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편한 멍에 가벼운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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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1동성당 [suyu1] 쪽지 캡슐

2005-12-21 ㅣ No.492

“편한 멍에 가벼운 짐”


아주 어릴 때, 일소가 귀하여 흔히 인력(人力)으로 쟁기질을 하던 모습을 보기도 했다. 한번은 지어미가 그 가녀린 어깨에 두 밧줄을 걸고서 소처럼 끌고, 지아비는 뒤에서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엎는 모습을 보았다. 괜스레 까닭 모르게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을 천부(天賦)로 받았는지 그때에 이미 고단한 인생의 뒷그림자를 본 것이다. 단순히 그 부부가 불쌍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일에 대한 알 듯 모를 듯한 비감(悲感)한 느낌 때문이었다.


짐과 멍에는 힘겨운 삶과 인생의 고달픔을 상징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통의 바다 위를 떠도는 것이 인생인데 어느 누구든 힘겹고 고통스럽지 않은 인생이란 없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존재의 근본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그 문제에 대한 궁극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는 한 지상(地上)의 여하한 조건에서도 온전한 만족이란 없다.

그런데 같은 인생길을 걸으며 어떤 이는 몹시 고달파하고 또 어떤 이는 그리 힘들지 않은 듯 유유자적하기도 한다. 때로 객관적으로 정말 견디기 힘든 큰 시련을 당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마주치는 인생의 짐과 멍에는 고만고만한 것이고 사실 대동소이하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선명한 양극(兩極)으로 갈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분명 짐과 멍에의 무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무엇을 위해, 또 왜 멍에를 메는지 그 목적이 불투명하거나 명료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곧 삶이 힘겹고 곤고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삶에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아니면 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모 재벌의 예쁜 막내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뉴스가 한동안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뒤에 다시 들은 얘기로는 자살이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조건을 누리고 살았지만 누구에게나 드리우는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무슨 이룰 수 없는 소망이 그 처녀를 절망으로 내몰았을까? 아니면 모든 것이 무의미했던 것일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멍에를 벗겨 주신다거나 짐을 덜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다.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당신의 멍에와 짐을 지라고 권하셨다. 그 말씀은 곧 마냥 곤고한 내 인생의 멍에와 짐에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으로부터 배우는 의미를 부여하라는 가르침이다. 멍에와 짐의 무게가 덜어져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동기(動機)와 명분(名分)이 분명해지니 고통스럽지 않게 된다는 뜻이요, 그런 정도의 무게는 대수롭지 않게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는 해법(解法)이다. 무의미(無意味)한 것들이 유의미(有意味)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자, 예수님께 자신의 멍에와 짐을 맡기는 자는 더 이상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다. 아니다. 예수님의 멍에까지 멘다면 어쩌면 그 짐의 무게는 객관적으로 더 무거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바로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더 무거워진 짐을 오히려 가볍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안식이요 구원이다. 내세(來世)를 보장받을 뿐만 아니라 이 현세(現世)의 삶에서도 이미 천상의 행복을 누린다는 것이다. 

(글/ 류종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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