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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필독][영광] 영광榮光 과 광영光榮 은 천주교회의 고유한 차용 번역 용어들이다 [divine glory] 1988_glory 773_love 124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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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3 ㅣ No.2010

 

게시자 주: (1)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0.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2) 이번 글에 서술된 바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2017년 3월 중순부터 4월 말 기간 동안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따라서 그 저작권(著作權, Copyright)이 필자에게 있는, Data Mining 기법을 적용한, "AI 기반, 한시(漢詩) 표준 해석법 [A Standard Method of Interpretation of Chinese Poems(漢詩), Based on AI(Artificial Intelligence)]"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을, 또한 사용하여 분석하고, 이 분석의 결과에 따라 도출된 바들/결론들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1-1. 본글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글들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8.htm <----- 필독 권고

[제목: 요한 13,31-32 에서, 이제 ... 영광스럽게 되었고, 되셨다, 되셨으면???; 게시일자: 2019-05-13]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9.htm <----- 필독 권고

[제목: glorious 는 영광을 발(發)하는 혹은 영광을 사출(射出)하는 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영광스러운, 영광스럽게 되신???; 게시일자: 2019-05-21]

 

1-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소위 말하는, 신성적 영광(divine glory)으로서의 "하느님의 영광"(the glory of God, gloria Dei)의 교의 신학적 의미/정의(definition)에 대한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44.htm <----- 필독 권고

[제목: 영광 - 용어 정의(definition) 외; 2011-04-28]

 

1-3.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grace"(은총)이라는 성경 용어는 NAB (New American Bible) 구약 성경 본문 중에서는 일곱 번만 오로지 사용되었으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IK.HTM 

 

그러나,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glory"(영광)"이라는 성경 용어는 NAB (New American Bible)의 구약 성경 본문 중에서 "grace"(은총)이라는 성경 용어보다 훨씬 더 많이, 즉,  294번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7A.HTM 

 

따라서, "glory"(영광)"이라는 성경 용어는, 신약 성경 서간문들에 기록된, 이방인들의 사도인, 성 바오로(St. Paul)의 "은총 신학"(theology of grace)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유다주의(Judaism) 안에서 이미 인지되어, 구약 성경의 본문 중에서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시자 주 1-3: (1) 이번 글에서는, 연대순에 있어 내려가면서,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즉, (i) 우선적으로, 아래의 제2항에서 유다주의(Judaism) 안에서 "glory"(영광)"이라는 성경 용어의 의미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ii) 그런 다음에, 아래의 제3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아래에서 정의되는, 이 용어의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적 정의(definition) 등을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iii) 그러고 나서, 아래의 제4항에서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성경 용어로서 사용된, 따라서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榮光"(영광)의 출처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2) 그런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그동안 들여다본,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마련된, 다수의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 중에서,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榮光"(영광)의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적 정의(definition)를 제대로 기술하고 있는 문헌은, 적어도 여태까지, 찾지 못하였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위의 (i)(ii)는 그리스도교 신앙적으로 대단히 유의미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1-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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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영광이 발(發)하는(proceeds) 바로 그 장소 및 시간

하느님께서 현존(現存)하시고

그리고 역으로(conversely)

하느님께서 현존(現存)하시는 바로 그 장소 및 시간

하느님의 영광이 발(發)한다(procee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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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은총(grace)자신들의 심장들 안에 받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자신들의 심장(hearts)들 안에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그 영혼(soul) 육신(body)이 거룩하게 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러한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그 육신이 장차 부활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받을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즉, 그 육신이 장차 부활하면서 거룩하게 변모될 자들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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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1. 다음은, "한어대사전"에 주어진 "榮光"(영광)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아래의 제4항에서 그 출처를 함깨 들여다볼,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영어로 "glory"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에 대응하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로서 채책된, "榮光"(영광)이라는 한자 단어의 한문 문화권 안에서의 원 자구적 의미(original literal sense)는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www.guoxuedashi.com/hydcd/250452u.html 

(발췌 시작)

榮光  

 

(榮光,荣光)
1.五色雲氣。古時迷信以為吉祥之兆。[졸번역: 다섯 가지 빛깔(五色)의 운기(雲氣, 구름의 움직이는 모양)을 말한다. 옛 시절(古時)에(#) 이것으로써 길상(吉祥)의 조짐(兆朕)으로 삼았다(以為: to believe, to think, to consider, to be under the impression).]
 《初學記》卷六引《尚書中候》:“榮光出河,休氣四塞。”
 《南齊書‧陸澄傳》:“永明中,天忽黃色照地,眾莫能解。
 摛(王摛)云是榮光。
 世祖大悅,用為永陽郡。”
 清錢謙益《送劉編修鴻訓頒詔朝鮮》詩之三:“金函玉節日邊行,遼海榮光接漢京。”
2.指花木的光澤。[졸번역: 화초(花草)들과 수목(樹木)들의 광택(光澤, luster)을 가리킨다.]
 宋蘇軾《哨遍‧春詞》詞:“正溶溶養花天氣。一霎暖風迴芳草,榮光浮動,掩皺銀塘水。”
3.敬稱尊者容顏。中國近代史資料叢刊《太平天國‧頒行詔書》:“生逢其日,得見皇上帝榮光,爾世人何其大幸?”
4.光榮,榮耀。[졸번역: 광영(光榮), 영요(榮耀)를 말한다.]
 唐李白《大獵賦》:“方將延榮光於後昆,軼玄風於邃古。”
 王琦注:“榮,榮名也。光,光華也。”
 魯迅《熱風‧隨感錄三十八》:“他們的國粹,既然這樣有榮光,他們自然也有榮光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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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필자가 "古時迷信"을, "옛 시절의 미신(迷信, superstition)"이라고 번역하는 대신에, "옛 시절(古時)에"로 번역한 것은, "옛 시절의 미신(迷信, superstition)"이라는 표현은, 무신론적 유물론적 관념인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집필자의 고유한 견해가 이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는 과정에 의도적으로(intentionally)/작위적으로 주입되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가 지적한 이 문제는, "한한대사전", 권7, 제519쪽에 표제어로 수록된, "榮光"이라는 한자 단어의 동일한 용례들에 대한 첫 번째 설명이 "오색 구름. 상서로운 징조로 여겼다"인 것으로부터도, 또한 알 수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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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일부 분장들의 우리말 번역 끝)

 

2-1-2. 다음은, "한어대사전"에 주어진 "光"(광영)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아래의 제4항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이 단어가 또한,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영어로 "glory"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에 대응하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로서,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http://www.guoxuedashi.com/hydcd/47656m.html 

(발췌 시작)

光榮  

 

(光榮,光荣)
1.榮譽;榮耀。[졸번역: 영예(榮譽); 영요(榮耀)를 말한다]
 漢桓寬《鹽鐵論‧散不足》:“雖無哀戚之心,而厚葬重幣者,則稱以為孝。顯名立於世,光榮著於俗。”
 唐皎然《送烏程李明府得陟狀赴京》詩:“仲容綸綍貴,南巷有光榮。”
 明方孝孺《送伴讀朱君之慶府序》:“與賢者同志則光榮;與愚者同事則汙辱。”
2.恩寵。[졸번역: 은총(恩寵, grace)을 말한다.]
 《隋書‧李密傳》:“父兄子弟并受隋室厚恩,富貴累世,至妻公主,光榮隆顯,舉朝莫二。”
 唐劉禹錫《謝上連州刺史表》:“特降洪恩,得移善部,光榮廣被,母子再生。”
3.光芒。
 三國魏嵇康《阮德如答》詩:“隋珠豈不曜,雕瑩啟光榮。”
4.榮顯。
 晉干寶《搜神記》卷一:“汝子孫不能光榮先祖,何得罪神仙,乃累親如此。”
 宋歐陽修《代曾參答弟子書》:“吾與足下奚所識知,幸而生於時,得以登其門望其堂而傳其道,以光榮其身。”
5.由於做了好的事情而被公認為值得尊敬的。如:光榮之家;偉大、光榮的中國人民解放軍。

(이상, 발췌 끝) 

 

