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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필독][영어본 신학대전 번역 오류] mansuetudo이 gentleness 혹은 meekness로 일관성 없이 번역됨; 에페소 4,2-4; 겸손, 겸화, 인내 2648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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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1 ㅣ No.2964

1. 들어가면서  

 

1-1. 우선적으로, 다음의 내용들 전부를 차분히 확인하도록 하십시오:

 

신학대전, Ia IIae, q58, a1, on the contrary 에서, 라틴어 "mitis"가, "meek"아니고"gentle"로 번역됨 [주: 왜냐하면 "meek"한 자[예를 들어, 예수님(마태오 복음서 11,29)] "gentle"하기 때문에, 전후 문맥 안에서, 번역 오류로 보기 어려움]: 

https://isidore.co/aquinas/summa/FS/FS058.html 

 

신학대전, Ia IIae, q59, a2, objection 1 에서, 라틴어 "mitis"가, "meek"아니고, "gentle"로 번역됨 [주: 왜냐하면 "meek"한 자[예를 들어, 예수님(마태오 복음서 11,29)] "gentle"하기 때문에, 전후 문맥 안에서, 번역 오류로 보기 어려움]: 

https://isidore.co/aquinas/summa/FS/FS059.html 

 

다른 한편으로,

 

신학대전, Ia, IIae, q66, a4 에서, 한 개의 윤라덕(a moral virtue)의 명칭인 라틴어 "mansuetudo"가, 형용사 "gentle"의 명사형인, "gentleness"로 번역됨 [주: 나중에 밝히겠지만, 이것은 가장 적합한 번역임]:

https://isidore.co/aquinas/summa/FS/FS066.html 

(발췌 시작)

Ad secundum dicendum quod patientia dicitur habere opus perfectum in tolerantia malorum, in quibus non solum excludit iniustam vindictam, quam etiam excludit iustitia; neque solum odium quod facit caritas; neque solum iram, quod facit mansuetudo; sed etiam excludit tristitiam inordinatam, quae est radix omnium praedictorum. Et ideo in hoc est perfectior et maior, quod in hac materia extirpat radicem. Non autem est simpliciter perfectior omnibus aliis virtutibus. Quia fortitudo non solum sustinet molestias absque perturbatione, quod est patientiae, sed etiam ingerit se eis, cum opus fuerit. Unde quicumque est fortis, est patiens, sed non convertitur, est enim patientia quaedam fortitudinis pars.

 

Reply to Objection 2: Patience is said to have "a perfect work," by enduring evils, wherein it excludes not only unjust revenge, which is also excluded by justice; not only hatred, which is also suppressed by charity; nor only anger, which is calmed by gentleness; but also inordinate sorrow, which is the root of all the above. Wherefore it is more perfect and excellent through plucking up the root in this matter. It is not, however, more perfect than all the other virtues simply. Because fortitude not only endures trouble without being disturbed, but also fights against it if necessary. Hence whoever is brave is patient; but the converse does not hold, for patience is a part of fortitude.

(이상, 발췌 끝)

 

신학대전, IIa, IIae, q33, a4 에서, 한 개의 윤라덕(a moral virtue)의 명칭인 라틴어 "mansuetudo""gentleness"로 번역됨 [주: 나중에 밝히겠지만, 이것은 가장 적합한 번역임]:

https://isidore.co/aquinas/summa/SS/SS033.html

 

신학대전, IIa IIae, q157, a4 에서 본문 중에 발췌 인용된 Douay-Rheims Bible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라틴어 성경 용어 "mitis""meek"로 번역됨:

https://isidore.co/aquinas/summa/SS/SS157.html 

 

다른 한편으로,

 

신학대전, IIa IIae, q157 의 분문에서, 대단히 심각하게도, 다수에 걸쳐, 한 개의 윤라덕(a moral virtue)의 명칭인 라틴어 "mansuetudo""meekness"로 번역됨. 그리고 여기에는 본문 중에 발췌 인용된 Douay-Rheims Bible 집회서 3,17(19)가 포함됨 [주: 나중에 밝히겠지만,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임]:

https://isidore.co/aquinas/summa/SS/SS157.html 

 

신학대전, IIa IIae, q161, a1 에서 본문 중에 발췌 인용된 Douay-Rheims Bible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라틴어 성경 용어 "mitis""meek"로 번역됨:

https://isidore.co/aquinas/summa/SS/SS161.html 

 

