에 표현되어 있다.

 

순명은 가장 으뜸가는 미덕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으며,

예수회 회원들의 활동성과 능률은 바로 순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증해 주었다.

모든 행동은 교회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로마 교황에 대한 조건없는 순명에 따라 인도되었다.

따라서 모든 예수회 회원들은 세가지 서원에 이어 교황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들을 어떠한 곳에 보내든지 그곳으로 간다는 네 번째 서약을 한다.

 

 

이냐시오 성인의 가장 큰 업적은 예수회를 통해 교회를 안으로 부터 개혁시킨 데 있으며

예수회는 교육사업과 성사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그리고 새로 발견된 이교 지역의 복음화를 통해

종교 개혁으로 타격받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회복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성인은 1622년에 시성되었고,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자로 공경받고 있다.

(오늘의 말씀에서)

 

 

St Ignatius Loyola (detail)-MONTANES, Juan Martinez.
c. 1610.Polychromed wood.Chapel,Seville University

 

 

만레사에서 이니고는 영신수련이라는 그의 소박한 책의 골자를 잡았다.

이것은 기하학의 공식처럼, 서정적이랄것이 거의 없지만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불태웠고,

교회역사를 영웅들로 채워왔다.

영신수련의 독창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이것이 금욕주의적 전통을 따르고 있고 다소 다른 영성작가들의 작품을 기초로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을 농축해서 한권으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가장 고귀한 가슴의 고통스런 경험에 의한 것이다.

몬세랏에서부터 만레사까지 절뚝거리며 걸어온 "숭고한 방랑자"

한번은 만레사로부터 조금 떨어진 작은경당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맑게 흐르는 까르도넬 강을 보며

길가의 십자가 근처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눈깜짝할 사이에

그가 남은 여생동안 배워야 할 만큼 많이 영성적인 것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그의 마음에 비추어졌다.

"이것에 의해서 그의 이해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것처럼,

그에게 다른사람의 마음이 주어진것처럼 밝아졌다."

진정 다름 마음,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던 그 마음" 1523년 2월 말쯤 그는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예수회홈에서 http://www.jesuits.or.kr/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교회의 문에 자기 논문들을 붙였다.

그로부터 17년 후에 이냐시오는 가톨릭 종교 개혁을 위한 너무도 훌륭한 역할을 수행할 수도회

"예수회"를 설립했다.

개신교도들에게 그는 용서할 수 없는 적이었다.

그러나 교회 일치 운동의 근원은 그의 말 속에서 발견된다.

 

"만일 어떤 이단자들이 박애와 그리스도교적 중용의 본보기를 보여 준다면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정통파의 진리를 드러내는 데 깊은 배려를 해야만 한다.

그들의 잘못에 대해 어떤 종류의 경멸도 나타내서는 안되며, 혹독한 말도 해서는 안된다."

현대 교회 일치 운동에 공헌한 가장 위대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은 예수회 회원인 베어 추기경이었다.

 

 

성 이냐시오의 희망은 군인이었으나

 전쟁 때 다리를 심하게 다친 후 군인으로 살겠다는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30대 중반에 학교로 돌아가서 43살에 졸업했다.

 

그래서 그는 군인의 수호 성인인 동시에 만학도들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뒤늦게 학교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젊어서 진학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나 공부를 마치기 전에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학교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학교로 돌아오는 것이다.

만학도들은 뒤늦게 배우는 만큼 학교 수업도 더 진지하게 듣는다.

학교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대학에 다닐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쉰 살이 다 되어서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하였다. 주위에서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시작하지 않는다면 제가 어떻게 교사가 될 수 있죠?"

 

성 이냐시오가 학교로 다시 돌아가 자기 나이의 절반도 채 안 되는 어린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받고

그래서 훗날 큰 수도회인 예수회를 세운 것처럼,

당신에게도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만한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꼰벤뚜알프란치스코홈에서www.ofmconv.or.kr)

 

 

루이스 곤살레스가 성 이냐시오에게 직접 듣고 쓴 행적기에서

(Cap. 1,5-9: Acta Sanctorum Iulii, 7[1868],647)

 

여러분의 영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이냐시오는 유명한 사람들의 비상한 행적을 기록한 저속하고 공상적인 책을 즐겨 읽었다.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느꼈을 때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그런 책을 갖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요양하고 있던 집에는 그런 책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모국어로 된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과

[성인들의 꽃]이라는 책을 그에게 주었다.

 

이 두 권의 책을 자주 읽으면서 그 책에 담긴 내용에 어떤 공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책에서 마음을 떼어 전에 늘 읽던 그런 저속한 이야기로 생각을 돌리고

또 어떤 때는 그 생각에다 마음까지 돌리곤 했다.

마음속에 이런 무절제한 생각들이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가까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최근에 읽은 책의 영향으로 이런 생각들을 지금의 생각에다 굴복시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생애를 읽으면서 자주 자신에게 말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복된 프란치스꼬와 도미니꼬가 한 것을 나도 한다면?"

그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이런 생각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지만 다른 것들이 끼어 들어와

이전의 저속하고 공상적인 생각들이 되살아나곤 하여 그것들도 오래 지속되었다.

이렇게 꽤 오랫동안 두 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서 교차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생각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었다.

그가 저속한 생각을 가지고 즐기는 동안 그 순간에는 큰 기쁨을 느꼈지만

그 생각에 싫증을 느껴 흘려 버리고 나면 슬픔과 공허를 느꼈다.

한편 성인들이 실천했던 고행의 생활을 생각할 때 느낀 기쁨은 생각하는 중에만이 아니라

생각을 마친 후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이냐시오는 이 차이점을 보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침 어느 날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 이 차이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체험에서 어떤 생각들은 슬픔을 주고 또 다른 생각들은 기쁨을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그가 하느님의 것에 관해 도달한 첫 중요한 결론이었다.

훗날 자신이 ’영신 수련’을 할 때

이 체험은 자기 제자들에게 준 ’영의 식별력’이라는 가르침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로욜라의 이니고는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와 지극히 엄위하신 당신 어전과 예수회 앞에서 전능하신 하느님과,

그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께, 우리 주 예수의 회의 교서와 회헌에 선포된 삶의 양식에 따라

청빈과 정결과 순명을 서약하나이다.

