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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바오로 사도의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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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73

 

 

신약 바오로 사도의 서간

 

 

-백광진 신부님의 인터넷 성서 자료 참조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다. 이와 같이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이다."

- 1고린 9,19.22.23

 

 

 

1. 바오로의 편지의 정경화(성서로 인정됨)

신약성서 27권 중에서 20권이 편지다. 그런데 신약성서의 편지들은 엄밀히 말해서 개인적 용무만을 위한 사신(私信)은 하나도 없고 모두 상당히 큰 공동체들을 위해 기록되었다. 심지어 필레몬서와 같이 한 개인에게 보낸 편지도 그 수신자의 이름이 '당신의 집안에 있는 교회'로 되어 있어 그 공동체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바오로의 편지들은 우선 머리말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이름과 서로의 안부를 전한다. 다음엔 중재기도와 종말론적 희망을 포함하는 감사나 축복의 말씀이 나오다. 그리고는 종말론적인 결론으로 끝나는 편지의 본 내용이 이어진다. 그 다음엔 사목적 권고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편지의 끝맺음은 고별인사와 축복으로 되어 있다.

  바오로는 편지의 형태를 빌려 이제 막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 공동체에게 복음의 내용을 좀 더 깊이 해설해 주고 그 공동체를 사목적으로 격려하고 지도했다. 이런 까닭에 초대 교회는 바오로의 편지를 성서로 채택하여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읽게 했다.

 

2. 바오로 서간의 주제

하느님은 나자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약의 약속을 실현시키셨고 이 예수를 영광의 주님으로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선포한다.

 

3. 바오로 서간의 저자

바오로의 이름으로 씌어진 편지들은 도합 13권이다. 히브리서는 바오로의 이름으로 씌어지지 않았고 실제의 내용과 문체에 있어서도 바오로의 편지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13권의 편지들 중 의심할 여지가 없이 바오로의 것으로 보이는 책은 로마서, 고린토 전. 후서, 갈라디아서, 필립비서, 필레몬서, 데살로니카 전서로 총 7권이다. 여기에 덧붙여 골로사이서, 데살로니카 후서가 약간의 의심은 있지만 대체로 바오로의 친저로 인정된다. 에페소서는 언어와 사상에 있어서 바오로의 다른 편지들, 그 중에서도 특히 골로사이서를 많이 닮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이 편지의 저자가 바오로가 아니라 바오로를 잘 알고 그를 존경하는 사람으로 믿고 있다.

  4복음서의 집필 연대가 70년에서 100년 사이로 비교적 1세기 말엽인데 비해서,  바오로의 친저 편지들은 49년에서 바오로의 순교(대략 64년) 직전까지 1세기 중엽에 기록되었다.

  마지막으로 사목 서간으로 알려져 있는 디모테오 전. 후서와 디도서는 바오로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2세기초에 편집된 것으로 보이다.

 

4. 바오로와 복음사가  

  사도행전과 바오로의 편지들을 토대로 바오로가 복음사가들 중 적어도 마르코와 루가와는 서로 친분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우선 마르코는 요한 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사도 12, 12) 어머니 마리아(성모님이 아닌 다른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거주하다가 바오로와 자신의 삼촌 바르나바를 만나 한때는 그들과 전도여행을 같이 하기도 했다(사도 13, 5;골로 4, 10). 그러나 마르코는 바오로가 자신의 동행 문제로 바르나바와 의견 충돌을 일으키자 바오로가 필레몬서를 쓰고 있었을 당시에는 그와 함께 지냈다(필레 24절). 그 외에 마르코가 감옥생활을 하는 바오로를 도와주었다는 기록도 있다(골로 4, 10; 2디모4, 11).

