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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필독] 사랑(loves)들의 차이점에 대하여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773_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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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7 ㅣ No.1652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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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원 출처: http://trinitas.mju.ac.kr/frames/fiatlux2000.jpg

 

1. 들어가면서

 

아래의 제2항은, 교회의 박사들 중의 한 명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St. Francis de Sales, 1567-1622년)의 저서 [제목: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논문(Treatise onthe love of God)]에서 발췌한 것인데, 다음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서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주어진 사랑(love)의 종류들 혹은 단계들을 이해하는 데에, 혹시 국내의 교우님들께 도움이 될까 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우리말 번역을 이번에 마련하였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74.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65.htm

 

2.

출처: http://www.catholictreasury.info/books/on_love_of_God/lg16.php

(발췌시작) 

TREATISE ON THE LOVE OF GOD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논문

 

By St Francis de Sales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년)(*1)
 
Book I. Containing A Preparation For The Whole Treatise.

제1권. 전체 논문을 위한 어떤 준비를 포함함

Ch 13. On The Difference Of Loves.

제13장. 사랑(loves)들의 차이점에 대하여
 
Love is divided into two species, whereof one is called love of benevolence (or goodwill) the other of cupidity (convoitise). The love of cupidity is that by which we love something for the profit we expect from it. Love of benevolence is that by which we love a thing for its own good. For what other thing is it to have the love of benevolence for any one than to wish him good.

 

사랑(love)은 두 개의 종(種, species)들로 구분되는데, 그들 중의 하나는 선의(善意, benevolence) (혹은, 선의(善意, goodwill)에 기인하는 사랑(love) 이라고 불리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욕(私慾)/사욕편정(私慾偏情)에 기인하는 사랑, 사욕(私慾) 사랑/사욕편정(私慾偏情) 사랑(love of cupidity)이라고 불립니다.(*2) 사욕(私慾)/사욕편정(私慾偏情)에 기인하는 사랑, 사욕(私慾) 사랑/사욕편정(私慾偏情) 사랑(love of cupidity)은, 그것에 의하여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예상하는 이득(profit)을 위하여 어떠한 사물(something)을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선의(善意)에 기인하는 사랑은, 그것에 의하여 어떤 사물(a thing)을 그 고유의 선(good)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어떤 이(any one)를 위하여, 그에게 선(good)을 바라는(wish) 것 대신에, 선의(善意)에 기인하는 사랑을 가지는 것은 무엇인 다른 사물을 위하여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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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성 프란치스코 드 살에 대한 성인전은 다음에 있다:

http://info.catholic.or.kr/saint/view.asp?ctxtSaintId=2857&Orggubun=101

 

(*2) 번역자 주:

(1) 여기서의 사랑(love)에 대한 구분은, 다음에 안내되어 있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의 사랑(love)에 대한 비 이원론적(non-dualistic) 논리적 구분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2자(二者)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로서 "love(사랑, amor)" 의 쌍방향성의 각각에 대한 언급임에 주목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37.htm <----- 필독 권고

 

(2) 그리고 이 2자(二者)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로서 "love(사랑, amor)" 의 쌍방향성의 각각에 대한 언급은, 비록 영어본에 사용된 번역 용어들이 다르기는 하나, 다음의 글의 제5항에 안내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구분 및 서술과 동일하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86_to_love.htm <----- 필독 권고

 

그리고, 영어로, "concupiscence" 대신에, "cupidity"로 번역된 이유는 다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IIae q30, a3에서 "cupidity"라는 용어의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를 설명하는 중에 주어져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75.htm <----- 필독 권고

 

(3)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IIae, q26 과 이에 대한 요약 혹은 입문인 "신학대전여행"에 주어진 글을 전달하는, 다음의 글을 또한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74.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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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he to whom we wish good have it already and possesses it, then we wish it him by the pleasure and contentment which we have to see him possessed of it, and hence springs the love of complacency, which is simply an act of the will by which it is joined and united to the pleasure, content and good of another. But in case he to whom we wish good have not yet obtained it we desire it him, and hence that love is termed love of desire.

 

만약에, 우리가 그자 쪽으로 바라는(wish) 선(good)을, 그가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고 그리하여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을 소유하게 된 그에게 우리가 보여주어야 하는 그리하여 그 결과 단순히 의지의 한 행위인, 그것에 의하여 이 행위가 다른 이의 즐거움, 만족 그리고 선에 참가히게 되고 그리하여 결합하게 되는, 자기 만족에 기인하는 사랑(the love of complacency)이 뛰어오르게 하는, 즐거움 및 만족으로 그에게 그것을 바랍니다(wish). 그러나 만일(in case), 그자 쪽으로 우리가 바라는 선(good)을, 그가 그것을 아직까지 획득하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그에게 그것을 욕망하며(desire), 그리하여 그 결과 바로 그러한 사랑은 욕망에 기인하는 사랑(love of desire)이라고 불립니다.

 

When the love of benevolence is exercised without correspondence on the part of the beloved, it is called the love of simple benevolence; but when it is practised with mutual correspondence, it is called the love of friendship. Now mutual correspondence consists in three things; friends must love one another, know that they love one another, and have communication, intimacy and familiarity with one another.

