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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주교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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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10-03-29 ㅣ No.22

김옥균 주교 삶과 신앙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의 삶 산 목자
 
 
김옥균 주교는 1925년 12월 유서 깊은 교우촌인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대대리에서 아버지 김병희(필립보)와 어머니 방 아가타 사이의 2남 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공소 회장이었고, 그의 집은 곧 마을의 공소였다.
 
김 주교는 네다섯 살 무렵 공소 미사가 시작되면 으레 맨 앞자리에 앉아 미사 광경을 뚫어지게 지켜봤고, 미사가 끝나면 제의 대신 혼자 담요를 덮어쓰고 밥상 앞에서 미사드리는 모습을 흉내내곤 했다. 그런 그가 사제의 꿈은 갖게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읜 김 주교에게 신앙적으로 절대적 영향을 미친 이는 어머니였다. 김 주교는 어느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매일 새벽에 나를 데리고 미사에 참례하셨던 그 정성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주는 믿음의 원천"이라며 "내가 주교지만 어머니 신앙심은 못 따라간다"고 어머니의 깊은 신앙과 사랑에 고개를 숙였다.
 
김 주교가 일곱 살 때 이사를 간 남곡리(은이)는 한국교회 첫 번째 사제 성 김대건 신부가 사목했던 성지였다. 김 신부가 공소로 썼던 집과 붙어있는 집에 살았던 김 주교는 사제 생활 내내 용인 은이공소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집무실에 김대건 성인 유해를 모셔놓고 성인의 도우심을 청한 김 주교는 한국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주교 사목 표어도 '이 땅에 빛을'로 정하기까지 했다.
 
그는 1942년 서울 소신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태평양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함경도 덕원으로 옮겨 신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덕원신학교와 용산에 있던 소신학교를 거쳐 1950년 혜화동 성신대학(대신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신학교에 복학한 그가 갑작스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것은 당시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의 명에 따라서였다. 김 주교는 프랑스에서 사제품을 받고 신문학을 공부했다. 그때 서울대교구가 경향신문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신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노 대주교의 생각이었다.
 
1959년 김 주교 귀국 직후 경향신문이 폐간됨에 따라 신문학을 공부한 보람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러한 그의 경력을 가톨릭출판사 사장으로, 그리고 훗날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을 설립하고 재단이사장으로서 매스컴을 통한 선교라는 새로운 장을 열게 하는 데 적극 활용하셨다.
 
귀국 이후 김 주교는 1985년 3월 주교로 임명될 때까지 서울대교구장 비서 겸 가톨릭출판사 사장, 종로ㆍ명수대ㆍ청파동ㆍ수유동본당 주임과 교구 사무처장ㆍ관리국장ㆍ총대리 등을 지내면서 본당 사목과 교구 행정을 두루두루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이 폭넓은 사목 경험이 1980∼90년대 총대리 주교 시절, 교세가 급팽창하는 전환기에 교구 행정을 체계화하고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서울대교구 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데 원동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김 주교를 처음 볼 때는 빈틈이 없는 엄한 아버지 같은데,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것을 볼 때면 더없이 부드러운 인품을 가진 분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를 만났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이다. 누구에게나 따뜻한 미소와 악수로 대하는 김 주교는 그래서 모든 것을 다해줄 것만 같은 자상한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곤 했다. 김 주교가 서울대교구 총대리로 17년간 살아오면서 보여준 사목 스타일도 늘 따스하면서도 때로는 엄하게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김 주교는 스스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성격'이라고 할만큼 신중했고, 또 순리를 따랐다. 방대한 서울대교구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선 모든 면에서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구 관계자들은 김 주교가 재임하는 동안 교구가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면서도 별다른 무리가 없었던 것은 이처럼 신중하고도 순리를 따르는 그의 성품 및 업무처리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김 주교는 교구 인사 및 재정 책임자로서 생각지도 못한 비난을 받을 때마다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겼다고 한다. 또 사제 인사 때 외지로 나가는 사제들을 개인적으로 불러 등을 두드리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2001년 김 주교가 퇴임할 때 "교구 행정을 체계화하고 재정을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아 지난 20년간 수많은 본당을 신설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김 주교님 공로"라고 김 주교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꼼꼼한 김 주교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매사에 공평하고 소홀함이 없도록 중용의 길을 걷고자 노력해왔지만 손이 부족하다 보니 소외지역이 있게 되더라"고 여러 차례 토로했던 김 주교는 사회복지 시설과 가난한 이들을 찾아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직접 챙겨주기도 했다. 김 주교의 이러한 관심과 보살핌은 은퇴 후에도 1주일에 한 번씩 서울 신내동에 있는 노인 요양원에 가서 봉사하는 활동으로 오랫 동안 이어졌다.
 
김 주교는 최근 "하느님께서 제게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보시면 드릴 말씀이 없다는 것이 화두"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김 주교가 사제와 주교로서 이룬 업적을 돌이켜보면 겸양의 표현임을 금방 알 수 있는 이 말은 삶과 신앙에 대한 그의 자세를 엿보게 한다.
 
그는 평소 후배 사제들에게 당부한 것처럼 계획성 있는, 겸손한, 그리고 기도하는 삶을 살다가 갔다. 김 주교는 은퇴 후 평화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지금 내 안에는 주님만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지금 그는 그토록 갈망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
 
 
김옥균 주교 약력
 
△1925년 12월 9일 경기도 용인 출생
△1949년 12월 성신대학(현 가톨릭대) 철학과 졸업
△1954년 12월 프랑스 릴가톨릭대 신학과 졸업
△1954년 12월 사제수품(프랑스 릴교구주교좌성당)
△1957년 7월 릴가톨릭대 대학원 졸업(신학 전공)
△1959년 6월 릴가톨릭대(신문학 전공)
△1959년~1962년 서울대교구장 비서 겸 가톨릭출판사 사장
△1962년 서울대교구 상서국장
△1965년~1982년 종로ㆍ흑석동ㆍ당산동ㆍ노량진 동ㆍ청파동ㆍ수유동본당 주임
△1982년~1985년 서울대교구 사무처장ㆍ관리국장ㆍ총대리 겸임
△1985년 4월 주교수품,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겸 총대리
△1989년~2001년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이사장
△2000년 6월 가톨릭대 명예문학박사 학위
△2001년 12월 원로사목자
△2010년 3월 1일 선종
 
 
▲ 1996년 한국 주교단의 교황청 정기방문에 참석한 김옥균 주교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고 있다.
 
 
 
▲ 본당 주임 시절 유치원생과 함께한 김옥균 주교.
 
 
 
▲ "자, 갑니다." 주교복을 입고 테니스를 치는 김옥균 주교.
 
 
 
▲ "그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서울대교구 총대리 사임 후 가톨릭미술아카데미 실기과정에 등록해 정물 데생을 하고 있는 김 주교.
 
[평화신문, 2010년 3월 7일, 남정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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