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동성당 게시판

삶과 음악이라는 악보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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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baphys] 쪽지 캡슐

1999-02-09 ㅣ No.71

몇해전 아니 오래전 부터 나는 이 글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하였다.

내가 글을 쓴것은 그리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정말 이 글은 내심연에서 맴돌던 작은 물보라처럼 아끼고 있었던 터라 어떤 원고의 청탁에도 올리지 않은 활어회(?)같은 글이다.

 

나는 수년전 문득 인생과 음악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신학교에서 그레고리안 음악 실습시간에 악보를 보며 느꼈다.

그레고리안 악보 뿐아니라 현대의 오선악보를 바라보면 악보란 정말 규칙과 조화 그리고 쉼과 강약 시작과 끝, 반복과 극적 단절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음악에 악보가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잡음이 될것이다.

쉼표에서 쉼을 고르고 강조의 순간에는 점점 크게 그런식으로 우리는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나의 인생의 악보안에서 나는 얼마나 나는 이 악보에 충실했는지 궁금하여졌다.

나는 처음에 그리 나의 인생의 악보에 관심조차 갖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쉼표의 순간에 목청을 돋구다가 나의 마음이라는 기관지는 금새 쉬어버리고 나의 육체라는 성대는 시들어져 알아 붑는다.

또한 크라이 막스의 순간에는 그만 긴 쉼표가 있는 것처럼 무기력해져 버린다.

어떨 때는 나의 인생의 악보를 찌져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어느 부분은 삭제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의 악보는 수정가능한 부분과 주어진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나 내자신이 악보의 양을 나도 모르게 나의 성량과 음색을 고려치 않고 늘려나감을 알게 되었다.

내 꿈은 나의 삶의 딱 맞는 악보를 쓰고 그 악보를 무리없이 연주하는 것이다.

친구들과 놀때는 정말 모든 것을 잊고 놀고 밤에 잠들 때면 노곤함에 골아 떨어지며 기도할 때는 하이든의 미사곡을 들을 때 처럼 잠심하는 삶이 좋다.

 

요즈음 나의 삶의 악보에는 어떤 음표들이 있을까?

샴바와 레퀴엠 그리고 서기 9세기의 느린 키리에의 3가지 형식이 번갈아 연주되는 파노라마식 반복연주라 할까?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 은광 유치원 은광 유치원 착하고귀여운 우리들의 꽃동산- 내가 태어나 아마도 최초로 부른 최초의 노래인 듯한 이노래 속에서 그래도 가장 나의

삶이 즐겁고 슬폈던 시절인 유치원시절의 노래를 봄을 기다리는 요즈음 다시 불러보고싶다.

 

다시 불러보고 싶은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악보와 글이 단순하고 짧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치원 때 나는 이 노래가 결코 유치하거나 짧다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너무 나의 인생의 악보에 무리한 음표들로  복잡한 구성을 하는 것이 아닌가 느낀다.

인생이 복잡하다고 그 인생의 음악이 아름답다고 할 순 없다.

악보가 매우 알아보기 쉽다고 유치한 음악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곧 새해다 나는 내 인생의 작곡자로서 또 한살을 먹는다. 이제 나도 '서른 즈음에 '라는 노래를 들어야 할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난 서른 즈음에 다시 동요를 하나쓰고 싶다.

 

어린 아이들은  사순절때도 목청 높혀 행진곡 풍으로 '수난기약 다다르니'를 부른다.

그이유는 그들은 어떠한 노래도 그들의 영혼의 눈으로 악보를 읽기에 늘 희망과 꿈이 가득하기 때문일 것이리라.

 

밀린 원고들을 기한 안에 출판사에 넘기기도 벅차는 구나!  오늘하루 나의 기도를 이글을 읽고 새롭고 단순한 삶의 악보를 작곡할 이들에게 바친다.

     

                                                

           cantare est secundata orare - 성가를 부르는 것은 두번기도하는 것이며 두배기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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