더욱이 나는 교서에 언급된 선교에 관하여 교황께 특별 순명을 약속하나이다.

또한 동일한 교서와 회헌에 따라 어린이들의 신앙 교육에 성실한 관심을 가질 것을 약속하나이다."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와,

저에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주소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도로 바치나이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오니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주관하소서.

저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허락하소서.

저는 이것으로 만족하리이다.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봉헌기도-

 

Dedication to Jesus

 

Lord Jesus Christ,
take all my freedom, my memory,
my understanding, and my will.
All that I have and cherish you have given me.
I surrender it all to be guided by your will.
Your grace and your love and wealth are enough for me.
Give me these, Lord Jesus,
and I ask for nothing more.  Amen.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단이 성행하여 교회가 위험에 이르면

반드시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성인을 보내시어 이를 보호하신다.

마르틴 루터가 이단을 만들어 여러 사람을 현혹케 할 때에도 역시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기둥,

진리의 옹호자로 한 유명한 성인을 보내셨으니, 이는 곧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라는 분이다.

 

그는 1491년 바스크 지방에서 유명한 로욜라라는 고성(古城)에서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친은 모두 신심이 두터운 분이었다.

그러나 이냐시오를 수도자로 만들 생각은 없었고, 본인 역시 어려서부터 장차 용감한 기사로 출세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사업보다 오히려 명예와 쾌락을 더 원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는 이 세속의 아들을 위대한 성인으로 만드셨고,

또한 진리를 선포하는 수도원의 창립자로 만드셨다.

 

스페인이 프랑스와 전쟁하던 때이다. 그때 30세였던 이냐시오는

전쟁에 참가해 팜플로나라는 요새를 수비하던 중 폭탄에 맞아 다리에 중상을 입어 치료하는중에

여러 책을 읽다가 성인전과 샤르트르(카르누시오)수도자 루돌프가 저술한 ’그리스도의 생’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점점 읽어갈수록 정신을 빼앗기게 되었고,

자연히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어 현세의 허무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영신의 눈이 뜬 이냐시오는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외출할 수 있게 되자,

유명한 몽세라트 산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을 순례하고,

그곳에 보존되어 있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의 상본 앞에 무릎을 끓고 하루 밤을 기도로 지샜다.

이튿날 아침, 그는 자신의 갑옷을 성당에 바치며 화려한 기사의 복장은 걸인에게 자선하고

그 대신 고행의 복장을 하고, 만레사 시에 가까운 어떤 동굴안에 살게 되었다.

 

그 후 10개월 동안 고독한 가운데 오로지 기도와 고신 극기의 생활을 했다.

이와 같은 명상적 생활을 하면서 ’영신 수련’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책은 묵상을 가르치는데 후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는지 모른다.

전에는 현세의 영예만을 추구하던 그가 10개월간의 수양을 하는 동안 성령의 은혜를 받아

완전히 회개하는 동시에, 자기에게 맡겨진 특별한 사명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동료들을 모아

영적 십자군을 일으켜 끝까지 진리를 위해 싸우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선행의 첫 단계로서, 주님께서 수난하신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려고 했다.

그러나 때마침 투르크 황제 소리만 1세가 그리스도 신자를 극도로 박해하고 있던 터라,

그는 프란치스코회 관구장의 권고에 의해 스페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이냐시오는 이미 33세였는데, 자기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사제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남의 조소를 받아 가며 그 나이에 고등 학교에 들어가고 다음 대학에까지 가서

청소년들과 마친가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틈틈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동료들을 규합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커다란 오해를 사게 되고, 잠시 이단자로 취급되어 결박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미소를 띄며 "나는 예수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결박되기를 원합니다.

이만한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희생과 인내가 보답되어 비로소 두 제자가 생긴 것은 1529년의 일이었다.

그들은 즉 성 베드로 파브로와 후에 동양의 대 사도가 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 복자 베드로 파브르 축일:8월8일(8월11일)

 

그 후 또 네명의 훌륭한 대학생들도 이에 참가했으므로,

이들 7명은 우선 이냐시오와 같이 묵상을 하고 1534년 성모 승천 축일을 기해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 성당에서 서원을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성 이냐시오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성지 순례를 계획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병으로 인해 할 수없이 연기하게 되었고

,의사의 권유로 스페인으로 돌아와 1년간 수양해야만 했다.

고향 사람들은 전에는 화려한 갑옷으로 몸을 감고 백마를 타고 씩씩한 모습으로 출정했던 귀공자가

지금은 완전히 달라져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를 보고 놀라며 한편으론 감탄했으나,

 이냐시오가 로욜라 성에 살지 않고 병자의 간호도 해 주는 것을 보고 더욱 그에 대해 감탄하는 것이었다.

 

 

건강을 회복하자, 그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가서 그곳에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곧 예루살렘을 항하여 출발하려고 했다.

이때가 1537년의 봄이었는데, 아직도 투르크 인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다는 소문을 듣고

성지 순례는 단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지 순례는 중지하고 그대신 수도회에 관한 교황의 인가를 얻기 위해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다.

 

구원의 성도 로마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이냐시오가 도중에 있는 ’라스토르타’라는 소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바치고 있으니까,

갑자기 황홀한 탈혼 상태에 빠져 성부께서 나타나시고 그 옆에 십자가를 지닌 예수의 용모가 보였다.

예수께서는 부드럽게 그를 바라다보시며 "로마에서 너에게 은혜를 주겠노라’말씀하셨다.

이때 그의 마음속에 외친 환희는 실로 큰 것이었다.

 

 

 

과연 로마에 도착한 후로는 만사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그들은 당시의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알현을 청했는데 쾌히 승낙을 얻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540년 9월 27일에는 그들의 수도회 예수회에 대한 인가가 정식으로 내려졌다.