  다음으로 루가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 3번의 언급이 있다. 필레몬서 24절에서 루가는 바오로의 동업자로 소개되고 골로사이서 4장 14절에선 '사랑하는 의사'로 묘사되다. 그리고 디모테오 후서 4장 11절엔 루가만이 바오로를 끝까지 수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기록들이 얼마나 역사적인 신빙성을 갖느냐도 문제이지만, 그 복음사가들이 직접 그 복음을 썼느냐에 대해서 대개는 회의적이고 또 동명이인(同名異人)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바오로가 위의 두 복음서 저자들과 친분을 맺었노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 어렵다.

 

5. 바오로

바오로의 출생에 관해서는 사도행전이 전해주고 있는 몇 가지 정보 이외에 다른 자료가 없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는 다르소 시에서 출생했다(22, 3; 21, 39 참조). 다르소 시는 바오로의 초기 선교활동의 주무대였던 길리기아 지방에 있는 한 도시로서 희랍문화가 상당히 발전되었던 도시로 평가되었다. 바오로가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이스적 사고방식과 대화술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지식은 이 도시에서 길러진 게 아닐까요?

  불행히도 바오로가 언제 탄생했는지, 또 그의 부모의 이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해주는 자료는 전혀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바오로가 예수보다 10여 년 늦게 출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기원전 6년경 탄생하셨으니 바오로는 서기 5년경에 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문이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는 증언은 바오로의 자신의 편지에 나와 있다(로마 11, 1; 필립 3, 5).

 

6. 바오로의 외모

  "바오로의 편지는 무게도 있고 단호하기도 하지만 막상 대해보면 그는 약하기 짝이 없고 말하는 것도 별 것이 아니다"(2 고린 10, 10)

  바오로의 편지와는 별도로 2세기 말경 <바오로 행전>이라는 전설 모음집이 발간되었는데 역사적인 신빙성은 없지만, 꽤나 자세하게 바오로의 외모를 전해주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바오로는 땅딸막한 대머리 총각이고 다리가 양가발이로 뒤틀려 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약간의 매부리코에 양미간에 짙은 눈썹이 교차하는 안면과 더불어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용모라면 그 누구도 바오로를 미남이라고 일컬을 수는 없겠다.

  그런데 <바오로 행전>은 이런 기형적인 용모에도 불구하고 바오로가 은총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결국 바오로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얻어진 내면의 아름다움이 그의 육체적인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는 말이겠다.

  실제로 바오로 자신이 편지들에서 끊임없이 불평하는 것처럼 그에게는 불치의 병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지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들을 해본다. 간질, 말라리아, 만성적 안질 등.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열한 장황한 육체적 고통들은 그의 병약한 체질에 대한 게 아니라 그가 당한 고생을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다. 어떻든 그는 세 번씩이나 이 만성 질병에서 구해주시도록 하느님께 청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와 같은 치유의 은혜를 입을 자격이 없음을 시인하고 이 육체의 연약함을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한 채찍질로 받아들이다.

 

7. 사울과 바오로

사울이라는 이름은 유다식 이름이고 바오로는 그것의 로마식 이름으로 처음부터 그는 이 두 가지 이름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오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스스로를 한 번도 사울이라고 부르지 않고 언제나 바오로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의 이름을 처음에는 사울이라고 했다고 개종 이후 그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이방인의 영역에로 넘어갈 때부터 바오로로 바꾸어 부른다(사도 13, 9).

  성서적 전통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이름을 바꿔 부를 때에는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아브람을 인류의 조상으로 삼으시며 가나안 복지로 가도록 명하실 때에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 부르신 것이라든가, 예수께서 시몬 바르요나를 당신 제자로 삼으시면서 게파(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다.

  유다교에만 집착해 있었던 사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새로운 소명인 이방인 선교에 첫발을 내딛는 과정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사도행전의 저자는 개종전후의 이름을 구분하여 불렀다.

