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광장

'귀향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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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선 [delltapose] 쪽지 캡슐

2010-01-31 ㅣ No.2106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이상일 서강대 前 총장이 부르는 '귀향의 노래'

  • 문갑식 기획취재부장 gsmoo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낙엽은 떨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내려앉는 겁니다"
    "준비된 은퇴보다, 만들어가는 은퇴가 더 좋지요"
    美 체류 중 운명의 성지 순례… 사치스러운 삶 깨닫고 결심… 전북 장수서 자연의 언어 배워
    "대학개혁 왜 밀어붙였냐고요? 학생들이 경쟁력 가지려면 공동체 구성원들부터 변해야죠"
    "은퇴하면 특별한 체험을 하죠… 없을수록, 허술할수록 도와주는 편한 친구가 생겨요"

    신부(神父)의 집은 언덕 위에 있었다. 대문(大門)도 울타리도 없는 2층 양옥 너머에 얼어붙은 저수지가 있고 그 뒤에 덕유산이 버티고 있다. 그걸 축(軸)으로 백운·백화·장안·영치·북·할미산 7개 봉우리가 집을 감싸고 있다.

    이 그림 같은 땅에서 이상일 전 서강대 총장(63)은 2005년 10월부터 살고 있다. 가족은 영국산 린나와 멜렉, 진돗개 바름(Justice)과 사랑(Love)이다. 린나와 멜렉은 히브리어(語)로 기쁨의 환호성, 왕(王)이라는 뜻이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던 27일 오후 1시, 그는 애견(愛犬)들과의 산책을 마친 뒤였다. 얼마나 개들이 주인을 사랑해줬는지 신부는 온통 흙투성이였다. 잠시 씻고 오겠다며 사라진 적막한 공간을 테너의 음성이 메웠다.

    순간 40평 남짓한 이 은퇴자의 공간이 새 모습으로 다가왔다. 영성(靈性) 강하게 내리쬐는 성소(聖所)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누군가 옆에서 건드리면 누선(淚腺)이 터질 것 같은, 그러면서도 마음속은 정화되는 것이었다.

    로마교황청 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聖書學)을 14년간이나 연구한 권위자이자 대학의 개혁가였던 그다. 그는 왜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 은둔해있을까. 이상일이 부르는 귀향(歸鄕) 노래에 맞춰 빗소리가 창(窓)을 두드렸다.

    신부(神父)의 집 뒤, 얼어붙은 저수지에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7개 산봉우리가 집을 감싸고 있는 언덕 위에서 이상일 전 서강대 총장은 애견 네 마리와 함께 새로운 노년을 맞고 있다. 신부를 얼싸안은 린나의 고향은 머나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다. 린나에게 전북 장수는 어떤 의미일까.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순례자

    서강대 총장에서 물러난 후 신부는 6년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사목(司牧)활동을 했다. 코네티컷에서 3년, 시카고에서 3년째를 맞이했을 때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시카고 교구(敎區) 신학대 교수직 수락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미국은 사제의 연금제도가 완벽한 나라다. 그런데 그때부터 교수로 일하더라도 연금을 받기 위해 필요한 20년에 1~2년이 모자랐다. 그러던 차에 운명 같은 성지 순례(巡禮)의 기회가 왔다. 이집트~이스라엘~터키 코스였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2005년 2월 12박13일의 일정으로 순례를 갔습니다. 마지막 코스가 터키의 카파도키아였어요. 그곳에 사암이 마치 버섯 같은 모양으로 자라 있는데 윗부분에 동굴이 여러 군데 뚫려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압제를 피해 몰려와 살았다고 하더군요. 출구는 사다리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게 했고요."

    ―전 못 가봤지만 멋져 보입니다.

    "밖에서는 상상이 안 되는 규모였어요. 2만명에서 3만명이 한꺼번에 거주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성(聖) 바실리우스, 성 나지안제누스, 성 니세누스 같은 대(大) 신학자들이 그런 혹독한 환경에서 살았던 겁니다. 그걸 보고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왜요?

