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가난한 과부의 헌금 (마르 12,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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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11-11 ㅣ No.134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가난한 과부의 헌금 (마르 12,38-44)

 

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역할을 크게 부각하면서, 평신도를 통하여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1968년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지금은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의 결성과 더불어 해마다 대림 제1주일을 ‘평신도 사도직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사도직의 사명을 거듭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뒤 1970년부터는 연중 마지막 주일의 전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내 오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연중 마지막 전 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하면서 2017년부터 한 주 앞당겨 지내고 있다.

 

엘리야 예언자는 사렙타의 과부에게 물과 빵을 청하고는, 그 여자의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왕상 17,10-16)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는 10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고 한다. (히브 9,24-28)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신다. (마르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 32주일 제1독서(1열왕 17,10-16)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2~13)

 

고대 근동 사회에서 '과부'는 대부분 남편의 사망으로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위치에 있었다. 물론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는 죽은 자기 형제의 형수를 취하는 '수혼제'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사이에도 보편적으로 관습화된 것으로 여겨진다(창세38,6-11; 룻기1,11-13).

 

당시 사회적 약자인 과부들은 이같은 풍속을 통해 나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같은 보호는 죽은 형이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을 때에만 적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렙타 과부의 경우처럼(12절) 자식이 있는 경우는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더 망막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스라엘의 경우는 이들에 대한 보호를 탈출기 22장 21-24절이나 신명기 14장 29절에 명문화할 만큼, 적극적인 책임을 그 주변의 이웃에게 부과하고 있지만, 이방인인 이 여인은 어떤 보호와 동정도 구할 여력이 없는 극한 절망에 처해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 예언자에게 음식을 제공하도록 하셨다.

 

더욱이 그 과부는 엘리야 예언자가 그토록 혐오하는 바알 종교의 원산지인 시돈에 살고 있는 여인이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심오한 섭리가 담겨진 곳으로, 약한 것을 선택하셔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느님의 능력(1코린1,27-31)과 이방 세계에 대한 구원 계획을 보여준다(루카4,24-26).

 

 

또한 본문은 다른 각도로 보면, 아합왕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쳐 북부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와 아쎄라 숭배를 만연시킨 '시돈의 공주' 이제벨을 물리치시기 위해서 '시돈의 과부' 하여금 엘리야를 돕게 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 수 있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당시 사렙타의 과부가 '하느님'의 이름을 내세워 맹세한 것은 그녀가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교류가 많던 페니키아의 한 여인으로서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말에 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단지 이스라엘의 민족신인 하느님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이 여인이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이나 '우리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 않고, '어르신의 하느님'(당신의 하느님)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사렙타 여인이 가지고 있던 음식 재료의 전부였다. '한 줌' 해당하는 '멜로 카프'(mello kaph)'채우다'라는 동사 '말레'(malle)에서 파생된 명사'멜로'(mello)'손바닥'을 뜻하는 명사 '카프'(kaph)가 연결된 것으로, 손바닥을 채울 정도의 소량을 뜻한다.

따라서 '단지'(큰 도기 항아리)를 뜻하는 '카드'(kad)에 겨우 이 정도의 가루가 있었다는 것은  과부의 극심한 빈곤 상태를 대변해 보여준다.

 

또한 '병'을 뜻하는 명사 '찹파하트'(tsappahath)는 병사가 전쟁터에 나갈 때 휴대할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용기를 지칭한다(1사무26,11). 이 작은 병에 들어있는 소량의 기름 역시 과부의 빈곤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본문에 묘사된 과부의 극심한 빈곤 상태는 후에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풍성함을 극대화시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본문은 12절에 나오는 사렙타 과부의 절박한 대답에 이어 엘리야가 낙심과 절망에 빠진 여인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두려워'에 해당하는 '티르이'(thiri)의 원형 '야레'(yare)'두려워하다'(창세20,11),'경외하다'(2역대19,9)라는 뜻으로 두려움 뿐만 아니라 존경이나 경외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와 같이 '두려워하지 말고'라는 의미의 부정(否定) 명령으로 사용될 때에는 위로나 인사의 말이 된다(창세50,19).

사렙타 과부는 너무나 암울한 미래에 대하여 큰 두려움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미 모든 식량이 바닥이 나고 더 이상 삶을 지탱할 만한 물질이나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기대할 것이라고는 죽음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러한 과부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확고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한편, 원문에 나타난 '야레'(yare)동사를 통하여 우리는 중요한 신앙적 메시지를 발견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인생에 밀어닥치는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차원의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불확실한 인생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존하신 주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느님만을 두려워할 때 비로소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인간적인 두려움들을 온전히 제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큰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여기서 엘리야는 마지막 남은 식량으로 빵을 만들어 누구보다 먼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인 자신에게로 가져오라고 명하고 있다.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두려워하지 말고'라고 권면하면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인 행동원리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향한 의지적 결단과 그에 다른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걱정이나 염려나 두려움을 하느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방법 뿐이다(필리4,6).

 

한편, 엘리야는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먼저' 자신에게로 가져오라 말한 후,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라'고 말한다.

인간적으로 판단할 때에는 참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과부는 분명히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지극히 적은 양으로 겨우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 밖에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렙타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전혀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주님께서 그 집에 식량이 떨어지지 않게 할 것(14절)이라는 예언자의 말을 그대로 믿고 순종한다.

