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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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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석 [heodang72] 쪽지 캡슐

2002-08-27 ㅣ No.2961

부제 때, 신학생들 앞에서 했던 성시간 강론입니다.

그냥 문득 떠올라서 올려봅니다.

작년 6월이었는데, 벌써 오래 전 일로 느껴지네요.

그리고 왠지 그때가 그리워지기도 하네요..^^

그때의 바람이 이젠 조금씩이라도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평화로우시길 기도합니다...        - 허 신부 합장..

 

 

<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저녁을 잡수실 때 악마는 이미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의 마음 속에 예수를 팔아 넘길 생각을 불어 넣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겨 주신 것과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그는

"주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너는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안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하고 사양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하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주님, 그러시다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목욕을 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그만이다. 너희도 그처럼 깨끗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미 당신을 팔아 넘길 사람이 누군지 알고 계셨으므로 모두가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고 나서 겉옷을 입고 다시 식탁에 돌아와 앉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왜 지금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는지 알겠느냐? 너희는 나를 스승 또는 주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  요한 13, 1-15. 34-35.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때로 나는 분노한다. 그리고 지금이 그러하다. 조금씩 조금씩 가슴 한 구석에서 분노가 올라오고 있다.

 

어떻게 제자의 발을 스승이 씻겨줄 수 있는가?

어떻게 주님의 손이 더럽고 지저분한 우리들의 발을 만지고 그 때를 닦아낼 수 있는가? 아, 나는 이해되지 않는다.

저치들은 또 무엇인가? 주님의 손에 자기들의 더러운 발을 내밀고 있는 저 놈들은.

저들은 왜 주님의 손을 거부하지 않는가? 왜 주님을 말리지 않는가?

참기 힘들다. 나의 주님께서 사람의 발을 닦고 있다는 이 현실이 힘들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닦을 때마다, 내 가슴에서는 한 겹 한 겹 분노가 쌓인다. 아, 답답하다.

 

어느새 주님께서 내 앞에 서 계신다.

한 손에 들려져 있는 수건.

그의 이마에 맺혀있는 땀방울...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누르며 힘들게 주님께 묻는다.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신다. 예의 그 차분한 목소리로.

"너는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깊은 한숨이 나온다. 그렇지만 조용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씀드린다.

"안 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정 그렇다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 발을 씻으실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주님께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잠시, 주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조용히 나를 바라보신다...

 

다시금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목욕을 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그만이다. 너희도 그처럼 깨끗하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내 발을 대야에 담그신다.

주님의 머리를 내려다보는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문득 제 새끼의 상처를 핥아주는 어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창조주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무죄하신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을 먹으라고 내어주신다.

 

생각해 보면, 지난 7년 신학교 생활 속에서도, 크고 작은 분노를 체험하였다. 형제들이라고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니까. 또한 내 자신이 그들에게 늘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었으니까. 물론 나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그러하였고.

그래서 때로 누군가, 형제적 사랑에 대해 얘기할 때면, 오히려 어떤 소외감 같은 걸 느낀 적도 있었다.

'이젠 저런 말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 결국, 하나라는 허상의 한계와, 끼리끼리의 만족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 텐데...'

 

그래서 감실 안에 계신 주님께 나는 다시금 말씀드린다.

"주님, 저희들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데, 당신께서는 또, 사랑을 말씀하시는군요."

주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신다.

"그게 나야..."

 

길이신 주님 앞에 서면, 이미 지나온 길보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많이 남았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형제의 더러운 발을 받아들이지 못 할 때, 그 발을 씻어주시는 주님 또한 받아들일 수 없음도.

 

사제품을 앞두고 한가지 바람이 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나의 삶이, 우리의 삶이,

주님의 성심께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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