    "제가 너무 가진 것이 많았고 사치스러웠고 너무 대접을 많이 받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반면 고마워할 줄 모르고 불평과 비판을 너무 쉽게 하기도 했고요."

    ―그때 낙향(落鄕)을 결심했다는 겁니까.

    "순례를 마치고 서울에 한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때 제 고향 장수에 있던 육촌 동생을 만났습니다."

    ―육촌 동생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은퇴를 하고 싶다, 서울이 아닌 강원도 같은 데서 살고 싶다고 했지요. 22년 반을 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조금 빠른 느낌이 들더라도 시골에 가고 싶다고요. 동생이 어릴 때 저와 앞뒷집에서 살아 아주 친했는데 펄쩍 뛰더군요. 왜 고향을 놔두고 강원도로 가느냐고."

    ―넙죽 받으시진 않았겠죠.

    "고향에 폐 끼치기 싫다고 사양했더니 제수씨와 함께 또 찾아왔어요."

    ―신부님들은 원래 재산이 없지요.

    "동생이 이곳에서 양돈 사업을 크게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그런 문제는 우리에게 맡기라. 그렇지 않아도 평소 지나치면서 봐둔 땅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이 위치였습니까.

    "호숫가라는 말을 듣고 펄쩍 뛰었어요. 절대 비싼 땅 사지 말고 규모도 200~300평 정도로만 하라고. 그런데 미국으로 다시 갔다가 6개월 후에 다시 와보니 글쎄…."

    ―육촌 동생이 뜻을 어겼겠군요.

    "동생이 그러더군요. '아무리 신부님의 뜻을 존중하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며 2500평을 사놓은 겁니다. '있는 걸 없애는 건 쉽지만 없는 걸 있게 하는 건 어렵다'고도 설득했습니다.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는데 과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땅값이 폭등했나요?

    "그런 건 아니고요, 여기서 2~3분만 걸으면 논개 사당이 있습니다. 논개 사당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첩첩산중, 차도 안 다니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곳에 온 뒤 매년 3500~4000명이 제 집에 들르고 있습니다. 자고 가는 분들도 있고요. 그분들을 위해선 잘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대문도 울타리도 없는데 겁이 나진 않나요.

    "신부는 원래 겁이 없습니다."

    귀향자

    이상일의 집안은 조선시대 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장수 땅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이상일이 4대(代)째고 지금은 6대가 되고 있다. 신부는 1남4녀의 둘째인데 8살 아래 여동생이 부산에 사는 이(李)요아킴 수녀다.

    신부는 장수 번암초·장계초등학교를 거쳐 장계중을 마친 뒤 전주상고에 진학했다. 그 뒤 그는 당시 전국에 2곳밖에 없었던 신학교 가운데 광주신학대에 진학했다. 서강대를 세운 예수회 신부들이 운영하던 학교였다.

    ―신학대에 진학할 때 고민은 하지 않았나요?

    "고민은 없었는데 사실 신학대 진학은 한 목사님의 설교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곡예사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외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려 하는데 믿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단 한 사람만이 '믿는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곡예사가 또 말했대요. '내가 당신을 업고 건너갔다 돌아오려 하는데 따르겠느냐'고. 그는 한참 고민하다 수락했답니다. 곡예사는 진짜로 그를 업고 폭포를 건너갔다 왔다는군요."

    ―믿음의 힘입니까?

    "그 얘기 다음이 더 충격적이었어요. '당신들은 2000년에 세상이 망할 텐데 어쩔 겁니까'라는 거예요. 전 놀라 '아! 그렇다면 빨리 사제(司祭)가 돼야겠구나'하고 생각했지요. 신학대에 온 지 한 학기도 안 돼 그 말이 엉터리라는 걸 알게 됐지만요."

    ―그럼 신학대에 온 동기가 사라진 게 아닙니까?

    "동기가 바뀌었으면 신학대를 나가야 했는데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게 의미가 있겠다 싶어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가족들의 영향도 컸고요."

    ―1979년부터 로마교황청 성서대학원에서 수학했지요.

