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경이의 편지

인쇄

최영호 [cary] 쪽지 캡슐

2000-09-27 ㅣ No.2044

 

"많이 뵙고 싶어요..."로 시작되는 경이의 편지를 받았다.

경이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의 친구로, "병원에 가야 돼. 나 임신했어..."라는 만우절 쪽지를 딸에게 보내 내 입술을 부르트게 했던  장본인이다(게시물 742번, 십대에겐 정말 못 당해).

 

아버지는 교수이시고 어머니는 큰 회사의 비서로 유복한 생활을 하던 경이의 집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께서 전자상거래에 손을 대시면서부터라고 들었다. 몇 번인가 집을 옮겨 다니더니 급기야는 조그만 아파트에 월세로 내려앉았다.

하라는 공부는 뒷전이고 허구한 날 몰려다니며 노는 통에 나에게 지청구도 많이 듣고 더러는 어깨나 엉덩이를 맞기도 했지만, 우리 집에 들어설 때면 늘 생글생글 웃으며 큰 소리로 인사하는 아이가 경이였다.

빵이며 주전부리를 아이가 돌아올 때 맞추어 마련해 주는 까닭에 우리 집은 늘 친구들이 끓는 편인데, 경이는 특히 가다랭이와 다시마로 맛을 낸 일본식 우동을 좋아했다. 쑥갓이나 미역 한 조각을 얹어 우동을 내고 마지막으로 ’히치미’라는 양념 고춧가루를 찻숟갈로 넣어주면 번번이 ’우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집에서 기르는 페르시아 고양이가 아프다고 울먹이며 전화를 하기도 하고, 금전 문제로 부모가 심하게 다투던 어느 날인가는 전화기를 붙들고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해 가슴을 아리게 하던 아이였다.      

 

문제가 어떻게 진척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경이 부모는 위장 이혼(이라고 믿고 싶다)을 하고 여름방학 직전에 야반 도주하듯이 간단한 짐을 챙겨 미국으로 떠났다. 아빠만 한국에 남으신 채.

 

지난번 미국에 갈 때 전화통화라도 할 수 있을까 하여 아이의 연락처를 수소문 해 봤지만 알 길이 없어 안타까웠는데, 석 달만에 경이가 뉴저지에서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A4 용지 두 장 분량으로 빼곡이 쓴 경이의 편지에는

감사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고(엄마가 바쁘셔서 스스로 먹을 것을 챙겨야 했던 경이에게 친구와 함께 먹는 간식은 허기를 메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가 보다),

지금의 생활이 외롭고 힘들지만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살려고 애쓴다는 당찬 각오가 들어 있었다.

서류가 도착하지 않아 학교도 아직 못 다니고 친척집에 얹혀 사는 경이의 입장이 좋을 리 없건만, 그 철부지에게 이런 의젓한 면이 있었나 싶게 조리 있고 씩씩한 편지였다.

딸아이에게는 경황없이 맡기고 간 옷가지를 부쳐 달라며 미화를 함께 넣어 보냈다.

 

지난 토요일,

"엄마가 경이 옷을 사 보낼까 하는데 함께 갈래?" 하고 물으니 딸아이는

"어, 어쩜 엄마두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수?" 하며 따라 나섰다.

딸아이는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리본 달린 로퍼식 구두를 샀고, 난 베이지 색 스웨터를 골랐다.

무엇이고 담아 두지 못하는 딸아이는 곧바로 다른 친구에게 이 일을 전화로 보고했다. "짜식, 나한텐 편지 한 장 보내고 울 엄마한텐 두 장 보냈다니까..."

경이의 편지는 막연하게나마 아이의 밝은 미래를 예감케 했고, 내 딸아이에게 또 다른 희망을 품게 하는 빌미가 되어 주었다.

 

경이에게 보낼 옷가지를 챙기며 지난여름 옛 친구들을 불러 우정을 나누었던 김석주 안드레아 선배의 이야기를 자세히 담았다.

경이가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고 꿋꿋하게 홀로 서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먼 훗날 웃는 얼굴로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49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