 

8. 바오로의 예수 체험

바오로가 예수를 알게 된 때에는 34년경이라고 보면 무방한다. 사도행전에서는 그의 회심을 다마스커스와 관계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에 반해 바오로의 편지들은 자신의 회심을 '계시'(갈라 1, 16), '새 창조'(2고린 5, 17),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1고린 15, 8)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바오로의 회심은 악인에서 선인으로 돌아서는 윤리적인 '회개'도 아니었고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의 '개종'도 아니었다. 바오로는 회심 이전이나 이후에나 윤리적인 수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회심 이후에도 유다교를 의식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오로의 회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 곧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심'(로마 8, 9)으로써 그리스도께 소속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바오로가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그리고 원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을 어떤 경로를 밟아 얻게 되었는지는 사도행전에서도 그 자신의 편지들에서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9. 바오로의 여행수단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오로는 세 차례에 걸쳐 전도여행을 단행했다. 그런데 이 세 차례의 전도여행 모두 출발점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였다. 그리고 제3차 전도여행의 종착역은 예루살렘이었지만,  제1차와 2차 여행은 종착역도 안티오키아였다. 마지막으로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로마로 압송되었고 전승에 의하면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중해 동쪽과 북쪽의 거의 전 지역을 포함하는 이 모든 여정들은 육로와 해상을 통과했는데 당연히 육로여행 때는 도보와 말, 당나귀, 수레 등을 타고 다녔을 것이고 해상 여행은 돛과 노를 가진 목선을 이용했을 것이다.

 

10. 바오로의 직업

랍비들은 율법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돈을 받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정한 생업을 가져야 했다. 바오로는 원래 비교적 부유한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도 복음을 전파하면서 돈 받기를 거부했고 천막 짜는 일로 자신의 생활비를 벌었다(사도 18, 3).

 

11. 바오로의 사도성

그리스도교의 사도는 두 가지 조건을 채워야 한다. 첫째 그들은 교회사 안에서 첫번째 세대에 속해야 하고, 둘째 무엇보다 복음전파의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열 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바오로는 역사적 예수와 함께 생활했던 열 두 제자들 틈에 끼지 못했던 탓으로 처음에 초대교회 안에서 사도로서의 그의 권위가 간혹 의심과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거세게 반발하면서 바오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임을 거듭거듭 강조하면서(로마 1, 1; 1고린 9, 1-2;15, 9; 2고린 11, 4-5) 자신의 가르침도 다른 사도들이나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직접 전해들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갈라디아서 첫머리에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나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다"고 선언한다. 바오로는 자신과 열 두 사도들 이외에도 '주님의 형제'(유다인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먼 친척도 형제 자매로 불렀다) 야고보와 바르나바도 사도로 생각하였다(갈라 1, 19; 1고린 9, 6; 15, 7). 교회의 직책 중 사도직을 최상의 은사로 소개하고 이 직책은 놀라운 표정과 기적들을 동반함으로써 거기에 신적인 권위가 부여된다고 믿고 있다(2고린 12, 12).

 

12. 사도단과 바오로

바오로는 복음 앞에서 그리고 주님의 식탁 앞에서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해왔고 베드로와 바르나바도 그 사실을 받아들였는데 예루살렘의 수구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도착하자 비겁하게 이방인들과 음식을 나누지 않은 체하며 피했다.

  바오로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직접 대고 "당신이 이미 그리스도의 법을 받아들여 유다인으로서의 모든 규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는데 왜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려는 이방인들을 유다교의 규정에 묶어 놓으려는거요?"하고 면박을 주었다(갈라 2, 14). 베드로가 워낙 잘못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도 없이 바오로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사건이었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의 사도단이 바오로를 지지하고 이방인 선교에 대한 그의 독보적 권한과 위치를 인정한 것으로 묘사된 것과는 달리, 바오로는 이방인 선교 벽두에 야고보를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수구파들로부터 상당한 방해를 받았던 것 같다.