신학대전, IIa IIae, q170, a2, ob2 에서, 한 개의 윤라덕(a moral virtue)의 명칭인 라틴어 "mansuetudine"가, 두 번에 걸쳐, "meekness"로 번역이 됨 [주: 나중에 밝히겠지만,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임]:

https://isidore.co/aquinas/summa/SS/SS170.html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2월 15일]

1-2. 다은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라틴어 단어 "mansuetudo"에 대응하는 프랑스어 단어 "mansuétude"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가 "mansuetude"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wordreference.com/definition/mansuetude <----- 필히 확인 요망

 

그리고 바로 위의 주소에 접속하면 알 수 있는 라틴어 단어 "mansuetudo"의 의미는, 아래의 제3항, 즉, 3. 유관 자료 분석 II 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파악된 라틴어 단어 "mansuetudo"의 의미를 또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 2023년 2월 15일자 내용 추가 끝]

 

 

2. 유관 자료 분석 I

 

바로 위의 제1항에 발췌된 바로부터, 본글의 제목으로 지적한 바가 사실임을 이제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한 개의 윤라덕(a moral virtue)의 명칭인 라틴어 "mansuetudine"의 번역 용어로서, [(2023-02-15일자 내용 추가 시작) 바로 위의 제1-2항에서 고찰한 영어 단어 "mansuetude" 대신에 (이상, 2023년 2월 15일자 내용 추가 끝)"meekness"를 사용하는 것이 매우 부적절함에 대한 졸고를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648.htm

(빌췌 시작)

4-2.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위의 제2-3항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발췌 시작)

게시자 주 2-3: [주; 이 게시자 주는 아래의 제3항을 작성한 후에 추가한 것임]
(1)
 그런데, 위의 제1-6-2항에 발췌된 바에 의하여, (i) 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 예로니모(St. Jerome, 342-420년)가 들여다본 히브리어 집회서 3,17 본문이, (ii) 바로 위에 발췌된 1896년에 이집트 카이로 소재 회당에서 발견된 히브리어 집회서 3,17 본문과, 정확하게 동일한지의 여부는, 오래 전에 사라진 성 예로니모가 들여다본 히브리어 집회서의 사본을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하였기에, 적어도 지금까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다.

 

(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게, 성 예로니모가 집회서 3,17(19)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에, (i)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라틴어본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특히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meek"의 의미를 지닌, 라틴어 단어 "mitis"의 명사형을 사용하는 대신에, (ii) 특히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meek"의 의미만을 오로지 가지고 있지 않은, 라틴어 명사 "mansuetudine"을 사용한 것은, 마태오 복음서 11,29집회서 3,17(19)의 본문들이, 라틴어로 번역이 되는 과정에서, 변별력의 상실을 야기하지 않기 위하여서였을 것임을 또한 생각할 때에, 상당히 유의미하다는 생각이다.

 

(3) 무슨 말씀인고 하면, 성 예로니모(St. Jerome, 342-420년)께서 일찌기 집회서 3,19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에,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라틴어 형용사 "mitis"의 명사형 "mitigatio"을 사용하지 않았음은, 매우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4) 그러나 이와는 달리,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의 경우에, "mitis"에 대응하는 영어 번역 용어로서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영어 형용사 "meek"의 명사형 "meekness"를 집회서 3,19에서 사용한 것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라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5) 설상가상으로. 왜냐하면 1947년에 마련된 영어본 "신학 대전"에서, 필요시, 바로 위의 제(4)항에 안내된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에서 발췌 인용하기 때문에, 아래의 제3-2-1항에 안내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라틴어 정본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a, IIae, q.157 이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췌 인용된 대중 라틴말(Vulgate) 성경, 집회서 3,19에서 사용되고 있는 라틴어 성경 용어 mansuetudine"의 번역 용어로서 "Douay-Rheims Bible", 집회서 3,119에서 사용되고 있는 "meekness"라는 잘못 선정된 영어 단어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영어본 "신학 대전"의 본문에서도 또한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https://isidore.co/aquinas/summa/SS/SS157.html#SSQ157OUTP1 

 

(6) 다른 한편으로, 본글의 제2-5항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지역 언어인 "영어" 자체의 변별력이 "라틴어"의 변별력에 비하여 매우 부실하여, 예를 들어, "mitis", "modestos", "mansuetudine" 이들 세 개의 라틴어 단어들이 모두 한 개의 영어 단어 "meek"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바로 위의 제(5)항에서 지적한, 영어본 "신학 대전" 본문 안쪽으로 증폭되어 퍼져 나간 번역 오류의 문제정말로(indeed) 대단히 심각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상, 게시자 주 2-3 끝)

