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밥이 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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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8-06-12 ㅣ No.4202

 

부음을 듣고도 전혀 슬프지 않았다.


3시간 전에 사랑했던 아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그를 바라보면서도.

미처 준비가 덜 된 영안실로 문상을 가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의 얼굴을 대했을 때도  "너무 슬퍼하지 말어"란 위로인사 대신  “그동안 고생 많았어.”라며 그의 등을 다독여 준 것이 전부였다.


항상 형을 대하듯 나를 대하며 12년간 정을 붙이며 지낸 후배 가브리엘의 아내 안젤라가 오늘 세상을 떴다. 병석에 누워 지낸 것이 무려 16년...

결혼생활 30년에 16년을 병석에 누워서 지낸 그의 아내였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그 많은 병원비며 본인의 고통, 뒷바라지하던 남편과 자식들의 고통까지 모두 한순간에 날리며 그 지긋지긋한 병석을 털고 일어나 세상을 떴다.


여보, 내 옆구리에 뭐가 난 것 같아. 그것이 발단이었다.

처음에는 물 혹이라고 했다. 그러나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하니 난소암이라 하더란다.

수술을 하고 방사선 치료를 끝내고, 4년 동안은 큰 아픔 없이 잘 지냈단다.

그런데 재발을 했다.

암이 온몸으로 전이 되고 더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하여 가평에 있는 작은 예수회 기도원에 가 있으며 자연식으로 치유를 하려고 무던히 노력도 하고 다시 더 심하다 싶으면 병원에 입원하여 진통제 주사로 통증을 가라앉히고, 다시 퇴원해서 집에서 진통제로 연명하다가 병원으로, 다시 집으로, 그러기를 무려 수 십 번 반복했다.


등창이 나고 여기 저기 곪고, 다리가 짓무르고, 퉁퉁 붓고, 또 부은 데가 썩고...

암세포가 온몸으로 전이 되어 이제 더는 못 산다고. 잘해야 6개월을 못 넘긴다고 한 것이 무려 12년째 그렇게 살았다.



입원을 해서 조금만 진통이 덜 하면 병원의 소독 냄새가 싫다고 부득부득 집에 데려다 달라고 울면서 하소연을 하고, 좀더 지켜보다가 나가자 하면 소리소리 지르고 땡깡을 부리고...다른 환자 보기에 민망해서 다시 퇴원시켜 집에 데려가면 채 3일이 못돼 다시 병원으로 실려 와야 하고, 심지어는 어제 퇴원했다 다음날 응급실로 되돌아오기도 무려 10차례 넘게 했단다.

간혹 남편이 지방 출장을 갔을 때는 3차례나 119불러 실려 온 적도 있었고....


아들 둘 뿐인데, 그 아들들조차도 엄마가 병원에 있으면 차라리 저들이 편하다고 병원에 보내라고 하고, 자신도 나가서 벌어야 아이들 학비며 생계라도 꾸리지.

아내가 병원에 있으면 아이들이나 자기도 덜 힘든데 자꾸만 집에 가자고 보채니....그 부대낌에 가브리엘의 고충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왔다 갔다...갔다 왔다....오죽하면 성바오로 병원 측에서 알아서 호스피스병실로 돌려주었을까.

그래도 밤에는 가브리엘이 아내 옆을 지켜주고 아침에 컵라면이나 토스트로 끼니를 떼고 출근했다가 저녁에 잠시 집에 들어가서 옷만 챙겨 입고 다시 병원으로... 그게 12년간의 일과였다.


가끔 점심시간에 나를 만나러 오면 신세 한탄을 하면서 자기는 점심 한 끼니 먹는 것으로 버틴다고 해서 하다못해 순대국 한 그릇을 먹어도 영양가가 있을 것 같은 메뉴로 골라야만 했었다.


생이 뭔지 그렇게 악착스럽게도 포기하지 않던 아내. 의료진들이 더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데도 살려고 버둥질치던 아내.

속도 모르고 집에 데려다 달라고 울면서 떼를 쓰는 아내가 때로는 밉고 야속하기도 하였을 게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며칠 전에 밤늦게 술에 잔뜩 취해서 호스피스 병동에 갔다가 복도에서 수녀님을 만나 그만 엉엉 울어버렸단다.

