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울성당 게시판

* 스무살,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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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zanac] 쪽지 캡슐

2000-01-07 ㅣ No.696

 

            스무살, 그 이후...

 

 

 그는 약간 긴장이 되었다. 이제 곧 그녀가 올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결 좋은 붉은 단발머리는 아직 그대로일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그녀의 목소리는 5년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는

하마터면 그녀의 목소리를 몰라볼 뻔 했다. 뭐랄까.. 그녀는 많이 성숙한

듯했다. 하긴, 5년이나 지났으니.. 그녀를, 소녀에서 여자로 바뀌어 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특히 여자들은 빨리 변한다니까..

 

  11시면 커피숍에서 만나긴 이른시간이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일찍

만나자고 했을까. 그는 쇼파에 몸을 기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촌이라

그런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머리를

맞대고 잡지를 보며 킬킬대고 있었다. 이제 스무살이나 되었을까..

 

  내게도 저런 나이가 있었지.. 하고 문득 그는 생각한다.

 

  지금의 그의 나이가 그들과 얼마 차이가 나는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왠지

모를 아쉬움과 묘한 질투심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스무살.. 스무살이란건 좋은거다. 스물 한살도, 열 아홉살도 스무살 만큼은 좋을 수 없었다. 야릇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기억을 아련하게 하는, 그말.

스무살. 어른이 되기엔 너무 어린 나이. 아니 너무 여린 나이.

 

 갑자기 스무살의 그녀가 떠오른다.

 

  그녀를 처음 만난것도 스무살이었지..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서있던

스무살의 그녀. 막 씻어올린 파란 사과 같았던, 스무살의 그녀. 그녀는 정말

예뻤고, 그의 기억 속에서 한번도 예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쉰다.

 

  그는 탁자위에 놓인 유리잔을 집어든다. 다시 캔에 든 콜라를 따르고

빨대로 저었다. 아직 그녀는 오지 않았다.

 

  미국에서 마시던 콜라맛과는 틀렸다. 같은 코카콜라라도 각국의 콜라맛이

다르다더니, 정말 그런가보다.. 하고 그는 생각한다.

 

  미국에 있을 때, 처음에 그는 그녀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애써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후회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떠나오는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떠나오는게 아니었는데..

 

 그의 미국유학은 어차피 내정된거였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서 도망치고

싶었고, 그런 그의 마음이 출국을 앞당기게 했다. 결코 뒤돌아보지

않으리라..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지만, 그는 결국 후회를 하고야 말았다.

그녀에게 못할짓을 했다는 것, 아니 실은 그것보다는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은게 그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그게 사랑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남아있다는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고,

그럴리는 없다고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끔찍히도 그녀를 싫어하던 그가

아닌가.

 

 처음엔.. 처음엔 그도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다. 아니, 처음에 반응없던

그녀를 끈질기게 쫓아다닌 것도 사실 그였다. 재미있고, 적당히 뺀질거리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던 그에게, 냉담했던 그녀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그들은 그 학번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처음엔 그들도 정말 행복했다.

 

 그녀는 사랑스러웠고,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그도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듯했다. 그러나 점점 그는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의

도도했던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는 더이상 그녀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그에게 언제나 상냥했고, 언제나 고분고분했고, 언제나

착했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점점 싫어졌고, 주위에서 그녀를 칭찬할

때마다 짜증이 났다. 왜 그런지는 그도 몰랐다. 분명히 그녀는 착했고, 그를

사랑해줬고, 모두가 인정하는 미인이었지만, 그에게 그녀의 매력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여자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몇명의 여자들과 잠시 만나고 다니기는 했지만, 누구 한사람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건 ’바람을 핀다.’의 수준도 못되었다.

 

 그의 흔들리는 모습을 볼때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그녀의 편을 들었다.

 

 ’니가 배가 불렀구나’,’세상에 해원이 만한 여자가 어딨냐?’등등 ...

 

 그도 알고는 있었다. 그가 이유없이 냉대하기엔 그녀가 너무 아깝다는걸.