(이상, 발췌 끝)

 

따라서, 위의 제2항제3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7)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의 경우, "mitis"에 대응하는 영어 번역 용어로서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영어 형용사 "meek"의 명사형 "meekness"를 집회서 3,19에서 라틴어 "mansuetudo"에 대응하는 영어 번역 용어로서 사용한 것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

 

5-4-2-5. [내용 보강 일자: 2023년 2월 1일] 다음에 발췌된,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알퐁소 바뇨니 신부님(1566-1640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30년경에 초간된 "수신서학"에서, 마태오 리치 신부님"천주실의"(1603년)에서 기 도입되어 사용된 차용 번역 용어인 "善"(양선)이,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 집회서 3,19갈라티아서 5,23에서 사용된, 칠죄종들 중의 한 개인 "분노"(anger)를 제어하는 한 개의 덕(virtue)을 나타내는 라틴어 용어 mansuetudine(원형: mansuetudo)[참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IIa IIae, q157]한 개의 이름/호칭(a name)으로서 또한 사용되고 있는데,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용은, (i) 위의 제5-4-2-4항에 발췌된, "善"(양선)이라는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진복팔단들 중의 두 번째 단의 의미를, 그리고 (ii) 바로 이 "수신서학"의 초판 출판 시기보다 더 늦게 출판된, 아래의 제5-4-2-6항제5-4-2-7항에 발췌된 바에 포함된 "천주강생언행기략""천주강생성경직해" 중의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 마태오 복음서 5,4 11,29에서 사용된 라틴어 성경 용어 "mitis"의 번역 용어인 "善"(양선)의 의미를, 한문 문화권의 사람들이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장애 혹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상당히 부적절한 사용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2023년 2월 1일자 내용 보강 끝]:

[주: 이어지는 유관 부분인 이하의 발췌 생략].

(이상, 발췌 끝)

 

 

3. 유관 자료 분석 II 

 

또한, 다른 방식에 의하여, 바로 위의 제1-1항제1-2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들로부터, 한 개의 윤라덕(a moral virtue)의 명칭인 라틴어 "mansuetudine"의 번역 용어로서 "gentleness"를 선정하는 것이 매우 적절함을 재차 확인하는 것인데, 이를 위하여,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여, 또한 차분히 읽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mansuetudo_in_갈라티아5_23_2648.htm <----- 꼭 필독 권고

(발췌 시작)

[...]

 

-----
(*) 게시자 주: (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영문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의 부록에 나열된 성령의 열매들 12개[주: 출처: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 갈라티아서 5,22-23]에서, 갈라티아서 5,23의 첫 번째인 "mansuetudo"가, "mildness" 대신에, "gentleness"로 번역되어 제8번째로 나령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va2005cccc.htm <----- 여기를 클릭하여 필히 확인하라 

 

(ii)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Ma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mildness"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m/m201.htm 

(발췌 시작)

MILDNESS

 

Gentleness in disposition and behavior. As a fruit of the Holy Spirit, it is a perfection of love which tempers justice by avoiding any unnecessary action that might provoke anger or resentment.

 

겸화(謙和)(mildness, mansuetudo)

 

성향(disposition) 및 처신(behavior)에 있어 겸화(謙和)(gentleness)를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 한 개로서(갈라티아 5,23), 이 덕(virtue)은, 분노(anger) 혹은 분개(resentment)를 유발시킬(provoke) 수도 있는 어떠한 불필요한 행동도 회피함으로써, 정의(justice)를 누그러뜨리는 애덕의 어떤 완미(a perfection of love)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iii) (이 글의 결론 15) 따라서, 위의 제(i)항에서 확인한 바 및 제(ii)항에 의하여, 영어 형용사들 "mild""gentle"이, 성향(disposition) 및 처신(behavior)에 있어, 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이 글을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iv) 따라서, 바로 위의 제(iii)항(이 글의 결론 15)따름 정리(corollaries)들로서,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6) 성향(disposition) 및 처신(behavior)에 있어 겸화(謙和)한 자(the gentle/the mild)들(집회서 3,17; 갈라티아 5,23; 신학 대전 IIa IIae, q157) 중에서만 오로지 양선(良善)한 자(the meek)들[즉, 어질고 윤리적으로 착한 자들](마태오 복음서 5,5)이 있을 수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17)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다수의 영어본 성경들 중의 약 1/3에서, 갈라티아서 5,23의 첫 단어가, "gentleness" 대신에, "meekness"로 번역된 것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https://biblehub.com/galatians/5-23.htm <----- 필히 확인하라

 

(이 글의 결론 18)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에서 "온유하게"로 번역된 표현 및 갈라티아서 5,23의 첫 단어가, "온유"로 번역된 표현은 매우 심각한 번역 오류이며, 대신에, 각각 "겸화하게"(謙和)"겸화"(謙和)로 번역되는 것이 매우 적절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19) "새 번역 성경", 마태오 복음서 5,5; 11,29에서 "온유"로 번역된 표현은 매우 심각한 번역 오류이며, 대신에, "양선"(良善)으로 번역되는 것이 매우 적절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상, 발췌 끝) 

 

4.

