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동(구 미아3동)성당 게시판

어제, 술을 마셨습니다.

인쇄

상지종 [sjjbernardo] 쪽지 캡슐

2000-03-30 ㅣ No.1691

, 오랫만에 글을 띄웁니다.

 

매일 게시판에 들어와 벗들이 올리신 글을 읽었습니다.

 

매일 복음 묵상을 올려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하루 하루 복음을 묵상하고 매일 미사 강론을 준비는 했지만, 게시판에는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 전에 비해 특별히 바빴던 것도 아닌데 조금은 게을러졌나 봅니다. 사실 이것 저것 해야 될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들(물론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이고, 어느 정도는 제가 벌린 일이기도 하구요)을 생각하면 머리는 아프고 마음은 부담스러운데, 일이 손에 잡히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잘 되리라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이 함께 계시니까 말입니다.

 

각설하고 어저께 체험을 나눌까 합니다.

어제는 술을 마셨습니다. 재의 수요일부터 금주를 했으니까 20일만에 마신 것이지요.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것보다 술을 마시는 것이 더 괴로웠던 적은 아마 어저께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은 없을 것이구요.

 

이 글을 띄울까 말까 참 많이 망설였습니다. 사순 시기 동안 금주하겠다는 약속을 깬 것에 대해 변명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름대로 사순 시기 동안 자신의 다짐을 지키며 생활하고 계시는 벗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솔직한 것이 더 나을 것 같고, 또 제 나름대로는 어제의 일을 통해 값진 체험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서울대교구 7지구(8지구-성동, 광진 지구) 청년연합회 회장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용희 지도신부님(비록 저의 본당 신부님은 아니었지만)과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어제 그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41일 멕시코로 교포사목을 하기 위해 떠나시는데 환송회를 하게 된 것이지요. 이 신부님은 주임 신부님과도 매우 각별한 관계이십니다. 그래서 함께 만났지요. 주임 신부님이 교우 분 댁에서 환송회 자리를 마련하셨는데 제가 거기에 함께 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사순 시기 동안 금주하는 것을 주임신부님도 알고 계시고,  이 신부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환송회 자리이니 만큼, 한 잔 따라드리고 분위기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는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떠올렸지요. 엄격한 안식일 규정을 깨뜨리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보다 안식일을 먼저 생각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율법을 지켜가다보니 율법이 하느님을 대신하고, 율법 준수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했을 법도 합니다.

 

여하튼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면서 속으로는 무척 많은 생각이 오고 갔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순 시기에 금주를 하겠다고 다짐했던가?' '혹시 환송회 핑계로 나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이자리에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 '사순 시기동안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던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 내 자신을 드러내려는 위선적인 것은 아니었던가?' 서로 상반되는 생각들이 왔다 갔다 했지요.

 

'혼인 잔치집에 신랑과 함께 있는 친구들이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단식은 주님께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데,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주님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고, 단식이라는 것이 자신의 인간적인 의지를 시험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다짐(단식이든 금주든 금연이든 이것이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이)을 깨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어제는 저의 다짐을 깨뜨렸기에 아쉬운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가 만들어 놓은 율법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던 값진 날이었습니다.

 

부활까지는 앞으로 많은 날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계속 금주를 할 것입니다. 저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금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자칫 저 자신을 과시하려는 인간적인 충동이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는 나누고 싶은 말이 참 많이 있었는데, 정리가 잘 되지 않네요. 그래도 함께 하시는 벗들이 알아서 잘 받아주셨으리라 믿습니다. 여러분도 나름대로의 사순 시기 체험을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남은 사순 시기를 잘 보내시고 기쁘게 부활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매일 복음 묵상은 되는데로 빨리 다시 올리도록 할께요. 죄송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가 띄웁니다.

 

 



92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