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6년 3월호 [훈화]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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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6-03-06 ㅣ No.48

 

1. <성령의 인간이며 위대한 신앙인 성 요셉>

삶이란 크고 작은 만남과 선택의 연속입니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우리 삶은 결코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나 조건이든 선택하지 않고는 삶을 디자인할 수도 없습니다. 만남과 선택이란 우리 인생에서 그만큼 큰 역할을 합니다. 어린 시절 만난 누군가 때문에 꿈이 바뀌기도 하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기도 합니다. 성공이냐 실패냐, 인생을 원하는 방식대로 설계하느냐 못하느냐는 결국 인생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만남과 선택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사회 속에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는 사주팔자나 풍수지리도 그 근원을 보면 만남과 선택의 문제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시간과의 만남(선택)은 사주팔자로 풀어지는 것이고, 사람과 공간과의 만남(선택)은 풍수지리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실질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사람끼리의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봄 기운이 생동하는 3월에 우리는 성령의 인간이요 위대한 신앙인인 성 요셉을 만납니다. 요셉 성인을 만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봅니다. 요셉 성인과 마리아의 만남, 그리고 요셉 성인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한 현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성 요셉을 통해서 본받을 점은 무엇일까?

첫째, 요셉 성인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엄청난 육화 신비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까지 요셉 성인은 남다른 외로움과 고독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자신과의 투쟁에서 하느님을 선택했고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곧 미혼모인 여인과 그의 아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세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데 당신만의 몫을 해내십니다. 요셉 성인처럼 우리도 삶 안에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려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둘째, 요셉 성인은 자신이 선택한 가정에 대해서 어떤 불만과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불만과 불평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불화의 요인(미혼모, 자식)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선택한 것들에 대해서 불평하기보다는 요셉 성인처럼 모든 불만과 불화의 요인을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인간적인 시각으로만 요셉 성인을 볼 때 그분은 쓸개 없는 사람이나 바보처럼 보입니다. 요셉 성인은 약혼녀가 이미 임신했음에도 그냥 살기로 합니다. 아이가 크면서 마리아는 그 아이가 요셉의 아이가 아니라고 틈틈이 상기시키기까지 합니다. 더 속상한 것은 마리아가 자기 아이를 안 낳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래도 같이 살아야 하나?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부부간의 이해심입니다. 배우자를 이해하려는 마음입니다. 요셉 성인처럼 우리도 상대를 이해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넷째, 요셉 성인은 임신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보호합니다. 그리고 아기를 낳은 후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까지 가서 피난 생활을 합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요셉 성인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것은, 마리아가 겪을 운명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위험과 고통마저도 떠맡아 함께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 성인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이며 훌륭한 남편이고 아버지였습니다. 이 땅에 모든 아버지들이 요셉 성인을 본받아 성가정을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최광조 신부_

 


2.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ꡐ거룩한 재계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전투를 시작하며 주님께 비오니, 악의 세계를 대적하려는 저희로 하여금 극기의 보루로 진을 치게 하소서. 성부와 …ꡑ(재의 수요일 본기도)


올해 재의 수요일인 3월 1일, 우리는 재를 머리에 받고 다시 ꡐ은총의 때ꡑ 사순절 40일을 살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바라보며 이번 사순절이 참으로 우리 자신을 위한 구원과 완성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재계와 희생과 보속으로, 또한 신앙적인 각성과 성찰과 결심으로 완전무장하는 일입니다.

사순절은 대림시기와 마찬가지로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판공시기입니다.

판공(判功)이란 무엇입니까. 가톨릭 대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ꡒ한국교회의 특수용어로 교우들이 1년에 두 번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고해성사를 말하며 이때의 고해성사는 원칙적으로 성사표를 받은 교우들만이 받을 수 있다. 교회법상 고해성사는 1년에 한 번만 받아도 되는 것이지만 한국교회에서는 1년에 두 번 춘추(春秋)로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관례였고, 이를 판공이라 불렀다.ꡓ


판공(判功)이란 원래 심판공부(審判工夫) 또는 심판신공(審判神功)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해마다 성탄과 부활대축일을 전후하여 시행하는 이 판공에는 으레 찰고(察考)라는 시험제도가 부과되어 있습니다. 마치 이 세상 마지막 날 영광과 권능을 떨치며 다시 오실 주님의 준엄한 심판에 대비하는 기다림과 경각심을 일깨운다고 할 것입니다.