  그들이 가장 크게 문제를 삼고 있었던 것은 그의 가르침의 정통성 여부였다. 바오로는 분명 열 두 제자의 무리에는 속하지 못했지만 그는 여러 번 자신 있게 자신의 가르침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얻어진 것이고 자신의 이방인 사도직도 주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과 그가 이룩한 이방인 선교의 놀라운 결실을 보고 종내는 사도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수구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도 그의 사도직을 인정하며 그를 동업자로 받아들였으리라 확신한다.

 

13. 사도 바오로의 동료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오로는 첫 전도 여행 때 바르나바와 요한 마르코를 동반자로 삼았다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헤어집니다. 두번째 전도 여행 때에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동반자로 맞아들이다. 세번째 전도 여행은 브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시작한다.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바오로의 중요한 협력자로서 그리스인 디도를 빼놓을 수 없겠다.

  이외에 바오로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게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바오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이들에 대한 안부를 소상히 묻거나 문안해달라는 부탁을 하곤 하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오로는 27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문안을 부탁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정을 맺는데 각별히 신경을 쓴 거다.

 

14. 바오로의 언어

바오로가 길리기아 지방의 다르소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유다인들이 팔레스티나를 떠나 여러 이방지역에 흩어져 사는 현상)의 유다인 출신이면서 예루살렘에서 랍비 교육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아라메아어와 그리스어 둘 다 능통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의 주요 선교대상이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향한 그의 연설이나 편지들은 당연히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15. 바오로의 성격

복음에 대한 열정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헌신적 봉사와 사랑은 바오로를 단단히 무장시켰다. 그는 무슨 일에든지 적극적이었고 자신이 한번 진리라고 생각한 일에 진지하고 철저하게 몰두해 들어갔다.

  설상가상으로 바오로는 그의 권위와 가르침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반대자들의 공격에 끊임없이 반박성명을 내야 할 형편이었다. 이 모든 요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바오로로 하여금 자신의 편지들 안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복음과 권위가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성공적인 그의 선교활동이 자신의 약점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나칠 만큼 강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균형을 잃어버린, 그리하여 영원히 자기 나팔만을 부는 사나이로까지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 같다. 그러나 바오로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업적이나 능력을 자랑한 적이 없고 다만 자신 안에서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루신 업적을 자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자랑도 반대자들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 진리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내놓은 것이지 자기 선전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히려 바오로의 편지 곳곳에서 우리는 그의 신생교회들에 대한 어버이다운 애정과 관심을 엿볼 수 있고 많은 친구들과 협조자들에게 보내는 자상한 충고와 문안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바오로가 결코 언제나 도발적이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상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따뜻한 면모도 갖춘 균형 잡힌 인물임을 증언하는 대목들이다.

 

16. 바오로의 거주지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오로가 항구도시 에페소에서 3년 동안 머무른 것으로 되어 있다(20, 31). 이것이 사실이라면 에페소는 바오로가 한 장소에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에 바오로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광신적인 유다인들로부터 끊임없는 반대와 모함을 받았다. 바오로를 쫓아내기 위해 유다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정도였다.

  바오로는 대부분 유다인들의 모함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바오로가 자신들이 처형한 나자렛 예수를 '부활하신 주님'이라고 선포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계속 전하는 걸보고 위협을 느꼈던 것 같다. 더구나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율법과 유다인들의 전통적 관습을 상대화시키고 직선적으로 비판하는 바오로는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바오로를 제거하기 위하여 갖가지 구실을 찾으며 일반 시민들을 선동하였다. 바오로에 대한 직접적인 테러 이외에도 치안대장이나 총독에게 고발하여 감옥에 갇히도록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2고린토 11, 23-26 참조).

  바오로는 예루살렘과 가이사리아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함으로 예루살렘에서 체포돼 가이사리아로 이송되어 아그리빠 왕에게 심문을 받는다. 심문 도중에 바오로는 출생지 다르소에서 얻은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로마황제에게 상소한다. 이 상소가 윤허되어 로마로 압송된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바오로는 셋집을 얻어 거기에서 만 2년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맞아들이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아주 대담하게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28, 30-31)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이것은 로마에 도착한 바오로가 가택연금 상태에서 전도를 계속했다는 보고이다.