순간의 권태이길, 그도 바랬다. 하지만 한번 떠난 마음은 다시 돌이킬수

없었고, 그럴때마다 매달리는 듯한 그녀의 안타까운 눈빛이 그를 더욱

부담스럽게 했다. 그는 점점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의 유학얘기가 나온 건 그때 쯤이었다. 그의 집에선 그저 졸업이나 하고

보내자는 쪽으로 얘기가 굳어지고 있었고, 그도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와 그가 사귄지 3년이 되어가고 있던 어느날 이었다.

 

 그녀가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학교 도서관에 있던 그를 불러냈다. 그는

약간의 짜증을 느끼며 그녀를 따라 나섰다. 그녀는 인적이 없는 등나무벤치로

앉았다. 그리곤 땅만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다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나 레포트 쓸거 남았는데.."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였다.

 

 "앉아봐."

 

 한참후에 그녀가 꺼낸 말이었다. 그녀의 행동이 어딘가 불안해보여 하는

수없이 그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혹시 얘가 끝내자는 얘기를 하려는 건가.

내 마음을 알고... 라고 그는 생각했다. 뭐, 그녀가 먼저 그렇게 나온다면

그는 시원하게 끝내줄 작정이었다. 어차피 애들한테 욕먹을까봐 얘기 못하고

있던건 그 였으니까..

 

 그녀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결심한듯 고개를 들었다.

 

 "재혁아."

 

 그는 힐끗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잠깐 눈물이 반짝인것도 같았다.

 

 햇빛이 너무 밝아서일거야... ’우리 그만 끝내.’ 그다음엔, ’내가 너무

힘들어서 안되겠어..’ 일테지. 그러나 그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나 임신했어."

 

 그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무..무슨 얘길까, 이건.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뭐가 어떻다고?

 

 " 너.. 한테 부담주기 싫었는데, 너도 알아야 되잖아.."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꼭쥔 두손이 조금 떨리는걸 느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했다. 해원이가 임신을 하다니..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 얘가 날 놓아주지 않을 작정이구나.. 라고 생각하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화를 내선 안되겠지,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해결한담.. 그는

막막했다. 하필 이럴 때.. 제기랄.

 

 그가 한참동안 아무말이 없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어떻게 하지?"

 

 그는 다시 짜증이 났다. 바보같이 ’어떻게 하지..’라니..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서든 마련해 볼께."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얘기했다. 그런 그를 보다가 다시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난, 낳고 싶어."

 

 그는 너무나 기가 막혔다. 얘가 머리가 어떻게 된게 아닌가.. 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겨우 눌렀다.

 

 "너 미쳤어? 앤 낳아서 뭐하게? 너 나이가 몇인데, 그리고 내 입장은 어떻게

라구!"

 

 그녀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결혼할 거 아니었어? 학교는.. 휴학해도 상관없어,난. 어차피 결혼

할거면 좀 빨리 해도 되잖아."

 

 "누가? 누가 결혼을 해? 내가 너랑? 너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 사귀면 다 결혼하냐? 그리고 어쩌다가 임신도

 있는거지, 그게 뭐 그리 중요해? 너 이제보니 날 잡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너, 뭔가 착각하고 있나본데, 난 너랑 결혼할 생각, 해본적도 없어. 그리구

난 어차피 이번 학기중에 유학갈거야. 어차피 너랑 끝낼 생각이었다구!"

 

 그는 그때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의 마음 한 쪽에선 끊임없이 그만 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의 의지완 상관없이 그의 입에선 끝끝내 잔인한 말이

튀어 나오고야 말았다.

 

 "그리구, 그게 내 앤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흠칫했다. 내가 그런 말도 안되는 말을 해버리다니.

녀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런거였어..? 그녀는 들릴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손등위로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더이상 거기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도망치듯 그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의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다. 내가..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녀가 아직도 그자리에 앉아 울고 있을것 같아, 그는 뒤를 돌아볼수가

없었다.