본당신부는 판공을 더 잘하기 위하여 판공교리 교육을 하거나 판공교리 문제지를 배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직접 신자들을 대면하여 신공(神功)과 신앙공부 실태를 점검하고 추계 판공 때는 신년도 교무금을 책정하기도 합니다. 사실 판공은 본당신부와 신자 모두에게 구원의 말씀인 성경과 교리공부의 숙지도는 물론 신자로서의 수계생활에 대한 충실성을 확인하는, 중요하고 은혜로운 행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당에서는 판공성사에서 제외된 이를 횟수와 연한에 따라 냉담자 또는 쉬는 교우, 행방 불명자로 분류하게 됩니다.

투쟁교회를 살며 지상여정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이 특별한 시기에 주위의 지치고 뒤처진 이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활동하며 레지오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신전쟁(靈神戰爭)을 치르며 성모님의 사랑받는 레지오 전사(戰士)로서 지금 여기서(Hic et Nunc) 과연 내가 우선적으로 감당하고 책임질 과제와 책임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최종적인 심판에 대비하고 - 주님의 부활 승리를 내다보며 -  스스로 무엇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고 또 무엇이 우리들을 구원의 대열에서 이탈하고 추락하게 하는지 내 영혼의 실태를 점검하며 자신의 구원을 위해 힘쓰는 일이 아닙니까. 레지오 단원으로서 의무적인 주회 출석은 물론이고, 온전한 헌신과 봉사의 자세로 기도와 희생과 활동의 충실성을 보일 때입니다.

이 특별한 - 은총 충만한 - 시기에 베드로 사도와 이냐시오 성인의 권고말씀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며 ꡐ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도록ꡑ해야 하겠습니다.


ꡒ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ꡓ(1베드 5,8~9).

ꡒ원수는 대열 안에서는 강한 체하나 강한 힘 앞에서는 약해진다. 이는 마치 남에게 발각되기를 원치 않는 허영심 많은 애인과도 같고 취약지점만을 찾고 있는 군대 지휘관과도 같다ꡓ(성 이냐시오 로욜라).

최홍길 신부_



3.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삶>

형제자매 여러분,

한번 여러분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십시오.

ꡐ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ꡑ라고들 합니다. 또  ꡐ사람이 살다 보면 얼굴에 그 사람의 삶의 역사가 드러난다ꡑ고도 합니다.

이런 말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경고도 되고 동시에 어질고 착하게 살라는 권유이기도 합니다.

ꡐ인상이 좋아 보인다ꡑ ꡐ함께 있으면 편안함을 느낀다ꡑ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그 얼굴을 통해서 그의 착한 모습이 드러나지만 어떤 사람은 얼굴만 봐도 불편해 보이고 함께 있으면 짜증이 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어보십시오. ꡒ너는 오늘 행복하니?ꡓ 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 하느님 앞에서 얼굴을 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것들에 집착하고 이것저것 명분을 따지고 여러 가지 핑계를 댑니다. 무슨 일이든지 남의 탓만 하겠지요.

하지만 진정으로 어진 양심을 가진 사람은 남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고 불평불만을 하기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든 좋은 점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다 때가 있으려니 하며, 하느님께서 자신이 모르는 무엇을 준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기가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올바로 보면서 성찰할 수 있다면 양심이 모질어질 수 없고 포용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짜증나고 힘들게만 느껴지지 않고 하느님의 안배에 의지하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의 덕을 키우는 수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입니다. 돈을 들여서도 공부를 하는데, 인생공부를 멋지게 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불투명한 상황, 옳고 그름을 헤아릴 수 없는 역경에 부딪힌다면 황급히 대응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보십시오. 주님의 부활의 영광은 그 앞에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나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 세상의 즐거움이나 영광을 찾지 말고 참되고 영원한 영광을 찾으십시오. 자신의 마음을 억지로 포장하지 마십시오. 잘못 포장하면 속은 썩어서 냄새를 풍길 수도 있습니다. 거짓된 삶을 버리고 진실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여러분이 양심을 어질게 가져야 합니다. ꡐ있는 그대로ꡑ 받아들일 줄 알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이 지상의 삶이 매우 복잡하다고 해도 끝내 자신이 가야 할 ꡐ하느님께로 향하는 과정ꡑ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 양심을 어질게 가질 때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통도 달게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사람은 인간의 칭찬을 경계합니다. 인간의 칭찬을 기꺼워하는 이는 세상에서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언제나 슬픔을 가져다 줍니다. 이 세상의 영광은 항상 그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진실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욕심에 빠져 거짓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깨끗하고 어진 양심을 가진 사람은 작은 일에 충실합니다. 자신이 하는 행동에 책임을 지며 늘 하느님께 의탁하기에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됩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의탁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도 진정한 하느님의 봉사자가 되기 위해서는 늘 우리의 양심을 어질게 가지고 마음의 평화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올 한 해 보다 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윤병길 신부_

