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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신앙의 수호자 베네딕토 16세 (상)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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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3-03 ㅣ No.61

‘영원한 신앙의 수호자’ 베네딕토 16세 (상)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현대사회의 큰 이정표 역할 해온 ‘정통 교리의 수호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후계자’, ‘전 세계 교회의 교황’, ‘서방교회의 총주교’, ‘로마의 주교’, ‘이탈리아 교회의 수석 주교’, ‘로마관구장 대주교’, ‘바티칸시국의 원수’, ‘하느님의 종들의 종’…. 2월 28일, 그는 이 모든 수식어를 내려놓고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로만 다시 섰다. 우리 또한 근·현대 역사상 처음으로 전임교황, 현임교황과 함께 살아가는 시기를 보내게 됐다.

2005년 4월 19일 네 번째 선거에서 새 교황이 선출됐다. 교회 역사상 가장 짧았던 콘클라베였다. 교회 구성원 대부분은 이 콘클라베를 통해 선출된 깊은 연륜과 탁견을 갖춘 인물을 반겼다. 반면 급진적인 개혁을 바랐던 이들은 실망했다. 그가 강경한 보수주의자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하지만 반대파들조차 그가 암울한 시기,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형성하는데 지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장기적으로는 역사 속에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도 말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하느님과 인간을 멀어지게 하는 이 시대 조류에 맞선 최고의 ‘신앙 수호자’ 였다.

이번 특집에서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신학자와 교황으로서 걸어온 발자취를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신학자로서의 과거, 논쟁의 전면에 선 보수주의자 이미지, 전임 교황과의 친분 등을 핑계한 논란의 중심에 서야 했다. 심지어 콘클라베 이전에는 사목경험이 거의 없고, 비이탈리아계 유럽인이고, 전임 교황의 정책에 너무 깊이 관여돼 있고, 중도-진보파 추기경들이 그의 편을 들어줄리 없다는 등의 이유로 결코 교황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여론도 판을 쳤었다.

하지만 그는 교황으로서, 점점 더 세속화되고 영성이 결여된 현대사회의 큰 이정표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교회의 전통을 살리고 성경에 근거한 신앙회복을 강조하며, 교회 가르침을 확산해왔다. 뿐만 아니라 ‘바오로의 해’, ‘사제의 해’, ‘신앙의 해’와 같은 특별 기념의 해 선포를 통해서도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지속적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신학자로서의 탄탄한 역량이 자리한다.


■ 평범한 그리스도인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어렸을 때 자신의 모습에 대해 평범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바이에른 지방은 16세기 종교개혁 때에도 유일하게 가톨릭 정통성을 지킨 게르만 지방이었다. 튀빙겐대 교수 시절 제자였던 마이클 파헤이 신부(예수회)는 베네딕토 16세는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바바리아 사람이며, 이는 곧 그가 완전한 가톨릭 배경을 가장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사제 성소도 대단한 영감에서 시작된 바람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어놓는 삶의 과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학’이라는 학문은 그를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인물로 변모시킨다.


■ 천재적 신학자

사제품을 받은 후 1년여간 고향 본당의 보좌신부로 사목한 것을 제외하면 베네딕토 16세는 학자로서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았다. 뮌헨대학과 프라이징대학을 거쳐 본대학에서 당대 독일 신학계의 위대한 인물들과 교류하며 학문적 탐구에 빠져들었다. 당시 나이는 32세에 불과했다. 20여년간 대학교수로 활동하면서 그는 뛰어난 강연과 저술 등을 쏟아내며 당대 정상급 신학자로 활동했다. 스스로도 신학교수는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신학자로서 가장 높은 명성을 얻었던 시기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중반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본인도 자신의 최고 역작으로 꼽는 「그리스도교 입문」을 펴내기도 했다. 또 현대 교회론 저서들 가운데 백미로 평가받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써내기도 했다.

그의 신학적 사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보나벤투라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모든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다는 즉, 신의 은총을 받지 않은 인간 지성에 대해 보다 부정적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적극 받아들였다. 자신을 가리켜 ‘결연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무인도에 가야 한다면 성경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두 권의 책을 가져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학교수 자격 논문을 쓰면서는 보나벤투라의 역사신학을 연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또 그가 가장 좋아한 현대 신학자는 나치에 강력히 저항했던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였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해온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신부도 그가 빠져든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 진리의 수호자

이러한 신학적 배경은 그가 교회 전통과 정통성에 바탕을 둔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고, 그 입장을 엄격하게 밀고 나가는 원동력이 됐다.

지금까지 베네딕토 16세 앞에 붙었던 호칭 중 가장 적절하다고 꼽히는 것은 바로 ‘정통 교리의 수호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도 보편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세속주의와 도덕적 상대주의를 교회의 가장 큰 도전으로 간주, 온 힘을 다해 맞섰다.

그는 저서 「이 땅의 소금」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 내용을 인용, 아들이 수면병에 걸린 아버지를 깨우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비록 잠을 자고 싶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화를 내지만 아들은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말한다. 교회 역시 신자들이 잠에 빠져들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베네딕토 16세 사상의 핵심은 급변하는 세상 흐름 안에서, 확고한 전통을 바탕으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는 서구문화를 신앙에 적대적인 끔찍한 폐해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폐해들로부터 신앙에 대한 교의와 교회의 관습들을 지키고 증진하는데 힘써왔다.

