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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 찾는 바보들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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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peace-maker] 쪽지 캡슐

2009-06-13 ㅣ No.9563

시대정신 찾는 바보들의 행진



시사IN | 박형숙 기자 | 입력 2009.06.11 09:51 | 누가 봤을까? 50대 남성, 전라

 

 

 
왜? 장례식은 끝났지만 노무현 사후, 한국 사회에 큰 질문이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 추모의 열기는' '누가 이들을 불러 모으는가' '이 큰 상실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전문가들과 언론은 노무현 서거 정국에서 드러난 민심을 헤아리기 위해 물음표를 던지고 있지만 답은 뚜렷하지 않다. 민심은 복잡하고 어지럽게 얽혀 있다.

슬픈 공화국, 울고 싶은 사람들

"다 그만두고 그냥 어디 가서 실컷 울고 싶다." 한겨레 2월9일자 김선주 칼럼은 읽는 이들의 가슴을 쳤다.

김수환 추기경이 스스로 ‘바보야’라고 이름 붙인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 새만화책출판사 소속 만화가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웃는 모습을 가로 4m, 세로 3.5m짜리 대형 유화 걸개그림으로 그렸다.

 

그래, 차라리 나았다. 이명박 정부의 1년은 활력이 있었다. '고소영' '강부자' 정권이라 비판할 수 있었고,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로 두 달여 동안 광장을 점유하며 연대와 열광의 시간을 보냈다. 세계 경제위기가 닥쳤지만 '미네르바'라는 인터넷 경제대통령을 탄생시키며 집단 지성의 위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상황은 돌변했다. 대국민 사과를 두 번이나 했던 대통령은 더 이상 끌려다닐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구속과 처벌로 거리 민심을 진압했고 2년차 정권의 통치력을 검찰·경찰력으로 발휘하는 퇴행을 거듭했다. 사람들은 잡혀갔고 쫓겨났다. 그리고 죽어갔다. 용산 철거민, 장자연, 박종태…. 권력에 짓눌린 죽음이었다. 김헌태 전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소장(인하대 언론정보학과 겸임교수)은 "묻지 마 성장에 대한 맹목적 기대로 이명박을 찍었지만 집권 1년 만에 무너졌다.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 몽둥이가 되어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절망했고, 감정의 돌파구는 애도로 이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예상치 못한 추모 물결은 울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1분도 안 되는 조문을 하기 위해 서너 시간 줄을 서는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일에 기꺼이 동참했다.


사람들은 다시 '가치'에 목말라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 들어 더욱 강화된 시장만능주의 사회에서 신념과 소신의 종말을 지켜보며 가치를 지향했던 사람, 서민 편에 서왔던 사회 어른에 대한 그리움, 향수를 갈망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바보'들의 죽음 속에서 확인된다.

사람들은 '노무현의 가치'에 깊은 애도를 보내고 있다. 정의와 원칙을 향한 노무현의 진정성에 대한 뒤늦은 공감이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노무현의 바보 정신을 드러내는 대표 어록이다. 살아생전 그 자신도 '바보'라는 별명이 제일 좋다고 했듯이, 사람들은 "바보 노무현, 저도 끝까지 바보처럼 살겠습니다"라는 추모 글로 화답했다.

노무현에 앞서간 또 한 명의 '바보'가 있다. 지난 2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하는 추모 물결은 로마 교황청을 흔들었다. 정진석 추기경은 "가톨릭 국가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놀라워했다. 로마 교황청이 '교황의 이름으로' 장례를 치르라는, 사실상 교황이 직접 조문한 수준의 장례 격상 조처를 내렸던 것도 40만 조문객의 바보 행렬이 보여준 힘이었다.

살아생전 김 추기경은 자화상에서 스스로를 '바보야'라고 이름 붙였고,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다"라고 고백했다. 김수환의 '바보 정신'은 사랑과 희생이었다. 평생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 편에 서온 김 추기경의 유명한 일화. 1987년 6·10 항쟁 당시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선종 이후, 바보 김수환의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 각막을 기증한 그의 뒤를 잇는 장기기증 서약자들은 벌써 5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바보 정신은 추모의 제단에만 있지 않았다.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를 다시 쓴 < 워낭소리 > 의 300만명에 이르는 흥행 기록에도 바보 정신은 살아 있다. 신뢰와 느림의 가치다. 영화 평론가 심영섭 교수(대구사이버대학·상담심리학)는 "소와 할아버지는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눈빛만으로도 믿음이 오가는 사이였을 겁니다. … 이 비루하고 고된 삶에서, 소와 노인이 소통할 수 있었던 건 믿음인데, 그 믿음 밑에는 소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나름의 노력이 '통'했던 것이겠지요. 소한테 사료를 안 먹이고 꼴을 베어 먹이는 것. 새벽에 일어나 쇠죽을 쑤는 일. 귀찮고 힘들지만 소가 무엇을 좋아할지 농부는 생각한 것입니다."( < 황해문화 > 2009년 여름호)라고 평했다.

