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明洞聖堂) 농성 관련 게시판

8월 14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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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환 [franco2] 쪽지 캡슐

1999-08-14 ㅣ No.148

  한바탕 전쟁을 치른 기분이다.

"8월 무더위의 명동밤은 고느적이 잦아든다"는 표현이 무색해 졌다.

 

  00:10 - 밖이 소란스럽다.

"죽여라!"하는 고함이 들리고, 고성이 오간다. 잘못들은 줄 알았으나 여전히 소리가 들린다. 밖으로 나가보니 차량들과 사람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술냄새가 진동하고, 재외동포들을 위한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 소속의 한 사람이 차량 안에서 어쩔줄을 모르고 있다. 축협노조원들이 취해 차를 빼려는 사람에게 씨비를 건 것이다. 겨우 진정을 시키고 돌아왔다.

 

  03:00 - 성당내를 한바퀴 돌면서 아연실색했다.

성당 경내 곳곳에서 이리저리 취해 뒹구는 축협의 노조원들이 가득하고, 머리 맡에는 소주병, 맥주병들이 나뒹굴고, 저녁 도시락들은 흩어져 반찬들로 얼룩져 있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장소를 지정해 주었건만, 그렇게 주위를 주었건만, 도데체 이해 할 수가 없다. 일단 병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04:20 - 고위 집행부의 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 "너무하지 않느냐?"고 항의 하려 했으나 이미 휘청이고 있다. 그저 망연자실 동공이 풀린 상태로 말도 잘 못하고 있다. "일단 주무시라고, 05:30에 깨우겠다고"하고는 눞혔다. 8상자의 소주와 7상자의 맥주 BOX를 치우니 05:30이다. 여기저기 방뇨해 놓아 찌릿내가 진동하지만 어쩔도리가 없다.

대성당 문 앞에서 취해 잠든 4~50여명의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이제 곧 06:30 미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신자들을 위해 지정해 준 자리로 돌아가라고 소리쳤지만 정신들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힘겹게 고함치며 간신히 자리를 정리하니 06:20이다. 참는데도 한도가 있다. 화가 들 끓어 오른다.  

 

  07:20 - 90이 넘은 할머니 신자의 볼멘 항의가 시작되었다.

신부님, 도데체 이게 무었입니까? 아무데서나 저렇게 뒹굴면 어쩌라는 겁니까?

이리저리 한바탕 신자들의 볼멘 항의를 듣고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09:50 - 더 이상의 인내도 남지않았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찾을 길이 없고, 대성당 앞은 또 다시 가로 막히고, 성당마당을 온통 점령하고 있어 신자들이 어쩔줄을 모른다. 홍보부장을 불렀다.

"참는데도 한도가 있다. 내가 그토록이나 일렀고, 지난번에도 그토록이나 알아듣게 말했건만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 지금도 저기서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도데체 뭐하는 것이냐? 이런 모습은 여기서 정말 처음본다. 모두 나가달라"고 고함을 쳤다. 어제 뭐라 했느냐? 피곤하고 힘드니 하룻밤만 잘 수 있게 해달라더니 이 난장판을 만들다니, 이젠 다시 명동을 찾을 생각도 말라고....

홍보부장은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한다. 통제가 불가능하고, 회장님이 활복을 해 모두 흥분되어 있다. 그러니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 그럼 그동안 여기를 찾은 많은 사람들은 흥분해서 죽었을 것이다. 현대중기는 동료를 2사람이나 묻었고, 조성만 열사는 여기서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러지는 않았다. 또 같이 어려운 아니 여러분들 보다 더 어려운 저 조선족의 동포들을 보라 얼마나 의연한 모습인가! 그런데도 이해를 해달라니...

어쨌던 그것조차 참아내지 못하고, 아니 그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 위원장이 연설을 해도 뒤에서는 여전히 술판을 벌이는 모습이 어떻게 이해되겠는가? 그럴 수록 더욱 의연하게 정신을 가다듬고 투쟁을 해야지 이런 썩어빠진 모습으로 무슨 투쟁이냐.. 당장 언덕으로 내려가라. 그리고 약속대로 철수해라.......

 

  11:30 - 지방노조원들이 철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6:30이 넘도록 여전히 웃통을 벗어재끼고 여기저기 누워 있는 모습이 계속이다. 축협중앙회 부회장이 자제와 격려를 위해 방문했다. 노조원들과 집행부를 만나고 찾아왔다. 성당에 피해를 주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왔다. 고맙지만 이런 모습은 정말 처음 본다며 항의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후, 앞으로의 일들과 연행된 노조원들에 대한 걱정을 함께하고 석방문제를 논의했다. 서로 도울 수 있는 것은 돕자고 하고 헤어졌다.

 

  17:00 - 축산업협동조합 노조위원장이 보였다.

언덕으로 내려가 다시 강력히 항의했다. 노조원들이 서서히 성당마당을 비우기 시작했고, 언덕을 가득 메웠다. 홍보부장에게 다시 어떻게 할것이냐고 묻자, 축협중앙회노조위원장이 곧 석방된다고 하니 함께 논의해 알려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22:10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함께 논의할 때 성당측의 입장을 분명히 전달해 달라. 첫째, 인원을 집행부 3~40여명으로 축소해 달라. 통제를 할 수 있다면 모르되 통제불능의 상태에서 주일을 지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더위에 아무리 통제를 한다해도 한계가 있다. 그러면 신자들과 분명 마찰이 있게 되고 불상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둘째, 주일에는 성당마당에 주차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현재 있는 10여대의 차량들을 모두 철수시켜달라. 셋째, 언덕에만 있고, 경내로는 들어오지 말라. 분명 이 많은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떠난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켜라. 넷째, 방뇨한 곳은 물로 씻어내라. 다섯째, 조선족 동포들에게 찾아가 어제의 일에 대해 사과하라.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나 하자. 자체 규찰대를 조직하지 않는한 1,000여명이 넘을 경우 축협만은 성당사용을 불허하겠으니 양해해 달라. 홍보부장은 놀랐나 보다. 저런 신부가 아니었는데...하는 눈치다.

 

  21:10 - 노조원들이 단위별로 해산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인원이 축소될지는 아직 모른다. 너무 많은 인원이기에 아직도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서경석 목사가 찾아와 내일 주일이니 이 언덕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것이다. 그거야 뭔 문제겠는가?

 

  하느님!

오늘은 제가 너무 힘들었나 봅니다.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습니다.

하루종일 화를 낸 제가 부끄럽습니다. 글치만 하느님 이틀을 꼬박 새 보십시오.

그래도 않된다구요? 제가 수양이 부족했습니다. 인내심과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평신도 사목회 여러분들이 불침번을 선다고 찾아왔습니다.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의 마음도 어루만저 주십시오. 전 너무 피곤해 이만 자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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