    "신학대 다닐 때부터 성서학을 공부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시편(詩篇)'이 제 전공입니다. 그러려면 배워야 할 언어가 많아요. 라틴어, 히브리어부터 아시리아의 아카드어, 이집트 상형문자까지요."

    ―박사 학위 논문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었습니다.

    "로마교황청 성서대학원은 스승이 제자를 자식처럼 여깁니다. 요즘 말로 '빡'세게 닦달하는 대신 모든 편의를 봐주는 거지요. 그런데 첫 지도교수님께서 그만 62세에 뇌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25개국어를 했던 분입니다. 두 번째 지도교수님께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한국에 왔는데 그분 역시 암으로 사망했어요. 57세에."

    ―억세게 운이 없군요.

    "그래서 동료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닥터 파터 킬러'였습니다. 닥터 파터는 독일어로 쓰는데 '논문 지도교수'라는 뜻입니다."

    ―전 성서를 여러 번 읽어보려 했는데 창세기(創世記)를 못 넘깁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 조언 한마디 해주신다면.

    "딱딱한 얘기가 될 텐데, 성서는 인간의 출생근거입니다. 지금까지의 삶, 다가올 삶, 영원한 삶이 그 안에 담겨 있고요, 같은 구절이라도 살아 있는 존재라고나 할까요."

    ―같은 구절이 살아 있다니요?

    "자기의 삶이 오르막이냐 내리막이냐에 따라 같은 구절도 달리 와 닿거든요. 똑같은 말을 해도 작년에 느끼는 것 다르고 올해 느끼는 것 다르지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성서의 오류를 탐색하는 분, 의혹의 눈길로 보는 분과 믿음이 있는 분의 해독(解讀)에 차이가 나지요."

    ―그리고 서강대에서 총장까지 하셨고요. 2년여 만에 조기 퇴진한 것도 화제를 불러일으켰고요.

    "1999년 3월 4일까지 했지요. 제가 서강대 총장이 됐을 때 낸 책이 '캐주얼하게 살고 싶다'였습니다. 총장에서 물러난 뒤 주위에서 '서문(序文)을 방정맞게 써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한 분이 있었어요. 캐주얼이 실제로 입기도 쉽지만 벗기도 쉽잖아요."

    ―당시 지나치게 강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고 반발한 사람들도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 당시 대학이 변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생들이 고품격 경쟁력을 가지려면 공동체 구성원들이 변해야지요. 전 대학 구성원이 아방가르드(전위·前衛)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상아탑의 꼭대기에 있을 게 아니라 상아탑을 움직이는 바퀴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

    ―대학이 원래 보수적이지 않습니까.

    "그런 걸 낯설어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상일 전 총장은 색깔있는 옷을 입어야 젊게 보인다고 하자“옷이 이것밖에 없는데”라며 흰 와이셔츠로 갈아입고 나왔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은퇴송(頌)

    신부는 기자 일행에게 집 구경을 시켜줬다. 세탁기가 놓인 빨래하는 방, 손님방, 김치를 비롯한 음식물이 놓여 있는 주방, 1층에 있는 손님방이었다. 지하실은 세미나용으로 쓰인다.

    2층에 연구실이 있었다. 연구실은 모두 유리로 할 계획이었지만 석양이 너무 강해 뜻을 바꿨다고 한다. 연구실 옆 신부의 침실은 손님방보다 훨씬 검소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후배 김제구 설계사가 무료로 해줬다고 한다.

    ―혼자 지내면 식사가 제일 힘들지 않습니까.

    "음식은 거의 제가 다 해먹습니다. 김치는 주변 분들이 가져다주고요. 요리 자랑 좀 해볼까요?"

    ―해보시죠.

    "식사 준비를 하다 보면 점점 겁이 없어집니다. 정 모르면 아는 분께 전화해서 물으면 되니까요. 한번은 우리 밭에서 나는 토마토에 올리브오일과 치즈를 넣은 뒤 야콘 잎을 가루로 만들어 얹은 적이 있어요. 손님들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나중엔 돼지갈비를 구우면서도 야콘 잎 가루를 넣어보니 돼지 특유의 냄새가 없어졌다고 하더군요. 사소한 것 같지만 자연은 그렇게 저를 가르쳐줍니다."

