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촌동성당 게시판

2월 같은 사람들

인쇄

이제욱 [austin89] 쪽지 캡슐

2000-02-12 ㅣ No.505

2월 같은 사람들

 

일 년 열두 달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은 2월입니다.

 

2월은 첫째, 부담이 없어 좋습니다. 앞도 뒤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운데도 아닌 둘째아들, 딸처럼 편안하고 부담이 없는 달입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의 불안도, 결과에 대한 긴장도 없는 2월은 찾으면 자기 자리에 있고 찾지 않으면 없는 듯 지나가는 달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2월을 좋아하는 이유는 2월의 겸손 때문입니다. 그 아까운 날들을 다른 달에게 3일이나 떼어주고, 스스로 가난해진 채 만족해하는 겸손의 2월이 좋습니다.

 

세 번째로, 2월이 좋은 이유는 그 안에 있는 강한 힘 때문입니다. 꽃이 피고 잎이 돋아나는 환희의 3월을 소리 없이 준비하는 2월은 마치 임신한 어머니와 같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2월이 오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없이 살아가는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아이를 안고 좋아하는 어머니, 따듯한 눈길로 제자를 바라보는 선생님, 종일 시장 바닥에 앉아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 목욕탕에서 등을 미는 총각,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지는 아가씨, 전방을 지키는 군인, 출근길이 바쁜 직장인....

 

욕심없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런 분들은 2월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편안하고 겸손하고 소박하지만 그 마음과 생각에는 아름답고 강한 힘이 있는 이 분들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가 안정되고 발전하는 것 입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는 아이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다른 사랑을 만들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한 믿음과 삶에 대한 신뢰가 싹트게 되니까요.

 

남녀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그 설레임이 다른 설레임을 만들고 그 설레임들로 말미암아 사회 전체에 생기가 돌고 밝아지니까요.

 

우리가 지금,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있는 것은 2월 같은 분들이 우리 주위에 많기 때문입니다. 잊혀진 듯 조용하지만, 겉으로는 겨울 같지만, 주어진 일을 자기의 몫으로 알고 묵묵히 살아가는 이런 분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위로이고 희망이며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2월입니다. 아무도 충만하지 못하고 아무도 똑똑하지 못하며 완전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잘 나지 않았고 다 배우지 못했으며 모두가 인생길에 많이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느새 봄이 오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우리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이 우리 곁으로 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그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열심히 살겠다’ ’사랑하리라’는 생각 여러 번 했고, 모르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 다정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특별히 기억하지 않는 2월이지만, 이 2월이 한 해를 일으켜 푸르게 하고 가을에는 가지마다 열매를 맺게 하듯, 우리들의 부족함 속에 있는 성실과 사랑이, 인내와 겸손과 소박함이 나의 삶과 우리 모두의 인생을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평생을 2월로만 살지도 모릅니다. 일생을 준비만 하다가 마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이 그 안에 있고 기쁨도 그 안에 있으며, 감사할 일도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정용철(월간 좋은생각 발행인)

 



23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