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17주일]주님의 기도 (루카 1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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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일]주님의 기도 (루카 11,1-13)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만 찾을 수 있어도 그곳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하신다. (창세 18,20-32)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빚 문서를 지워 버리셨다고 한다. (콜로 2,12-1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청하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11,1-13)
연중 제17주일 제1독서 (창세18,20-32)
그 무렵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 보아야겠다." (20-21)
'원성', '부르짖음'에 해당하는 '자아카트'(zaaqath)는 '소리지르다'(1열왕22,32), '소리를 지르다', '외치다'(1사무28,12)를 뜻하는 '자아크'(zaaq)에서 유래하여 '울부짖는 소리, '외침'(예레27,28)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본문에서 하늘을 향한 억울한 사람들의 애절한 호소인 듯이 보인다. 이 단어가 '크다'는 의미를 지닌 '랍바'(rabba)와 함께 쓰여 소돔과 고모라인들의 죄악이 극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창세4,10참조).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무겁구나'에 해당하는 '카바드'(habad)는 '무겁다'(2사무14,26), '병들다', '둔하다'(이사39,1)는 뜻으로 죄가 너무 많아 무거워서 움직이기에 둔할 정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너무가', '대단히', '매우', '심히'라는 뜻을 가진 '메오드'(meod)가 이 단어와 함께 사용되어 소돔 사람들의 '죄악'(hatatham; '핫타탐')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소돔 성의 멸망은 그 도시에 만연된 죄악상이 이처럼 극에 달하였기 때문인데, 이들은 성적으로 깊은 타락의 늪에 빠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매우 부패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소돔은 고모라와 함께 그 이름이 후세 사람들에게 '죄악의 도시'를 대표하는 명칭이 되었고 (이사3,9; 예레23,14; 마태10,15), '소도미아'(sodomia)하면 자연법이면서 동시에 신법을 거스르는 죄인 '동성연애'(Homo Sexuality , Lesbian)를 뜻하게 되었다.
"그들과 같은 식으로 불륜을 저지르고 변태적인 육욕에 빠진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 고을들도,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아 본본기가 되었습니다." (유딧1,7)
'이제 내가 내려가서'
'내려가다'로 번역된 '에라다'(eradah)는 '야라드'(yarad)의 1인칭 권유형으로서 '나로 하여금 내려가게 하라'( Let me go down)로 직역할 수 있지만, 그 본래 뉘앙스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명령하시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즉 울부짖는 소리의 원인이 무엇인지 직접 사실을 조사하러 내려가시겠다는 것이다.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로 번역된 '아수 칼라'(asu kalla)에서, '칼라'(kalla)는 원래 명사로서 '완성', '성취'라는 뜻이 있으며, 부사로 사용될 때는 '완전히', '정녕', '모두'(탈출11,11)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고 '저지른 것'으로 번역되는 '아사'(asa)는 '만들다'(탈출20,11; 1열왕15,13), '어떤 일을 하다'(탈출5,9; 느헤4,15)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인들이 행한 죄악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그들이 완전히 행했는지'이며, 의역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죄악을 다 저질렀는지'이다.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나에게 들려온'에 해당하는 '합바아 엘라이'(habbaa ellai)에서 '들려온'으로 번역된 '합바아'는 직역하면 '온'(which has come)이다.
사실 부르짖음에 대해서 '듣다'라는 동사 '샤마'(shama)가 더 어울리지만, 굳이 여기서 '오다'라는 뜻이 있는 '뽀'(bo)가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부르짖는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부르짖으며 다가오고 있는 인격체 전체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신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세상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살피시며, 당신의 공의에 따라 역사를 진행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알아 보아야 겠다'
'알아 보아야겠다'에 해당하는 '야다'(yada)에는 철저히 조사하여 정확한 실상을 파악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은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하여 결국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는 심판을 통해 멸망시키겠다는 것과 동시에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피상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조사하심은 물론 반드시 결산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연중 제17주일 복음 (루카11,1-1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르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10)
루카 복음사가는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 11장 5~8절에서 '한밤중에 찾아온 벗의 비유'를 들고, 기도 응답에 대한 보다 분명한 확신을 주기 위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세로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받으며, 하느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내용이 기록된 11장 9~13절을 첨가한다.
11장 9절에 '청하여라'로 번역된 '아이테이테'(aiteite; ask)는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게 청하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되는 '아이테오'(aiteo)의 현재 명령형이다. 이것은 아들의 신분인 하느님의 자녀가 위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이 동사가 현재 명령법으로 사용되어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청할 것을 강력하게 명령하고 있으며, 또한 능동태로 사용되어 자신이 직접 청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단어가 '기도'와 관련해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루카10,13; 마태18,19; 마르11,24).
한편 '주실 것이다'로 번역된 '도테세타이'(dothesetai; it will be given)는 '주다'를 뜻하는 '디도미'(didomi)의 미래 직설법 수동태이다.
희랍어 문법에서 미래 직설법은 미래에 반드시 발생할 어떤 사건에 대한 강한 확신을 뜻하므로, 여기서는 하느님께 청하면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강한 확신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찾아라'로 번역된 '제테이테'(zeteite; seek)는'발견하기 위해서 애써서 찾는 것'을 의미하는 '제테오'(zeteo)의 현재 명령형이다.
'제테오'(zeteo)는 되찾은 은전의 비유(루카15,8), 되찾은 양의 비유(마태18,12)에도 사용되었고, 하느님을 찾는 데도 자주 사용되었으며 (신명2,29; 이사55,6; 65,1; 사도17,27), 천국의 잔치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루카13,24).
따라서 '찾아라'는 것은 단지 성도 개인에게 필요한 것만을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자신을 찾으라는 의미까지도 포함된다.
한편 '얻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휴레세테'(hyuresete; you will find)는 미래 능동태로서 '너희들이 능동적으로 발견할 것이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생겨나는 것을 암시한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예레29,13~14ㄱ)
그리고 '문을 두드려라'로 번역된 '크루에테'(kruete; knock)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는 안되게끔 열성을 다해 간절히 두드린다는 의미를 가진 '크루오'(kruo)의 현재 명령형이다.
이렇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가 구하는 실제 내용이 하느님께 상달되어 문제에 대한 해결의 문을 하느님께서 반드시 확실하게 열어 주신다는 것이다.
'열릴 것이다'에 해당하는 '아노이케세타이'(anoigesetai; will be opened)는 '열다'를 뜻하는 '아노이고'(anoigo)의 미래 직설법 수동태이다. 이것은 멀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열릴 것이라는 확신을 불어넣어 주고, 또한 수동태로서 그 응답의 비결이 바로 하느님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루카 복음 11장 9절의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는 점점 적극성을 띠는 자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이같은 집요함과 끈질긴 인내, 그리고 열성이 담긴 기도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루카 복음 11장 10절에서는 11장 9절의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 '가르'(gar; for; 왜냐하면)로 시작하여 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설명해준다.
11장 10절의 원문은 모두 동사가 현재 직설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의 기도의 응답이 먼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일이라는 것을 생동감있고 실감나게 표현해 주고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