 

이 수도회가 종래의 다른 수도회와 다른 점은, 교황에게 특별 순명을 서원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감한 병사로서 그 영적 왕국을 위해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분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마르틴 루터가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하고 수많은 신자를 교회에서 갈리게 한 때도,

이냐시오와 그 동료들은 분연히 일어나서 진리를 위해 싸우며 교회의 손해를 보충하는데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이냐시오는 수도회의 인가를 받고 난 후 겸손한 마음으로 총장직을 사퇴하려고 했으나,

교황의 직접 명령으로 15년간이나 그 직에 있으면서 회원들을 지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생활은 극히 검소하고 엄격했다. 그의 수면은 3, 4시간에 불과했으며,

많이 기도하고 고신 극기하고 소박한 음식에 만족하며, 때로는 몇개의 구운밤으로 식사를 메운 적도 있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했으나 타인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며 온순하고,

매우 사랑에 가득 찬 태도로 대했다. 제자들에게도 항상 그와 같이 할 것을 권하고,

고행은 완덕에 있어 중요한 것이지만 또한 건강을 해칠 정도로 가혹히 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했다.

그리고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남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된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의 덕행은 모든 사람들에게 단연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의 공적은 소위 종교 개혁자들의 교회 손실에 대한 가톨릭 교세의 회복에 노력한 것인데,

그의 묵상 운동과 또한 그의 제자인 성 베드로 파브르

교리서의 편찬으로서 유명한 성 베드로 가니시오의 활동은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교회의 존귀한 투사인 이냐시오는

1556년 7월 31일 로마에서 무수한 덕행과 공덕으로 장식된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게 되었다.

 

 

’타는 불’이라는 뜻인 이냐시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헤매는 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고,

냉담한 마음속에 정열을 북돋아 주었다.

실로 이냐시오의 생애를 상징하는 표어를 말한다면

’나는 이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루가 12, 49)라는 구절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가 질러 놓은 불은 점점 퍼져나가 신앙부흥의 대업을 완수했다.

이로써 위대한 이냐시오의 공적은 길이 빛날 것이다.

그는 1622년에 시성되었고, 피정과 영신 수련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주님 안의 벗들 예수회의 창설자 성 이냐시오의 영성

 

모든 수도 공동체는 고유한 은혜를 지닌다.
교회의 신비에 보편적으로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예수회에 보다 더 본질적으로 고유한 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도적 봉사를 위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동지애' 혹은 '동반자의 삶'이고, '주님 안의 벗들'이 되는 체험이 예수회 창립의 기초를 이룬다. '예수회'(Compa a de Jes s, 직역하면 '예수의 동반자')라는 명칭이 지시하듯 동반자로서의 삶이 예수회의 근원적 특은이다. Compagnie de Jésus(프) Compagnia di Gesù(이) Company of Jesus(영)


그러므로 이 "동반자"의 은혜를 보다 더 깊이 이해할 때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을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성인의 첫 동료들이 지녔던 내적 태도와 영적 여정을 따라가면서, 성 이냐시오 영성의 두 결정적 지표들, 즉 라 스또르따의 체험과 까르도네르 강가의 체험을 중심으로 예수회에 전수된 특은을 살펴보겠다.

 

이냐시오는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바르셀로나, 알카라, 살라망카에서 공부하면서 이미 동지들을 찾고 있었다.
그때 만난 동지들과의 관계는 끝까지 계속되지 않았지만, 후에 파리에서 그의 고유한 인품, 즉 친절함, 영성지도자로서의 탁월함, 하느님께 대한 봉사의 열정, 앞을 내다보는 식견 등에 감명 받는 여섯 명의 20대 젊은이들이 모였다: 삐에르 파브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시몬 로드리게즈, 디에고 라이네즈, 알퐁소 살메론, 니꼴라스 보바디야.

 

1534년 8월 15일 성모승천 축일에 몽 마르뜨르의 한 작은 경당에서 그 당시 이미 사제였던 파브르가 미사를 집전하고, 미사 중에 일곱 명의 동지들은 청빈과 정결의 개별적 서원을 발하고 예루살렘을 순례하기로 서약한다. 그 이듬해에 이냐시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동지들을 파브르에게 맡기고 휴양을 위해 고향을 방문한다. 그 동안 파브르는 세 명의 동지들을 더 받아들인다: 끌로드 제이, 파샤스 브뢰트, 쟝 꼬뒤르. 이들 열 명이 예수회를 창립한 장본인들이다.  

 

그러므로 동반자로서의 은혜는 이들이 파리에서 머물던 시절에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라이네즈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일주에 한번씩 동지들의 하숙방에서 돌아가면서 만났는데 이 모임은 형제적 사랑의 공동체였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자주 만나면서 이들은 서로 "주님 안의 벗들"이 된 것이다. 이때 이들은 결코 어떤 수도회를 창립하려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주님 안에서 친구들로서의 정을 나누며 지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동반자'의 은혜가 예수회에 특은으로 전수된다.

 

이들은 1537년 1월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위해 베네치아에서 함께 만났고, 그 후 로마에 가서 2년 동안 여러 사도적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대단한 열정으로 사도적 활동을 전개했는데 길거리에서 설교하고 성사를 집행하며 여러 곳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병원 등의 사회복지 시설에서 봉사하면서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추위 등의 어려움 속에서 가난하고 고생하는 이들을 위한 활동을 펴나갔다. 이러한 사도적 활동은 그들 서로 간에 공감대를 더 깊이 형성해주었고 형제적 유대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면서, 그리스도교의 영성사에서 아주 독특하고 눈부신 우정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바로 주님 안에서 서로 벗들이 된 것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한데 엮어져 사도적 활동에 헌신하기 위해 교황의 권위와 이냐시오의 고유한 영도력 아래 뭉쳐진 우정 어린 사제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교회의 필요에 따라 교황께서 자신들을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를 위해 세상 어디에나 파견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권위에 자신들의 의지를 내 맡겼고, 교황께서는 그들과 함께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을 보시고, 또 유럽의 각지에서 오는 요청에 따라 이들을 여기저기에 파견하셨다. 이렇게 서로 흩어지는 상황에서 이들 사이에 떠오른 질문이 있었다.