  로마의 클레멘스는 바오로가 로마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은 후 서부의 끝인 스페인에까지 전도여행을 했다고 전한다. <무라토리오 경전>과 위경 <베드로 행전>도 같은 전승을 반복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스페인 여행을 마친 바오로는 로마에서 다시 붙잡혀 더 엄격한 수인생활을 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67년:로마의 클레멘스와 떼르뚤리아노는 64년으로 주장) 참수 치명을 당했다고 한다. 그 때 그분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정확한 출생연도를 모르니 알 수 없지만 대략 60세 정도가 아니었나 추측한다.

 

17. 바오로 서간에 나오는 지명

1) 다르소

바오로의 출생지로 로마시대 때에는 길리기아(Cilicia)주의 수도로서 철학과 의학 학교로 이름났었다고 함. 회심한 후에도 바오로는 이곳에서 한동안 살았다(사도 9, 30; 11, 25).

2)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지금은 터키의 안타키아(Antakja)라는 이름의 보잘것없는 도시에 불과하지만 바오로 사도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중의 하나인 시리아의 수도로서 로마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

  루가에 의하면 안티오키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던 곳이며(사도 11, 19-26) 초대교회 선교의 출발지라고 할만큼(사도 13, 1-3; 14, 26-28; 15, 35-40; 18, 22) 중요한 곳이었다. 성서시대 이후에도 상당기간동안 안티오키아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3) 키프로스 섬

바르나바의 고향으로 스테파노 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던 첫번째 박해 때 그리스도인들이 피해온 곳이기도 하다. 사울(바오로)과 바르나바는 제1차 전교여행 때 이곳에서 전교 했다(사도 11, 19 이하).

  키프로스(Cyprus)섬에는 현재 약 7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그 중 80퍼센트가 그리이스계 사람으로 그리이스정교 신자이고 18.7퍼센트가 터어키계 사람으로 이슬람 신자인데 인종적 종교적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1960년 독립, 공화국으로 출범하였지만 1974년 7월 그리이스군 장교들이 이끌던 일단의 군인들이 정권을 탈취하자 5일 후 터키는 군대를 동원하여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결국은 키프로스 섬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북부지방을 강점하였으며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그리이스계 주민들을 추방하고 1983년에는 그 지역을 '터어키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으나 국제적으로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 즉,  남부는 그리이스계 키프로스이고 북부 일부는 터어키계 키프로스이다.

4) 갈라디아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의 이름이다. 오늘의 터어키의 수도 앙카라 근처를 지칭한다. 학자들 사이에는 사도 바오로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갈라디아가 정확히 어느 지역을 두고 말하는지 논란이 되는데 그 이유는 갈라디아는 로마제국의 행정구역('주')으로서의 갈라디아를 가리킬 수도 있고,  또는 좁은 의미로 기원전 3세기 초 갈리아 지방에서 오늘의 앙카라 근처 지역으로 이주해왔던 켈트족이 살았던 지역을 지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의 수신교회의 지역이 바오로가 그의 1차 전교여행 때 방문하였던 비시디아와 이고니온을 포함하는 행정구역('주')으로서의 갈라디아를 뜻한다면 아마 갈라디아서는 바오로의 편지들에서 가장 먼저 씌어진 편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갈라디아로 보고 있다.

5) 필립비

지금은 어지간한 지도에서는 찾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작은 도시로 데살로니카 북서쪽에 있는 카발라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당시에는 꽤나 번창한 도시였다고 한다.