개사자 주 2-1-2; 특히 바로 위에 발췌된 설명은, 그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s)들에 있어, "光榮"(광영)"은총"(恩寵 grace)을, 즉, "은총"(grace)을 받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光"(광영), 즉, "榮光"(영광)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이상, 게시자 주 2-1-2 끝)

 

2-1-3: "한어대사전"에 주어진 恩寵"(은총)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guoxuedashi.com/hydcd/172935i.html 

(발췌 시작)

恩寵  

 

(恩寵,恩宠)
謂帝王對臣下的優遇寵幸。亦泛指對下屬的寵愛。
 漢王充《論衡‧幸偶》:“無德薄才,以色稱媚……邪人反道而受恩寵。”
 唐韓愈《論淮西事宜狀》:“臣謬承恩寵,獲掌綸誥,地親職重,不同庶寮。”
 《京本通俗小說‧菩薩蠻》:“主人恩義重,兩載蒙恩寵。”
 陳白塵《大風歌》第一幕:“皇太后對足下可謂恩寵備至。”

(이상, 발췌 끝)

 

2-1-4. 다음은 "한어대사전"에 주어진 "榮耀"(영요)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guoxuedashi.com/hydcd/250566u.html 

(발췌 시작)

榮耀  

 

(榮耀,荣耀)
亦作“榮曜”。
1.花木茂盛鮮艷。
 漢邊讓《章華臺賦》:“體迅輕鴻,榮曜春華。”
 三國魏曹植《雜詩》之四:“南國有佳人,容華若桃李……俛仰歲將暮,榮耀難久恃。”
 唐賀蘭進明《行路難》詩之二:“君不見門前柳,榮曜暫時蕭索久。”
 唐柳宗元《酬賈鵬山人郡內新栽松寓興見贈》詩之一:“夭夭日放花,榮耀將安窮。”
2.富貴顯耀。
 三國魏曹植《封二子為公謝恩章》:“竊位列侯,榮曜當世。”
 唐李公佐《南柯太守傳》:“生自爾情義日洽,榮曜日盛,出入車服,遊宴賓御,次於王者。”
 宋司馬光《送張兵部知遂州》詩:“人間富貴非不有,似君榮耀真亦稀。”
 元辛文房《唐才子傳‧徐凝》:“人間榮耀,徐山人不復貯齒頰中也。”
3.美好的聲譽。[졸번역: 미호(美好, bonum, goodness)한 성예(聲譽, 명성과 칭예, fame, reputation)를 말한다.]
 唐韓愈《新修滕王閣記》:“詞列三王之次,有榮耀焉。”
 清孫枝蔚《過茅大方先生祠》詩之一:“富貴還鄉井,多遭鄉井嗤。不如守大節,榮耀在親知。”
 柳青《創業史》第一部第三章:“這兩面獎旗是郭振山領導下的下堡鄉五村的榮耀。”

(이상, 발췌 끝)

 

2-2. 다음은, "Jewish Encyclopedia"(유다 백과사전)에 표제어로서 수록된 "GLORY OF GOD"(하느님의 영광) 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영어로 "glory"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는 구약 성경 용어로서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유다주의(Judasim)에서 이 용어가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어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출처: http://www.jewishencyclopedia.com/articles/6713-glory-of-god 

(발췌 시작)

SHEKINAH (V11p258003.jpg; lit. "the dwelling"):

(Redirected from GLORY OF GOD.)

 

In the Targumim.


타르굼(Targum)(#)들에서


The majestic presence or manifestation of God which has descended to "dwell" among men. Like Memra (= "word"; "logos") and "Yeḳara" (i.e., "Kabod" = "glory"), the term was used by the Rabbis in place of "God" where the anthropomorphic expressions of the Bible were no longer regarded as proper (see Anthropomorphism).

 

사람(men)들 사이에 "거주하시고자(dwell)" 이미 강하하신 하느님의, 장엄한(majestic), 현존(presence) 혹은 드러내심(manifestation)을 말합니다. Memra (= "word"; "logos") 그리고 "Yeḳara" (i.e., "Kabod" = "glory")처럼, 이 용어는 라삐(Rabbi)들에 의하여, 성경의 의인화 표현(anthropomorphic expressions)들이 더 이상 적합하다고 간주되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God)"의 자리에 습관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Anthropomorphism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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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타르굼"은 아람어(Aramic)로 번역된 구약 성경을 말한다.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더 자세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39.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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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 itself is taken from such passages as speak of God dwelling either in the Tabernacle or among the people of Israel (see Ex. xxv. 8, xxix. 45-46; Num. v. 3, xxxv. 34; I Kings vi. 13; Ezek. xliii. 9; Zech. ii. 14 [A. V. 10]).

 

이 단어 그 자체는, 장막(帳幕, Tabernacle)에 혹은 이스라엘 백성 사이 둘 중의 하나에 거주하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바로 그러한 절(passages)들로부터 취하여집니다(탈출 25,8. 45-46; 민수 5,3, 35,34; I열왕 6,13; 에제키엘 43,9;즈카르야 2,14 [A. V. 10]을 보라).

 

Occasionally the name of God is spoken of as descending (Deut. xii. 11; xiv. 23; xvi. 6, 11; xxvi. 2; Neh. i. 9). It is especially said that God dwells in Jerusalem (Zech. viii. 3; Ps. cxxxv. 21; I Chron. xxiii. 25), on Mount Zion (Isa. viii. 18; Joel iv. [A. V. iii.] 17, 21; Ps. xv. 1, lxxiv. 2), and in the Temple itself (Ezek. xliii. 7). Allusion is made also to "him that dwelt in the bush" (Deut. xxxiii. 16, V11p258004.jpg); and it is said that "the glory of the Lord abode upon Mount Sinai" (Ex. xxiv. 16).

 

때로는 하느님에 대한 이 이름(the name of God)은 강하 행위(descending)로서 말해집니다(신명 12,11; 14,23; 16,6.11; 26,2; 느헤미야 1,9). 특별히, 하느님께서 예루살람에(즈카르야 8,3; 시편 135,21; 1역대 23,25), 시온 산 위에(이사야 8, 18; 요엘 4. [A. V. 3.] 17,21; 시편. 15,1, 74,2), 그리고 성전 그 자체 안에(에제키엘 43,7), 거주하신다라고 말해집니다. 암시(allusion)는 또한 "덤불에 거주하시는 분"(신명 33,16, V11p258004.jpg)에도 마련되고, 그리고 "시나이 산 위에 거주하시는 주님의 영광"(탈출 24,16)라고 말해집니다

 

The term "Shekinah," which is Hebrew, whereas "Memra" and "Yeḳara" are Aramaic, took the place of the latter two in Talmud and Midrash, and thus absorbed the meaning which they have in the Targum, where they almost exclusively occur. Nevertheless the word "Shekinah" occurs most frequently in the Aramaic versions, since they were intended for the people and were actually read to them, and since precautions had therefore to be taken against possible misunderstandings in regard to the conception of God.

