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이제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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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peace-maker] 쪽지 캡슐

2009-06-07 ㅣ No.9516

[삶의창]

 

 

이제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 박기호

 

 
 
 
한겨레  
 

 

 

 

 
» 박기호 신부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이미 처형을 각오했고 더구나 사흘 뒤면 다시 부활할 것도 알고 있었다면서 하느님의 그리스도라는 분이 이토록 몸부림칠 수 있는가? 예수와 뜻을 같이했던 갈릴레아 민초들만이 그 이유를 안다. 예수는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이었음을 … 예수의 십자가 절규는 민초들의 탄원이었다. 구경꾼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는 누구인가? 부엉이바위 위에 홀로 서서 내려다본 세상은 새벽이 아니라 어둠이 깊어가는 밤이다. 길은 보이지 않지만 낭떠러지라고 길이 아니란 법이 있는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던 그는 스스로 돕는 자들에게 주어질 빛나는 신의 상급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비주류 서민들에게 꿈과 희망의 그림을 보여준 사람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를 알아보고 대통령으로 세운 국민이다. 그의 죽음에서 자신들의 희망이 추락함을 겪은 이들의 행렬을 보았던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그만이 아니라 국민들 또한 그랬다. 피 흘려 일궈놓은 민주주의가 날마다 역행하고, 지향할 가치도 철학도 볼 수 없는 정부에 화가 나는데, 집권당은 여전히 탄탄한 지지를 받고, 이대로라면 4년 후를 기대할 징조도 없다. 말을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달려도 제자리뿐인 공포의 꿈속처럼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극한 패배감과 집단 우울증의 어둠에 갇혀버렸다. “운명이다.”

 

운명을 ‘치악의 전설’에 담은 노무현을 본다. 구렁이로부터 까치 새끼를 구해준 나그네는 산사 아래 외딴집에 여장을 풀었지. 한밤중 미망인은 구렁이로 변신했다. “살고 싶거든 당장 저 종을 세 번 울려라!” 그때 종소리가 울려왔다. 까치가 자신의 몸을 던져 종을 친 것이다. 암흑에 깜박거리는 촛불과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그는 스스로 ‘은혜 갚은 까치’가 되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며 살아온 그가 마지막 부엉이바위를 제단으로 삼은 것이다.

 

이 땅의 주눅 든 지성과 양심을 흔들어 깨운 종소리로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은혜 갚은 까치를 눈물로 보냈으되 그의 혼백은 아직도 구천을 헤매며 서울의 북악과 방방곡곡을 혼불로 날고 있는 듯하다. 떠난 자는 육신을 벗고 승천해야 한다. 남은 자는 그의 넋을 몸에 담아야 한다. 역사는 망각으로 과거가 되고 기억으로 현재가 된다. 깨어 일어서는 것이 산 자의 몫이다.

 

머지않아, 그의 뜻대로 세워질 작은 비석 앞에 이사야 예언서를 헌송하고 싶다.

 

“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하였으니 높이높이 솟아오르리라.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주는 자 어디 있었느냐?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그를 찌르고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야훼께서 그를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어놓았다. 그리하여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이제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이사야 53장)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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