 

선의(善意)에 기인하는 사랑(love of benevolence)이 사랑받는 자 측에서의 대응 없이 행사된다면, 그것은 단순 선의(善意)에 기인하는 사랑(love of simple benevolence)이라고 불리나, 그러나 그것이 상호 대응과 함께 실천될 때에, 그것은 우의(友誼)에 기인하는 사랑(love of friendship)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상호 대응은 다음과 같은 세 사물들을 주된 부분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벗들은 서로 사랑하여야 하고, 그들이 서로 사랑함을 알아야 하며, 그리고 서로와 통공/교통(communication), 친밀(intimacy) 그리고 친숙(familiarity)을 가져야 합니다.

 

If we love a friend without preferring him before others, the friendship is simple; if we prefer him, then this friendship will be called dilection, as if we said love of election, because we choose this from amongst many things we love, and prefer it.

 

만약에 우리가 한 명의 벗을 다른 이들보다 먼저(before) 그를 선호함 없이 사랑한다면, 이 우의(友誼)는 단순(simple) 우의(友誼)이며,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그를 선호한다면(prefer), 바로 이러한 우의(友誼)는 애모(愛慕)(dilection)(*)라고 장차 불릴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사물들 사이에서 바로 그것을 우리가 선택하고, 그리고 그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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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dilection" 을 "애모(愛慕)"로 번역한 것은, 대단히 불행하게도 영어 사전들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는, 프랑스어 단어 "dilection" 에 대응하는, 그리고 그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사전적(beforehand) 선호(選好), 편애(偏愛)' 인, 라틴어 단어 "dilectio""애모(愛慕)"로 번역된, 다음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의 중국어본 용어색인을 따른 것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umma/ch/18_Index.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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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 when by this dilection we do not much prefer one friend before others it is called simple dilection, but when, on the contrary, we much more esteem and greatly prefer one friend before others of his kind, then this friendship is called dilection by excellence.

 

게다가 또(again), 바로 이러한 애모(愛慕)(dilection)에 의하여 우리가 한 명의 벗을 다른 이들 보다 먼저(before) 대단히 선호하지 않을 때에, 그것은 단순 애모(愛慕)(simple dilection)라고 불리나, 그러나, 이와는 달리, 우리가 한 명의 벗을 그자의 종류의 다른 이들보다 먼저(before) 훨씬 더 많이 존중하고(esteem) 그리고 크게 선호할(prefer) 때에, 바로 이 우의(友誼)빼어나게 애모(愛慕)(dilection by excellence)라고 불립니다.

 

If the esteem and preference of our friend, though great and without equal, do yet enter into comparison and, proportion with others, the friendship will be called eminent dilection, but if the eminence of it be, beyond proportion and comparison, above every other, then it is graced with the title of incomparable, sovereign and supereminent dilection, and in a word it will be charity, which is due to the one God only.

 

만약에 우리의 벗에 대한 존중과 선호가, 비록 크고 그리고 필적하는 자 없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yet) 다른 이들과 비교(comparison)와 조화/비례(proportion)로 들어간다면, 이 우의(友誼)탁월 애모(愛慕)(eminent dilection)라고 장차 불릴 것이나, 그러나 만약에 그것의 탁월함이, 조화/비례와 비교를 넘어서, 다른 자 모두 위에 있다면, 그것에게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sovereign) 그리고 초탁월 애모(愛慕)(supereminent dilection)의 칭호로써 영예가 주어지며(is graced with), 그리하여 한 단어로 그것은 장차, 오로지 한 분이신 하느님께 합당한, 애덕(charity) 일 것입니다.

 

And indeed in our language the words cher, cherement, encherir, (1) represent a certain particular esteem, prize or value, so that as amongst the people the word man is almost appropriated to the male - kind as to the more excellent sex, and the word adoration is almost exclusively kept for God as for its proper object, so the name of Charity has been kept for the love of God as for supreme and sovereign dilection. 

 

그리고 정말로 우리의 언어에 있어 cher, cherement, encherir 라는 단어들은(1) 어떤 구체적인 특별한 존중(esteem), 상(prize) 혹은 가치(value)를 나타내어, 그리하여 그 결과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man) 이라는 단어는 더 우수한 성에 대하여서처럼 남성(the male)에게 거의 전용(專用)되고 있으며, 그리고 흠숭(adoration)이라는 단어는, 그 고유한 대상에 관하여, 하느님을 위하여 거의 배타적으로 보존되고 있어, 그리하여 애덕(Charity)이라는 이름은, 지고의(supreme) 그리고 최상의(sovereign) 애모(愛慕)에 관하여, 하느님의 사랑(the love of God)을 위하여 보존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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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eaning dear, dearly, to endear. The Saint's argument cannot be given in English. It rests on the connection between cher and charite like the Latin carus and caritas. (Tr.) 

 

1. 소중한(dear), 소중하게(dearly), 사랑받게 하다(to endear)를 의미함. 이 성인(Saint)의 논의는 영어로 주어질 수 없습니다. 이 논의는 라틴어 carus 와 caritas 처럼 프랑스어 cher 와 charite 사이에 있는 관련에 의존합니다. ([영어] 번역자 주(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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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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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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