기원전 358-357 알렉산더 대제의 부왕인 필립 2세 때는 샘들이 매우 많아 토지가 비옥하였고 금광도 발굴되었다. 원래 이 지역은 로마와 소아시아 지역을 연결하던 간선 상업도로요 군사도로였던 에냐시아 가도(Via Egnatia)가 있던 곳인데 여기에다 필립 2세는 도시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따서 필립비라 하였다 한다. 필립비는 기원전 42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율리우스 케사르(J.Caesares)의 암살자였던 브루투스와 카씨우스와 싸워 이긴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우구스투스는 필립비를 재건하고 필립비에 많은 퇴역로마 군인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고 필립비 시민들에게는 이탈리아 권리(jus italicum)를 부여하였다. '이탈리아 권리'란 로마제국의 본토인 이탈리아 영토 내에서 시민들이 차지하던 권리로 이 권리의 소지자는 재산의 소유, 판매, 이전과 시민법 소송의 권리를 가졌고 인두세와 토지세를 면제받았다고 한다.

  필립비 교회는 바오로가 제2차 전교여행 때 세웠던 교회로 유럽지역에서 첫번째로 세운 교회였다. 바오로는 기타 다른 지역에서의 전교활동 중에서도 이 필립비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특별히 사랑하였다. 바오로의 편지들 중 필립비서 만큼 정이 넘치는 편지도 없을 것이다(사도 16, 12-40; 1데살 2, 2; 2고린 7, 5-7; 8, 2; 11, 8-9; 필립 4, 15-16).

6) 데살로니카

알렉산더 대제의 막료 장군이었던 카산드로스(Cassandros)가, 에냐시아 가도가 지나는 길이며 항구를 끼고 있던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알렉산더 대제의 이복누이이자 자기 부인이었던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고 한다. 로마제국시대 때에는 마케도니아주의 수도가 되어 급속히 발전하였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즈음에는 매우 번창하던 도시였다.

  7세기에 동로마제국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빼앗긴 후 데살로니카는 동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다음가는 대도시로 부상했다. 1430년 이후 거의 500년 동안이나 터어키 지배하에 있다가 1912년에 와서야 그리스인들이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인구 100만 정도의 그리스 제2의 대도시이다.

7) 아테네

고전 그리스 시대의 중심지로 최고 전성기는 5세기. 기원전 404년 펠레폰네소스 전쟁 때 스파르타에 패함으로써 고전 아테네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고전 시기에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를 비롯하여 정치가, 시인, 역사가 등등 오늘날까지도 인류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인물들을 배출했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기원전 86년에는 로마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의 정치적 중요성과 경제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수세기 동안 거의 폐허로 방치되어 있던 아테네는 터키에 대한 독립전쟁(1821-30)과 그 이후 독립국가의 수도가 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1834년 당시 아테네의 인구는 항구의 인구를 포함하여 만 명 미만에 불과하였으나 현재는 4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발칸전쟁,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1946-49년의 공산주의자들의 반란 등으로 아테네에는 많은 피난민 또는 이주민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8) 고린토

현재 고린토라고 하는 시는 신 고린토이며 1858년과 1928년의 대지진 후에 세워진 곳으로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0킬로미터 되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가 전교했던 고린토는 그리이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중심지로 국제도시였다. 고린토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즉 서쪽에는 이오니아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 항구를 품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며 에게해로 나갈 수 있는 켄크레아 항구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고린토인들은 이쪽 항구에서 건너편 항구로 화물을 옮길 때에는 선박도 바퀴가 달린 운송장치를 통해 건너편 항구로 옮겼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배들은 바람과 파도가 많아 위험스럽고 먼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돌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지금 이곳에는 1882년에 착공 1893년에 완공된 길이 6345미터 폭 23미터의 고린토 운하가 있고 운하 위에는 다리가 놓여 있다.

  기원전 146년 로마군대가 그리스를 점령할 때 고린토는 최후의 저항의 보루였다. 오랜 포위 끝에 로마인들은 이 도시를 초토화시켰다가 후일 케사르의 명령에 의해 로마의 식민도시로 복구되고 나중에는 아카이아 주의 수도이자 총독의 거주지가 되었다. 퇴역 군인들이 즐겨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주민 중에는 로마인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상업 대도시였기 때문에 여러 나라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였다. 그래서 지중해 연안의 모든 문화. 종교가 혼합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특히 성윤리가 매우 타락해 있었다고 한다.