 

"Memra"와 "Yeḳara"가 아람어(Aramaic)인 것과는 달리, 히브리어(Hebrew)인 "셰키나(Shekinah)"탈무드(Talmud)(#1)미드라쉬(Midrash)(#2)에서 이들 둘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그리하여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이 거의 배타적으로(exclusively) 등장하는, 타르굼(Targum)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흡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키나(Shekinah)"라는 단어는 아람어 버젼들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데, 왜냐하면 이 버젼들이 이 백성을 위하여 의도된 것이었고 그리고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읽혔기 때문이며, 그리고 왜냐하면 하느님에 대한 개념 형성(conception)에 관련하여 가능한 오해(misunderstandings)들에 반하여 예방책(precautions)들이 바로 그 이유 때문에(therefore) 취하여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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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탈무드"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 중에 안내된 바를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451.htm <----- 필독 권고

 

(#2) 번역자 주: "미드라쉬"는 3세기 초 이후로 유다교 라삐들에 의한 성경에 대한 강론적 해석을 말한다.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더 자세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31.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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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 "dwell" in the Hebrew text is accordingly rendered in the Targumim by the phrase "let the Shekinah rest" (e.g., Ex. xxv. 8; xxix. 45, 46; Num. v. 3, xxxv. 34; Deut. xxxii. 10 [R. V. "he compassed him about"]; Ps. lxxiv. 2). Onḳelos translates "Elohim" in Gen. ix. 27 by "Shekinah"; and wherever the person, the dwelling, or the remoteness of God is mentioned, he paraphrases by the same word (Num. xiv. 14, 42; xvi. 3; xxxv. 34; Deut. i. 42, iii. 24, iv. 39, vi. 15, vii. 21, xxiii. 16, xxxi. 17); so too, wherever the Name occurs, he substitutes for it the term "Shekinah" (Deut. xii. 5, 11, 21), and "presence" or "face" is translated the same way (Ex. xxxiii. 14-15; Num. vi. 25; Deut. xxxi. 17-18; see Maybaum, "Anthropomorphien," etc., pp. 52-54). Targ. pseudo-Jonathan and Yerushalmi adopt a like system, as in Ps. xvi. 8, lxxxix. 47, Lam. ii. 19, and Cant. vi. 1 (ib. pp. 64 et seq.). Where the text states that God dwells in the Temple above the cherubim (as in Hab. ii. 20; I Sam. iv. 4; II Sam. vi. 2; I Kings viii. 12, 13; xiv. 21; Ps. lxxiv. 2), or that God has been seen (Isa. vi. 6 et seq.; Ex. iii. 6; Ezek. i. 1; Lev. ix. 4), the Yerushalmi has "Shekinah"; and even where it describes God as abiding in heaven, the same word is used (Isa. xxxiii. 5; Deut. iii. 24, iv. 39). This statement holds true also of allusions to His remoteness or to the hiding of His face (Hos. v. 6; Isa. viii. 17, xlv. 15; Hastings, "Dict. Bible," iv. 488b). The Temple is called the "house of the Shekinah" (Targ. Onḳ. to Deut. xii. 5; Ps. xlix. 15, cviii. 8); and the term likewise occurs in connection with "glory" ("yeḳara"; Ruth ii. 12; Cant. iii. 6, iv. 6, v. 6; Ps. xliv. 25, lxviii. 19, cxv. 16; Jer. xix. 18) and with "holiness" (Cant. i. 10, ii. 2, iii. 2, vi. 1; Ps. lxxiv. 12, lxxxvi. 3).

 

[...]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들의 우리말 번역 끝) 

 

3.

이번 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아래에서 정의되는,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용어의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적 정의(definition) 등을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1월 10일] 

그런데, 유관 자료들을 찾아서 분석하는 과정에, "하느님의 영광"의 정의(definition) 그 자체보다는, 이 용어가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커다란 어려움들로 대두되어,(*) 이 부분에 대하여 좀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에 띠리. 이 어려움들을 별도의 글들에서 더 정밀하게 들여다 본 후에, 이들을 취합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하였던 것인데, 이제 이 작업이 마무리되었기에, 이 부분의 작성을 재개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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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이 어려움들에,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i) 영어로 "glorious"로 번역되는 용어가, "영광을 발(發)하는/사출(射出)"으로 번역되는 대신에, "영광스러운"으로 대단히 잘못 번역된 것, (ii)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0항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가 있는 것, (iii)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808항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가 있는 것, 등이 포함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들 번역 오류들과 관련하여, 각 번역 오류의 종류와 수준이 서로 다름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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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다음은, 2011년 4월 28일자 필자의 졸글[제목: 영광 - 용어 정의(definition) 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44.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2-1. 다음은, 아래의 제3항에서 발췌 중인 성경 본문들(탈츨기 24,16-17; 33,18.22; 신명기 5,24)에서 사용 중인 영광(glory)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St. Joseph 판 NAB(New American Bible)의 부록으로 주어진 Bible Dictionary에 주어진 용어 설명입니다:
 
Glory
영광 
A very important notion in biblical theology. In Hebrew (kabod), the word designates "to be heavy," "to be illustrous." It often denotes the radiant manifestation of God, in his grandeur (Ez 1, 28). This divine glory is possessed by Jesus (Jn 1, 14). According to St. Paul, every Christian shares in this divine glory already here below (Phil 3, 21).
 
성서 신학(biblical theology)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히브리어(kabod)로, 이 단어는 "무거움(to be heavy),"빛과 함께 밝게 빛남(to be illustrious)"를 나타냅니다. 이 단어는 흔히, 당신의 장엄함으로, 하느님의 빛을 내는 나타남(현현, 顯顯)을 의미합니다(denotes)(에제키엘 1,28).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신성적 영광(divine glory)을 소유하십니다(요한 복음서 1,14). 성 바오로(St. Paul)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여기 아래에서 이미 이러한 신성적 영광(divine glory)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필리피 3,21). 

 

2-2. 다음은 아래의 제3-3-3항에 발췌한 탈출기 33,18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에 주어진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내적 실체(sa réalité intime)를 말한다.
 
  
2-3.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809항에서 가르치고 있는 "영광(glory)"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CCC 2809 The holiness of God is the inaccessible center of his eternal mystery.
What is revealed of it in creation and history, Scripture calls "glory," the radiance of his majesty. In making man in his image and likeness, God "crowned him with glory and honor," but by sinning, man fell "short of the glory of God." From that time on, God was to manifest his holiness by revealing and giving his name, in order to restore man to the image of his Creator.

(졸번역)
CCC 2809 하느님의 거룩함[holiness, 성성(sanctity, 聖性)]은, 접근, 도달 할 수 없는, 당신의 영원한 신비의 중심에 있다. 창조와 역사에 있어 당신의 거룩함으로부터 드러내어지는 바를, 성경은 "영광(glory)", 즉 당신 엄위의 광채 라고 부른다. 당신의 모습 및 비슷함으로(창세 1,26) 사람을 만드심에 있어,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영광과 명예의 관을 씌우셨다." 그러나 죄를 지음으로써, 사람은 "이 하느님의 영광(the glory of God, gloria Dei)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바로 그 시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창조주이신 당신의 모습으로(콜로 3,10) 사람을 회복하게 하고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시고 제시하심으로써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내기로 하셨다.

(이상, 발췌 끝)

 

3-1-2. 다음은, 2011년 5월 7일자 필자의 졸글[제목: 영광 - 용어 정의(definition) 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46.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7월 24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주어진 설명을 읽으면, 이제 이 "영광"이라는 용어에 대한 더 자세한 용어 정의(definition)를 읽을 수 있습니다:

(발췌 시작)
GLORY
The recognition and praise of someone's excellence. Applied to God, the divine (internal) glory is the infinite goodness that the persons of the Trinity constantly behold and mutually praise. His external glory is first of all the share that creatures have in God's goodness. Sometimes called objective glory, it is given to God by all creatures without exception, by their mere existence, insofar as they mirror the divine perfections. Formal glory is rendered to God by his rational creatures, when they acknowledge the divine goodness and praise God for who he is and what he has communicated of himself to the world. (Etym. Latin gloria, renown, splendor, glorification.)
 
영광(GLORY)
 
어떤 이의 탁월성(excellence)에 대한 인정(recognition)과 찬미(praise)를 말합니다. 하느님께 적용될 때에(applied to God), 신성적 영광/내적 영광[the divine (internal) glory]은, 성 삼위의 위격들께서 변함없이 주시하면서 상호 찬미하는, 무한한 선함(infinite goodness)을 말합니다. 당신의 외적 영광(His external glory)은 무엇보다도 먼저 피조물들이 가지는(have), 하느님의 선함 안에 있는, 바로 그 모든 할당(all the share)을 말합니다. 때로는 객관적 영광(objective glory)이라고 불리는 당신의 외적 영광은 예외 없이 모든 피조물들에 의하여, 그들의 다만 존재(mere existence)만에 의하여, 그들이 이 신성적 완미(完美)(the divine perfections)들반사하는(mirror) 한, 하느님께 바쳐집니다(is given to). 형상적 영광/정식 영광(formal glory)은 당신의 이성적 피조물(rational creatures)들에 의하여, 그들이 이 신성적 선함(the divine goodness)을 인정하고 그리고 당신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하여 및 당신께서 당신 자신으로부터 이 세상에 이미 나누어주신(has communicated) 바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할(praise) 때에, 비로소 하느님께 바쳐지게 됩니다(is rendered to). [어원. Latin gloria, renown, splendor, glorification.]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따라서, 위의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영광(glory)"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에 의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809에 주어진 "영광"의 정의(definition) 하느님의 외적 영광(God's external glory)원인(cause)임을 알 수 있으며, 그리고 탈출기 33,18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에 주어진 "영광"에 대한 "하느님의 내적 실체(sa réalité intime)" 라는 설명은, 하느님의 내적 영광(God's internal glory)원인(cause)에 대한 설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구약 성경의 본문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이 성 삼위의 하느님이신 것을 드러내시지 않으셨으므로,
 
하느님의 내적 영광(God's internal glory)이 당신의 무한한 선함(God's infinite goodness)으로 정의됨(defined)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습니다.

