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6년 4월호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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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6-03-24 ㅣ No.50

 

훈화1.엠마오 유감

우리 신자들이 열심히 살아보자고 마음을 다잡는 날은 일 년 중 어느 날일까?

새해 첫날도 아니고, 자기 생일이나 영명축일도 아니다. 성탄이나 부활대축일은 더더욱 아니다. 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재의 수요일을 맞아 우리 신자들은 ꡒ십자가의 길 기도도 이젠 자주 바쳐야지. 평일 미사도 빠지지 않고 매일 참석해야지. 술도 끊고 담배도 끊어야지.ꡓ 이렇게 여러 가지 결심들을 굳게 한다. 그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부활성야가 되면 술 끊은 이는 병으로 나발 불고, 담배 끊은 이는 줄담배 피고, 커피 끊은 자매님은 커피 주전자를 안고 다닌다.


사순절이란 무엇인가? 부활절을 잘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가 아닌가? 사순절을 잘 보낸 이들은 악습도 죄에 물든 우리의 과거도 예수님의 시신과 함께 돌무덤에 묻어버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삶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과 동시에 우리의 악습도 부활한다. 사순절이 되면 열심히 살고, 부활이 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우리 사제들도 마찬가지다. 부활이 되면 더욱 예수님 닮은 목자로서 신자들을 위해 새롭게 태어나야 할 터인데, 부활대축일을 지내느라 몸도 마음도 지쳤으니 이젠 좀 쉬자고 말한다. 그래서 평협회장이나 몇몇 이들과 함께 짧은 휴가를 떠난다. 이걸 사제들의 세계에서는 ꡐ엠마오ꡑ라 부른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하고 절망에 빠져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엠마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의 땅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렇게 우리는 부활 중심이 아니라 사순절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어느 신부님이 남아메리카에서 인디오들을 위해 선교활동을 하던 중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아는 대로 써보라고 했더니 열이면 열 모두 ꡒ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다ꡓ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라고 다를 바 없다. ꡐ예수님ꡑ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으시는 모습, 가시관 쓰고 피를 철철 흘리시는 모습, 아니면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는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ꡐ주바라기ꡑ들이다. 해바라기가 해님만 바라보다 얼굴도 모습도 해님을 닮게 되었듯이 우리도 주님만 바라보다 얼굴도 삶도 주님을 닮은 제자들이 되어야 할 ꡐ주바라기ꡑ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어느 정도 닮기는 했으나 모두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모습, 가시관 쓴 얼굴을 닮았다. 그러나 죽은 예수라면 믿을 필요가 없다. ꡒ원수까지 사랑하라ꡓ  ꡒ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ꡓ는 고귀한 가르침을 폈으나 결국은 실패한 한 젊은 이상주의자라면 존경은 하고 추모는 할지언정 우리가 목숨까지 바쳐가며 따를 이유가 없다. 우리는 죽어버린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 부활의 거룩한 밤에 듣게 되는 복음은 ꡒ주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ꡓ라는 사도 바오로의 외침이다. 부활은 우리 믿음의 시작이요 원천이며 또한 중심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 그리고 기쁨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에 놓여져야 한다.

신앙생활이 짐스럽게 느껴지고 아무리 해도 작심삼일밖에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시관과 십자가 고통의 양만 생각하면 죄송하고 부담이 될 뿐이다. 십자가를 바라보되 십자가 너머의 승리를 바라보아야 한다. 부활 신앙이 우리 삶의 중심에 놓여질 때 기쁨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와, 누가 그렇게 살면 죽인다고 해도 ꡒ죽이려면 죽여라. 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ꡓ고 할 수 있는, 그래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명나는 활기찬 삶이 될 것이다.

_임문철 신부

 


