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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세월을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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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sso-long] 쪽지 캡슐

2000-11-13 ㅣ No.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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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에서 깨어보니 세상이 온통 낯설고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 없어

나도 내가 아닌 듯 해라

그 아름답던 기억들이 다 꿈이었던가

한바탕 타오른 그 불길이 정녕 꿈이었던가

누군가 말을 해다오

내가 왜 여기 서 있는지

그 화려한 사랑의 빛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멀리 돌아 보아도 내가 살아온 길은 없고

비틀거리는 걸음 앞에 길고 긴 내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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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잊혀진 여인" 처럼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나도 지독한 병을 앓는다.  머언 산이

위쪽부터 시나브로 황갈색으로 물들어 어느날 아침 은행나무 이파리가 내 발치까지 노랗게

물들이고 있을 때 명치 끝엔 주먹만한 돌덩어리가 들어 앉는다....

 

우리집 마당 감나무의 커다란 홍시를 오늘부터 따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축

늘어진 가지에 매달린 그이의 볼을 닮은 홍시를 따는 아빠를 보고 있자니...

올해도 이제 모퉁이를 돌아서면 그 끝에 다다르고 말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늘 안개속처럼 그 앞을 알 수 없지만 이 가을이 가고 나면 우리는 또 한해의

끄트머리에 닿아 있으리란 걸 너무도 훤히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세월은 순수하다.

 

새로운 천년이 도래한다고 요란하게 떠들어댈 때 그 모든 소란에 비웃음을 날렸으면서도

속으로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긴 있었던가...새천년의 한해가 옷깃을 여미며 떠날 채비를

하는 지금 나는 흔들리고 있다.  길고 긴 내 그림자와 함께...

사람은 만나면 헤어지는 거고 세월은 가고 오는건데...

 

그걸 모르진 않는데, 마음으로부터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지 못할 때, 아주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때쯤이면 어김 없이 그 허전함에 목이 마를 때, 난 년초부터

썼던 일기를 뒤적인다.  숨쉬었던 시간을 거슬러 가다보면 현재는 차라리 위로가 되고

알 수 없는 미래에도 베짱같은 게 생겨나기도 하니깐...*^^*

 

난 늘 뭔가를 적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흔적을 남겨서는 안되었고 설사 뭔가를

남겼다 하더라도 찢어버리거나 태워버려야 했었다. 지금 뒤적이는 이 일기장도 성탄절이

지나고 한복입고 새배하는 즈음이 돌아오면 나의 곁에서 떠날것이다...

 

짝사랑하던 선배에게 쓴 시...

어느 추운 겨울날 고등학교 뒷담을 돌아가며 만든...나의 글...

엄마가 보낸 눈물 자욱이 번져있는 "사랑하는 내 딸 소영아.."로 시작하던 그 긴 편지들..

모두 사라지고 없다..

 

욕심많은 나 이기에... 못마땅한 나의 행동들 나약한 생각의 파편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루어 짐작컨대 내년 가을에도 난 지금처럼 앓고 있으리라..면역조차 생겨나지 않는

병이지만 나는 이 병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지금도 들린다..

내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 "뚝"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오늘은 왠지 쓸쓸하며...아프며....어지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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