할아버지가 소를 이용해 써레질을 하고 손으로 모를 심고 낫으로 들판의 풀을 베는 것은 불도저 정권의 속도전과 사뭇 대비되는 행위였다. 영화는 그렇게 할아버지와 함께 소가 '천천히 죽어가는 삶'의 과정을 보여주며 느림의 향수를 자극한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바보'는 합리성·이성주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기 이익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가치를 고수하는 사람들이었다. 바보의 전통이 그러했다. 한정숙 교수(서울대 서양사)는 "역사 속에서 바보는 세속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내적 진실을 드러내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서양에는 '현명한 바보'라는 말도 있다"라고 말했다.

" < 리어왕 > 속의 어릿광대는 거리낌 없이 왕후장상을 조롱하고 그들의 위선을 꾸짖지만, 리어왕이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어 광야를 헤맬 때는 끝까지 그를 수행하는 유일한 길벗이 되어준 신실한 인간이었다. 또한, 러시아 정교에서 '바보 성자'들은 백치 같지만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순결한 영혼과 예지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민중은 이들을 두려워하고 존경했다. 유명한 톨스토이의 민담 < 바보 이반 > 에서 주인공 이반 역시 러시아의 바보 숭배 전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내면의 힘'을 가진 인물들

그러나 혼란스러움은 남는다. "바보 정신의 계승"을 외치는 이즈음, 민심이 180도 변한 것일까? 불과 1년6개월 전 이명박 후보를 야당 후보와 사상 최대 격차로 당선시킨 민심. 또 4개월 뒤 치러진 총선에서 뉴타운·특목고 공약을 내세운 '욕망의 정치'가 휩쓸었던 민심이 '가치의 정치'로 대회전이라도 했다는 것일까? 견해는 엇갈린다.

김호기 교수(연세대·사회학)의 진단이다. "촛불집회, 김수환 추기경 선종, 노 전 대통령 서거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서 강화되어온 물질·경쟁·시장 만능주의를 포괄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성찰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신자유주의적 방식의 경제 살리기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서서히 이뤄져온 총체적인 성찰의 과정 속에 노 전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가 대단한 전환점을 제공하는 의미가 있어요."(경향신문 5월30일자)

반면, 슬픔과 애도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각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견해도 있다. 역사 속에서 민심은 늘 복합적이었고 가변적이었으며 역동적이었다. 시사 평론가 김종배씨는 민심이 변한 게 아니라 민심의 다른 측면이 부각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선거 때 사람들은 민주주의나 인권 등 시민적 가치는 따놓은 열매라고 여겼다. 이미 잡은 물고기에 미끼를 던지지 않듯이 이번 대선·총선에서는 다른 열매, 즉 경제적 이슈에 '올인'했고 정권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분노하고 정치·사회적 가치에 반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 소시민조차 신자유주의 삶에 편입된 현실에서 이들의 경제적 욕망은 여전히 강력하게 엄존한다."

김종철 < 녹색평론 > 대표의 진단은 좀 더 냉정하다. "나는 우리 사회에 과연 바보주의라는 게 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있다면 지금 산업사회가 주는 피로감, 출구가 보이지 않는 폐색 상황에 갇혀 있는 사회들에서 공통적으로 엿보이는 어떤 막연한 감정적 반응이 아닐까 싶다. 지옥 같은 경쟁 교육 시스템에 자기 아이들을 밀어넣는 수많은 부모를 보면, 바보주의는커녕 아직도 자신만의 성공을 꿈꾸는 경향이 완강하다고 본다. 민심은 약자에 대한 동정심도 있지만 생존 문제에 관련해서는 매우 영악한 법이다. 이는 수천년 동안 변함없는 진실이다. 지금이라도 이명박이 유화적으로 나온다면 단번에 여론의 방향은 달라질 수 있다."

지나친 비관일까? 절망은 꽉 차고 희망은 비어 있다. "지난 1년 동안 국민은 이명박 정부 밑에서 많이 상처받고 많이 힘들고 많이 지쳐 있다. 사람들이 슬픈 영화를 찾고 슬픈 장례식에 가고 슬픈 촛불시위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상실했기 때문이다."(심영섭) 그 상실의 공백을 뭐가 채우게 될지 알 수 없다. 잇따르는 애도 물결 속에 내면의 가치와 인간적 가치에 대한 개안이 이뤄지긴 했지만, 그 실체가 '반이명박'이라는 정치적 구호에 불과할지 아니면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산업화 시대의 패러다임에 대한 성찰로 드러날지 말이다. 추모의 행렬이 바보들의 행진으로 이어진다면 새로운 시대정신의 탄생도 기약할 수 있겠건만!

박형숙 기자 / ph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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