훈화2. 은총의 때 사순절

새 생명이 약동하는 새봄과 더불어 이달의 16일(일)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 종말에 그분과 함께 틀림없이 부활할 수 있다는 보증만이 아니라 오늘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는 부활한 사람으로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 소용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이 흘러넘치는ꡐ은총의 때 사순절 40일ꡑ의 절정을 살고 있습니다. 부활절을 잘 맞이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영적 쇄신이 요청됩니다. 육체적인 건강진단을 위해 종합병원의 인간 독크에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들의 영신사정을 돌보기 위해서도 인간 독크에 들어가 종합진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보면 형식에 치우쳤는지도 모릅니다. 레지오 규칙에서 요구하는 출석의무와 같은 최저선을 지키기도 힘겨워 하면서 ꡐ한평생 싸움이 끝난 다음 사랑과 영광의 나라ꡑ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자가당착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미사 때마다 성체 축성 직후에 ꡒ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ꡓ 하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인간의 오관과 추리 능력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길 없는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를 그리스도 가신 지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믿고 추종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부활사건 자체에 대한 시시비비보다도 오늘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자신에게는 어떻게 비치고,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ꡒ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ꡓ(사도 3,15). 이는 베드로 사도의 첫 설교 중 한 대목입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분이 다시 살아나셔서 당신을 믿는 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활동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현대의 교회도 부활의 증인들, 다시 말해서 죽음을 극복하고 초월한 사람들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 생전에 한 번도 스승을 직접 대면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직접 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1코린 15,3~8).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개인적 증언입니다. 이것은 어떤 환상이나 환시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부활신앙을 증거한 사람이 어디 바오로 사도 한 분뿐입니까. 2천 년 교회 역사를 면면히 이어오는 동안 무수한 순교자들과 성인 성녀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죽음을 극복하고 초월했기 때문에 모험도 마다하지 않고 용감하게 생활하며 우리를 결박하고 있는 온갖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인의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신앙을 증거하는 데 있어 오늘의 상황이 초대교회나 한국교회의 초기보다 더 수월한 것으로만 생각하신다면 대단한 잘못입니다. 오늘 보이는 우리들의 세계는 실로 한심하고 비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세계의 현실은 인간 중심이 되어 물질주의 내지 물량주의가 판을 치고 인간의 존엄성은 땅에 떨어져 계속 비인간화의 길로 줄달음질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강조하고 있는 사랑의 실천도 말만 풍성할 뿐 실은 탐욕과 시기, 중상모략이 가득한 오늘의 세계가 아닙니까.

우리들의 상황은 2천 년 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때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부활하셔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우리들은 그리스도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해야 합니다. 참다운 크리스천 생활은 부활신앙을 잉태하고 부활신앙을 고백하며 온전히 부활하는 삶입니다.

_최홍길 신부

 


훈화3. 영적으로 재무장하여

옛말에 ꡐ주객이 전도된다ꡑ 또는 ꡐ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ꡑ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일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 자기가 하는 일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자기의 욕심에 빠져버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본래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하며 늘 초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즘의 세상 흐름은 우리에게 그리 밝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 점점 냉담자의 수가 늘고 있으며, 열심히 봉사하는 레지오 단원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봉사하기보다는 봉사를 받고 싶어합니다. 참으로 미래가 희망적이라고만 할 수 없는 요즘 세상에서 우리 레지오 단원은 과연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어떤 신부님께서는 오늘의 현실을 ꡐ위기의 시대ꡑ라고 말하면서 위기(危機)라는 말은 위험과 기회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 삶의 갈림길에서 맞이하는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되돌아보면 사실 우리 교회의 역사 안에도 많은 위험과 기회가 함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 로마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교회의 심장부까지 멸망당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게르만족들이 쳐들어와 건물을 파괴하고 약탈하였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침략과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교황님은 그레고리오 마뉴스였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이 상황을 헤쳐나가고자 세속의 권력자인 동로마제국 황제에게 게르만족을 내쫓을 수 있는 군사력의 도움을 청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계속되는 침략 속에서 교황님은 마침내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교황님께서는 침략자들과 협상을 벌이면서 한편으로는 교회의 개혁을 시작하셨습니다. 교회의 사목자인 사제와 주교에게는 영적 쇄신을 강조하였고, 사회적 개혁을 강조하였습니다.


교회는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당시의 많은 수도자들이 교황님 명을 받아 게르만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유럽의 곳곳에 수도자들을 파견하여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오히려 위험에 빠졌던 교회를 더 풍요롭게 확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독일, 영국, 아일랜드 등이 바로 이때에 복음화되었습니다.

교황님의 이러한 개혁과 쇄신은 복음정신을 근본으로 하였고 교황님 자신이 철저하게 삶으로 실천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교황님께 순명하며 파견되었던 수도자들의 역할도 대단히 컸습니다.

점점 세속화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정말로 복음을 선포하는 레지오 단원으로서 살고자 한다면 먼저 레지오 정신으로 무장하십시오. 올바른 정신이 없다면 올바른 활동은 불가능합니다.

