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부활 제5주일(가해) 요한 14,1-12; ’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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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5-04 ㅣ No.5378

부활 제5주일(가해) 요한 14,1-12; ’23/05/07

 

 

  

 

 

 

미국의 어느 여자 수도원에서 성소자가 나날이 줄어들자, “어떻게 하면, 젊은 성소자들이 많이 모여들 수 있을까?”하는 의견수렴을 거쳐서, 젊은이들에게 맞는 조금 재밌고, 젊은이들이 충분히 마음 편하게 다가설 수 있는 광고를 하자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그래서 고속도로변에 수녀원을 배경으로 수영장을 그려넣고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수녀님 광고를 내고는 성소자를 모집했답니다. 여러분, 그래서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실제로는 젊은 성소자들이 더 많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그나마 간헐적으로 오던 성소관심자마저도 아예 발길을 뚝 끊어버렸답니다.

 

어느 본당에서 제 후임 신부님이 청소년들을 성당으로 모으기 위해서, 성당 마당에 농구대를 하나 심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실제로 성당에 와서 신나게 농구를 하면서 놀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 아이들이 미사에 참석하거나 주일학교에는 들어가지 않고 농구만 하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나마 성당 미사에 나오고 주일학교에 출석하던 아이들마저 성당 미사와 주일학교 참석을 뒤로하고는 농구대로 몰려들었답니다. 결국 그 신부님은 떠나면서 그 농구대를 뽑아버리고 가셨습니다.

 

미국 뉴저지에 베네딕토 뉴튼 수도원이 있습니다. 1924년 설립되어 78년의 역사를 지난 수도원이 수사님들이 모자라서, 결국 2002년에 한국 베네딕토 왜관 수도원에 인계하였습니다. 한국 수사님들이 그 수도원을 인수하고 나자 동네 사람들이 와서, “수도원 문을 닫는 줄 알았는데, 한국 수사님들이 와 맡아주셔서 감사하다.”라고들 하였답니다. “우리가 자랄 때 수도원 강가에서 물놀이하고 놀았고, 수도원에서 수영 가르쳐 주고, 보트 빌려줘서 잘 타고 놀았다.”라고 하면서 감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이가 수도원을 통해 도움을 받고 살았지만, 그중에 수도원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어서, 결국 그 수도원은 한국인이 인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천주교회에 와서 자신들이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이용하기는 해도, 성당에서 재물을 나누고 공유해 준다고 해서, 성당에 신자가 늘어나는 것은 밀가루 신자들처럼 일시적이고, 사용할 것이 없거나 자신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 사라지게 되면, 미련 없이 떠나 버립니다. 천주교회에서 세상과 나눌 수 있는 재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으로 여겨 나누는 것으로 그쳐야지,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설사 기대한다고 해도, 그 성과가 좋게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교회의 역사 속에 드러난 체험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당이 신앙만으로는 안 되고, 조금 재밌어야 온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성당에 사람들이 놀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를 찾는 사람은 피시방이나 벚꽃놀이나 여행이나 이벤트 행사장으로 가지 성당으로 오지 않습니다. 설사 재미있어서 온다고 해도 그 미끼가 사라져 버리는 순간 떠나 버리고 맙니다. 위 수녀원의 성소자 모집 광고의 결과에서 보듯이, 성당에는 마음이 공허하고 영적으로 허전하고 지쳐서, 극심한 갈증으로 목말라서, 주님의 축복과 위로를 받아 마음의 평화와 영적인 충만함을 얻으려고 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주님 사랑을 받아, 인생의 길과 내적인 힘과 영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 영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도록, 주님과 함께하는 충만함을 누리도록 제시하고 안내하는 것이 성당에서 준비하고 베풀 수 있는 본질이며, 또 그래야만 성당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당이, 성당이 되기 위해서는 성당의 본질을 드러내야 합니다. 성당의 본질은 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살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새로 살게 되었습니다. 또 그렇게 예수님께서도 생명을 바쳐 우리를 살려주심으로써, 죽음의 그늘 아래 갇혀 계시지 않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이가 성당에 와서, 예수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아 새 생명을 얻고, 기쁘고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쁘고 평화로운 가운데 아직도 죄악의 굴레와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갇혀 있는 이들에게,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죄악에서 해방되어, 참 삶의 길과 새 생명의 충만함을 누려 기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제시하고 안내하는 일이 성당이, 성당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지난 사순시기에 저녁 기도를 하러 성당에 들어왔더니,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성당에서 십자가의 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활동으로 배당을 받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사순시기에 신자로서 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기도와 활동의 보상에 대한 아무런 기대와 요구도 없이,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모님 대전에 자신의 활동을 봉헌하고 싶어서, 기도하는 이들이 성당을 성당되게 하는 신자들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쳐할 곳이 많다.”(요한 14,2)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느 누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사랑해주고 대접해주지 않느냐의 여부와는 전혀 관계없이, 꾸준하고 진실하며 겸손하고 단순하게 기도와 활동하며, 천주교 신자로서 자신의 몫을 다 하는 신자분들은 하늘에 보물을 쌓”(마태 6,20)는 분이고, 그분들의 노고와 희생과 활동을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들어주시고, 갚아주실 것입니다.”(마태 6,6.18) 열두 제자와 같이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도우며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루카 8,3)던 여자들처럼, 교회 내에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사제의 사목적 결정을 존중하고 기꺼이 따르며, 주님 대전에 시간과 재능과 재원을 들여 자신을 봉헌하는 신자분들은,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볼 것입니다.

