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성령 강림 대축일(청소년 주일, 가해) 요한 20,19-23; ’23/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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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5-14 ㅣ No.5401

성령 강림 대축일(청소년 주일, 가해) 요한 20,19-23; ’23/05/28

 

 

 

 

 

 

 

언젠가 한 번 어떤 신자가 산에 올라갔다가 바위에서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등 뒤에서 자기를 받쳐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 덕분에 떨어져 죽지 않고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그 신자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각자가 한 번씩은 다 기적같이 주님의 도우심을 받은 체험들이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이 순간 그것을 다 기억하지 못하거나, 우리가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신 것이라고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쳐 버렸거나, 하도 많거나 남도 다 그렇게 주님의 기본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사니까 그냥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살기 때문에 무미건조할 뿐입니다.

 

그 신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명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그때 그 신자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기라도 했다면 하느님은 안 계신 것일까?

만일 그때 그 신자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무슨 일이라도 났다면 하느님은 안 계신 것일까?

아니 최소한 하느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일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커다란 사고가 아니라 작은 사고가 났다고 다행이며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고 여긴다면, 세상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는 이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그들은 도와주지 않으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그 순간 그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다른 선택을 하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선택은 우리가 개입하거나 조종할 수 없는 하느님만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아쉽고 안타깝다고 해서 죽은 것은 악의 작용이요 나쁜 것이고, 그 반대로, 산 것은 기적이며 좋은 것이라고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 살아있는 이유가 살면서 이 땅에서 꿈꾸는 좋은 이상을 성취하고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우리가 이 땅에서 채워야만 할 어떤 의무와 보속이 있는 것인지, 세상 어느 누구의 잘못이나 제도의 허점으로 말미암아 상처 난 영혼들의 아픔을 감싸 안고, 기워 갚으며 위로해 주도록 하기 위해서인지? 이렇다 하게 우리 자신의 소명과 현재의 처지와 상황을 공동체의 사회의식과 역사와 문화의 시각이나 주님의 뜻 안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바에야 명확히 이해하거나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너와 나의 경험을 비교하기 이전에, 내 기도 중에도 어느 기도는 들어주시고 또 다른 어느 기도는 안 들어주십니까? 그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이 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만큼이나, 그대로 잘 된 적만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우리에게 이익이 되거나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된 것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이고, 우리에게 손해가 되었거나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우리의 하느님 체험이 우리가 느끼는 대로, 우리가 여기는 대로, 우리가 생각하기 나름대로, 우리가 재해석하는 대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합리화하듯 애써 위로받을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적 같은 체험도 없거나 옛날에 한 번에 그쳤고 지금은 없다고 느끼거나, 또는 어렵고 고통스럽거나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이 아니어서, 주님께서 눈에 드러나게 그리고 확실하게 느끼도록 해주시지 않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움직이심을 이해하고 느끼면서 주님과 함께하고 일치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식하고 살지는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과 동떨어져 살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 지금의 삶이 긴장감 없는 안정적인 삶이어서 주님께서 특별히 찐하게 느끼게 해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고 계신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기억과 재현 그리고 그러한 삶의 연속적인 체험 속에 새겨진 정입니다.

 

우리는 결혼할 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한평생 부부로서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부부생활이 뭐 그렇게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매일을 지나간다면, 외식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그 무료함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도 또 하나의 평이함으로 남고 또 부부가 생존을 위해서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남편이나 아내 어느 한쪽이 없어도 되고, 그냥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기쁘고 슬픈 일이 긴박하고 드라마처럼 반전되지 않으면서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부부는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그냥 사는 것처럼, 오늘을 살도록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감싸 안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슬프고 지쳤을 때 과거의 기쁘고 행복할 때를 기억하고 되새기면서 오늘을 이겨나가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주님과의 우정을 되새기면서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살려주시고, 지켜 주시고, 이끄셨는지 되새겨보고 기억해 내서, 내 인생 속에 주님께서 함께해 주신 기억들을 직접적으로 되살리고 되새김으로써, 오늘의 우리 신앙의 깊이를 더해 나가게 됩니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해주신 일들이 다 기억나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어린 시절을, 우리의 성장 기간을 어떻게 주님께서 끌어안고 오늘에 이르게 해 주셨는지 미루어 짐작하면서 주님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아이들 주변에 얼마나 큰 위험들이 존재하고 있는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긍정적이고도 가치를 지닌 모든 가능성과 동시에, 우리 아이들이 자칫하면 위험에 처할, 아니 어떤 경우에는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위험에 빠질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럴 때마다 섬뜩섬뜩합니다. 그 모든 위험성과 갖가지의 유혹과 어려움을, 우리도 모르는 새에 다행스럽게 지나쳐 오고 또 이겨내고, 오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드러내지 않고 보살펴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그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을 지켜 주시고 그들에게 은총을 내려주고 계신 주님을 발견하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 같으면, 아니 저 정도면, 떠나고 포기하고 마칠 수도 있을듯한 인생이지만,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주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시고, 함께해 주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내려주신 주님의 은총이, 마치 나에게 베풀어 주신 것처럼,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과 맺은 지난 일들을 기억하게 하고, 또 기억나게 하고, 기억나는 사건들을 되새겨, 주님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

 

그리고 그 기억을 오늘에 다시 상기시켜 주시고, 다시 현실에서 적용시켜 주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15)

 

아울러 그러한 과거의 경험과 오늘의 적용을 고리로 연결시켜 이어지게 하고, 그러한 이어짐이 우리 마음속에 더욱 깊고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더욱더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해주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16)

 

우리가 오늘 부족하고 나약하여, 오늘 우리에게 닥친 일들을 만족스럽게 다 마치지 못했어도, 오늘 잠자리에 들 수 있음은 성령께서 채워주시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24-25)

 

우리가 오늘 부족하고 나약하여, 오늘 우리에게 닥친 현실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좋고 만족스럽게 마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실책도 하고, 일을 처리해 가는 과정에서 상처받고 떠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을 웃으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음은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향한 성령의 이러한 마음을 들어주시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26-28)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생생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되새김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그 평화와 기쁨을 형제들에게 전하십시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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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대축일 꽃꽂이

https://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1&id=192412&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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