 

이러한 순종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그녀의 심령을 감동시키신 결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순종의 결과 그녀와 그 아들은 육신적인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24절; 루카4,24~26).

 


 

 

 

 

연중 제32주일 복음 (마르코12,38-4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43ㄴ~44)

 

마르코 복음 12장 38절~40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성주간 화요일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신 마지막 설교 말씀이며, 12장 41절~44절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날 일어난

마지막 에피소드요 활동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종교 지도자들과 수차례 논쟁을 마치시고, 이제 마지막으로 군중들을 상대로 위선적인 유다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계 및 그들에게 내릴 화를 선포하시는 이다(마태23,1~36; 루카20,45~47 참조).

 

특히 마르코 복음 12장 40절에 나오는 '과부'에 해당하는 '케라'(chera; widow)가부장적 사회였던 유다 사회에서 가장을 여윈 자로서, 고아와 더불어 경제력을 잃어버린 대표적 부류이며, 사회적으로 가장 보호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다(탈출22,21; 신명24,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율법을 잘 지키고 남들보다 더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며 도와주어야 할 율법학자들이 그러한 과부들의 가산을 강제적으로 혹은 교묘하게 착복했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이며, 반율법적인 행위이다.

 

여기서 '가산'에 해당하는 '오이키아스'(oikias; houses)의 기본형 '오이키아'(oikia)는  일차적으로 '집'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건물로서의 집만이 아니라 집으로 대표되는 모든 재산을 뜻하는 비유법으로 쓰였다.

 

이제 마르코 복음 12장 41절~44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헌금을 바치는 자들의 태도를 자세히 관찰하시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루카21,1-4 병행).

 

여기서 '헌금함'은 성전 안의 '여인의 뜰'에 있었다. 이곳은 이방인의 출입이 통제되었고, 남녀 유다인들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이곳은 남자들의 뜰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 위치하며, 벽들 따라 일렬로 놋쇠로 된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13개 놓여 있었다.

이 가운데 9개는 성전세나 희생 제물 대신에 바치는 헌금을 넣는 함이었고, 4개는 성전의 수리와 장식을 위한 헌금을 넣는 함이었다.

 

마르코 복음 12장 41절'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라고 나오는데, '많은 부자들이'에 해당하는 '폴로이 플루시오이'(polloi plousioi; many rich people)'큰돈'에 해당하는 '폴라'(polla; much; in large amounts)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부자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많은 헌금을 했다는 말인데, 그들이 인간적인 과시를 위해 헌금을 했다는 암시를 강하게 주는 것이다.

 

특히 '넣었다'에 해당하는 '에발론'(eballon; threw; cast in)'넣다', '던지다' 라는 뜻의 '발로'(ballo)의 미완료형으로서, 미완료 시제가 행위의 계속과 반복을 나타낸다는 점을 볼 때, 그들이 자신이 부자임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헌금을 계속해서 헌금함에 넣었음을 묘사한 것이다.

 

한편, 가난한 과부가 넣은 '렙톤 두 닢'에 해당하는 '렙타 뒤오'(lepta dyo; two very small copper coins)에서 '렙톤'은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통용되던 화폐 중 가장 작은 화폐였다.

이것은 로마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콰드란스'의 2분의 1 가치를 지녔고, '한 콰드란스'참새 두 마리의 가격에 해당하는 '앗사리온'('한 닢'; 마태10,29)의 4분의 1가치를 지녔다.

따라서 '두 렙톤', 즉 '한 콰드란스'라는 말은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적은 액수였는지를 드러내는 말이다. 특히 앞의 부자들의 많은 헌금과 비교하면, 그 액수는 더욱더 초라해진다.

 

마르코 복음 12장 42절 '넣었다'에 해당하는 '에발렌'(ebalen; put in; threw in)'넣다', '던지다'는 뜻의 '발로'(ballo)의 부정(不定) 과거형인데, 이것은 단순히 어떤 동작이 발생했음을 나타내는 시제이다.

이것은 부자들의 행동과 대조되는데, 과부는 한순간의 동작으로 헌금을 헌금함에 넣는 행동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코 복음 13장 43절에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말씀하신다.  '더 많이'에 해당하는 '플레이온'(pleion; more)'많은'이란 뜻의 형용사 '폴뤼스'(polys)의 비교급이다.

 

많은 부자들이 많은 액수의 헌금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사람들보다 두 렙톤을 넣은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계산 방법은 인간의 계산 방법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산술적으로 잘못 평가된 것 같지만, 하느님의 계산법은 신앙적 기준에 의한 것이며, 겉이 아니라 속, 즉 양(量)이 아니라 질(質)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오류가 아니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마르12,44)를 드린 것이었으며,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과부의 헌신과 봉헌의 정도를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생활비'에 해당하는 '비온'(bion; living) 기본형 '비오스'(bois)넓은 의미로 '생'(生), '생명의 기간이나 과정'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처럼 그러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재물'이나 '부'(富)를 뜻하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

따라서 '생활비를 모두 다'에 해당하는 '홀론 톤 비온 아우테스'(holon ton bion autes; all she had to live on; even all her living)는 단순히 의식주 문제와 관련된 비용이 아니라 그 과부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 전부를 뜻한다.

이러한 생활비를 하느님께 봉헌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께 맡기는 절대적인 신앙을 드러내었다는 뜻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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