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6년 2월호 [훈화]

인쇄

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6-01-19 ㅣ No.45

 

1. 가난한 과부의 헌금


봉헌에 관한 글을 준비하면서 얼른 머리에 떠오른 장면은 역시 ꡐ가난한 과부의 헌금ꡑ 이야기(마르 12,41~44)입니다.

바친 것이라고는 렙톤 두 개, 겨우 빵 한 조각 살 수 있는 돈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바쳤다고 칭찬하십니다. 다른 사람은 넉넉한 가운데 얼마를 할애해서 바쳤지만, 그 과부는 있는 것을 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과부가 가진 것을 다 바쳤다고 해서 부자들이 결코 적게 바쳤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의 규정에 따라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쳤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놓아두고 예수님께서 과부를 칭찬하시는 것으로 보아 아직 기대에 못 미칩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욕심쟁이가 아닐까요? 사실 IMF 사태 이후 전 국민이 먹고 사는 일에 찌들어 살다보니, 예수님만이 아니라 헌금에 대해서 강론하는 사제들 역시 신자들의 형편을 너무도 몰라주는, 한마디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으로 몰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십분의 일을 바쳤다는 것은 거꾸로 얘기하면 십분의 구는 다른 쪽에 썼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ꡐ기준ꡑ이라고 생각하는 삼십분의 일을 봉헌할 경우, 삼십분의 이십구는 다른 쪽으로 쓴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있다고는 하지만, 하느님께 낯 뜨겁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해야 할 터인데, 이런 정도로 충분할까요?

ꡒ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ꡓ(마태 6,21)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고정시켜 놓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몽땅 사로잡고 있는 재물을 하느님께 돌려놓아야 합니다. 따라서 가진 것을 많이 바칠수록 좀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업을 위해서 협력한다는 차원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ꡐ주님의 기도ꡑ 내용은 보다 근본적인 태도를 요구합니다. ꡒ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ꡓ 내일이나 일 주일, 또는 한 달, 일 년, 평생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내일 먹을 양식은 내일 또 주실 것이니 오늘 필요한 부분만 청하면 됩니다. 그리고 문맥을 좀더 확대해서 보면 ꡒ오늘 먹을 양식으로 충분하니 내일 먹을 양식이 있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겠다ꡓ는 자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유랑하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내용(탈출 16,13~31)과 직결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고 남은 것을 그 다음날을 위하여 남겨두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 말을 듣지 않고 남겨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남겨둔 것에서 구더기가 끓고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데도 무엇을 자꾸 쌓아 놓는다는 일은 결국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믿는 일이므로 하느님을 불신하는 일이 됩니다. 그것들은 썩어 냄새를 피우며 우리의 영혼과 삶을 오염시킵니다.

과부는 가진 것을 모두 바칠 수 있었지만, 부자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과부는 쌓아 놓지 않고 그날 그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만 살다보니 호주머니가 가벼워 가진 것을 모두 바치는 일이 쉬웠지만, 부자들은 쌓아 놓은 것이 많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TV 홈쇼핑에서도 보험 판매를 흔히 합니다. 그러나 어떤 보험도 하늘에 든 보험만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_김광태․야고보  신부


2. 병자의 나음이신 루르드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오는 2월 11일(토)은 루르드의 성모 기념일이면서 교황님께서 정하신 제14차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레지오 창설 후 첫 활동이 병원방문(교본 352~357쪽)이었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물론 세계교회 모든 신자들이 프랑스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의 성모님을 생각하며 - ꡐ병자의 나음ꡑ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을 청하며 - 이 은혜롭고 특별한 날을 지내게 됩니다.

새삼 대구교구의 초대 교구장 플로리아노 드망즈 안세화(Demange) 주교님과 교구청 경내 성모당이 생각납니다. 안 주교님은 성모님에 대한 특별하고 탁월한 신심으로 ꡐ신뢰하고 일하라!ꡑ(Confide et Labora)라는 사목시정(司牧施政)을 정하시고 태산이라도 움직일 듯한 굳건한 믿음으로 성모당을 봉헌하며 대구 가톨릭교회의 초석(礎石)을 놓으신 분입니다.

대구대교구청 경내에는 루르드 성모 동굴 모상의 이른바 ꡐ성모당ꡑ이 우뚝 서 있습니다.

