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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수호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중) 풍파에 흔들리지 않는 작은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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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3-03 ㅣ No.63

진리의 수호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중) 풍파에 흔들리지 않는 '작은 배'

세상 풍파 온몸으로 이겨낸 우리의 목자





- 한 남성이 2월 24일 성 베드로광장에서 "존경하는 교황님, 우리는 당신이 보고싶을 겁니다"라고 쓴 이탈리아어 손팻말을 들고 교황이 마지막으로 주재하는 삼종기도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CNS]


"우리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교의(敎義)의 풍파를 경험했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이데올로기가 난무하고 얼마나 많은 사상이 유행했습니까? 그리스도교 사상이라는 작은 배는 몇 번이고 풍랑에 요동치면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표류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자유주의, 심지어 무종교주의로 내던져졌으며, 집단주의에서 급진적 개인주의로, 무신론에서 모호한 종교적 신비주의로 떠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참사랑이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척도가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유행이나 첨단 사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2005년 4월 18일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 추기경단 수석이자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인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교황 선출기원 장엄미사 강론에서 이같이 말하고 "교회는 이설과 사상의 격랑에 흔들리지 말고 그리스도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는 미사 후 교황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 115명과 콘클라베(교황 선출 비밀회의) 장소인 시스티나 성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튿날 제265대 교황이 되어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톨릭 정통성 흔드는 격랑에 맞서

이날 강론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생애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결정적 단서다. 그가 1981년 신앙교리성에 들어가서부터 줄곧 몰두한 일은 '작은 배'(그리스도교 사상)가 격랑에 흔들리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8년 남짓 베드로의 후계자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이러한 신념에 흔들림이 없었다.
 
신학적 오류와 싸우고, 교설(巧說)을 배격하는 동안 적지 않은 비난도 받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교회는 그분(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지 신학자들의 실험장이 아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올바로 계승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그가 언급한 '교의의 풍파' 가운데 가장 거센 풍파는 라틴아메리카에서 태동한 해방신학이었을 것이다. 해방신학은 남미 군사독재정권의 억압과 민중의 고난 속에서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세우려는 변혁적 신학사상이다. 1970, 80년대에 남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공의회 정신을 강조하면서 사회변혁의 열정을 분출했다.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와 브라질의 레오나르도 보프가 전면에 서고, 적지 않은 진보 성향의 주교들이 지지했다.

하지만 교황청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분석도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고, 복음이 계급투쟁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며 훈령을 통해 거듭 경고했다. 특히 라칭거 추기경은 일부 사제들이 반정부군에 합류하거나 교도권에 정면 도전하는 것을 보고 이를 마르크스 혁명의 시초라고 판단했다. 보프 신부와 라칭거 추기경은 해방신학 진영과 반(反)해방신학 진영의 상징적 인물이 되어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경고와 반론제기, 심문과 대화, 제재와 반발이 20년 넘게 이어졌다.

해방신학은 1980년대 말 동구 공산권 붕괴 이후 대중성을 상실했지만, 그 신학적 영감과 유산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그는 숱한 비난을 무릅쓰고 해방신학 열풍을 잠재운 데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저희는 해방신학 문제를 다루면서 주교님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국적으로 종교를 정치화하는 위험이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종교를 정치적 당파성의 세계로 내몰아가고, 고유한 종교성을 파괴할 수도 있는 위험이었습니다."(대담집 「이 땅의 소금」 118쪽)

그는 또 "(신앙교리성에 들어올 때) 로마 직무 가운데 유쾌하지 않은 임무들은 상당 부분 내가 떠맡아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했다"고 털어놓았다.

여성 사제서품, 사제 독신제, 동성애, 낙태 등과 관련해 쏟아지는 급진적 주장에 맞서는 것도 그에게는 유쾌하지 않은 임무들이었다. 그리스도교 정통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는 신학적 오류에 대항하는 동안 그는 서구사회에서 도스토옙스키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중세시대 이단 심문관 이미지가 굳어져 갔다. 그럼에도 그런 주장과 행동이 여과 없이 교회로 유입되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관련자들과 대화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제재와 경고, 파문으로 대응했으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여성 사제서품 문제만 하더라도 교황청은 「논 포수무스(Non Possumus) 등 교령과 사목서한을 통해 여러 차례 '불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서구교회 일각에서 "우리는 교회법을 어겼지만 수품은 유효하다"며 서품을 강행하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해 "여성 사제서품은 우리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주님이 교회의 틀을 열두 사도로 하셨고, 그 후계자로는 주교와 원로, 즉 사제가 있다. 교회의 이 틀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주님이 세우신 것이다. 그에 따르는 것이 순명이며 오늘날 상황에서는 매우 힘든 순명의 행위이다"(대담집 「세상의 빛」 230쪽)라고 말했다.


"공의회 정신을 철저히 해석하라"

교황직 수행에 따르는 피로감은 일반 사람이 쉽게 헤아리기 어렵다. 교회 전통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 진보인 양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교황직 수행은 과거에 비해 몇 배가 더 힘들지도 모른다.

교황은 2009년 아프리카 사목방문 중에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만이 에이즈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분명한 길"이라는 요지의 연설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언론은 거두절미하고 '콘돔사용 금지'만을 부각시켜 바티칸의 에이즈 정책이 비현실적이라고 혹평했다. 교황은 나중에 "그때 정말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아프리카에서 가톨릭교회야말로 사람들 가장 가까이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에이즈 예방과 교육활동을 하고, 도와주면서 그들과 함께하는 기관이다. 나는 '그저 콘돔만 나눠주는 것은 성을 통속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근본적 해결은 오직 성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여론의 독재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신앙과 세속주의가 충돌할 경우 '천재적 신학자' 특유의 논리를 전개하며 밀고 나간다. '철갑 추기경'이란 별명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또한 정제되지 않은 진보적 목소리에 대해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철저히 해석하고 나면 보수ㆍ진보 양방향의 극단주의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 정신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신앙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평화신문, 2013년 3월 3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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