    ―손님 없는 날은 적적할 것 아니겠습니까.

    "남들은 심심할 것 같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제가 2월부터는 새벽 3시반, 12월부터는 새벽 4시반이나 5시 사이에 일어납니다. 하루 2시간 반 정도 묵상(默想) 기도하는 시간, 개들과 산책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일을 합니다. 여름에는 10~12시간 정도 야채도 가꾸고 청소도 합니다. 손님 주무시고 간 방 뒷정리도 하고요. 심심할 시간이 없어요."

    ―그 모든 걸 혼자 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처음엔 바퀴 하나 달린 수레에 남들의 4분의 1도 안 되는 분량의 흙이나 자갈을 싣고 가다 덜덜 떨기도 했습니다. 손에 힘이 없어 쏟아버리기도 했고요. 1년 정도 발발 떨었지만 그후엔 익숙해졌습니다."

    ―그럼 그 막막한 1년은 어떻게 견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신부 중에 굶어 죽은 신부는 제가 과문(寡聞)한지 모르지만 한명도 없었잖아요. 하느님이 신부인 나를 절대 굶어 죽게 할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배운 15개 국어가 아깝지 않나요.

    "일전에도 어떤 분이 그렇게 묻던데, 그런 생각은 없고요. 전 16번째 언어를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16번째 언어라뇨?

    "자갈의 언어, 잡초의 언어. 처음엔 진흙이나 바위를 여기저기 옮기기만 했지요. 나중에 보니 풀은 그대로 놔두면 꽃밭이 될 수도 있었어요. 제가 만일 자갈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해독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문법을 안다면 자연을 못살게 굴지는 않았겠지요. 요즘 16번째 언어를 배우며 반성도 많이 합니다. 낙엽은 떨어지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스스로 내려앉기도 하는 겁니다."

    ―무슨 반성을.

    "이런 걸 미리 깨달았다면 사람을 보는데도 달리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시골에 은둔하면 사목에는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

    "여기 온 다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질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막스 베버가 예수님의 카리스마를 이야기했는데 그 카리스마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일상화됐지요. '제도 교회'가 되면서 예수님의 카리스마를 체험하기에 약한 구조가 된 겁니다. 하비콕스도 그렇게 비판했어요. 교회는 가난해지려 노력하지만 정작 빈자(貧者)들은 가난하게 사는 기성 교회 대신 신흥 종교에 빠진다고요. 라틴아메리카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럼 이곳에 온 게 초기 공동체 같은 생활을 해보려?

    "보다 직접적이고 뜨겁게 예수님의 카리스마를 체험하려면 자연 안에서 묵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이곳에 수도(修道)하러 온 겁니다. 지금 방바닥이 따뜻하지요? 2008년 9월 태양열 기구를 기증받기 전까지는 겨울에 5~8도였어요. 추위도 하느님이 주신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승용차도 없는데 그러면 외출은 어떻게.

    "손님들 차 얻어타기도 하고. 뭘 사려 해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택시를 부르면 최소 2만원 이상 나오고. 누군가 승용차를 기증하겠다고 했는데 거절했습니다. 게을러질까 봐요."

    가족들

    신부는 귀향한 뒤 '린나'라는 책을 냈다. 린나를 통해본 세상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린나는 그가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시카고에 살던 요세피나 가족이 선물한 것이다. 린나의 고향은 장수에서 멀리 떨어진 노스캐롤라이나다.

    멜렉은 수컷으로 암컷 린나와 짝을 맞추기 위해 구해온 것이다. 진돗개 한 쌍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진돗개를 키우는 진돗개 전문가인 '수학의 정석'의 저자인 홍성대(洪性大) 전주 상산고 이사장이 준 것이라고 한다.

    ―진짜 애견들에게서 세상을 봅니까.

    "영국산 개들과 진돗개의 성격이 다른 것도 느끼고, 그들 사이의 위계질서도 느끼고 그렇습니다. 진돗개들은 벌써 새끼들을 많이 낳았는데 영국산 개들은 그렇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가 있지요."

