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꽃샘 추위도 꺽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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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5-03-13 ㅣ No.3354

매나끈 좋던 날씨가 우리 본당 신자들이 성지순례를 한다니까 시샘을 했나 갑자기 추워지니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내딴에는 3월 12일부터 13일까지 1박2일로 예정돼 있던 우리 문화원의 광양 청매실농원 문화탐방을 여러사람에게 거짓 핑계를 되어 19일 출발로 연기까지 해놓고 별렀던 그날이었는데.

영하 6도라니? 거기다 한강 고수부지 산책길을 따라 새남터까지 장장 2시간은 족히 걸릴 먼 거리인데 강바람은 또 얼마나 셀까? 걱정이 안될 수 없었다.

"간다는 사람이 150명도 안된데요, 오죽하면 가는 사람들 명단을 내라고 하시겠어?" 아내가 내게 그랬다.

"누가 명단을 내래? 신부님께서 그러셨어?"

"몰라. 어쨌든 걱정이야. 뭘좀 할려그면 사람들이 좀 자발적으로 따라 주면 얼마나 좋아?"

"날씨가 추우니까 그렇지 뭐"

그런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도 마음이 찔렸다.

나 스스로 강바람을 맞고 3시간을 걸어 갈 자신이 없었다.

나는 지금도 천식약을 하루에 세번씩, 그리고도 흡입제를 하루에 다섯번 흡입해야만 하는 병자나 다름없는 몸이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깡다구로 한번 가보까?" 내가 그랬더니

"참으셔. 또 병원 실려가서 사람 놀래키지 말고" 아내가 걱정스레 말했다.

호흡기내과 문화식 박사가 "절대 감기들지 않도록 조심해요, 건강에 무리하면 안돼요"하던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150명?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나라도 가서 머리 수를 채워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가 결국엔 마음을 접고, 아침에 일어나 차를 꺼내서 한유약국 앞에서 모이기로 한 우리 반 자매님들을 승용차 가득히 태워 출발지점인 자동차극장까지 모셔 드렸다.

 

헌데 우리가 1등으로 도착하다보니 그 넓은 고수부지에 사람이라곤 겨우 20명도 안되게 나왔으니 내 마음이 무거워서 살 수가 있어야지.

밤 10시에 있을 본당 미사나 갈까하면서 방에 누워있는데 자꾸만 바늘방석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버스타고, 지하철 타고, 나 혼자서 새남터 성당으로 달려갔다.

 

어릴 때 용산역 앞 철도관사에 살면서 중,고, 대학까지 10년을, 그리고 마누라를 만난 곳도 그곳이었으니 새남터는 내게 있어서 추억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서부이촌동이라 불렀던 그곳은 양아치들이 주워오는 쓰레기며 넝마 더미가 산을 이루었고, 한강뚝방 밑은 샛강이라 해서 홍수가 나기 전까지는 갱변이었으니 땅콩 밭이며, 파밭이 널부러져 있었다.

뜨문뜨문 아카시아 나무나 포풀러 나무가 서 있었던 풀밭에는 젊은 남녀들의 데이트 를 했고 밤이 오면 우리 동네 아이들이 신주머니 하나 가득히 땅콩을 서리해오는 놀이터였다.

"저쪽으론 가지 마! 귀신 나온데. 예전에 사람들 목 잘린 데가 저기래잖아?'

그 시절 '막난이의 비사'라는 영화를 본 일이 있어 시퍼렇게 날이 선 칼로 목을 자르기 전에 춤을 추듯 몸을 흔드는 것을 보았으니 더 겁을 먹을 수 밖에.

그쪽 땅콩밭은 아무리 땅콩서리가 탐이 나도 겁이 나서 못 갔던 곳이 나중에 알고보니 바로 새남터 였다.

 

뿐만 아니라 더 각별한 인연은 처음 새남터 성지에 성당건물을 지을 때 사목회 총회장이셨던 박성렬 회장님이 바로 내 집안형제처럼 가까운 분이셔서(내가 벌이없이 놀 때 꾸르실료 교육 받으러 간다는 말을 전해 들으시고 내외분께서 일부러 우리본당에 오셔서 나 모르게 사무장님한테 꾸르실료 교육비를 맡겨놓고 가실 정도로 가까이 지낸다. 내 형편이 당시 교육비 9만원 쯤 못 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벌이 없는 사람에겐 부담이 될거라 여기셨던가 보다) 새남터성당 헌당미사며, 그 후에도 여러 번 그곳 기념관에서 미사를 드린 일이 있어 더욱 가고싶었는지도 모른다.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용산역에 내리니까 택시들이 줄지어 있었고, 거기에서 새남터까지는 제법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걸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 아시죠? 도보성지순례 그 좋은 기회에 제가 왜 참여 못했는지 주님은 아시죠? 저 잘못하는 것 아니죠?"하며 나는 걸었다.

손에 쥔 묵주로 30단을 하고도 몇단을 더했으니 내 걸음이 느린 탓도 있지만 1키로는 족히 될 게다.

 

새남터 기념관 밖앝에 서있는 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속 모르는 그이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그저 보는 사람마다 미안키만 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들이... 역시 많아 오지 않았구나! 왠지 맘이 아파 왔다.

아무리 추웠다 해도 겨우 3시간. 그걸 못 참나? 우리의 신앙선조님들은 하나뿐인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바치면서 주님을 증거하고 사랑했는데 겨우 이 추위를 못참아서 이렇게도 안 오다니? 신자들이 얄미워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러나!........!!!!

 

" 곧 미사 드릴테니 2층으로 올라오시래요"하는 안내봉사자의 명을 따라 성당안으로

들어가던 나는 그만 감격해서 나도 몰래 눈물이 뺨으로 주루룩 굴러내렸다.

그 넓은 성당 안에 가득히 사람들이 앉아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사람 들! 이 사람들이 모두 우리본당 신자들이란 말인가!.........!!

오! 나의 주님! 정말로 당신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나는 감격, 감격, 또 감격이었다.

"잠실 5동 신자님들은 지하성당에서 미사를 드릴테니 밖으로 나오세요"하는 안내방송에 내 감격이 잠깐 멈추기는 했지만 빠져 나가는 사람은 겨우 20명 내외. 그러고도

그 넓은 성당이 우리본당신자들로 꽉 메워져 있었으니 내 눈에는 모든 게 기적처럼 보였다.

 

그래. 그래. 까짓거 추위가 무슨 대수라고, 우리 신자들이 겨우 그 추위에 떠냐? 덤벼라 꽃샘추위야! 우리는 불탄다! 그저 감격일 수 밖에 없었다.

 

신부님께서도 신바람이 나셨는지 손수 성가연습을 시키시고(상상조차 안했던 일이다)......나는 자꾸만 눈물이 날려는 걸 애써 참았다.

 

"추운데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이 했세여. 3시간이 넘게 걸어왔지만 예전에 우리 신앙선조님들은 이렇게 걸으시는 것이 보통이었에여. 몇시간을 걸어서 미사를 드리러 다니신 것만 아니죠. 이곳 성지에서 순교하신 분들, 그분들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바쳤잖아여?"

미사를 여는 우리 신부님의 말씀이 가슴에 꼭꼭 찔려서 들려왔다.

그렇다. 우리는 이겼다.

꽃샘추위도 우리를 꺽지는 못했다!

주님, 이들을 축복하소서!

우리 본당신자들이 사귐과 섬김과 나눔으로써 하나 되어

우리주 그리스도를 찬양하게 하소서!

꽃샘추위를 이긴 의지로 선교의 불이 우리 본당에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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