 

 그래.. 그랬었지. 그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그렇게

겁하게 그녀를 떠났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착한 그녀였는데.

이제와서 무슨 염치로 그녀를 만날 생각을 한걸까. 그는 갑자기 목이 말랐다.

그는 얼음물 한잔을 더 부탁했다. 약속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그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에게 심한말을 해놓고, 그는 며칠간을 잠도 못이루고 고민을

했다. 수많은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내가 너무 심했지.. 아냐, 어차피

끝내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확실히 해 놔야 딴말이 없지.. 해원이도 날 빨리

잊을거구.. 임신은 왜 해가지구.. 혹시 날 잡아놓으려고 거짓말을 한걸지도..

, 해원이는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애가 아닌데..

 

 그는 괴로웠다. 하지만 그가 그 자신을 위해 괴로워 하고 있을 무렵, 그녀는

상을 버릴 생각을 할 만큼 괴로웠다는 걸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그는 부모님을 부추겨 서둘러 유학수속을 밟았다. 그녀가 임신을 했단

이유로 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될것 같지는 않았다. 수술만 하면 그녀도

새생활을 할수 있다고 그는 애써 생각했다. 그저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떠나기 전날, 그는 그녀에게 수술비가 든 편지 봉투를 전해주었다. 그가

함께 가서 수술을 받자고 했지만, 그녀는 혼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담담했다. 조금 웃기도 했다. 그래.. 그렇게 날 잊어라..

 

 그는 먼저 일어섰고. 그녀는 잠시 혼자 있다 가겠다고 커피숍에 남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했고,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었다. 그는 그녀를 남겨두고 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는 떠났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난 곳이 바로 이 커피숍이었다. 아니, 사실 그녀와

사귈때도 거의 이곳에서 만났다. 그때는 그들을 알아보던 상냥한 주인 누나가

었는데, 주인이 바뀐 모양이었다. 인테리어도 좀 달라졌고..

 

 이 자리에서 많은 일이 있었지.. 그녀에게 얼마나 많이 사랑한다고 얘길

했었지? 바로 이자리에서...

 

 얼마전 그는 서울에 왔다. 단 한번만이라도 그녀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녀가

를 원망하고 있다고 해도, 아마 그녀도 다 잊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예쁘고 착하니까, 지금쯤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결혼을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뻔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고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에게 용기를 얻게 했다.

 

 그는 결혼을 하러 귀국했다. 미국에서 알게 된 여자였다. 별다른 감정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아름다웠고, 당차고, 또 부유했다. 몇번이나

그는 돌아가 예전의 그녀, 해원이를 다시 만나보고 싶었지만, 못할짓을

했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어차피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마지막으로 한번만..

 

 그는 그녀의 연락처를 어렵게 알아냈고,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했을때,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단순히 유학간 과친구인줄 알고, 그녀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지금 대기업 디자인실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따로 살고 있는 집 전화번호까지도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와 어렵게 통화가 되었을 때, 그녀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의 만나자는 요구를 흔쾌히 응했다. 마치 오랫만에 만나는 과 친구를

대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왠지

섭섭한 기분이 드는걸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이젠 그녀도 아무렇지도 않겠지..

 

 그때 커피숍의 문이 열렸다. 그녀였다! 확실히 많이 변했긴 했어도,

분명,분명히 그녀였다.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그녀였다.

 

 그는 차마 그녀를 부를 수가 없었다.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걸 느꼈다. 깔끔한 까만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여전히 예뻤다. 아니

이제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 했다. 머리도.. 머리도 많이 길었다.

늘 짧은 단발만을 고집하던 그녀의 머리는 어느새 허리 가까이까지 길어져

있었다. 그녀가 그를 발견했다. 그는 짐짓 모른 척 고개를 숙였고, 그런 그

앞에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면서,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 왔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사람 오는줄도 모르고.."

 

 꼭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같은 말투였다. 그의 가슴이 뛰고 있었다.