[...]

1-5-2.
 
Example:
 
예를 들어, 우리말로 번역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본문 중에 바로 이러한 번역 오류제2808항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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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C 2808 In the decisive moments of his economy God reveals his name, but he does so by accomplishing his work. This work, then, is realized for us and in us only if his name is hallowed by us and in us.
 
(졸번역)
CCC 280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경륜의 결정적인 순간들에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시며, 다만(but) 당신께서는 당신의 일(work)을 수행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바로 그 경우에 있어(then), 당신의 이름이 우리에 의하여(by) 그리고 우리 안에서(in) [영광을 받음으로써(by being glorified)](*) 거룩하게 드러나 빛날(is hallowed) 만 오로지(only if), 바로 이 하느님의 일(opus Dei)이 우리를 위하여(for) 그리고 우리 안에서(in) 실현될 수 있습니다[즉, 실현될 가능성이 있습니다].(*2)

[내용 추가 일자: 2019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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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바로 이 대괄호 [ ] 안의 문구 추가가, 전후 문맥 안에서, 논리적으로 적합함(logically proper)은,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강론 말씀에서 확인될 것이다:

(발췌 시작)
The first concern of the “Lord’s Prayer” is that God’s name should be glorified, that his Kingdom should come, that his will should be done.

"주님의 기도"의 첫 번째 중요한 건(concern)은 하느님의 이름이 반드시(should) 영광을 받아(be glorified), 그리하여 그 결과 그분의 나라/통치(his Kingdom)가 반드시(should) 도래하고, 그리하여 그 결과 그분의 뜻(his will)이 반드시(should) 성취되는 것입니다.

(*2) 번역자 주: 즉, 당신의 이름이 우리에 의하여(by) 그리고 우리 안에서(in) [영광을 받음으로써(by being glorified)](*) 거룩하게 드러나 빛나게 됨(being hallowed)이 하느님의 일(opus Dei)이 우리를 위하여(for) 그리고 우리 안에서(in) 실현될 수 있음[즉, 실현될 가능성이 있음]한 개의 실천적 원리(a practical principle), 즉, 한 개의 필요 조건(a necessary condition)임을 여기서 말하고 있다. 실천적 원리/실천 원리(practical principle)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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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9년 12월 23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졸번역 끝) 

(기존의 번역) 
2808 구원 경륜의 결정적인 순간들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밝히시는데, 당신의 일을 수행하심으로써 그 이름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거룩히 빛날 , 하느님의 일도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게시자 주: 바로 위의 우리말 번역은, 번역 과정에서 "당신의 이름이 우리에 의하여 그리고 우리 안에서 거룩히 빛나게 됨" 이라는 필요조건을, "only"를 강조로 생각하여 생략하고 잘못 번역한 결과, 번역 과정에서 충분조건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므로, 명백한 논리적 번역 오류입니다. 이 번역문과 위의 졸번역과 반드시 차분히 비교/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졸번역은,
 
"바로 그 경우에 있어, 당신의 이름이 우리에 의하여(by) 그리고 우리 안에서(in) 거룩하게 빛나지 않으면(not be hallowed), 바로 이 하느님의 일(opus Dei)이 우리를 위하여(for) 그리고 우리 안에서(in) 실현될 수 없음"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으나,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의 번역은,
 
"하느님의 일이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거룩히 빛나지 않는다" -(x)
 
와 논리적으로 동치인 표현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논리적으로 명백한 번역 오류 입니다, 왜냐 하면, 이 표현은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거룩히 빛나지 않는 이유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전지전능하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대단히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2808항에서, 강조하는 표현인 "A only if B"의 형식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다음의 문장의 내용과 논리적으로 동치입니다:
 
"바로 그 경우에 있어, 당신의 이름이 우리에 의하여(by) 그리고 우리 안에서(in) 거룩하게 빛나지 않으면(not be hallowed), 바로 이 하느님의 일(opus Dei)이 우리를 위하여(for) 그리고 우리 안에서(in) 실현될 수 없다." -(y)
 
이 문장[즉 -(y)]은, 그 위의 문장[-(x)]와는 전혀 다르게, 하느님의 일이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안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이유 혹은 책임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기에, 신학적으로 하자가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의 오류로 인하여, "A only if B" 문장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위치가 서로 뒤바뀌게 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상, 발췌 끝)

 

3-1-3. 다음에 발췌된 바는, 이 세상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45.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III. "THE WORLD WAS CREATED FOR THE GLORY OF GOD"
III. "이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CCC 293 Scripture and Tradition never cease to teach and celebrate this fundamental truth: "The world was made for the glory of God."134 St. Bonaventure explains that God created all things "not to increase his glory, but to show it forth and to communicate it",135 for God has no other reason for creating than his love and goodness: "Creatures came into existence when the key of love opened his hand."136 The First Vatican Council explains:
 
This one, true God, of his own goodness and "almighty power", not for increasing his own beatitude, nor for attaining his perfection, but in order to manifest this perfection through the benefits which he bestows on creatures, with absolute freedom of counsel "and from the beginning of time, made out of nothing both orders of creatures, the spiritual and the corporeal. . ."137
 
(졸번역)
CCC 293 성경(Scripture)과 성전(Tradition)은 다음과 같은 근본 진리(fundamental Truth)를 가르치고 경축하는 것을 결코 멈춘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the glory of God)을 위하여 창조되었다.”성 보나벤뚜라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증대시키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이 영광을 밖으로 나타내어 그리하여 이것을 나누어 주시고자(communicate)" 만물들을 창조하셨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선함(goodness) 이외에 창조 행위을 위한 다른 이유를 전혀 가지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물들은 사랑의 열쇠(the key of love)가 당신의 손을 열었을 때에 비로소 존재(existence)로 나타났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당신 고유의 선함(goodness)과 "전능하신 힘"을 지니신 바로 이 한 분이신, 참 하느님께서는, 당신 고유의 지복(beatitude)을 증대시키기 위하여서도 아니고, 당신의 완미(perfection)를 얻기 위하여서도 아니고, 당신께서 창조물들에게 베푸신 혜택들을 통하여 바로 이 완미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계획의 절대적 자유로우심과 함께 "한처음에, 무로부터 영적인 및 형이하학적 창조물들 둘 다에 있어서의 순서(orders)들을 ..." 만드셨다.
 