9) 에페소

이곳 역시 지금은 지도에서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곳이 되어 버렸지만 바오로 사도 당시만 해도 아시아 주의 수도로 동양과 서양을 잇는 상업 중심지 항구도시였다.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고린토 항구와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바오로 사도가 진정 그렇게 열심히 선교하였고 초세기 교회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소아시아(오늘의 터키 지역) 교회들은 오랜 세기동안 이슬람의 지배 속에 있던 탓인지 지금은 이슬람 사원들만이 곳곳에 보일 뿐 찬란했던 교회들의 자취는 고고학적 발굴에서나 엿볼 수 있을 뿐이다.

10) 말타 섬

사도행전 28장 1절에 의하면 바오로는 배가 파선한 후 극적으로 어느 섬에 오를 수 있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섬의 이름은 멜리데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멜리데 섬이 오늘날의 말타 섬과 동일하다고 본다.

  말타 섬은 현재 인구 40만 정도의 작은 섬이지만 고대로부터 시실리 섬 바로 남부라는 그리고 지중해의 거의 정중앙이라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지중해를 제패하고자 하는 나라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하던 섬이었다. 페니키아, 로마, 아랍, 노르만 족이 번갈아 차지하다가 마지막으로는 영국이 1814년부터 1964년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1974년부터 공화국이 되었는데 비동맹 노선을 취하고 있다.

 

18. 바오로 서간의 중요성

* 신약성서 27권의 문헌 중 13권이라는 많은 양이 바오로 사도의 편지라고 되어 있다.

 *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하는 복음서들이 오랜 구전(口傳)과정과 복음사가들의 편집과정을 거쳐 전해지고 있음에 비해 사도 바오로의 편지는 이러한 중간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전해지고 있다(물론 일부 서간에 대해 학문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음을 전제함).

 * 바오로의 편지들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문헌들이다.

 * 복음서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교리'가 형성됨에 있어서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은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좁은 팔레스티나를 벗어나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를 거쳐 제국의 수도 로마에까지 전파함으로써 장차 교회를 세계적 교회가 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 신심사적으로 볼 때 바오로 사도의 삶과 가르침은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예,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회개).

 * 교회일치적 측면에서도 사도 바오로의 편지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기본적인 성서적 전거는 바로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이었기 때문이다.

 

19. 바오로의 서간의 상황

1) 데살로니카 전후서

가장 먼저 씌어진 데살로니카 전서를 읽으면서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사건이 있은 지 불과 20여년 밖에 안 되던 때, 즉 역사적인 예수사건에 대한 목격증인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던 그때 바오로의 선포를 통해 막 형성된 참신한 데살로니카 교회와 바오로 사도의 상태를 감안하면서 읽어야 한다.

2) 필립비서

기쁨과 감사로 가득찬 편지이다. 아주 사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는 필레몬서도 이때 읽는 것이 좋다.

3) 고린토 전후서

고린토 교회의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그리스도 신앙으로 비추며 때로는 신랄하게 꾸짖으며 때로는 아버지같이 타이르고 호소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적 내용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4)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바오로 사도의 핵심 신학이라 할 수 있는 '의화론'이 이 편지들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두 권의 책이 다소 시간적인 차이를 가지고는 있다.

5) 골로사이서와 에페소서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쓴 편지냐 아니냐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 편지들이지만 최소한 바오로의 철저한 영향을 받은 편지로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에 있어서 꼭 인용되는 편지이다.

6) 사목서간들(디모테오 전후서, 디도서)

이 세 편지들을 사목서간 또는 목회서신이라고 하는데 이 명칭은 이 편지들에서 바오로가 그의 제자들인 디모테오와 디도에게 사목적 직무를 이행하는데 필요한 지침을 주고있는데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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