'주님 안의 벗들'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들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공동으로 식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모으시고 일치시킨 것을 우리가 갈라서는 안된다."는 자각과 더불어 1539년 3월 중순부터 6월 24일까지 함께 모여 소위 말해 '사도적 공동식별'의 기초를 이루는 [첫 사부들의 식별(Deliberatio primorum Patrum)이라는 과정을 통해 사도적 활동에 투신하는 수도회를 창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이제 특별히 라 스또르따의 체험과 까르도네르 강가에서의 이냐시오의 체험을 자세히 살펴보자.

 

 

This portrait of St. Ignatius was done posthumously
by Jacopino del Conte in 1556.
The painting is now in Rome at the international headquarters office
(the Curia Generalizia) of the Society of Jesus.
(Graphic and text courtesy of the Society of Jesus)

 

 

라 스또르따에서의 체험 (1537년)
 
이냐시오의 [자서전](#96)에는 이 체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사제가 된 후에도 그는 자신을 준비하고 성모께서 자기를 성자와 한 자리에 있게 해 주시기를 빌면서 일년간 미사를 지내지 않고 보내기로 결심한 바 있었다. 로마를 몇 마일 남겨두고 하루는 어느 성당에서 기도하는데, 그는 자기 영혼에 크나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성부께서 자기를 당신의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한자리에 있게 해 주시는 환시를 선명히 보았으며 성부께서 자기를 성자와 함께 있게 해 주셨음을 추호도 의심할 바 없었다."


첫 동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 체험을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냐시오가 파브르, 라이네즈와 함께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오고 있었다. 로마에서 얼마 멀지 않은 라 스또르따라는 마을의 한 경당에서 기도 중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천주 성부께서 이냐시오를 그의 봉사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놓아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베풀겠다." 하셨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 수가 없어 이냐시오는 동료에게 말하기를 "로마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는데, 아마 우리가 십자가에 매달리게 될지도 모르겠소." 했다.
이냐시오는 또 말하시기를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를 뵌 것 같은데 그 가까이 계신 영원하신 성부께서 그리스도께 "이 사람을 네 종으로 거두기를 바란다." 하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냐시오를 실제로 거두시며 "너희가 우리에게 봉사하기를 원한다." 하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 때문에 이냐시오는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큰 신심을 지니시고 "예수회" (Compa a de Jes s)라는 이름을 동료들의 모임에 사용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초기의 예수회원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예수의 동반자로 선택하셨다고 이해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예수회에 부여하신 특수한 은혜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죽지 않으시지만 그분께서는 아직도 계속 당신의 지체 안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계신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동지들을 부르시는 것이고 예수회원들은 이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들 자신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고통을 나눈다. 십자가를 통해 그분의 동반자가 되었기에, 예수회원 각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구원된 후에도 비참하게 멸망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기를 원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회원은 예수의 동반자로서 그분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찬 가슴으로 그분의 은혜에 힘입어 그리스도를 가깝게 본받고, 가난하기를 원하며 정결하기를 원하고 순명하기를 원하면서 그리스도를 섬기기를 원하는 것이다. 비난을당하고 상처를 받으며 당신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것이 예수회원들이 선택하는 삶이다.


까르도네르 강가에서 체험 (1522년 8월) 


[자서전](#30)에 기록된 성인의 체험을 살펴보자: "길을 가다가 신심이 솟구쳐 그는 강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앉았다. 강은 저 아래로 흐르고 있었고, 거기 앉아 있을 동안 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더니, 비록 환시를 보지는 않았으나 영신사정과 신앙 및 학식에 관한 여러 가지를 깨닫고 배우게 되었다. 만사가 그에게는 새로와 보일 만큼 강렬한 조명이 비쳐왔던 것이다. 비록 깨달은 바는 많았지만 오성에 더없이 선명한 무엇을 체험했다는 것 외에는 자세한 설명을 못했다. 그는 예순 두 해의 전 생애를 두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은혜와 그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들을 모은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 그가 받은 것만큼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이냐시오의 측근이었던 까마라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체험은 하나의 통합적인 영적 조명의 체험으로서, 이냐시오는 모든 것이 어떻게 하느님에게서 나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지를 깊이 통찰했다고 한다. 
 

초기 동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냐시오는 이 은혜를 항상 최고로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 체험을 통해서 깊은 겸손과 온유함을 얻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냐시오는 언제나 예수회의 생활양식에 관한 어떤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늘 이 체험을 언급하곤 하였는데 마치 바로 이 한 순간에 모든 것의 내적 원인과 근본을 꿰뚫어 보았던 것 같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예수회의 이상과 정신은 이냐시오의 라 스또르따 체험과 까르도네르 강가에서의 체험을 그 원천으로 한다. 이 체험과 은혜는 이냐시오의 첫 동료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통해 나누어졌고, 지금도 예수회원들에게 [영신수련]과 [예수회 회헌]을 바탕으로 하는 사도적 공동생활을 통해 전수된다.

 

예수회의 [회헌](#655)에서는 예수회의 사도적 사명 안에 서린 이 동반자의 특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회원들이 세계 곳곳의 신자와 비신자들 간에 흩어져 있어 그들의 최고 장상과 또한 그들 서로 간에 결합되는 것이 어려울수록 더욱 이를 위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에 힘써야 한다. 회원들이 서로, 그리고 최고 책임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예수회의 유지와 운용이 어렵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자 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 예수회의 중요 문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회에 결성된 공동체는 우리를 한데 모으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서 기원하는 것이며, 모든 성원들이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겠다는 능동적이고 인격적인 염원을 바탕으로 설립된 것이며, 다양한 사도직 생활을 위하여 성령께 충동받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감을 갖고 순종함으로써 유지된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생활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어 자신과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성업을 수행하도록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것이 예수회 공동생활의 바탕이며 목적이다."