CCC 294 The glory of God consists in the realization of this manifestation and communication of his goodness, for which the world was created. God made us "to be his sons through Jesus Christ, according to the purpose of his will, to the praise of his glorious grace",138 for "the glory of God is man fully alive; moreover man's life is the vision of God: if God's revelation through creation has already obtained life for all the beings that dwell on earth, how much more will the Word's manifestation of the Father obtain life for those who see God."139 The ultimate purpose of creation is that God "who is the creator of all things may at last become "all in all", thus simultaneously assuring his own glory and our beatitude."140
 
(졸번역)
CCC 294 하느님의 영광(the glory of God) 당신의 선함(goodness)의 바로 이러한 나타남(manifestation) 및 나누어 줌(communication)의 실현(realization)을 그 주된 내용으로서 가지는데(consists in), 이 실현을 위하여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의 은총에 대한 찬미를 하고자 하는, 당신 뜻의 목표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아들들이 되도록" 우리를 만드셨는데(에페 1,5`-`6), 이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영광(the glory of God)은 사람(man)이 충만하게 살아있는(alive) 것이며,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의 살아있음/생명(life)은 하느님을 뵈옴(the vision of God)이기 때문입니다: 창조를 통한 하느님의 드러내심(revelation)이 땅에 사는 모든 존재들을 위하여 생명을 이미 얻게 하였다면, 거룩한 말씀(the Word)에 의한 성부의 나타나심(manifestation)은 당신을 뵙는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장차 얻게 할 것일까요." 창조의 궁극적인 목표는 "만물들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최종적으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1코린 15,28)이 되시어, 그 결과 당신 고유의 영광과 우리의 지복(참행복)을 동시에 확증하시고자 함에 있다."
(이상, 발췌 끝).
 
[...]

3.
이 글에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본질인 당신의 성성(Sanctity, 聖性), 즉 거룩하심(Holiness)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들에 대하여 함께 읽고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3-1.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주어진 한 분이신 "하느님의 성성(Snactity, 聖性)"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발췌 시작)
SANCTITY
성성(聖性)

In an absolute sense, the Divinity. The sanctity of God is his total transcendence or total otherness. It is in this sense that the Church prays in the Gloria of the Mass, "You alone are the Holy One, you alone are the Lord, you alone are the Most High." All other sanctity is by participation, so that a creature has as much sanctity as it shares in the Divinity. Essentially it consists in the possession of sanctifying grace, although the term is usually applied to persons who practice more than odinary virtue, especially the love of God and their neighbor.
 
절대적인 의미에 있어, 유일한 신성(the Divinity)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성성(聖性)은 당신의 전적인 초월성(total transcendence) 혹은 전적인 다름(total otherness) 말합니다. 교회가 미사 중의 대 영광송(Gloria)에서,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You alone are the Holy One, you alone are the Lord, you alone are the Most High)" 이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입니다. 모든 다른 성성(聖性)은 참여에 의한 것이며, 그 결과 피조물은 이 유일한 신성에 그것이 참여하는 정도까지의 성성(聖性)을 가집니다. 본질적으로 이 참여에 의한 성성(聖性)은, 비록 이 용어가 보통 통상적인 덕(virtue)보다 더한 바를, 특별히 하느님과 자신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적용되고 있기는 하나, 성화 은총(the sanctifying grace)의 소유를 주된 내용으로서 가집니다(consists in)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3-1: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하느님의 성성(聖性)에의 참여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 성화 은총(the sanctifying grace)의 소유이고, 그리고 바로 이 은총은 세례성사 시에 하느님에 의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주입되기 때문에, 죄인들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바로, 세 개의 섯아들고 구성된 입문성사들 중의 하나인, 세례성사인 것입니다.

 

3-2. 바로 위의 제3-1항에 발췌된 바에서, "사랑(love, caritas, charity)"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와 용례들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concept_of_love.htm <----- 필독 권고

 

특히,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들을 먼저 읽고 학습한 다음에, 위의 주소에 있는 글들을, 오래된 글들부터 최근의 글들의 순서대로,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86.htm <----- 필독 권고 

[제목: 하느님의 사랑의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1-07-21]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65.htm <----- 필독 권고 

[제목: 애덕(charity)이라는 덕; 2013-11-04]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47.htm <----- 필독 권고 

[제목: 번역 용어인 사랑하다(to love, amo) 라는 동사의 의미; 게시일자: 2015-07-02]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1.htm <----- 필독 권고 

[제목: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과 인성(人性)적 사랑(human love)의 차이점; 게시일자:2016--4-30]

 

3-3.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영어로 "glorious"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가 "영광스럽다"[표준국어대사전: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를 느낄듯 하다]대단히 잘못 번역되었음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8.htm <----- 꼭 필독 권고

[제목: 요한 13,31-32 에서, 이제 ... 영광스럽게 되었고, 되셨다, 되셨으면???; 게시일자: 2019-05-13]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9.htm <----- 꼭 필독 권고

[제목: glorious 는 영광을 발(發)하는 혹은 영광을 사출(射出)하는 으로 번역되어야 함.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영광스러운, 영광스럽게 되신???; 게시일자: 2019-05-21]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8.htm <----- 필독 권고

 

게시자 주 3-3: 상당한 시간과 노력들 들여 실증적으로(positively) 정밀하게 입증하는, 이들 세 개의 주소들에 있는 글들은 대단히 긴 글이기에, 이들 모두를 여기에 발췌하지 않고, 다만 마지막 글, 즉, 2018.htm 중의 일부만 아래의 제3-4항에 발췌하였습니다.

 

3-4. 다음은, 바로 아래의 출처에 있는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글/논문[제목: religion 이라는 한 개의 용어의 그리스도교 전통적 정의(definition)와 19세기초의 한 근대주의자의 정의의 차이점; 2019-12-19]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8.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3-1. 다음에 발췌된 바는,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표제어로 수록된 "religion as feeling"이라는 세속의 용어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r/r075.htm 

(발췌 시작)

RELIGION AS FEELING

 

The view that Christianity is essentially a religion of feeling. It was systematically developed by 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 in his Christian Faith, which dates an epoch in the history of modern theology. While rationalists and supernaturalists carried on their struggle, Schleiermacher took the ground from under their contention by removing its main presupposition. The Christian faith, he said, does not consist in any kind of doctrinal propositions. It is a condition of devout feeling and, like all other experience, simply an object to be described. Against the supernaturalists he maintained that Christianity is not something to be received on authority from without, but an inward condition of our own self-consciousness. Against the rationalists, he said that religion is not a product of rational thinking, but an emotion of the heart, a feeling that occurs independently of the mind. Moreover, this feeling is not merely personal but social in its Protestant form, since it is the common experience of a historical community derived from the Reformation. 

 

느낌으로서 경신[복합체/체계](religion as feeling)[정의(definition) B]

 

그리스도교(Christianity)가 본질적으로 느낌으로 구성된 한 경신(敬神)[복합체/체계](a religion of feeling)이라는 견해(view)를 말합니다.

 

이 견해는 [독일의] 실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에 의하여, 근대 신학(modern theology)의 역사에 있어 한 사건으로서(an epoche) 그 연대를 정하는(date), 그의 책 Christian Faith에서 조직적으로(systematically) 전개되었습니다.

 

합리주의자(rationalists)들과 초자연주의자(supernaturalists)들이 자신들의 고투를 수행하는 동안에, 실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그들의 논쟁(contention)의 어려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from under) 그 주된 사전전제(presupposition)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견해의] 근거(ground)를 확보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은 교리적 명제(doctrinal propositions)들의 어떤 종류를 주된 부분으로서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은 열렬한 느낌(devout feeling)의 한 조건/연(緣)(a condition)이며, 그리하여, 다른 경험(experiences)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단지(simply), [경험의 결과로서] 서술되는 한 대상(an object)일 뿐이다.

 

초자연주의자(supernaturalists)들에 반대하여(against) 그는 다음을 견지하였습니다(maintained): 그리스도교(Christianity)는 외부로부터(from without) 권위 때문에(on authority) 받아들여져야 하는 그 무엇(something)이 아니고, 다만(but) 우리의 고유한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의 안쪽으로부터 나오는(inward) 한 조건/연(緣)(a condition)일 뿐이다.

