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4주일(가해) 마태 5,1-12ㄴ; ’23/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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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1-14 ㅣ No.5280

연중 제4주일(가해) 마태 5,1-12; ’23/01/29

 

 

 

 

 

 

 

어느 어려운 지역에 본당 신부님이 부임하셔서, 성당을 짓기 위해 모금도 다니시고, 교구에 빚도 얻어서 간신히 성전을 짓고 떠나셨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그 신부님을 아주 훌륭한 신부님으로 칭송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신부님이 오셔서, 전임 신부님이 갖은 고생을 다 하시면서 이렇게 훌륭한 성당을 짓느라고 진 빚을 갚아야 하니 돈을 내시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신자들이 나쁜 신부님이 오셨다고 불평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에서의 한계와 장애를 벗어나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사목을 펼치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물질로 이루어진 현세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요한 17,14)를 실현하는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나 봅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다 보면, 줄 것 안 주고, 낼 것 안 내고, 남의 것 빼앗아 가면서, 남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도록 하며 자신의 부를 축적하여 사는 생활양식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사는 것을 내심 부러워하며 기회만 되면 나도 그렇게 살아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겠다고 기회만 보고 있는 생활양식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줄 것 다 주고, 낼 것 다 내고, 남에게 바보 멍청이 취급을 받아가면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생활양식이 있는가 하면, 안 줘도 되는 것을 주고, 안 내도 되는 것마저 찾아서 내며,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자기 것을 나누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사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생활양식이 있습니다.

 

근 현대시기에 우리나라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청업자에게 납품을 받아놓고 줄 것도 안 주고, 그나마 자기가 줄 것을 담보삼아 상대가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아 챙기고 나서 고의부도를 내고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며 성장 가도를 달려간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약삭빠르고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그야말로 당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보고 집안에서 부인들은 자기 남편이 무능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왜 남들은 다 그럭저럭 먹고사는데, 왜 우리 남편은 하는 일마다 안 되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과연 고의부도를 내고 자기만 살찌우는 사람들이 잘하는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 당하는 사람이 잘못한 것인지. 아니면 똘똘하지 못해서 자기 몫을 미리 챙기지 못하고 자기가 받아낼 것을 악착같이 쫓아가서 얻어내지 못해서 그냥 손해보고 마는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

 

오늘 저는 세상에서 돈 벌고 살아남기 위해 남의 것을 꿀꺽꿀꺽 먹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자기 것을 찾아내고 기어이 받아내고야 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든가, 아니면 지금은 손해를 보지만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이익과 보상을 기대하면서 참고 기다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는 것인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가 나누고 싶은 내용은 바로 슬퍼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행복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라고 선언하십니다.

 

세상의 똘똘이들에게 당하고, 냉정히 잘라 말하지 못하고, 악착같이 받아내지 못해서 손해보고 결국 슬퍼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식을 보자니 남편이 걸리고. 남편을 생각하자니 자식이 걸리고, 시댁을 생각하자니 친정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고, 친정을 생각하자니 남편의 얼굴이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선한 마음에 죄책감과 부담감만 가득 안고 그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슬퍼하는 사람들. 부모와 자식의 죽음을 잊지 못해 한 없이 아파하는 사람들, 이별한 배우자와 친지들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 그리워하며, 아직도 자기 삶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 심지어는 이웃의 불행과 아픔 앞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해주고, 이웃의 불행과 아픔을 적절히 도와주지 못해서 주님의 십자가 아래 꿇어 자신의 부족함과 이기적인 모습을 뉘우치며 아파하는 사람들, 세상의 행복과 구원을 막고 지연시키는 불의와 사리사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슬퍼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잘살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하기는커녕 그 사람들에게 아픔을 선사하고 상대의 아픔을 전제로 자신의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지 못하고 오로지 사리사욕에 빠져 자기만 챙기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현세에서 재물을 모으기는 하지만, 그 재물을 지키기 위해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멀리하며 불안 속에 살아가며, 자기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현재 자기가 가진 재산이 누구보다도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불만과 불평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주님의 위로를 위로로 감사히 받아들이기는커녕, 어쩌면 이웃의 손가락질만을 받을지 모릅니다.

 

그런 반면에 자기의 것을 빼앗기고 자기 것을 받아내지 못해서 억울해하다가 결국 분노와 미움에 갇혀버린 사람은 참으로 안쓰럽다. 차라리 잊어버리고 포기해 버린 사람은 편안하기라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중의 고통을 겪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록 안 주기 때문에 못 받고, 빼앗아 가기 때문에 빼앗겼지만,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를 괴롭힌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오히려 염려해주는 사람은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비단 세상 안에서만이 아니라, 술 먹고 괴롭히는 남편이나 바람난 아내, 부모의 속을 갈가리 찢어 놓는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그 괴로움을 호소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끌어안은 사람은 위로를 받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대신 아버지께 간구해주신 것같이, 슬픔을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성화시키는 사람은 주님의 진정한 위로와 구원을 얻습니다.

 

현세에서는 주님께서 나의 결백함과 나의 용서를 알고 계시니 위로를 받을 것이고, 나의 슬픔과 고통을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구하시는 주님의 남은 고통에 참여하여 짐을 덜어주고 있으니 주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마침내는 자기가 위로하고 용서해 준 사람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구원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여서 죽었지만 죽지 않고 부활하신 것처럼, 비록 현세에서 당하면서도 용서하고, 복수하라고 자신의 마음을 충동하는 악마에게 빼앗기지 않고, 끝까지 선하게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그의 죄를 묻지 않고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 현세에서 어려움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주 친히 위로해 주시고, 주님을 믿고 복음을 실현할 힘과 용기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성령의 이끄심에 의탁하며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갑시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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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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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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