 

하느님께서 성 이냐시오 로욜라와 그 동료들에게 베푸신 특은을 모든 예수회원들이 친밀하게 나눌 수 있도록 이끄신다. 예수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 삶 모든 것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며, 교회 안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직을 수행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수고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회 소명의 핵심이다. 즉 교회 안에서 특수한 사명에로 부름 받았고 십자가의 깃발 아래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특출하게 봉사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예수회원은 참다운 내적 자유를 지니고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활동 속의 관상가), 사랑의 정신으로 정당한 권위의 인도 아래 공동으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도적 열정(분별된 사랑)을 갖고 주님께 봉사하기를 원해야 한다. 그래서 한마디로 예수회원들은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에 의해서 양성된 "주님 안의 벗들"이며 동시에 "주님의 벗들"이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에 대한 깊은 내적 인식, 예수회에 대한 철저한 사랑, 교회와 그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아낌없는 헌신과 봉사를 다할 자세를 회원들에게 요구한다.

(예수회홈에서www.jesuits.or.kr)

 

 

Soul of Christ, sanctify me.
Body of Christ, save me.
Blood of Christ, inebriate me.
Water from the side of Christ, wash me.
Passion of Christ, strengthen me.
O good Jesus, hear me.
Within Thy wounds hide me.
Separated from Thee let me never be.
From the malignant enemy, defend me.
At the hour of death, call me.
And close to Thee bid me.
That with Thy saints I may be

Praising Thee, forever and ever. Amen.


예수회 Society of Jesus 성인들

 

2월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게시판1605번)
St. Paul Miki and companions, martyrs, San Paolo Miki e compagni Martiri

 

2월15일
성 끌로드 라 콜롱비에르(게시판1619번)
ST. C. LA COLOMBIERE, San Claudio de la Colombiere Religioso 

 

3월10일
성 요한 오질비 순교자(게시판1653번)
San Giovanni Ogilvie Martire, St. John Ogilvie

 

5월16일
성 안드레아 보볼라 순교자(게시판1766번)
St. Andreas Bobola, M, St. Andrew Bobola, SJ M (RM)

 

6월21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게시판1830번)
San Luigi Gonzaga Religioso, Saint Aloysius Gonzaga (Jesuit)

 

7월31일
성 이냐시오 로욜라 사제(게시판1295)
St. IGNATIUS of Loyola , Sant’ Ignazio di Loyola Sacerdote

 

8월8일(8월11일)
복자 베드로 파브르(게시판1308번)
Beato Pietro Favre Gesuita

 

9월9일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게시판1358번)
San Pietro Claver Sacerdote, St.Peter Claver

 

9월17일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주교 학자(게시판1367번)
San Roberto Bellarmino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St. Robert Francis Romulus Bellarmine

 

10월10일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게시판1415번)
San Francesco Borgia Sacerdote, St. Francis Borgia

 

10월 19일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와 동료 순교자(게시판1427번)
St. Joannes de Brebeuf, C. et MM, Santi Martiri Canadesi

 

10월30일
성 알퐁소 로드리게스(게시판1443번)
Sant’ Alfonso Rodriguez, St. Alphonsius Rodriguez, C

 

11월13일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가(게시판1887번)
St. Stanislaus Kostka, Santo Stanislao Kostka 

 

11월23일
복자 미구엘 어거스틴 프로 순교자(게시판1488번)
Blessed Miguel Agustin Pro, Beato Michele Agostino Pro Martire Gesuita 

 

11월26일
성 요한 베르크만스(게시판1493번)
St. John Berchmans

 

12월1일
성 에드문도 캄피온 순교자(게시판1501번)
Sant’ Edmondo Campion Martire, gesuita, St. Edmund Campion

 

12월3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하비에르)Francisco Xavier(게시판1504번)
San Francesco Saverio Sacerdote, Saint Francis Xavier

 

12월21일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게시판1531번)
St. Peter Canisius, San Pietro Canisio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의정부교구 인창동성당 게시판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8. Adagio : (Allegro): Qui tollis - Antonio Vivaldi

update 2006.7.31.

 





 

 

 

 

 

 

 

 

 

 

 

 

 

 

 

 

 

 

Sant' Ignazio di Loyola Sacerdote
31 luglio - Memoria 
Azpeitia, Spagna, c. 1491 - Roma, 31 luglio 1556

Il grande protagonista della Riforma cattolica nel XVI secolo, nacque ad Azpeitia, un paese basco, nel 1491. Era avviato alla vita del cavaliere, la conversione avvenne durante una convalescenza, quando si trovò a leggere dei libri cristiani. All'abbazia benedettina di Monserrat fece una confessione generale, si spogliò degli abiti cavallereschi e fece voto di castità perpetua. Nella cittadina di Manresa per più di un anno condusse vita di preghiera e di penitenza; fu qui che vivendo presso il fiume Cardoner decise di fondare una Compagnia di consacrati. Da solo in una grotta prese a scrivere una serie di meditazioni e di norme, che successivamente rielaborate formarono i celebri Esercizi Spirituali. L'attività dei Preti pellegrini, quelli che in seguito saranno i Gesuiti, si sviluppa un po'in tutto il mondo. Il 27 settembre 1540 papa Paolo III approvò la Compagnia di Gesù. Il 31 luglio 1556 Ignazio di Loyola morì. Fu proclamato santo il 12 marzo 1622 da papa Gregorio XV. (Avvenire)

Etimologia: Ignazio = di fuoco, igneo, dal latino
Emblema: IHS (monogramma di Cristo)
 