 

합리주의자(rationalists)들에 반대하여(against)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경신(religion)[복합체/체계]은 어떤 이성적 사유 행위(a rational thinking)의 한 산출물(a product)이 아니고, 다만(but) 심장(heart)의 한 감정(an emotion), 마음에 독립적으로(independently of the mind) 발생하는 어떤 느낌(a feeling)[복합체/체계]일 뿐이다. 더구나, 바로 이 느낌[복합체/체계]은 다만(but), 그 반항/항의의 형태(Protestant form)에 있어, 개인적(personal)일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데(social), 왜냐하면 그것이 [16세기 초반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하여 개시된] 그 개혁(the Reformation)으로부터 유래하게 된 한 역사적 공동체(a historical community)의 공동의 경험(common experience)이기 때문이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3-1: (1) 바로 위의 제3-1항에 제시된 "경신"(religion)의 정의(definition)는, 소위 말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온고(溫故)"에 근거한 연역적 추론 행위(deductive reasoning)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다만 자신의 고유한 느낌/경험에 근거한 귀납적 추론 행위(inductive reasonings)을 추론 행위(reasoning)의 전부이라고 주장하는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논리적 오류(logical error)를 범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2) 따라서, 바로 위의 제3-1항에 제시된 "경신"(religion)의 정의(definition)를 진리로서 받아들이면, 각 개인이 그 무엇에 대한 판단의 순간에, 보편성이 결여된, 자신의 고유한 잣대(norms)/기준(standards)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각 개인에 있어 거룩함의 상실과 함께, 흐르는 세월 속에서, 해당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의 자유 의지의 의향들의 불일치로 구성되는 핵 분열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결국에, 해당 공동체는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와해/해체될 것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특히, 실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의 이름이 그 목록 중에 등장하는, "경신"(religion)을 적합하지 않게 서술하고 있는 예(examples)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maritain.nd.edu/jmc/etext/relig.htm 

(발췌 시작)

[...] Religion may thus be defined as the voluntary subjection of oneself to God, that is to the free, supernatural Being (or beings) on whom man is conscious of being dependent, of whose powerful help he feels the need, and in whom he recognizes the source of his perfection and happiness. [...]

 

[...]

 

Religion is not adequately described as "the knowledge acquired by the finite spirit of its essence as absolute spirit" (Hegel), nor as "the perception of the infinite" (Max Muller), nor as "a determination of man's 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 (Schleiermacher), nor as "the recognition of all our duties as divine commands" (Kant), nor as morality touched by emotion" (Mathew Arnold), nor as "the earnest direction of the emotions and desires towards an ideal object recognized as of the highest excellence and as rightly paramount over selfish objects of desire" (J. S. Mill). These definitions, in so far as they are true, are only partial characterizations of religion.

(이상, 발췌 끝)

(이상 게시자 주 3-1 끝)

 

따라서, 바로 위의 게시자 주 3-1에서 지적한 바에 이어서, 이 지적들의 한 결과로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5) 영어로 "glorious"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8.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9.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8.htm <----- 필독 권고

 

"영광스럽다"[표준국어대사전: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를 느낄듯 하다]대단히 잘못 번역된 것은, 성경 본문의 해석에 있어, 위의 제3-1항에 안내된,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인 실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의 신학적 견해를 따른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상, 발췌 끝)

 

3-5. 바로 위의 제3-4항에 발췌된 바에서 말하는 거룩함의 상실의 상실은, 다음에 발췌된 바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영광"의 상실을 가장 그  깊은 안쪽에 포함하고 있을 있을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7.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이 글의 결론 1) (i) 요한 복음서 14,31ㄱ 요한 복음서 17,24ㄴ의 문맥 안에서, 왜냐하면 세상 창조 이전부터 성부성자는 "사랑"이라는 매우 친밀한 관계의 상태(relationship)에 있으며, 따라서 이분들 사이에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그 무엇"은, 바로 이 유일한 관계의 상태(relationship)인 "사랑" 그 자체를 말하는, 성령이기 때문에"예수님의 영광, 즉, 강생하신 성자의 영광"은 곧 "성령"을 말함을, 그리하여 그 결과, (ii) 바로 위에 발췌된 요한 복음서의 여러 유관 문장들로부터, 특히 요한 복음서 10,30요한 복음서 14,31ㄱ, 그리고 요한 복음서 17,24ㄴ로부터"예수님의 영광이, 즉, 성령/성신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함(proceeds)"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광이 발(發)하는(proceeds) 바로 그 장소 및 시간

하느님께서 현존(現存)하시고

그리고 역으로(conversely)

하느님께서 현존(現存)하시는 바로 그 장소 및 시간

하느님의 영광이 발(發)하기(proceeds)

때문입니다.

 

[...]

 

바로 (이 글의 결론 1)한 개의 따름 정리(a corollary)로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 바로 위에 발췌된 요한 복음서의 여러 유관 문장들이, 특히 요한 복음서 10,30과 요한 복음서 17,24ㄴ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본문 중에,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라는 문구의 성경 근거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2-1: (3) 바로 위에 있는 (이 글의 결론 1) 중에서 도출된 "예수님의 영광"은 곧 "성령"을 말함은 또한, 다음의 제2-2항에 발췌된, 가톨릭 보편교회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2-2. 다음의 가톨릭 보편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0항의 두 번째 문장(statement)을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1: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1s2c3a8.htm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0항에서 발췌 시작)

CCC 690 [...] When Christ is finally glorified,12 he can in turn send the Spirit from his place with the Father to those who believe in him: he communicates to them his glory,13 that is, the Holy Spirit who glorifies him.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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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Jn 7:39.
13) Cf. Jn 17:22.
14) Cf. Jn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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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출처 2: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299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0항에서 발췌 시작)

[...]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셨을 때 9),(*1)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성부 곁에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10) 곧 당신에게 영광을 더하시는(glorifies)(*2) 성령11) 그들에게 주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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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요한 7,39 참조.
10. 요한 17,22 참조.

11. 요한 16,14 참조. 

 

(*1) 게시자 주: (번역 오류 한 개) 기존의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셨을 때"라는 번역문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전혀 받지 못하셨는데, 드디어 처음으로, 영광을 받으셨을 때"를 의미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요한 복음서에 기록된 바들에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명백한 번역 오류라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강생하신 성자이신 예수님께서는 한처음 이전부터 "성령", 즉, "성자의 영광"을 성부로부터 받으셨기 때문에(요한 복음서 17,24ㄴ), 따라서, 강생 이후에도, 강생하신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영혼(soul)"성자 하느님의 영광"을 항상 받고 있으셨으며[상태 A],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when Christ is finally glorified"란, 전후 문맥 안에서, "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과정에, 당신의 몸(body)이 또한 추가적으로 영광을 받아 거룩하게 변모되시고[상태 B][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59항ㄴ](#1), 또한 그러고 나서, 하늘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과정에, 최종적으로(finally)당신의 영혼(soul)과 몸(body), 즉, 당신의 인성(humanity)이 또한 추가적으로 영광을 받아 승천을 완료하셨을 때[신성적 영광(divine glory)을 예수님의 인성이 완미하게(perfectly) 받고 있는 상태 C][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59항ㄹ;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60항ㄴ 참조](#1)"를 정확하게(precisely) 지칭하여 말하는 것이므로[가툴릭 교회 교리서 제244항 참조](#2), 따라서, "when Christ is finally glorified"는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으로 영광을 받게 될 때"로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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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659항, 제660항을 읽을 수 있다: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1s2c2a6.htm#659 [영어본]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285 [우리말본]

 

(#2)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244항을 읽을 수 있다: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1s2c1p2.htm#244 [영어본]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124 [우리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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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게시자 주: 영어로 "glorify"로 번역되는 용어를 "영광스럽게 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심각한 번역 오류이므로, 필자가 "영광을 더하다"로 교체하였다. 이 지적에 대한 필자의 졸들들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8.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9.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8.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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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이상, 발췌 끝)

 

4. 사료 분석

 

이번 항에서는, 연대순에 있어 거슬러 올라가면서,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 등에 의하여 마련된, 다수의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 중에서, 영어로 "glory"로 번역 되는 성경 용어에 대응하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들인 "榮光"(영광)"榮"(광영)의 출처들에 대하여, 함께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게시자 주 4: 영국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의 개신교회 측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이 중국 본토에 저음 입국한 시점이 1807년임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807년과 개신교회의 대표역본/대표본/문리본이 출판된 1853년 사이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개신교회 측의 목회자들이 성경 본문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에 참조한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에, "방자유전"(제4-8항), "기인십편"(제4-7항), "칠극"(제4-6항), "천주강생언행기략"(제4-5항), "성년광익"(제4-1항), 그리고 "성경광익"(제4-1항)" 등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02.htm <----- 필독 권고

[제목: 1853년 경에 초판된 중국 개신교회 측의 대표역본/문리본 한문본 성경들의 용어들의 출처 문헌들에 포함되는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 게시일자: 2019-08-18]

(이상, 게시자 주 4 끝)

 

4-0.

