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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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연 [aldus119] 쪽지 캡슐

2005-11-04 ㅣ No.484

-제1독서 -

(욥기19.1, 23-27b)

- 복음 말씀 -

(마태오복음 5. 1-12a)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다시 돌아온 11월 그리고 위령의 날. 만추(晩秋)의 서정(抒情)에 일상의 정교한 예각(銳角)들이 맥없이 무뎌지는 저녁시간이다.

한기(寒氣)에 살(煞)이 든 이 몸도 오늘은 어쩐지 이물(異物)처럼 낯설다. 육신에 부칠 데를 찾지 못하는 마음은 창을 넘어 산자락의 쓸쓸한 몰락(沒落)을 불구경하듯 기웃거리며 서성댄다.

 

용케 살아남은 풀벌레들의 실낱같은 울음소리가 애처로워 견딜 수 없다.

산간(山間) 어디에서는 얼음이 얼었다 하고 첫눈 소식도 이미 지났건만 어찌하여 나무들은 훌훌 옷을 털어내며 시린 고독을 맨몸으로 맞이하는지 나는 그 사연이 궁금하여 편치 않다.


숲은 아직 살아있건만 사실은 이미 죽었다.

그런데 저 죽어가는 숲이 왜 저리도 아름다운가!

 

내가 이렇듯 중심(重心)을 잃고 허둥대는 까닭은,

아마 황량한 가을의 주검을 안고 함께 죽어가면서도 여전히 아름답게 활활 타오르는 저 숲과 그 안의 나무들이 옷을 벗어 내리는 알지 못할 사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수 십 년을 보아왔듯이 가을과 숲은 그렇게 어우러져 꿈처럼 종지부호를 찍고 미련 없이 사라지는데 나는 아무래도 그 황홀하고 정갈한 죽음을 내 것으로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불안과 염려 때문일 것이다.


곧잘 아무도 몰래 혼자서 어머니께서 쉬시는 곳을 찾아가곤 했다.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모든 멍에를 내려놓고 영복(永福)을 누리고 계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굳이 어머니 누우신 자리에 함께 드러누워야 마음이 편안하다. 인사를 올리고 연도를 바치고 나면 나는 어머니의 무릎을 베는 기분으로 반드시 무덤 옆에 나란히 눕는다. 그렇게 땅에 누우면 눈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외엔 할 게 없다.

 

어머니 몸에서 나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사람 꼴을 갖추고 다듬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내가 삽을 들어 어머니를 묻었듯이 언젠가는 고마운 이웃들에 의해 나도 그렇게 묻힐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왔다 간다.

어머니께서 끼치신 은혜는 하느님의 사랑만큼 무한하다. 또 여전히 하늘나라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며 음덕(蔭德)을 베풀어 주실 것을 나는 믿는다.

 

'어머니'로 상징되는, 내가 사랑의 빚을 진 이 땅을 떠난 모든 이웃들을 언젠가 그 꿈같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은 오롯이 하느님께 건 내 인생만큼이나 소중하다. 그 믿음과 희망이 소중하기에 나는 매일같이 나를 속이는 부조리한 삶에 울면서도 반듯하게 살아야 할 시퍼런 의식을 갈고 닦는다. 그리고 이 삶에 불만도 미련도 없다.

 

칸트가 그런 말을 했던가? 우리의 삶이 이렇게 부조리하기 때문에도 오히려 하늘나라와 그곳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반드시 계셔야만 하는 분이라고.


사제생활 십 여 년 동안 많은 죽음을 면전에서 지켜보았다. 심지어 파푸아 뉴기니에서는 하루에 일곱 구(軀)의 시신을 치우기도 했었다. 그야말로 선종(善終)도 있었고 추한 죽음도 없지 않았다. 죽음이 이미 심장 근처에까지 이르렀지만 그때까지 낯선 객(客)을 대하듯 대책 없이 떠나는 사람도 있었고 혀가 말려들어가는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성가를 불러달라던 사람도 보았다. 그렇게 언제나 죽음보다는 삶이 문제였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삶이 어떠했는지 드러나는 것이었다.


요한 바울로 2세 교황님의 선종도 벌써 오래된 얘기처럼 멀게 느껴진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시오.”

 

죽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미 죽음을 끝장내는 삶을 사셨기에 행복한 죽음을 맞으셨던 것이리라. 주님처럼 사셨고 주님처럼 삶을 마감하는 목자의 표양처럼 나도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고 싶다. 내가 죽을 때 죽음이 나를 어쩌지 못하도록 이 살아있는 시간에 내가 먼저 그 죽음을 끝장내거나 친구로 만들어버려야겠다.

또 그러기 위해서 항상 죽음을 생각해야겠다. 메멘토 모리!


내 비록 여전히 사사로운 현세 욕심에 휘둘리고 시시로 헛된 공명심을 안고 뒹굴지만, 그리고 아직도 그런 것들을 곁눈질 하는 못난 습성에 발 담그고 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십자가에다 희망의 말뚝을 박는 몸부림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류종구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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