Il primo scritto che racconta la vita, la vocazione e la missione di s. Ignazio, è stato redatto proprio da lui, in Italia è conosciuto come “Autobiografia”, ed egli racconta la sua chiamata e la sua missione, presentandosi in terza persona, per lo più designato con il nome di “pellegrino”; apparentemente è la descrizione di lunghi viaggi o di esperienze curiose e aneddotiche, ma in realtà è la descrizione di un pellegrinaggio spirituale ed interiore.
Il grande protagonista della Riforma cattolica nel XVI secolo, nacque ad Azpeitia un paese basco, nell’estate del 1491, il suo nome era Iñigo Lopez de Loyola, settimo ed ultimo figlio maschio di Beltran Ibañez de Oñaz e di Marina Sanchez de Licona, genitori appartenenti al casato dei Loyola, uno dei più potenti della provincia di Guipúzcoa, che possedevano una fortezza padronale con vasti campi, prati e ferriere.
Iñigo perse la madre subito dopo la nascita, ed era destinato alla carriera sacerdotale secondo il modo di pensare dell’epoca, nell’infanzia ricevé per questo anche la tonsura.
Ma egli ben presto dimostrò di preferire la vita del cavaliere come già per due suoi fratelli; il padre prima di morire, nel 1506 lo mandò ad Arévalo in Castiglia, da don Juan Velázquez de Cuellar, ministro dei Beni del re Ferdinando il Cattolico, affinché ricevesse un’educazione adeguata; accompagnò don Juan come paggio, nelle cittadine dove si trasferiva la corte allora itinerante, acquisendo buone maniere che tanto influiranno sulla sua futura opera.
Nel 1515 Iñigo venne accusato di eccessi d’esuberanza e di misfatti accaduti durante il carnevale ad Azpeitia e insieme al fratello don Piero, subì un processo che non sfociò in sentenza, forse per l’intervento di alti personaggi; questo per comprendere che era di temperamento focoso, corteggiava le dame, si divertiva come i cavalieri dell’epoca.
Morto nel 1517 don Velázquez, il giovane Iñigo si trasferì presso don Antonio Manrique, duca di Najera e viceré di Navarra, al cui servizio si trovò a combattere varie volte, fra cui nell’assedio del castello di Pamplona ad opera dei francesi; era il 20 maggio 1521, quando una palla di cannone degli assedianti lo ferì ad una gamba.
Trasportato nella sua casa di Loyola, subì due dolorose operazioni alla gamba, che comunque rimase più corta dell’altra, costringendolo a zoppicare per tutta la vita.
Ma il Signore stava operando nel plasmare l’anima di quell’irrequieto giovane; durante la lunga convalescenza, non trovando in casa libri cavallereschi e poemi a lui graditi, prese a leggere, prima svogliatamente e poi con attenzione, due libri ingialliti fornitagli dalla cognata.
Si trattava della “Vita di Cristo” di Lodolfo Cartusiano e la “Leggenda Aurea” (vita di santi) di Jacopo da Varagine (1230-1298), dalla meditazione di queste letture, si convinse che l’unico vero Signore al quale si poteva dedicare la fedeltà di cavaliere era Gesù stesso.
Per iniziare questa sua conversione di vita, decise appena ristabilito, di andare pellegrino a Gerusalemme dove era certo, sarebbe stato illuminato sul suo futuro; partì nel febbraio 1522 da Loyola diretto a Barcellona, fermandosi all’abbazia benedettina di Monserrat dove fece una confessione generale, si spogliò degli abiti cavallereschi vestendo quelli di un povero e fece il primo passo verso una vita religiosa con il voto di castità perpetua.
Un’epidemia di peste, cosa ricorrente in quei tempi, gl’impedì di raggiungere Barcellona che ne era colpita, per cui si fermò nella cittadina di Manresa e per più di un anno condusse vita di preghiera e di penitenza; fu qui che vivendo poveramente presso il fiume Cardoner “ricevé una grande illuminazione”, sulla possibilità di fondare una Compagnia di consacrati e che lo trasformò completamente.
In una grotta dei dintorni, in piena solitudine prese a scrivere una serie di meditazioni e di norme, che successivamente rielaborate formarono i celebri “Esercizi Spirituali”, i quali costituiscono ancora oggi, la vera fonte di energia dei Gesuiti e dei loro allievi.
Arrivato nel 1523 a Barcellona, Iñigo di Loyola, invece di imbarcarsi per Gerusalemme s’imbarcò per Gaeta e da qui arrivò a Roma la Domenica delle Palme, fu ricevuto e benedetto dall’olandese Adriano VI, ultimo papa non italiano fino a Giovanni Paolo II.
Imbarcatosi a Venezia arrivò in Terrasanta visitando tutti i luoghi santificati dalla presenza di Gesù; avrebbe voluto rimanere lì ma il Superiore dei Francescani, responsabile apostolico dei Luoghi Santi, glielo proibì e quindi ritornò nel 1524 in Spagna.
Intuì che per svolgere adeguatamente l’apostolato, occorreva approfondire le sue scarse conoscenze teologiche, cominciando dalla base e a 33 anni prese a studiare grammatica latina a Barcellona e poi gli studi universitari ad Alcalà e a Salamanca.
Per delle incomprensioni ed equivoci, non poté completare gli studi in Spagna, per cui nel 1528 si trasferì a Parigi rimanendovi fino al 1535, ottenendo il dottorato in filosofia.
Ma già nel 1534 con i primi compagni, i giovani maestri Pietro Favre, Francesco Xavier, Lainez, Salmerón, Rodrigues, Bobadilla, fecero voto nella Cappella di Montmartre di vivere in povertà e castità, era il 15 agosto, inoltre promisero di recarsi a Gerusalemme e se ciò non fosse stato possibile, si sarebbero messi a disposizione del papa, che avrebbe deciso il loro genere di vita apostolica e il luogo dove esercitarla; nel contempo Iñigo latinizzò il suo nome in Ignazio, ricordando il santo vescovo martire s. Ignazio d’Antiochia.
A causa della guerra fra Venezia e i Turchi, il viaggio in Terrasanta sfumò, per cui si presentarono dal papa Paolo III (1534-1549), il quale disse: “Perché desiderate tanto andare a Gerusalemme? Per portare frutto nella Chiesa di Dio l’Italia è una buona Gerusalemme”; e tre anni dopo si cominciò ad inviare in tutta Europa e poi in Asia e altri Continenti, quelli che inizialmente furono chiamati “Preti Pellegrini” o “Preti Riformati” in seguito chiamati Gesuiti.
Ignazio di Loyola nel 1537 si trasferì in Italia prima a Bologna e poi a Venezia, dove fu ordinato sacerdote; insieme a due compagni si avvicinò a Roma e a 14 km a nord della città, in località ‘La Storta’ ebbe una visione che lo confermò nell’idea di fondare una “Compagnia” che portasse il nome di Gesù.
Il 27 settembre 1540 papa Polo III approvò la Compagnia di Gesù con la bolla “Regimini militantis Ecclesiae”.
L’8 aprile 1541 Ignazio fu eletto all’unanimità Preposito Generale e il 22 aprile fece con i suoi sei compagni, la professione nella Basilica di S. Paolo; nel 1544 padre Ignazio, divenuto l’apostolo di Roma, prese a redigere le “Costituzioni” del suo Ordine, completate nel 1550, mentre i suoi figli si sparpagliavano per il mondo.
Rimasto a Roma per volere del papa, coordinava l’attività dell’Ordine, nonostante soffrisse dolori lancinanti allo stomaco, dovuti ad una calcolosi biliare e a una cirrosi epatica mal curate, limitava a quattro ore il sonno per adempiere a tutti i suoi impegni e per dedicarsi alla preghiera e alla celebrazione della Messa.
Il male fu progressivo limitandolo man mano nelle attività, finché il 31 luglio 1556, il soldato di Cristo, morì in una modestissima camera della Casa situata vicina alla Cappella di Santa Maria della Strada a Roma.
Fu proclamato beato il 27 luglio 1609 da papa Paolo V e proclamato santo il 12 marzo 1622 da papa Gregorio XV.
Si completa la scheda sul Santo Fondatore, colonna della Chiesa e iniziatore di quella riforma coronata dal Concilio di Trento, con una panoramica di notizie sul suo Ordine, la “Compagnia di Gesù”.