    ―왜 못 낳습니까.

    "원래 저기 있는 축사(畜舍)가 린나를 위해 지어준 건데 멜렉과 바름이와 사랑이가 오면서 점점 줄어들었지요. 멜렉이 한때 뒤편으로 밀려났는데 그 때문에 애정 결핍을 느끼고 많이 불안해했어요. 지금은 나아지고 있어요. 제가 개 목걸이에서 힌트를 얻었거든요."

    ―개 목걸이는 또 왜?

    "개들이 목걸이를 싫어할 것 같죠? 정반대입니다. 주인 곁에 바짝 붙어서 스킨십이 강화되니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갑자기 멜렉이 왕이 아니라 불쌍해 보입니다. 요즘 여자들에게 기 못펴는 남자들과 똑같은 신세군요.

    "그건 다르지요. 여자들에게 잡힌 게 아니라 권력을 스스로 내줬겠지요."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됐다고 세상이 난리입니다.

    "은퇴가 쉬운 일도 아니고 사람들이 처한 형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은퇴는 좀 빠르다고 할 때 시작하는 게 낫습니다. 은퇴한 뒤 그동안 해오던 일을 바라보거나 붙잡아도 안됩니다. 정작 은퇴를 못하고 놓았던 일이 잡아당기니까요."

    ―그래도 준비 없는 은퇴는 두렵지 않습니까.

    "준비된 은퇴도 좋지만 만들어가는 은퇴가 더 좋지요. 생활비를 만들어놓으면 안전하긴 하지만 은퇴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을 하지 못합니다."

    ―특별한 체험이 뭔가요.

    "없을수록 허술할수록 도와주는 편한 친구가 생기지요. 뭘 챙겨놓으면 까다로운 친구가 생기고요. 전 은퇴도 일종의 벤처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제가 말한 16번째 언어를 배우는 것도 그 중 하나고요. 자아(自我)를 리사이클링할 수도 있지요."

    ―자아를 리사이클링하다니요?

    "제가 어렸을 때 운동을 못했어요. 체육 시간만 되면 '나는 안되는구나'하고 뒤로 빠졌습니다. 그런데 1979년 캐나다 몬트리올에 갔을 때 크로스컨트리를 처음 해볼 기회가 있었어요. 처음 스키를 탔는데 8명 중 2등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몰랐지요. 이곳에 와 초등학교 동창들을 많이 만납니다. 지금 보니 저보다 5~6세 많은 동창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걸 어렸을 때 모르다가 지금 알게 됐으니 자아의 리사이클링이 아니고 뭡니까."

    ―일전에 어느 글을 보니 이곳에 오려면 술을 들고 오라는 내용을 봤는데.

    "전 이곳에 오는 분들은 자기 복(福)을 자기가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뭘 가져오란 뜻이 아니고요, 제가 원래 술을 좋아하니까요."

    ―천주교에선 술을 금하지 않나요?

    "금하지 않아요. 개신교 목사님들은 안 마시지만 전 한때 말술이었어요. 대학 총장 지낼 때 3시간 만에 선 채로 맥주컵에 500잔 이상을 마신 적도 있고요. 중국 하얼빈에 있는 대학과 자매결연을 할 때는 60도 이상 되는 고량주와 배갈을…. 그 양은 스캔들이 될 것 같아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러고도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볼 일 다 봤어요."

    ―웬 술을 그리 드셨습니까.

    "술을 마셔야 대학에 후원금이 들어오니까요. 외로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다양한 사람들과 보다 친하게 지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봐주세요."

    오후 4시반인데도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신부는 처음엔 '자고 가라'더니 나중엔 "부엌에 김치찌개를 끓여놓았으니 먹고 가라"며 여러 번 일행을 만류했다. 찾아온 손님에게 줄 게 없다고 미안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빈손으로 온 건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기자는 신부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들으며 그 어떤 성찬(盛饌)보다 값진 것을 만끽한 것 같았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신부는 또 묵상하고 애견과 산책하고 농사를 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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