4-0-1. 다음은, 1910년에 초간된, "4사성경" 초판요한 복음서 13,31-32가 포함된 페이지인데, "영광"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8.htm

(발췌 시작)

3-3. 다음에 발췌된 바는, 한기근 신부님(1867-1963년)과 동료 사제들에 의하여 번역되고 또 각주도 마련되어 1910년에 초간된, "4사성경" 초판요한 복음서 13,31-32가 포함된 페이지입니다: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부터 두 번째 열까지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유관 부분을 현재의 우리말 어법에 맞게 다시 씀 시작)

31 유다스가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 닐어시대 인자가 즉금(卽今) 영광을 받고 천주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천주께서 임의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음에 천주 또한 인자를 친히 영화롭게 하실 것이오 또 미구(未久)에 인자를 영화롭게 하시리라.

(다시 씀 끝)

(이상, 발췌 끝)

 

4-0-2. 다음은, 1862년에 초간된 것으로 알려진 우리말본 "천주성교공과"에 수록된 "영광경"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이상, 발췌 끝)

 

따라서, 지금까지 아래의 항들에서 고찰한 바와 바로 위에 발췌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5) 바로 위의 제4-0-2항에 발췌된, 1862년에 초간된 것으로 알려진 우리말본 "천주성교공과"에 수록된 "영광경"은, 다음에 발췌된, 중국 사천성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모예 신부(1730-1793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780년에 초간된, "천주경과", 상권, 제34쪽에 수록된 "축성3문"을 우리말로 직역 번역한 것이 결코 아니고, 그 번역 대본인 라틴어 기도문 "Doxologia Minor(소영광송)"(#)에 매우 출실한, (i) 아래의 제4-0-5항에 발췌된 "수진일과"에 수록된 "성삼광영송", 혹은 (ii) 아래의 제4-0-6항에 발췌된 "천주성교일과"에 수록된 "광영경", 이들 둘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조선 안에서, 중국 사천성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1836년과 그 이후에 우리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퍄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성직자들과 최양업 신부님(1821-1861년) 등에 의하여 우리말로 번역된 후에, 이 기도문의 이름이 "영광경"으로 교체된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30-1793_모예/1780_천주경과_상권.htm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부터 네 번째 열까지 읽도록 하라. "光榮" 혹은 ""이, 이 기도문의 이름과 본문 둘 다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았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특히, "祝兮聖三"(축혜성삼)이라는 특이한 표현이 이 기도문의 서두에 사용되었는데, 그러나 많이 부족한 죄인인 일천(日淺)한 필자가 들여다본 대단히 방대한 분량의 한문 문헌들 어디에서도, 모예 신부(1730-1793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780년에 초간된 "천주경과"제외하고(except), 이 표현이 사용된 용례를 찾아볼 수 없었에, 또한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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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라틴어 기도문 정본인 "Doxologia Minor(소영광송)"와 이 기도문의 영어본을 읽을 수 있다:

 

출처: http://www.preces-latinae.org/thesaurus/Basics/GloriaPatri.html 

(발췌 시작)

(이상, 발췌 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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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결론 4) 아래의 제4-0-3항에 의하여, 성 김대건 안드리아 신부님(1821-1846년)께서 순교 당한 해인 1846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안에서도 또한 "榮"(광영)이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를 사용해 왔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4-0-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846년에 새남터에서 순교 당하신 성 김대건 안드리아 신부님(1821-1846년)의 마지막 편지 중에 "爲主光榮"(주님의광영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있다고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pds.catholic.or.kr/pds/bbs_view.asp?num=629&id=27791&Page=7&menu=4817 

(발췌 시작)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도우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환난을 거두시기까지 기다립시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爲主光榮],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해갑시다.

(이상, 발췌 끝)

 

4-0-4.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839년 기해 박해 때에 순교 당한,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조카인,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년)가 관원에게 제시한 "상재상서"의 본문 중에 "顯主光榮"이라는 표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13.htm

(발췌 시작)

噫,彼聖敎之人獨非吾王之赤子耶.哀此,人斯何至此極而不少恤哉.獄中之斃,門戶之斬,連續不絶,泣血成渠哭聲漲天,父呼其子,兄呼其弟,如窮人之無所歸,淸明之世,此何光景.夫損生致命,證主眞敎,顯主光榮,吾?分內事矣.身亦將死之類也.遇此敢言之時不一次仰首長呼啼而愍?就死則山積之懷將無以自暴於百世之下.

(이상, 발췌 끝)

 

4-0-5. 다음에 발췌된 바는, 1783년이승훈이 북경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1784년에 국내로 반입하였다고 알려진, "수진일과", 속권1, 제2b-3a쪽에 수록된 "성삼광영송"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9-1654_니콜라스_롱고바르디_et_al/수진일과_원본.htm

(발췌 시작)

 

(이상, 발췌 끝)

 

4-0-6. 다음에 발췌된 바는, 1715년판 "천주성교일과", 권1, 제11b쪽에 수록된 "광영경"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9-1654_니콜라스_롱고바르디_et_al/천주성교일과_1715년판.htm

(발췌 시작)

(이상, 발췌 끝) 

 

4-1.

4-1-1. 다음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1669-1748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740년에 초간된, "성경광익", 상권, 예수성탄천명지경, 제13b쪽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9-1748_모이리악_드_메야/1740_성경광익.htm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을 보라. 성경 본문인 요한 복음서 1,1-14 중에서 "榮光"이 사용되었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4-1-1: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1669-1748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740년에 초간된 "성경광익" 중에 발췌된 성경 본문들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들에 있어, 아래의 제4-4항에 안내된,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1574-1659년)에 의하여 저술되고 출판된 "천주강생성경직해"에서 발췌된 것이다.

 

4-1-2. 다음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1669-1748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740년에 초간된, "성경광익", 하권, 하권, 성신강림본주일, 의행지덕: 수성신총조, 제1b쪽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상동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을 보라. 성경 본문이 아닌 곳에서 ""이 사용되었다.

(이상, 발췌 끝)

 

4-1-3. 다음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1669-1748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738년에 초간된, "성년광익", 권5, 하계 5월 3일 십자성가, 제96a쪽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9-1748_모이리악_드_메야/1738_성년광익_권5_5월_3일_심획십자성가.htm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 사용되었다.

(이상, 발췌 끝)

 

4-2. 다음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이 아니고,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장 바쎄 신부님(1662-1707년)에 의하여 1704년 경에 저술된, 신약 성경, 로마 보존본, 요한 복음서 제12장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2-1707_장_바쎄/요한_12.htm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요한 복음서 12,16에서 "榮光"(영광을 얻다)이 사용되었다.

(이상, 발췌 끝)

 

4-3. 다음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아담 샬 신부님(1592-1666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43년에 초간된, "주교연기", 권2, 영혼위신체 제22b쪽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92-1666_아담_샬/1643_주교연기.htm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92-1666_아담_샬/주교연기_권2_영혼위신체_24-30.htm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 사용되었다.