Le “Costituzioni” redatte da s. Ignazio fissano lo spirito della Compagnia, essa è un Ordine di “chierici regolari” analogo a quelli sorti nello stesso periodo, ma accentuante anche nella denominazione scelta dal suo Fondatore, l’aspetto dell’azione militante al servizio della Chiesa.
La Compagnia adattò lo spirito del monachesimo, al necessario dinamismo di un apostolato da svolgersi in un mondo in rapida trasformazione spirituale e sociale, com’era quello del XVI secolo; alla stabilità della vita monastica sostituì una grande mobilità dei suoi membri, legati però a particolari obblighi di obbedienza ai superiori e al papa; alle preghiere del coro sostituì l’orazione mentale.
Considerò inoltre essenziale la preparazione e l’aggiornamento culturale dei suoi membri. È governata da un “Preposito generale”.
I gradi della formazione dei sacerdoti gesuiti, comprendono due anni di noviziato, gli aspiranti sono detti ‘scolastici’, gli studi approfonditi sono inframezzati dall’ordinazione sacerdotale (solitamente dopo il terzo anno di filosofia), il giovane gesuita verso i 30 anni diventa professo ed emette i tre voti solenni di povertà, castità e obbedienza, più in quarto voto di obbedienza speciale al papa; accanto ai ‘professi’ vi sono i “coadiutori spirituali” che emettono soltanto i tre voti semplici.
Non c’è un ramo femminile né un Terz’Ordine. La spiritualità della Compagnia si basa sugli ‘Esercizi Spirituali’ di s. Ignazio e si contraddistingue per l’abbandono alla volontà di Dio espresso nell’assoluta obbedienza ai superiori; in una profonda vita interiore alimentata da costanti pratiche spirituali, nella mortificazione dell’egoismo e dell’orgoglio; nello zelo apostolico; nella totale fedeltà alla Santa Sede.
I Gesuiti non possono possedere personalmente rendite fisse, consentite solo ai Collegi e alle Case di formazione; i professi fanno anche il voto speciale di non aspirare a cariche e dignità ecclesiastiche.
Come attività, in origine la Compagnia si presentava come un gruppo missionario a disposizione del pontefice e pronto a svolgere qualsiasi compito questi volesse affidargli per la “maggior gloria di Dio”.
Quindi svolsero attività prevalentemente itinerante, facendo fronte alle più urgenti necessità di predicazione, di catechesi, di cura di anime, di missioni speciali, di riforma del clero, operante nella Controriforma e nell’evangelizzazione dei nuovi Paesi (Oriente, Africa, America).
Nel 1547, s. Ignazio affidò alla sua Compagnia, un ministero inizialmente non previsto, quello dell’insegnamento, che diventò una delle attività principali dell’Ordine e uno dei principali strumenti della sua diffusione e della sua forza, lo testimoniano i prestigiosi Collegi sparsi per il mondo.
Alla morte di s. Ignazio, avvenuta come già detto nel 1556, la Compagnia contava già mille membri e nel 1615, con la guida dei vari Generali succedutisi era a 13.000 membri, diffondendosi in tutta Europa, subendo anche i primi martiri (Campion, Ogilvie, in Inghilterra).
Ma soprattutto ebbe un’attività missionaria di rilievo iniziata nel 1541 con s. Francesco Xavier, inviato in India e nel Giappone, dove i successivi gesuiti subirono come gli altri missionari, sanguinose persecuzioni.
Più duratura fu la loro opera in Cina con padre Matteo Ricci (1552-1610) e in America Meridionale, specie in Brasile, con le famose ‘riduzioni’. Più sfortunata fu l’opera dei Gesuiti in America Settentrionale, in cui furono martiri i santi Giovanni de Brebeuf, Isacco Jogues, Carlo Garnier e altri cinque missionari.
Col passare del tempo, nei secoli XVII e XVIII i Gesuiti con la loro accresciuta potenza furono al centro di dispute dottrinarie e di violenti conflitti politico-ecclesiatici, troppo lunghi e numerosi da descrivere in questa sede; che alimentarono l’odio di tanti movimenti antireligiosi e l’astio dei Domenicani, dei sovrani dell’epoca e dei parlamentari e governi di vari Stati.
Si arrivò così allo scioglimento prima negli Stati di Portogallo, Spagna, Napoli, Parma e Piacenza e infine sotto la pressione dei sovrani europei, anche allo scioglimento totale della Compagnia di Gesù nel 1773, da parte di papa Clemente XIV.
I Gesuiti però sopravvissero in Russia sotto la protezione dell’imperatrice Caterina II; nel 1814 papa Pio VII diede il via alla restaurazione della Compagnia.
Da allora i suoi membri sono stati sempre presenti nelle dispute morali, dottrinarie, filosofiche, teologiche e ideologiche, che hanno interessato la vita morale e istituzionale della società non solo cattolica.
Nel 1850 sorse la prestigiosa e diffusa rivista “La Civiltà Cattolica”, voce autorevole del pensiero della Compagnia; altre espulsioni si ebbero nel 1880 e 1901 interessanti molti Stati europei e sud americani.
Nell’annuario del 1966 i Gesuiti erano 36.000, divisi in 79 province nel mondo e 77 territori di missione. In una statistica aggiornata al 2002, la Compagnia di Gesù annovera tra i suoi figli 49 Santi di cui 34 martiri e 147 Beati di cui 139 martiri; a loro si aggiungono centinaia di Servi di Dio e Venerabili, avviati sulla strada di un riconoscimento ufficiale della loro santità o del loro martirio.
L’alto numero di martiri, testimonia la vocazione missionaria dei Gesuiti, votati all’affermazione della ‘maggior gloria di Dio’, nonostante i pericoli e le persecuzioni a cui sono andati incontro, sin dalla loro fondazione.
Autore: Antonio Borr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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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3-Feb-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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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NATIUS of Loyola
 