본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는, 예를 들어,

 

4-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 심각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주소에 있는 묵상글[제목: Meditations: Friday of the Seventh Week of Easter]을 읽을 때에 영어본 신학 대전, IIa IIae, q157에서 사용 중인 대단히 잘못 번역된 용어인 "meekness" 다섯 개 모두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부록에 나열된 성령의 12개의 열매들 중의 한 개의 명칭(갈라티아서 5,23에서 첫 번째인)인 "gentleness"["겸화"(謙和)]로 교체한 후에,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https://opusdei.org/en/article/meditations-friday-of-the-seventh-week-of-easter/ 

 

4-2. 마찬가지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 심각성을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항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라틴 교부 Caius Marius Victorinus(카이오 마리오 빅토리아노, 300-370년)에페소서 4,2-4의 해설에서 발췌된 유관 부분의 우리말 졸번역을 읽도록 하십시오.

 

아래의 주소에 있는, 기원후 300경에 출생한 grammarian, rhetorician, philosopher, and theologian인 Victorinus Afrus(*) 의한, 에페소서 4,2-4의 해설[제목: With every humility and meekness and patience]을 읽을 때에 영어본 신학 대전, IIa IIae, q157에서 사용 중인 대단히 잘못 번역된 용어인 "meekness" 네 개 모두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부록에 나열된 성령의 12개의 열매들 중의 한 개의 명칭(갈라티아서 5,23에서 첫 번째인)인 "gentleness"["겸화"(謙和)]로 교체한 후에,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주: 아래에 발췌된 영문본에서 본글의 필자가 이미 교체하였음]:

 

출처: http://catholicanalects.blogspot.com/2020/08/humility-and-meekness.html 

(발췌 시작)

Cum omni humilitate et mansuetudine et patientia.

Et tolerantiam multam ponit, ne efferantur, ne superbi sint. Primo posita humilitas, deinde mansuetudo. Humilitas animi dejectio est. Frenum superbiae et immanitatis mansuetudo est. At vero quae sequitur patientia, in eo quod tolerant, si quid adversi evenerit. In prioribus, ne vereantur pati, duo posita, humilitas et mansuetudo. In his quae sequuntur, si passi fuerint, quales sint patientia, inquit. Deinde quod subjungit cum omni magnanimitate. Haec enim magnanimitas in hoc est, ut non solum patientier feras, sed erecto animo semper sis. Denique hoc subjungit, ut si passus fueris patienter, et magnanimiter feras sufferentes omnia quaecumque acciderint portantes invicem in charitate. Potest et ad sufferentes invicem in charitate, referri. Potest tamen integer esse sensus qui sequitur: Solliciti servandae unitatis spiritus in vinculo pacis. Ut spiritus unitatem servetis, aut unum spiritum servetis servandae pacis et in vinculo pacis, hortor vos ut soliciti sitis. Dat tamen rationes quare unitatis spiritus in vinculo solliciti esse debent: Unum corpus, inquit, et unus spiritus. Quia unum corpus est tota Ecclesia et unus spiritus, Ita ut et vocati estis in una spe vocationis vestrae. Et hoc argumentum est ad unitatem spiritus servandam in vinculo pacis, quod ita et isti vocati in una spe: non enim diversam spem habent, sed unam omnes, qui vocati sunt, promissorum Dei. Quae autem promissa sunt, notum est omnibus.