베네딕토 16세의 이러한 입장은, 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개방적, 진보적, 개혁적 성향의 신학자로 평가받았다는 사실까지 가리곤 했다.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역량을 인정받아 신학 전문위원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가한 진보적인 신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가 겪는 혼란을 보며, 급격한 개혁이 아닌 점진적이고 온건한 개혁에 대해 확신을 가진다. 1960년대 독일 대학가를 휩쓴 극렬 좌파 학생운동도 그가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신앙을 빌미로 광신적인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는 모습에 그야말로 경악했다고 회고한다.


■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그가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활동한 것은 24년이나 된다.

따라서 그를 강경한 보수주의자로만 치부하기에 앞서 신앙교리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앙교리성의 기본 의무는 신앙에 대한 교의나 가톨릭교회의 관습들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다. 특히 과학문명의 발전에서 비롯된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신앙에 의거해 응답할 수 있도록 신앙의 지혜를 함양하는 연구를 지원할 의무도 있다. 게다가 베네딕토 16세가 재직했던 기간은 산업화로 정신적 황폐화가 가중되고 전통적인 가치관과 권위가 붕괴되는 격변의 시기였다.

우리가 대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해도 되는가. 지금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는 이러한 현실을 성찰하도록 이끌었다.

베네딕토 16세는 ‘하느님 의미’의 상실은 우선 그리스도교 가치들을 평가 절하시킬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하느님을 배제하는 사회는 인간 존재를 위험에 빠트린다는 것이다. 실제 현대사회 곳곳에서는 생명 자체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

그는 우선 윤리적인 위기를 지적했다. 젊은이들이 신앙을 외면하는 현실,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추구함으로써 신앙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실, 성직·수도자들의 위기에도 일침을 가했다. 구체적으로 산아제한, 낙태, 동성애, 혼전 성관계, 인간 복제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윤리 문제는 상대주의적인 고려의 대상이 아니며, 보편적인 것으로서 변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제 결혼이나 여성 사제서품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이러한 입장 때문에 노골적인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경계,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자들의 입을 막고, 가톨릭 신학에 마르크스주의를 인용하지 못하게 했다. 독재와 같은 정치적 억압상황을 바꾸는데 적극적인 폭력까지 인정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인 이유였다. 칼 라너와 같은 개혁적인 신학자들과도 대립했다.

다만 베네딕토 16세는 성체성사 중심의 교회, 성경과 전통을 바탕으로 한 교회일 때 참된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전통은 근본주의나 낡은 규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을 원래 상태로 회복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재발견하자는 것이다. 요컨대 개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전통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 교황 선출 이전 연보

▲ 1927. 4. 16. 요제프 라칭거, 독일 파사우교구 마르크틀 암 인에서 출생
▲ 1946~1951 프라이징 대학과 뮌헨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 전공
▲ 1951. 6. 29. 프라이징에서 사제 수품, 뮌헨-모자크 성 마르틴 성당 보좌신부
▲ 1951~1952 뮌헨-보겐하우젠 성혈 성당 주임신부
▲ 1952~1954 프라이징 신학교 교수
▲ 1953 신학박사 학위 취득
▲ 1954~1957 프라이징 철학-신학대학에서 교의학과 기초신학 교수
▲ 1957 뮌헨 대학교에서 기초신학과 교수 자격 취득
▲ 1958~1959 프라이징 철학-신학대학의 교의학과 기초신학과 객원 교수
▲ 1959~1963 본 대학교 기초신학과 정교수
▲ 1962~1965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전문가로 참가
▲ 1963~1966 뮌스터 대학교 교의학과 교의사학 정교수
▲ 1966~1969 튀빙겐 대학교 교의학과 교의사학 정교수
▲ 1969~1977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교의학과 교의사학 정교수
▲ 1976~1977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부총장
▲ 1977. 3. 24 뮌헨 프라이징 대교구장
▲ 1977. 5. 28. 대주교 수품
▲ 1977. 6. 27. 추기경 서임
▲ 1981. 11. 25.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교황청 성서위원회 위원장,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장
▲ 2005. 4. 19. 제265대 교황으로 선출
▲ 2005. 4. 24. 제265대 교황 즉위


■ 주요 저서

「시온의 딸」(바오로딸, 1991)
「이 땅의 소금」(가톨릭출판사, 2000)
「하느님과 세상-우리 시대의 신앙과 삶」(성바오로, 2004)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미래의 도전들」(대변혁 시대에 가치를 지닌 것들에 관하여)(물푸레, 2005)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신다」(김영사, 2005)
「전례의 정신」(성바오로, 2006)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7)
「그리스도 신앙-어제와 오늘」(분도출판사, 2007)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엠애드, 2007)
「믿는 자는 혼자가 아니다」(바이북스, 2007)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월드북, 2007)
「신앙 진리 관용(그리스도와 세계의 종교들)」(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9)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성바오로, 2009)
「나자렛 예수」 1, 2(김영사)
「교황님과 함께하는 아침묵상」(월북, 2010)
「성탄」(바오로딸, 2010)

[가톨릭신문, 2013년 3월 3일, 주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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