정신이 살아있지 못하다면 겉으로 보이는 단체나 조직은 무의미합니다. 복음적 삶을 가장 모범적으로 사신 성모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원형이요 우리가 따라야 할 길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노력 속에 항상 성모님의 도우심과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레지오 단원은 굳건한 믿음과 희망을 갖고 주님의 은총 안에서 성모님의 군대로서 영적으로 재무장하여 쇄신의 발걸음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_윤병길 신부

 


훈화4. 영적 독서와 레지오 단원의 내적 생활

교본에서 가장 귀중하고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하며 지혜를 줄 뿐만 아니라 단원들의 일상에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절을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ꡐ레지오 단원들의 내적 생활ꡑ(33장 13절)에 관하여 쓰인 것을 들겠습니다. 이 절은 순수하고 진정한 성화의 방법을 우리들에게 확실히 보여주는 ꡐ건축물의 설계도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프랭크 더프 형제께서 ꡐ우리가 성인이 될 수 있을까?ꡑ라는 제목으로 저술한 소책자를 간략하게 잘 정리한 내용입니다.

ꡐ내적 생활ꡑ의 뜻은 우리들의 생각과 욕구와 애착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중심이며 우리 삶의 구석구석 모두를 지배하는 궁극적인 동기가 되시는 분입니다. 내적인 생활은 바오로 성인의 말처럼 살아가는 평생의 노력입니다. 즉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ꡒ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다ꡓ라고.

우리들이 주 예수님과 그분의 어머니와 친교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 우리들이 흔히 이것을 간과하기도 하는데 - 영적인 독서를 자주하는 습관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지오의 영성에서 필요한 기본적인 실천사항 중 하나입니다. 영적 독서는 쁘레시디움과 모든 평의회의 회합 진행 순서에 들어갑니다. 쁘레시디움이 설립되고 나서 몇 년을 지내면서 단원들이 레지오의 영성적 보화들로 흠뻑 적셔지기까지 영적 독서는 교본을 이용하도록 권고받지만 물론 다른 서적들에서 영적 독서로의 읽을거리를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교본을 읽고 공부하고 그 내용을 묵상하면서 한평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 삶에 대한 새롭고 생생한 통찰력과 사도적 열정을 끊임없이 얻어낼 수 있습니다. 에델 퀸과 같은 삶을 지향하는 수에넌스 추기경은 ꡒ에델 퀸은 교본을 늘 침대 머리맡에 두고 지냈다ꡓ고 자주 이야기하십니다. 그동안 내가 관찰한 바로는 교본을 진정 사랑하고 공부하는 레지오 단원은 순수한 사도직 정신과 묵상적 태도를 겸비하고 있으며 변함없이 진정으로 헌신적인 활동을 하는 단원들이라는 점입니다.

레지오 단원은 주회합에서 영적 독서를 경청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교본의 다음 내용은 우리들에게 힘을 줍니다. ꡒ크리스천의 신념을 키우고 넓히는 노력도 그러하지만 개인적으로 영적 독서를 하면 기도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본인의 필요와 능력에 따라 선택하겠지만 천주교의 주석서나 비평서 혹은 영성적 고전도 있고 신약성경도 영적 독서로 적당합니다.ꡓ 현명한 안내와 지도가 특히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인들의 생애에 관한 좋은 책들은 우리들의 영성생활에 훌륭한 길잡이가 됩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 우리들이 ꡐ어떤 삶의 과제를 설정해야 하는가?ꡑ를 스스로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자기 생애의 과제를 찾은 사람은 ꡐ미덕ꡑ에 가까이 다가서게 되며 ꡐ영웅적 자질ꡑ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성인들은 그분들 개개인의 거룩함의 실례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으며, 그들의 신념과 교의를 보여준 실제의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성인들에 관하여 잘 알게 되면 곧 그분들의 특성과 자질을 본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교본에는 없지만 ꡐ우리가 성인이 될 수 있을까?ꡑ 제하의 더프 형제 저서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물론 정보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여러 가지 점에서 큰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온 세상을 복음화할 수 있는 도구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정보기술의 신세계가 우리의 내적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제공할 잠재적 가능성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기술 매체들이 전달하는 저작물들에서 주장하는 천주교 신자나 기독교 신자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옳지 않으며, 그 내용이 영성생활에 해로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ꡒ홍수와도 같은 정보물의 격랑 속에서 마음과 가슴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좋은 영적 독서의 습관을 유지하여 우리의 영성적 건강을 돌볼 필요가 있습니다.ꡓ

_맥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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