 

 "많이 변했구나.. 예뻐졌어."

 

 "치~ 내가 언젠 안 예뻤나? 넌 하나도 안 변한거 같네?"

 

 그때였다. 무언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 여기 앉아."

 

 그는 놀랐다. 그녀가 작은 여자 아이를 옆에 앉히고 있었다. 그는 그

여자아이를 그때서야 처음 보았다.

 

 누구지.. 저앤..? 설마..

 

 그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씩~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우리 조카야. 너두 알지, 우리 언니. 왜, 결혼식에두 같이

었잖아."

 

 "아.. 명원이 누나.."

 

 "그래, 그 집 애가 벌써 이렇게 컸다."

 그렇구나. 명원이 누나 딸이 벌써...

 

 "언니랑 형부랑 괌에 놀러갔거든, 엄마두 오늘 바쁘시구.. 할 수없이 데리고

나왔어, 괜찮지?"

 

 "응, 그럼.. 근데 얘 되게 예쁘게 생겼다. 너 이름이 뭐니?"

 

 여자아이는 조그마한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가으이.." 했다.

 

 그녀가 웃으면서 대신 대답했다.

 

 "가을이야. 가을이. 얘가 요즘 이가 많이 빠졌거든."

 

 가을인 정말 예뻤다. 그의 기억속에서 명원이 누나도 예쁘긴 했지만, 가을인

히 더 예쁜것 같았다.

 

 "가을아, 안녕?"

 

 그가 손을 흔들자 가을이는 그녀를 힐끗 올려다 보았다.

 

 "가을아, 이 아저씬 이모 친구야.. 아저씨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해야지."

 

 그녀가 가을이에게 얘기하자 가을이는 꾸벅~하며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어쩌구 저쩌구 인사를 했다. 잘 알아들을순 없었지만, 대충 그녀가 시킨대로

한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자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왠지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잘 지냈니? 결혼한다면서?"

 

 그녀가 말을 꺼냈다.

 

 "으..응. 넌 아직.. 결혼 안했다며?"

 

 그녀가 말없이 웃었다.

 

 다시 만난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스무살의 앳됨과 상큼함은

지만, 지금의 그녀는 나름대로의 침착함과 우아함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런 그녀의 모습이 그에게는 또 다른 애틋함으로 느껴졌다. 그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많이 야윈듯 했다. 하지만 그는, 내겐 마음아파할 자격도

없다.. 고 생각했다. 나는 왜 해원이를 만나고 싶어했을까.. 왜 그렇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나려고 했었을까.. 새삼스럽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모르겠다, 정말.. 그는 생각했다.

 

 무슨 이유에서건 그는 그녀가 너무도 보고 싶었고, 꼭 한번은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그녀를 앞에두고 있지만,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그녀가 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았고, 울고 싶을 만큼 행복했다.

 

 왜 그녀를 버렸을까..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아픈데...

 

 그가 아무말이 없어도 그녀는 왜 만나자고 했는지 묻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무슨일로 만나자고 했냐고 물을 까봐 별의별 핑계를 다 준비했었던

그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녀가 그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을이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그는 가을이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그래, 가을아.. 우리 가을이 심심하구나? 아저씨랑 이모랑 어디

놀러갈까?"

 

 가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시간이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래도

그녀는 내심 바라고 있었던 듯 싶었다. 어디로 갈까.. 하고 있는데 가을이가

’에버랜드!’ 하고 조르듯 말했고, 그는 웃으며 차를 돌렸다. 평일치고는

사람이 많았고, 거의 가족들이었다.

 

 그와 그녀와 가을이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가족이라고 생각할까..

 

 그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가을이는 그를 매우 잘 따랐고,

그도 그런 가을이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5년전.. 그녀와 결혼했었더라면 지금쯤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워져 있겠지.

 

 그랬더라면 그와 그녀의 아이도 지금쯤 가을이만하게 컸겠지..

 

 그는 새삼스럽게 미안했다. 그녀에게, 그리고 죄없이 죽어간 그들의

아이에게도..