 


4. <쁘레시디움의 주회합>

프랭크 더프 형제는 교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ꡒ주회합은 레지오의 심장이며, 이곳으로부터 생명의 피가 모든 동맥과 정맥으로 흘러간다. 주회합은 레지오를 밝히는 전력과 동력을 생산하는 발전소이며, 레지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해주는 보화의 곳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레지오 단원들은 주회합에 참석하는 것을 제일의 의무요 가장 성스러운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어떤 것도 주회합을 대신할 수 없으며, 주회합이 없으면 레지오는 혼이 없는 육신과 같다.ꡓ


우리 모두 이런 의문을 가져봅시다.

ꡒ레지오에 있어 주회합이 왜 중심적 관심 대상일까?ꡓ 또 ꡒ레지오는 왜 단원들에게 주회합에 참석하는 일에 대하여 열정적이며 완전한 성실성을 요구하는가?ꡓ

예수님은 우리들이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증거하기를 바란다고 분명히 직접적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사도들이 처음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사도들은 건물 윗층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했던 방에 가서 마리아와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또 오순절 성령 강림 전 열흘 동안 사도들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첫 번째로 사도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또 그들이 그분에 대하여 알게 된 것 전부와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주로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 며칠 전부터 사도들과 그들 공동체는 성모님을 그들의 어머니로 맞이하게 되었고, 성모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예수님 승천 후 그들에게 보내기로 약속하신 그 성령에 관하여 거듭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누구도 성모님보다 성령에 관하여 더 친밀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성모님께서 분명하게 기억하시는 예수님의 우리들 구속(救贖)활동에 관련된 모든 사건들은 그리스도 신비체인 교회의 보화들 중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일부입니다. 세 번째로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ꡐ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ꡑ는 거룩하신 당부 말씀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한편 당시 사도들은 이런저런 문제들에 당면할 때마다 성모님께 의지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쁘레시디움 주회합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아마도 쁘레시디움 주회합은 최후의 만찬 식탁이 차려졌던 그 방에서,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시기까지 며칠이 지나는 동안에 사도들이 겪었던 일들을 지금 이 시간에 우리들이 체험해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세례식 날 주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 부르심은 우리에게 주님의 우리 구속(救贖)하심의 은총과 하느님 사랑의 복음을 이웃과 세상 만방(萬邦)과 함께 공유(共有)하라는 분부의 말씀입니다.

주회합의 첫 단계는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성모님 옆에 모여 성령께서 우리들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들을 인도하고 이끄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도직 활동이나 복음전파 사업을 계획하는 것은 깊은 신앙의 정신, 진실로 형제적인 정신 때문입니다. 쁘레시디움에서 배당 받는 실질적 주간 활동이 없으면 우리들은 단지 이야기꾼들이나 몽상가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간 활동을 실천하고 후에 이것을 평가하는 주회합은 우리와 우리들이 봉사하는 이들에게 거대한 은총의 샘이 됩니다. 이 은총은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순절 전 며칠 동안 사도들이 머물렀던 주님 ꡐ최후의 만찬ꡑ 방에서 있었던 그 상황을 우리가 주회합을 하면서 오늘에 체험하는 것입니다.

주회합에의 불참을 되풀이하거나 실질적인 주간 사도직 활동을 하지 않는 단원은 교본에서 지적한 대로 레지오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그리스도 신비체에 대한 성모님의 모성적 보살핌을 받는 기쁨을 함께 누리는 큰 선물을 잃게 될 것입니다.

쁘레시디움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귀중한 세포와도 같습니다. 주회합과 성모님 안에서 성모님과 협력하여 펼치는 주간 활동이야말로 그 쁘레시디움을 건강하게 만들고 능률적이게 하며, 진정 부러움을 사는 단위 조직으로 만들어줍니다. 다시 요약해서 레지오의 행동단원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회합에 참석하고 주별로 2시간씩 배당된 활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충실하게 지켜질 때 은총이 레지오 안에서 넘쳐날 것이며 그 은총이 성모님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풍성하게 전해질 것입니다.

맥그리거 신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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