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주일 밤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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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광 [paschal] 쪽지 캡슐

2001-03-12 ㅣ No.2640

주여, 오늘 밤, 나는 혼자입니다

 

성당 안의 소음도 차츰 사라지고

 

모두들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 혼자서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과 마주쳤습니다

 

많은 사람을 내뱉듯 쏟아놓는 전철역 앞을 지나서

 

주일의 기쁨을 좀더 오래 즐기려고 공원 앞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한가한 이들을 피해가다가

 

나는 길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과 마주쳤습니다

 

주여, 그 아이들은 절대 내 아이가 될 수 없는 남의 아이들입니다.

 

 

 

주여, 나를 보십시오

 

나는 혼자입니다

 

침묵이 나를 숨막히게 하고

 

고독이 나를 괴롭힙니다

 

 

 

주여, 나는 마흔 하나, 다른 사람과 다름없이 건장한 몸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힘찬 팔과

 

누군가를 사랑하고픈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바쳐왔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당신은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다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여

 

이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몸을 사람에게 주지 않고 주님께만 드린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면서도

 

누구의 사랑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젊은 여성과 악수를 하면서도

 

그 손을 오래 잡고 있을 수 없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 싹트면서도

 

이를 주님께 드린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남을 위해서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고 또 그들 틈에 끼어 있으면서도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받을 생각을 않고 언제나 주기만 한다는 것

 

내 이익은 찾지 않고 남의 이익만을 찾는다는 것

 

남의 죄를 듣고 혼자 괴로워하고 이를 견디어내는 것

 

비밀이 있으면서도 이를 어떻게든 터놓지 못한다는 것

 

언제나 남은 이끌고 가면서도 자신은 한 순간도 이끌리지 못한다는 것

 

약한 사람을 붙들어 주면서도 자신은 어느 강한 사람에게도 의지 할 수 없다는 것

 

이 모두 다 어려운 것 뿐입니다

 

혼자라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 있으면서도 혼자라는 것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고통과 죽음과 죄 앞에 혼자 서 있다는 것

 

주여, 정말 어렵습니다.

 

 

 

아들아, 그래도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느냐?

 

내가 바로 너다

 

내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강생과 구속사업을 이어가자면

 

또 다른 [나] 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너를 나로 알고 영원으로부터 뽑은 것이다

 

나는 네가 있어야 한다

 

내가 계속 축복을 주려면, 네 손이 있어야 한다

 

내가 계속 말을 하려면, 네 입술이 있어야 한다

 

내가 계속 고통을 받으려면, 네 몸이 있어야 한다

 

내가 계속 사랑하려면, 네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계속 구원을 주려면, 너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아들아, 나와 함께 있어다오.

 

 

 

주여, 저 여기 있습니다

 

내 몸도

 

내 마음도

 

내 영혼도, 다 여기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이 세상 어디나 다 닿을 만큼 크게 해주시고

 

이 세상을 다 짊어질 수 있을 만큼 강하게 해주시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고

 

이 세상을 다 끌어안을 만큼 순결하게 해주소서

 

나로 하여금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뵙는 장소가 되어도

 

곧 지나쳐버리는 곳이 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주님께로 향해 가는 길이 되게 하시고

 

아무것도 꺾을 것이 없는 길이 되게 하소서

 

주여, 오늘밤은 모든 것이 고요한데 내 마음 속은

 

뒤끊어 몹시 고통을 느낍니다

 

모두 내게서 영혼을 탐내고 있지만 나는 그들 하나 하나의 굶주림을

 

다 풀어 줄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내 두 어깨를 비참과 죄악으로 마구 찍어누르지만

 

나는 자조(自嘲) 하지 않고 천천히, 똑똑히, 또 겸허하게

 

[그렇습니다, 주여] 하고 되풀이합니다.

 

 

 

주여, 나는 주님 앞에

 

혼자 있습니다

 

이 밤의 평화 속에서.

 

 

 

 

 

주엽동 성당 6층에 세들어 살고 있는 칼 신부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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