“수녀님. 저 너무 힘들어요. 저가 대신 죽을 수만 있다면 제가 대신 죽었으면 싶어요”

수녀님이 그런 그를 보시고 측은해서 등을 두드려주자 그만 그동안 쌓였던 설움보가 한꺼번에 터져서 통곡으로 변하고 그 광경을 지켜본 호스피스 병동의 수녀님들 간병인들 문병하러 온 사람들, 입원환자들까지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수녀님들도 모두 따라서 울고 그 이야기를 들으신 수도회소속 원목신부님이신 최승창 바르톨로메오 신부님도 눈물을 훔치셨다고 한다.

그 남편이 얼마나 가련해 보였으면 그랬을까.


내가 문상 갔을 때 안젤라의 운명 소식을 듣고 영안실로 내려오신 노수녀님께서 

"안젤라가 그래도 가브리엘씨 스트레스는 확 풀어 주고 갔서잉. 그날 밤 여태 쌓였던 스트레스는 실컷 풀게 해주고 갔으니"라고 하셨다.


죽음이 무엇일까? 사람에게는 그렇게도 죽는 것이 무서운 것일까?

정말 나도 죽을 때가 되면 그럴까?

지금은 그럴 것 같지가 않은데.....?

죽음에 직면하면 죽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고 죽음이 무섭기도 하고 그렇겠지?

하지만 어쩌겠어? 어치피 죽을 건데,,,,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럴 수가 있을까, 그게 참 걱정이다.


이문심 안젤라 선종을 얘기하려면 성 바오로병원 호스피스병동을 매일 순회하시며  교우환자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시는 최승창 원목신부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최 신부님은 안젤라의 밥이셨다.

안젤라가 무엇이든 해달라고 하면 하라는 대로, 시키면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주셨으니 정말로 밥이셨다.

언제부턴가 병실에 성체를 영해주려고 오셨다가 그만 한번 들어준 부탁 때문에 올가미에 걸리신 것이었다.

“신부님 노래 하나만 들려주세요.”

“나는 노래할 줄 모르는 데요”

“성가도 못하셔요? 가톨릭 성가를 해주시면 되죠.”

언제 죽을지 모르는 환자가, 그것도 아직 오래 살아도 될 사람이, 어쩌다 저렇게 고통 속에 죽어 가고 있는데 내 어찌 그의 소원을 못 들어주랴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가사를 외우는 성가 한 곡조를 불러주신 것이 그만 그녀의 밥이 되는 단초였다. 다음부터는 아예

“신부님께서 노래를 안 불러주시면 저 성체를 안 영할 거에요.”라고 겁박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


가사를 외우는 성가가 바닥이 난 후에, 신부님은 노사연의 '만남’도 불러주셨고 팝쏭을 불러달라는 요청에는 ‘마이 웨이’까지 부르셨단다.


사랑이 많으신 최승창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정말 감사합니다.

안젤라가 이제 주님 앞에 엎드려 신부님의 가 없는 사랑을 주님께 전할 겁니다.

“제 마지막을 지켜주신 최승창 바르톨로메오신부님을 아버지께서 기억해 주셔요.”라고.



내일(6월9일)아침 7시 성바오로 병원에서 최승창 신부님 집례로 이문심 안젤라의 장례미사가 드려집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 그녀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해 주시고 혹시 시간이 나시는 분들 장례미사에 참례해주시면 제가 거기 있다가 청량리에서 제일 맛있는 24시간 가마솥설렁탕 집에서 아침진지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후기>


장례미사와 출관예절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최승창 바르톨로메오 신부님께서는 장례미사 강론을 통해 자신의 사제생활을 통해 아주 오래 동안 기억에 남을 환자였다면서 처음으로 병원에서 노래를 부르게 만든 환자였다며 고인 안젤라를 회상하셨습니다.

"신부님의 노래를 들으면 편안하고 행복해요"하는 그녀에게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노래를 불러주셨다고 하셨습니다다. 그러시면서 덧붙이신 말씀이

"6개월동안 호스피스병동에 있으면서 처음에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차츰차츰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안젤라가 정말로 죽음을 잘 준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시며

"어떤 주교님께서 암으로 6개월간 죽음을 선고받고 사시는 그 6개월 동안의 삶이 일생을 살아오신 기간보다도 더 잘 산 삶을 살았노라고 쓰신 일기가 생각난다" 하셨습니다.


가브리엘의 극심한 고통을 오래동안 지켜보노라 안젤라의 죽음에서조차도 슬픔을 느끼지 못했던 내 가슴 속에 울컥 슬픔이 솟구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안젤라 자매님,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 그곳 주님 품에서 이제 편히 쉬소서."


오늘 아침은 참말로 많이 슬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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