 

 가을이와 사진을 찍었다. 그녀와 함께 찍고 싶었지만 그녀가 한사코

거부했다. 즐거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말했다.

 

 "오늘 가을이 이상하네? 얘가 원래 사람을 잘 안 따르는데.."

 

 "그래? 가을이가 내가 좋은가보지, 뭐."

 

 그녀의 얼굴에 순간 순간 쓸쓸한 웃음이 스쳤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그의

 

 마음도 씁쓸했다.

 

 날이 어두워 오고 있었다. 이제 곧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가 가을이의 옷을 추스렸다.

 

 "가을아, 이젠 그만 가야지.. 감기 걸리겠다."

 

 가을이는 고개를 흔들며 그에게 안겼다.

 

 "싫어, 이모 혼자 가."

 

 그녀는 가을이를 억지로 차에 태웠고, 그도 아쉬웠지만 말없이 그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어야 했다.

 

 집까지 가는 동안 그들은 다 아무말이 없었다. 뒷자석에서 잠든 가을이가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있는것이 백미러를 통해 비춰졌다. 그녀는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여러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이대로 그냥 그녀를 데리고

무작정 달려가고 싶었다. 어느 곳이든..

 

 그녀의 집앞까지 왔다. 그도, 그녀도 아무말이 없었다.

 

 그도 내리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녀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아팠다. 도무지 그녀를 그대로 보낼 자신이 없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는게 더 나을 뻔 했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잡을 자신은 더욱

없었다. 내게 무슨 자격이 있다고.. 이제 그녀도 편안해 보이는데..

 

 "해원아."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응."

 

 그동안 미안했다, 나 원망 많이했지..? 나.. 그래도 한번도 널 잊어

본적이없어. 널 떠나고 나서야 알았어. 네가 얼마나 내게 큰 존재였는지..

네게

사랑한다는 말을 내가 했던가? 내가 얼마나 자주 했든.. 아무리 해도 그걸론

모자라.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가 표현하기엔.. 수 없이 많은 말들이

그의 입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와서..

이제와서... 어떻게.

 

 " 결혼..한다고 했지? 언제니?"

 

  그녀의 물음이었다. 그는 순간 흠칫했다. 그렇지.. 난 곧 결혼하기로 했지,

 아닌 다른 여자와.

 

 "다음주 토요일.."

 

 "일주일 정도 밖에 안 남았구나."

 

 "응.."

 

 "행복하렴. 진심이야."

 

 그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결국 그녀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을이를 깨워 차에서 내렸고, 가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도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는게

보였다. 엘리베이터문이 닫히면서, 잠깐, 아주 잠깐 그녀의 눈에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이는것도 같았다.

 

 모든게 조용했다.

 

 그녀를 만난게 꿈만 같았다. 그녀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그의 머릿속에 남아

그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운전대 앞으로 엎드리자 그의 손위에도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엘리베이터안에서 가을이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정말 이상해

보였다. 평소에 가을이가 보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고 겨우 서있었다. 층수 버튼도 누르지 않고.

 

 가을이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녀가 흠칫 놀라며 가을이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걸 가을이는 미처 보진 못했다.

 

 가을이가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엄마, 인젠 엄말 이모라고 안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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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야 !

 

 네가 너무 바빠 하늘을 볼 수 없을 때 나는 잠시 네 가슴에

 내려 앉아 하늘 냄새를 파닥이는 작은 새가 되고 싶다.

 사는 일의 무게로 네가 기쁨을 잃었을 때 나는 잠시 너의

 창가에 앉아 노랫소리로 훼방을 놓는 고운 새가 되고 싶다.

 모든 이를 다 불러모을 넓은 집은 내게 없어도 문득

 너를 향한 그리움으로 다시 짓는 나의 집은. 부서져도

 행복할 것 같은 자유의 빈집이다.

 

        ’이해인’ 님의

 

            ’사랑할땐 별이 되고’ 中에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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