Also known as
Inigo Lopez de Loyola
Memorial
31 July
Profile
Spanish nobility. Youngest of twelve children. Page in the Spanish court of Ferdinand and Isabella. Military education. Soldier, entering the army in 1517, and serving in several campaigns. Wounded in the leg by a cannonball at the siege of Pampeluna on 20 May 1521, an injury that left him partially crippled for life. During his recuperation the only books he had access to were The Golden Legend, a collection of lives of the saints, and the Life of Christ by Ludolph the Carthusian. These books, and the time spent in contemplation, changed him.

On his recovery he took a vow of chastity, hung his sword before the altar of the Virgin of Montserrat, and donned a pilgrim's robes. Lived in a cave from 1522 to 1523, contemplating the way to live a Christian life. Pilgrim to Rome and the Holy Land in 1523, where he worked to convert Muslims. In 1528 he began studying theology in Barcelona, Alcala, and Paris, receiving his degree on 14 March 1534. His meditations, prayers, visions and insights led to forming the Constitutions of the Society of Jesus on 15 August 1534; it received papal approval in 1541. Friend of James Lainez, Alonso Salmerón, Nicholas Bobadilla, Simón Rodriguez, Blessed Peter Faber, and Saint Francis Xavier, the group that formed the core of the new Society. He never used the term Jesuit, which was coined as an insult by his opponents; the Society today uses the term with pride. He travelled Europe and the Holy Lands, then settled in Rome to direct the Jesuits. His health suffered in later years, and he was nearly blind at death.

The Jesuits today have over 500 universities and colleges, 30,000 members, and teach over 200,000 students each year.
Born
1491 at Loyola, Guipuzcoa, Spain as Inigo Lopez de Loyola
Died
of fever on 31 July 1556 at Rome, Italy
Beatified
27 July 1609 by Pope Paul V
Canonized
12 March 1622 by Pope Gregory XV
Patronage
Basque country; diocese of Bilbao, Spain; Bizkaia, Spain; Gipuzkoa, Spain; Guipuscoa, Spain; Guipúzcoa, Spain; Jesuit Order; Jesuits; military ordinariate of the Philippines; retreats; Society of Jesus; soldiers; Spiritual Exercises (by Pope Pius XI); Vizcaya, Spain
Readings
Ignatius was passionately fond of reading worldly books of fiction and tales of knight-errantry. When he felt he was getting better from a wound he had received in battle, he asked for some of these books to pass the time. But no book of that sort could be found in the house; instead they gave him a life of Christ and a collection of the lives of saints written in Spanish.

By constantly reading these books he began to be attracted to what he found narrated there. Sometimes in the midst of his reading he would reflect on what he had read. Yet at other times he would dwell on many of the things which he had been accustomed to dwell on previously. But at this point our Lord came to his assistance, insuring that these thoughts were followed by others which arose from his current reading.

While reading the life of Christ our Lord or lives of the saints, he would reflect and reason with himself: "What if I should do what Saint Francis or Saint Dominic did?" In this way he let his mind dwell on many thoughts; they lasted a while until other things took their place. Then those vain and worldly images would come into his mind and remain a long time.

But there was a difference. When Ignatius reflected on worldly thoughts, he felt intense pleasure; but when he gave them up our of weariness, he felt dry and depressed. Yet when he thought of living the rigorous sort of life he knew the saints had lived, he not only experienced pleasure when he actually thought about it, but even after he dismissed these thoughts, he still experienced great joy. Yet he did not pay attention to this, nor did he appreciate it, until one day, in a moment of insight he began to marvel at the difference. Then he understood his experience. Thoughts of one kind left him sad, the others full of joy.

from the life of Saint Ignatius, from his own words, by Luis Gonzal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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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not let any occasion of gaining merit pass without taking care to draw some spiritual profit from it; as, for example, from a sharp word which someone may say to you; from an act of obedience imposed against your will; from an opportunity which may occur to humble yourself, or to practice charity, sweetness, and patience. All of these occasions are gain for you, and you should seek to procure them; and at the close of that day, when the greatest number of them have come to you, you should go to rest most cheerful and pleased, as the merchant does on the day when he had had most chance for making money; for on that day business has prospered with him.

Saint Ignatius Loy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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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God causes you to suffer much, it is a sign that He has great designs for you, and that He certainly intends to make you a saint. And if you wish to become a great saint, entreat Him yourself to give you much opportunity for suffering; for there is no wood better to kindle the fire of holy love than the wood of the cross, which Christ used for His own great sacrifice of boundless charity.

Saint Ignatius Loyola


 

 

Soul of Christ (Anima Chri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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