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동성당 게시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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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용 [pgiuseppe] 쪽지 캡슐

2002-09-30 ㅣ No.5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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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옥수동 공동체 가족들에게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송별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짧은 1년의 시간, 개인적으로는 좀더 깊은 친교 속에서 생활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그런 저를 온유함으로 받아주신 공동체 가족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서품때의 성구로 정하고 제 사제생활의 화두로 삼고있는 필립비서 2장의 말씀이 오늘 제2독서라서 그와 관련된 몇 가지 느낌을 나누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저는 그 마음이 곧 그분의 인격이고 그분의 존재 이유라는 생각에 사도 바오로의 이 신앙고백을 저의 신앙 고백으로 삼아 생활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사도 바오로가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 육화의 신비는 참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줍니다.

 

 하늘이 땅이 되는 놀라움, 그 신비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땅 끝까지 자신을 낮추시는 하느님의 겸손이며 동시에 사람의 살을 취하심으로써 우리의 인간 조건을 무한대로 받아들이시고 존중하시는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보여줍니다.

 

  하느님이 이토록 존중하시는 사람이기에 저의 사목 생활 역시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그 존경심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그 나름의 삶의 아름다운 역사를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번뇌가 교차되는 삶의 역사이지만 그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소중한 체험이고 보화입니다.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삶의 고귀한 흔적입니다. 그래서 그 한 개인의 고유한 삶의 양식과 내용은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해되고 존중되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우리의 기준으로 잘못된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를 생각한다면, 질그릇처럼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조건을 피하거나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약함을 껴안고 우리의 약한 육체를 취하신 그분의 강생을 생각한다면, 조금더 기다리고 참아내는 노력 역시 결코 어리석은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참으로 행복하게도 저는 옥수동 공동체의 생활 안에서 이런 육화의 신비를 몸소 살아가는 조화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각자, 저마다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경제적으로나, 그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능력으로나, 그 생각과 가치관에서 비교하기 어려운 다양함을 지니고 있지만, 참으로 상대를,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이해하는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며 불가능한 사실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며 우리 공동체에 주시는 은총이라는 생각이 앞섭니다.

 

 참으로 소중하고 고귀한 강생의 신비를 몸소 삶으로 증거해 주신 옥수동 공동체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전통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공동체의 내적 생명력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짧은 1년의 시간이었지만, 저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인내롭게 받아주시고 아울러 제 안에서 제 자신도 발견하지 못한 하느님의 아름다운 선물을 발견하고 용기를 주신 모든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 안에서 늘 행복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아울러 우연한 기회에 쓴 같은 맥락의 두 개의 글을 나누면서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첫째>

나는 순자(筍子)가 주장하는 성악설(性惡說) 보다는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을 더 믿는다. 아니 더 믿고 싶어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소망은 그 학설의 논리적 타당성에 기초하기보다는 사람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씨앗이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내가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선(善)에 대한 그 어떤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다면 산다는 것에 무슨 기쁨이 있을까?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에서 미래에 대한 그 어떤 희망을 간직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음 때문일까, 나는 10년 전 우리 사회를 밝게 하자는 취지로 한 작은 잡지가 처음 발간되었을 때의 기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밝은 이야기}라는 표제로 발간된 이 잡지는 말 그대로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구성되어있고, 이것이 사람과 우리 사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씨앗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누구나 약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약함이 악이라고 규정될 때 우리의 삶은 살아있는 삶, 생명력이 있는 삶이 아니라 죽은 삶, 마지못해 연명하는 삶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역시 아무런 희망 없이 늘 탄식과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간직한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模像)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용기와 희망인지 모른다. 세상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다는 하느님의 고백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사람 역시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가끔씩 신문, 방송을 통해 소개되는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들 안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희망의 우물에서 물을 퍼올린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믿고 싶고 또 믿는다.

 

<둘째>

천주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을 대상으로 입교(入敎) 동기를 물으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라고 응답한다. 마음이 평화롭지 않다는 것은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공통된 삶의 지향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한 개인의 고통일 뿐 아니라 사회의 건강 상태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엇이 진정한 행복이고 우리는 어떻게 행복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진정 평화롭고 조화롭고 건강한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나 아닌 나’를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나 아닌 나’를 나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에 의해 본래의 나는 죽고 거짓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지금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커다란 힘과 무게 중심이 물신주의(物神主義)에 기초하는 것이 사실이다. 연봉의 많고 적음이 곧 우리의 행복 지수라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끝없이 나 아닌 나를 찾아 떠나는 외로운 여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오늘도 참 행복은 강요되고 왜곡된 거짓 내가 아니라 본래의 나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존중할 때 주어지는 것임을 이야기하게 된다.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역사도 그 개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크게 화려하지는 않아도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아니 비교되어서도 안되는 작은 행복으로 꾸며진 행복이 진짜 행복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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