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사진 자료실

[성당] 부산교구 언양 본당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3-12-01 ㅣ No.1177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부산 교구 언양 성당(上)

영남지방 천주교 신앙의 ’온상’

 

 

(사진설명)

1. 영남지방 천주교 신앙의 온상인 언양본당. 1932년에 완공된 이 성당은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건물이다. 그 옆 건물은 신앙유물전시관.

2. 공소 신자들이 대대로 물려받아 보관해 온 은혜성모상(왼쪽)과 천상모후상.

3. 에밀 보드뱅 초대 주임신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동상. 요즘도 사람이 직접 종탑에 올라가 새벽미사 준비종과 삼종기도종을 친다.  

 

한반도의 등줄기 태맥산맥.

 

남쪽을 향해 힘차게 뻗어 내려가는 산맥은 대구, 영천에 이르러 끊어질 듯하다가 울주와 밀양, 양산 일대에서 용틀임을 하듯 솟구쳐 오른다.

 

황금빛 억새밭으로 유명한 ’영남 알프스’는 태백산맥이 여세를 모아 이 일대에 뿌려놓은 산군(山群)을 말한다. 동해와 먼 거리가 아닌데도 가지산, 천황산, 신불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로 인해 깊은 내륙이라는 느낌이 든다.

 

200여년전, 이 깊은 산골짜기까지 천주교가 전해진 것은 신비이다. 중국을 통해 한양과 서해 내륙으로 들어온 복음의 씨앗이 신유박해(1801) 이전에 이미 이곳까지 날아들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신라 천년의 불교문화와 조선 왕조의 유교문화가 만개(滿開)한 영남지방 특성을 감안하면 그 신비감을 더욱 떨칠 수가 없다.

 

언양 본당(주임 이장환 신부)은 한국교회 200년 신앙의 보고(寶庫)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귀중한 신앙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신앙선조의 열렬한 기도소리가 지금도 새어나올 듯한 16개 산골 공소들, 문전옥답을 다 버리고 들어가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한국판 카타콤바’ 죽림굴, 선조의 손때 묻은 유물을 모아놓은 신앙유물전시관…. 본당 관할구역 곳곳에 200년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언양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성당 구내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신앙유물전시관과 성당이 보인다.

 

1932년에 완공한 이 고딕식 성당은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石造)건물이다. 초대주임인 보드뱅(Beaudvin Emile,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는 설계 당시만 해도 신자들에게 건축비를 모금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박해의 피난살이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건축비를 낼 만한 형편이 되지 않았다. 보드뱅 신부는 결국 본국 은인들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돈을 얻어다 건축비를 댔다.

 

서울 명동성당을 건축한 중국인 기술자들이 공사를 맡았는데 특이한 점은 정면과 측면은 석재로 마감한 반면 뒷면은 붉은 벽돌로 처리한 것이다.

 

박만선(프란치스코, 60) 언양성지 안내봉사자회 회장은 "신자수가 증가하면 뒷벽을 터서 증축하려고 벽돌로 막아놓은 것"이라며 "건축 당시 돈이 모자라 공사가 몇 차례 중단된 점으로 미뤄 성당을 완성하기가 버거웠던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성당이 완공되자 울산 사람들이 도시락을 싸갖고 걸어서 성당 구경을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덧붙였다.

 

1990년 옛 사제관을 개조해 만든 신앙유물전시관에는 서적, 성물, 옛 서류 등 약 740점의 유물이 있다. 모두 산골짜기 공소와 교우촌에서 수집한 것이다. 그동안 교회박물관 등에서 두세 차례 성물을 수집해 갔는데도 이 정도로 많이 남아 있으니 언양이 얼마나 유서깊은 믿음의 고향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전시 유물들 가운데 공소 신자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은혜성모상(25.2cm)과 천상모후상(19.1cm)은 아마 몇 번은 땅에 파묻혔을 것이다. 박해시대에 관헌들이 들이닥치면 신자들은 성물부터 땅에 파묻고 산속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언양 토박이인 박 회장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듣고 자란 게 박해시대에 교우들이 살아 나온 얘기"라며 "경주 포졸들이 산등성이를 타고 마을로 접근하면 신자들은 심지어 간장독 속에 성모상을 던져놓고 피신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요리문답’, ’천주성교예규’ 같은 서적들은 반들반들하게 윤이 날 정도로 손때가 묻어 있다.

 

첫영성체 찰고를 앞둔 공소 어린이는 저 ’요리문답’에 나와 있는 문답식 교리를 외우느라 밤늦도록 끙끙댔을 게다. 또 교우촌 신자들은 ’천주성교예규’ 도문을 소리맞춰 외면서 연령을 하느님께 인도했을 게다. 이런 상상을 하면서 전시관을 둘러보면 유물 한점한점이 예사롭지 않게 와 닿는다.

 

전시관 벽을 빙둘러 채운 인물 사진들도 이채롭다. 1900년에 사제품을 받은 김문옥 신부,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 초대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 김동언 김동철 형제 신부, 안달원 신부, 이종창 신부, 박문선 박주선 형제 신부, 김두완 김두윤 형제 신부 등의 사진이 서품 순서대로 나란히 걸려있다. 모두 언양에서 배출한 사제들이다.