당시 경향신문사 사장이던 안세화 주교님께서는 1911년 4월 8일 대구교구가 설정되면서 첫 주교로 ꡐ허허벌판에 가난만을 갖고ꡑ 맨주먹으로 달려오신 것입니다. ꡐ새 교구ꡑ의 첫 감목(監牧)으로 부임하신 안 주교님께서는 먼저 성모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셨습니다. 동년 7월 2일 루르드의 성모님을 교구의 재정관리를 맡아주실 분으로 정하시고 앞으로 10년 안에 교구가 필요로 하는 사업을 완성시켜 주시면 주교관 대지 중 가장 아름다운 곳에 루르드 성모굴 모상인 성모당을 건립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암울하고 경제적으로 몹시 궁핍한 가운데서도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추진되면서 계산동 주교좌성당 공사를 할 때 당신 수하의 소세(Saucet, 한국명 소세덕) 신부님이 몹쓸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다시 ꡐ병자의 나음ꡑ이신 성모님 대전에 소세 신부님의 병을 낫게 해주신다면 모든 것을 물리고 성모당부터 먼저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드리며 청원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세 신부님의 병도 낫고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7년 3개월 11일 만에 성모당을 완공, 축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당 전면에 허원년도(1911)와 허원성취년도(1918)가 표시되어 있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 허원의 뜻으로(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바쳤다는 큰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1910년 8월 28일 우리는 한일합방을 당하였고 1914~1918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처절한 참화가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파티마 성모 발현이 있었는데, 1917년 10월 13일 파티마 성모의 마지막 발현과 ꡐ태양의 기적ꡑ이 있던 날로부터 꼭 1년 후 대구 성모당의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이는 당시의 제반 여건으로 미루어 볼 때 신비롭고 기적적인 일이었으며 안 주교님의 크고 무거운 믿음과 노역이 아니고서는 성취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1918년 성모굴이 완성되고 축성식을 가진 그날부터 대구 성모당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순례객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교구 내의 크고 작은 모임과 행사가 자주 베풀어졌으며, 그 가운데 미사와 성체공경 신심과 현양 행사가 많았던 것입니다.

지난 1981년 5월 4일에는 마더 데레사께서 다녀가셨고 1984년 5월 15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찾으셨습니다.

성모당의 성모님은 한국교회의 수호자이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시고 또한 대구교회의 수호자이신 루르드의 성모님이십니다.

안 주교님의 열망과 가르침에 따라 이곳 성모당을 거쳐간 수많은 신앙 선각(信仰先覺)들의 굳건한 믿음의 토대 위에 ꡐ병자의 나음ꡑ이신 루르드의 성모님께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또한 남북분단으로 여전히 소란하고 병들어 있는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해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병자의 나음이신 루르드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_최홍길․레오 신부


3. 사랑으로 일합시다

ꡒ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한다ꡓ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 속에 사는 사람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그 사랑은 가까이에서 멀리로 점점 역동적으로 확산되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과격해지고 왜곡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집착하려 할 뿐, 사랑 때문에 아프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탈을 쓴 이기심이요 욕심입니다. 곧 남을 돕는다고 하면서 그 행위 안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헛된 자기과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품은 채 남을 돕게 될 때에는 결과에만 매달릴 뿐, 그 결과를 향한 과정을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점점 사랑이 없어지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일삼고, 집단 이기주의로 인간의 끝없는 욕심 채우기만 하려고 합니다.이런 모습이 종교집단 안에서도 가끔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규율을 만들고 최소한의 것이라도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떠한 틀도 그 안에 정신이 살아 숨쉬지 못하면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율법만을 고지식하게 지키려 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껍데기만 남아있는 신앙 모습을 마음 아파하시고 그들을 질책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껍데기에 내용을 담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분의 삶 전체는 어떻게 해서든지 껍데기뿐인 인간의 영혼을 당신 사랑으로 채우려고 하셨던 ꡐ사랑의 희생ꡑ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느낄 수 없다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껍데기에 치중하고 있는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느낄 수 없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누구에게서 용서를 받는 것입니까? 우리가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단순히 형식에 머물고 만다면 우리의 기도는 허공을 떠도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사랑 안에 머물 때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깨닫게 되며 그 안을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려는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디에 주님의 사랑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헛된 욕망에 우리의 영혼이 물들어 있다면 무엇으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떠한 활동을 하든지, 그리고 무슨 기도를 하든지 주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사소한 행동일지라도 주님의 사랑을 담고 그 의미를 깨닫고 행할 때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채우는 사건이 되며 그 안에서 사랑의 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헛된 욕심과 욕망을 내던져 버리고 그것을 새로이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벅찬 감동에 빠지고 맙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사랑은 희생과 아픔을 동반한 사랑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희생을 감수할 수 없다면 그것은 거짓된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달콤함만을 생각하고 아픔과 고통을 멀리하고자 한다면 교회 안에서 주님의 사랑은 왜곡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에서 출발하고 십자가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의 아픔은 우리를 성숙시켜 주고,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냉철하게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며 주님께서 품안에 우리를 감싸주심을 알게 합니다.

사랑하기가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쳐 주고, 겸손한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이는 슬픈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 주고, 병들어 신음하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우리가 애타게 찾으려 하고 갈망하는 주님의 사랑이 바로 우리를 껍데기에 머물지 않게 하는 참다운 내용이요, 살아있는 정신입니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일할 것이며 참되게 완전한 사랑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찾을 것입니다. 아멘.

_윤병길․세례자 요한 신부



1,134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