 

과거에는 신자분들이 자신이 성당에 와서 활동하는 것이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활동함으로써, 덕분에 자신의 인성도 계발하고 스스로 성화되는 길이라고 여기며, 자신을 봉헌하는 기쁨에 만족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어떤 이들이 마치 하느님과 계약을 맺듯이, 내가 성당에 와서 이 만큼 일했으니, 이 정도의 대접과 보상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활동 자체의 자부심과 충만 그리고 그에 따른 기쁨과 봉헌보다, 자신이 베푼다는 의미에서 봉사한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그런 분들 중에는 활동에서 오는 주 예수님과의 일치, 그리고 그 일치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충분한 대접이나 보상을 못 받았다고 여겨, 불평이나 불만 속에서 채워지지 않은 갈망과 허전함에 지쳐서, 떠나 버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서, 주님의 복음을 읽고, 형제자매들과 구역반과 단체 소공동체에서 복음에 비춰진 자기 삶을 나누고, 복음이 비춰주는 생명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성당이 성당되게 하는 신자들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12)

 

요즘 세상을 복음화하고자 하는 교회의 복음화 노력이나 결실보다, 몇 배 더 빠른 물질적인 세속화의 유혹이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도록 하여, 우리를 혼란케 합니다. 우리가 만일 성당에 와서 영적인 풍요와 충만함을 갈구하지 않고, 물질적인 풍요와 만족을 추구한다면, 주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누리게 되는 영적인 풍요와 충만함을 얻을 수 있는, 마음으로 가난해지는 영성을 포기하게 됩니다. 조금 더 외적으로 멋있고, 화려하고, 풍족한 물질적인 충족을 기대하고 갈구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더 많고 화려한 물질적인 충족을 얻으려는 탐욕으로 공허해지고, 황량해지는 내 영의 사막화로 몸부림치게 됩니다.

 

성당에 오면서 마치 이벤트성의 행사나 외적 물질적 치장을 기대하고 몰두한다면, 성당을 성당이 아닌 복지관이나 구청이나 엔터테인먼트 행사장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며, 그런 연유로 성당을 찾는 이들은 성당이, 주님 사랑의 영적인 풍요에서 오는 기쁨과 평화의 집이 아니라, 일시적인 현혹과 삶의 편의와 이익을 위한 사용처로만 바라보고 말 것입니다.

 

성당에 들어와 성전 내부를 둘러보면서도, 성전 벽과 제단에 아로새겨진, 세월의 역사를 거치며 수년 동안 덕지덕지 붙어 있는 신자들의 원망과 하소연, 기쁨과 슬픔, 신자들 일생의 고뇌와 아픔, 간절한 소망과 염원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실내장식이나 조명이나 조각품들이나 소장품들만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면, 우리는 천주교 신앙 세계에 머물지 못하고, 주님과의 아무런 감흥이나 하느님 백성과의 영적 교류는 맺지 못한 채, 그리스도교 문화양식이나 외적인 구조물만을 바라보며, 물질적인 자취만을 냉랭하고 공허하게 맛볼 것입니다.

 

진리이신 주님 복음 말씀 나누기와 실천을 통한 복음화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란 구원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고 단순하게 주님께 기도하고 활동하며, 아무런 대가와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을 끊임없이 봉헌하면서, 주님의 뒤를 따라, 우리 성당을 주 예수님께서 머무실 수 있는 영적인 집으로 만들고, 주 예수님과 함께할 때 누리게 되는 영적인 풍요와 충만함으로 참 생명을 얻도록 합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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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일 꽃꽂이

https://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3&id=191996&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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