Victorinus Afrus, In Epistolam Pauli ad Ephesios, Liber Primus

Source: Migne PL 8.1271b-1272a

 

With every humility and gentlness and patience. 1

And much endurance he proposes, lest they are made wild, lest they become proud. First he proposes humility, then gentlness. Humility is a lowering of the soul. Gentlness is the bridle on pride and brutality. Then what follows is patience, by which they endure, if adverse things should befall. Initially, then, lest they fear to suffer, two things he proposes, humility and gentlness. Following these things, if they were to suffer, so they would be patient, he says. Then he continues 'with every magnanimity'. 2 And this magnanimity here is so that not only you suffer patiently, but you always do so with an upright soul. Then he adds, that if you were to suffer patiently, and endure magnanimously, suffering everything which befalls: 'bearing with one another in charity.' 1 And it is possible that 'suffering one another in love,' is all that is referred to. It is possible, however, that the sound sense is in what follows: 'Being anxious to maintain the unity of the spirit in the bond of peace.' 3 That you attend to the unity of the spirit, or that you attend to the one spirit in the guarding of peace in the bond of peace, I exhort you that you be anxious to do so. Now let reasons be given why they should be anxious for the unity of the spirit in the bond of peace. 'One body,' he says, 'and one spirit.' 4  Because one is the body of all the Church and one is the spirit. 'Thus you have been called into the one hope of your calling.' 4 And this is the argument for the guarding of the unity of the spirit in the bond of peace, that thus they are called in one hope, not having different hopes, but there is one for all who are called regarding the promises of God. For those things which are promised are known to all.


Victorinus Afrus, On the Epistle of Saint Paul to the Ephesians, Book One

1 Ephes 4.2
2 Vetus Latina
3 Ephes 4.3
4 Ephes 4.4

 

(유관 부분의 우리말 졸번역 시작)

모든 겸손과 겸화와 인내와 함께 (에페소 4,2)

 

그리고 그는, 혹시 그들이 난폭하게(wild) 될까 염려하여, 혹시 그들이 교만하게(proud) 될까 염려하여, 커다란 견디어냄(endurance)을 제안합니다. 첫 번째로 그는 겸손(humility)을 제안하고, 그러고나서 겸화(謙和, mansuetudo, gentleness)를 제안합니다. 겸손(humility)은 영혼을 낮추는 어떤 행위입니다. 겸화(謙和)는 교만(pride)과 [십계명들 중의 제5계명에서 금지하는 살인(인격 살인 포함)과 같은] 야만적 행위(brutality) 위에 있는 굴레(bridle)입니다. 그런 다음에 뒤따르는 바가 인내(patience)인데, 만약에 반대하는 사물들이 닥치면, 바로 이 인내에 의하여 그들은 견디어냅니다(endure). 초기에, 그러면, 혹시라도 그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는 두 개의 사물들을 제안하는데, 겸손겸화(謙和)입니다. 바로 이들 두 사물들을 뒤따라, 만약에 그들이 고통을 겪는다면, 그리하여 그들은 인내하게 된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모든 도량(magnanimity과 함께 계속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바로 이 도량은 그리하여 그 결과 그대가 인내하면서 고통을 겪을뿐만이 아니라, 다만 그대는 어떤 똑바로 선 영혼과 함께 항상 그렇게 합니다. [...]

(이상, 유관 부분의 우리말 번역 끝)

 

-----

(*) 게시자 주: (1)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영어 가톨릭대사전 등에 주어진, 성 예로니모가 청년인 시절에 로마에서 그에게 수사학을 가르쳤던, 바로 이 라틴 교부 Caius Marius Victorinus(카이오 마리오 빅토리아노, 300-370년)에 대한 안내의 글을 읽을 수 있다:

https://www.newadvent.org/cathen/15414b.htm 
https://en.wikipedia.org/wiki/Gaius_Marius_Victorinus 

 

(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Victorinus Afrus, 즉, Marius Victorinus라틴 교부들에 포함됨을 확인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21.htm

-----

 

게시자 주 4-2: (1) 특히 바로 위의 제4-2항에 발췌된 글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고[제목: (i) 인내(patience), (ii) 끈기/항심(恒心)(perseverance), (iii) 또다른 종류의 끈기/항심의 커다란 차이점들; 게시일자: 2022-11-12]에서 말씀드린 "인내"(patientia, patience)와 직접적으로 유관한 글이기도 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인내_vs_끈기_vs_최후의_끈기_2795.htm <----- 또한 필독 권고  

 

(2)

"Victorinus Afrus" [주: 구글 검색 결과]

http://www.documentacatholicaomnia.eu/30_10_0362-0372-_Victorinus_Afrus.html 

https://www.documentacatholicaomnia.eu/04z/z_0362-0372__Victorinus_Afrus__De_Trinitate_Hymni__MLT.pdf.html 

 

https://la.wikisource.org/wiki/Patrologia_Latina/Scriptores 

(이상, 게시자 주 4-2 끝)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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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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