 

이장환 신부는 "언양본당은 영남지방 신앙의 온상이자 사제 35명, 수녀 33명을 배출한 성소 못자리"라며 "지금도 순교자 후손들이 기도와 희생으로 본당 공동체를 떠받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불어닥친 산업화 바람은 이 믿음의 고향을 비켜가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 산골 교우촌에는 노인들만 남아 쓸쓸히 공소를 지키고 있다. 이미 쇠락해 터만 남아 있는 공소도 있다. 성당 앞 기름진 논밭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신부는 "신앙 유산과 전통은 한 번 잃어버리면 복원이 어렵다"며 관심을 호소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본당 신설과 건축 등 성장 일변도로 달려왔는데 이제는 과거 전통을 가꾸고 유지하는데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지역 유산과 전통을 보존하는 일은 본당을 한두 개 신설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신문, 제749호(2003년 11월 23일), 김원철 기자>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부산 교구 언양 성당 (하)

고산준령 곳곳에 신앙의 숨결 "생생"

 

 

(사진설명)

1. 성지순례를 온 마산교구 양덕동본당 신자들이 성모동굴에서 박해시대 언양 천주교회사를 듣고 있다.

2. 박만선 회장이 폐쇄된 삼정공소에서 떼어 온 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3. 200년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언양성당 내부.

 

 

영남지방 믿음의 고향인 언양에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한 곳에 들러 잠깐 순례하고 돌아서는 성지순례를 예상했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울산광역시 면적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언양본당(주임 이장환 신부) 관할구역 구석구석에서 200년 신앙전통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산골짜기 공소까지 들어가보자. 삶은 고단하지만 신앙 열의만큼은 뜨겁기 이를 데 없는 교우촌의 정겨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한국판 카타콤바’라 불리는 죽림굴까지 가려면 1시간은 족히 발품 팔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주변 경치가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준다.

 

이 일대에 복음의 씨앗이 그토록 일찍(1801년 신유박해 이전) 뿌려진 연유만큼은 알고 떠나자. 그러면 13곳에 달하는 사적지와 유적지 중 어느 한군데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것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명례방(지금의 명동) 집주인 김범우(토마스)는 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에 연루돼 추조(형조)에 끌려가 매를 맞고 경남 밀양 단장으로 귀양을 간다. 그가 귀양지에서도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는 샤를 달레 기록으로 보건대 언양에 사는 누군가가 그로부터 천주교를 소개받았을 것이다. 밀양과 언양은 100리 남짓한 거리다.

 

기록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언양 천주교인은 1790년 서울로 올라가 세례를 받은 해주 오씨 문중의 오한우(베드로)와 사촌 처남간인 경주 김씨 문중 김교희(프란치스코)다. 신유박해 때 오한우는 순교하고, 김교희는 일가족을 이끌고 내간월산 불당골(간월공소)로 피신하는데 이곳에서 언양지방 첫 신앙공동체가 형성된다. 또 강이문이라는 신자는 유배지 탑곡(울주군 두서면 내와리)에서 신자촌을 형성하고, 그의 영향으로 신자가 된 예씨 청년은 상선필(예씨네골,두서면 인보리)에 신자촌을 만든다.

 

불당골, 탑곡, 상선필 신자들은 서로 왕래하면서 정해박해(1827년) 직전까지 평화롭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뿌리를 뻗어 내려갔다.

 

■ 죽림굴

 

간월공소에서 왕방재라는 고개를 넘어 왕래한 박해시대 피난처. 고개 넘어 간월 방향에서 포졸들이 나타나면 신자 100여명이 넓은 굴 속에 들어가 위기를 모면했다. 1986년 이 굴을 처음 발견한 박만선(프란치스코, 60) 언양성지 안내봉사자회 회장은 발견 당시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박해시대 때 포졸들이 들이닥치면 신자들이 1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굴로 피신했다는 구전(口傳)을 어릴 적에 들었어요. 계곡이 가깝고 앞에 소나무가 있다는 단서를 갖고 20년 가까이 헤맸는데 막상 찾고보니 두번이나 지나친 곳이었습니다. 낮은 입구가 대나무와 풀로 덮혀 있어 좀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지요."

 

박해시대 교우들은 죽림굴 주변에서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이었다. 이 굴은 최양업 신부가 4개월간 은신하면서 미사를 집전하고 마지막 서한(1860년 9월3일자)을 쓴 곳이기도 하다. 본당 신자들은 굴을 발견한 11월9일이 돌아오면 이곳에서 기념미사를 봉헌한다.

 

■ 살티공소와 순교자 묘지

 

가지산(1230m) 중턱에 있는 살티에는 부산교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현존 공소와 순교자 김영제(베드로) 묘소가 있다. 지금은 관광지에 속해 있지만 박해시대에는 수목이 울창해 대낮에도 어두웠던 곳이다. 병인박해(1866년) 때 간월과 언양에 살던 신자들이 피난와서 형성한 공동체다.

 

그 무렵 김종륜(루가), 허인백(야고보) 등과 함께 체포된 김영제(베드로)는 울산과 서울에서 극심한 매질을 당하고 반주검이 되어 돌아와 장독(杖毒)으로 순교했다. 부산교구 김윤근 신부가 그의 5대손. 최재선 주교, 김문옥 신부, 이종창 신부 등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 못자리로도 유명하다.

 

■ 언양성당 주변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石造)성당 건물과 순교자유물전시관을 둘러본 후 뒷산으로 올라가면 병인박해 순교자 오상선(오한우의 증손자) 묘소가 나온다. 또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산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아름다운 성모동굴이 나타난다.

 

영남의 첫 신자 김교희(프란치스코) 묘소, 교우촌의 정취와 활력이 살아있는 직동공소, 순교자 치명장소인 언양 옥터 등도 성당 가까이 있다.

 

이장환 주임신부는 "본당은 기존 신자들의 뿌리깊은 신앙심과 신흥 아파트 단지로 이주해오는 젊은 신자들의 활력이 조화를 이뤄 괜찮지만 점점 쇠락하는 공소가 큰 걱정"이라며 "이 일대의 신앙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평화신문, 제750호(2003년 11월 30일), 김원철 기자>



1,118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