(이상, 발췌 끝)

 

4-4. 다음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1574-1659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36년에 초간된, "천주강생성경직해", 권9, 오주야소성탄첨례, 제26a쪽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74-1659_엠마누엘_주니오르_디아스/1636_천주강생성경직해.htm 

출처 2: 권9_15_오주야소성탄첨례_126-145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12월25일, 자시지경: 루카 복음서 2,1-14(1969년에 개정된 지금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예수 성탄 대축일 자정 미사 복음 말씀); 매상지경: 루카 복음서 2,15-20(1969년에 개정된 지금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예수 성탄 대축일 새벽 미사 복음 말씀); 천명지경: 요한 복음서 1,1-14(1969년에 개정된 지금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복음 말씀)] [(2016년 7월 17일) 주: 천명지경: 요한 복음서 1,1에 대한 각주에서 "말씀(the Word)"으로 번역되는 용어가 "물이붕"(라틴어 Verbum의 음역(transliteration)이라는 생각이며, 이 음역 단어의 의미는 "그대의 벗"임)으로 음역되었는데, 이 "말씀"은 "내언", "내상"을 말한다는 설명과 함께, 이 "말씀"이 곧 "성자(the Son of God, 하느님의 아드님)"를 말한다는 설명이 주어져 있고, 그리고 또한, 여기를 클릭하면 가지게 되는 "국립중앙도서관 국가전자도서관" 화면 제공의 우리말본 "성경직해"(1938년 출판) 자료에서, 원문 보기 > vol : 권 1, 본문 제85쪽에서부터 시작하는, "천명성경"에서, "내언(內言)"은 "속말"로 번역되었고 그리고 "내상(內像)"은 "속모상"으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설명은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에 의하여 제시된 "성자(the Son of God, 하느님의 아드님)"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있는 졸글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43.htm (<--- 필독 권고)] [(2017년 1월 4일) 주: 제26쪽 본문에서  "천주자"라는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 제26쪽에서 "천주의자(義子)" = "하느님의 입양 자식"이라는 번역 용어가 요한 복음서 1,12; 1,13; 1,14 각각의 각주에서 총 세 번 사용되고 있음. 특히, 요한 복음서 1,12의 각주에서 사람이 주님의 이름 쪽으로, 베풀어준 은혜(幸) 때문에 기뻐하며(幸)) 우러러고(仰) 공경하여(敬), 진실로 믿으면(實信), 천주께서 당사자에게, "천주의자(義子)", 즉, "하느님의 입양 자식"의 지위에 오름을 획득하도록 하고자, 총애, 즉, 은총을 베푸신다는 언급이 있음.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있는 졸글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44.htm (<--- 필독 권고). 다른 한편으로, 여기를 클릭하면 가지게 되는 "국립중앙도서관 국가전자도서관" 화면 제공의 우리말본 "성경직해"(1938년 출판) 자료에서, 원문 보기 > vol : 권 1, 본문 제88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문본 "성경직해"의 요한 복음서 1,14의 각주의 제일 마지막 문장에 있는 "천주지자"우리말본 "성경직해"에서 "천주의의자"로 번역되었는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그 이유는, 앞의 문장들에서 사용된 띄어쓰기 전혀 없는 "천주의자"라는 우리말 표기가, (i) "천주의 사람", 혹은, (ii) 입양 자식을 말하는지 독자들이 인지할 재간이 없는 "천주의 아들", 이들 둘 중의 어느 것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천주의 의자(義子)", 즉, "천주의 입양 자식"을 말함을, 한문본 "성경직해"를 우리말로 번역한 여러 번역자들 중의 한 분이, 오로지 우리말본 "성경직해"의 우리말 문장들을 읽고 이해하여야 하는 국내의 독자들을 배려하여 이와같이 번역하였다는 생각임.] [(2017년 1월 6일) 주: 제16쪽에, "성", "서", "성총"으로 구성된 "3교"에 대한 설명이 있음.]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열(column)을 보라. 성경 본문인 요한 복음서 1,1-14 중에서 "榮光"이 사용되었다.

(이상, 발췌 끝)

 

4-5. 다음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줄리오 알레니 신부님(1582-1649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35년에 초간된, "천주강생언행기략", 권2, 20, 야소자증진조유이단 제17b쪽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82-1649_쥬리오_아레니/1635_천주강생언행기략.htm 

출처 2: 권2_20_야소자증진주유이단_47-48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요한 복음서 5,19ㄹ.21-24; 요한 복음서 5,31-47(매년 대림 제3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매년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로부터,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과 다섯 번째 열을 보라. "榮光"이 사용되었다.

(이상, 발췌 끝)

 

4-6. 다음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판토하 신부님(1571-1618년)에 의하여 1614년에 초간되었고, 1629년에 초간된 "천학초함"에 포함된, "칠극", 권3, 해탐, 천학초함 제842쪽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29_천학초함/천학초함_전6책.htm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 사용되었다.

(이상, 발췌 끝)

 

4-7. 다음은, 1583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마태오 리치 신부님(1552-1610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08년에 초간된, "기인십편", 권하, 제8절, 선악지보재신지후, 제24a쪽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2-1610_마태오_리치/1608_기인10편_권상&권하_중각.htm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 사용되었다.

(이상, 발췌 끝)

 

4-8. 다음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판토하 신부님(1571-1618년)에 의하여 1600년에 저술된, "방자유전", 권3, , 제7a쪽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71-1618_디에고_데_판토하/1600_방자유전.htm 

출처 2: 방자유전_권3_71-76_전일후종피이래심판생사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2017년 9월 7일) 주: "성모마리아" 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음]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 사용되었다.

(이상, 발췌 끝)

 

5. 바로 위의 제4항의 사료 분석의 결과들

 

5-1. (이 글의 결론 1) 위의 제4-8항, 제4-7항, 그리고 제4-6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증/입증된 바에 의하여, 영어로 "glory"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는,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애초에, 그리고 아무리 늦더라도 1600년 혹은 그 이전에, ""(광영)으로 번역되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5-2. (이 글의 결론 2) 위의 제4-5항 및 제4-4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증/입증된 바에 의하여, 영어로 "glory"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에 대응하는 대응하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榮光"(영광)은,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들을 하나로 묶은 화합 복음서/조화 복음서의 한 종류인, 예수회 소속의 줄리오 알레니 신부님에 의하여 저술되어 1635년에 초간된, "천주강생언행기략", 권2, 20, 야소자증진조유이단 제17b쪽에서 처음으로 채택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5-3. (이 글의 결론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제4-3항, 제4-2항, 그리고 제4-1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증/입증된 바에 의하여, 영어로 "glory"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에 대응하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들인, 따라서 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인 의미를 지니는""(광영)과 "榮光"(영광) 둘 다는, 1635년 이후에도, 한문 문화권의 천주교회용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에서 지속적으로, 심지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용되고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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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다음의 굵은 파란색칠을 한 글자들을 클릭하면 구글 검색 결과들을 확보할 수 있는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에서 이들 두 용어들 ""(광영)과 "榮光"(영광)이 사용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光榮" site:vatican.va  <----- 필히 확인하라

"榮光" site:vatican.va <----- 필히 확인하라 

 

(2) 영국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의 개신교회 측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이 중국 본토에 저음 입국한 시점이 1807년임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807년과 개신교회의 대표역본/대표본이 출판된 1853년 사이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개신교회 측의 목회자들이 성경 본문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에 참조한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에, "방자유전"(제4-8항), "기인십편"(제4-7항), "칠극"(제4-6항), "천주강생언행기략"(제4-5항), "성년광익"(제4-1항), 그리고 "성경광익"(제4-1항)" 등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02.htm <----- 필독 권고

[제목: 1853년 경에 초판된 중국 개신교회 측의 대표역본/문리본 한문본 성경들의 용어들의 출처 문헌들에 포함되는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 게시일자: 201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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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다음은 위의 제4-0-2항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이 글의 결론 4) 위의 제4-0-3항에 의하여, 성 김대건 안드리아 신부님(1821-1846년)께서 순교 당한 1846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안에서도 또한 "榮"(광영)이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를 사용해 왔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5) 바로 위의 제4-0-2항에 발췌된, 1862년에 초간된 것으로 알려진 우리말본 "천주성교공과"에 수록된 "영광경"은, 다음에 발췌된, 중국 사천성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모예 신부(1730-1793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780년에 초간된, "천주경과", 상권, 제34쪽에 수록된 "축성3문"을 우리말로 직역 번역한 것이 결코 아니고, 그 번역 대본인 라틴어 기도문 "Doxologia Minor(소영광송)"(#)에 매우 출실한, (i) 아래의 제4-0-5항에 발췌된 "수진일과"에 수록된 "성삼광영송", 혹은 (ii) 아래의 제4-0-6항에 발췌된 "천주성교일과"에 수록된 "광영경", 이들 둘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조선 안에서, 중국 사천성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1836년과 그 이후에 우리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퍄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성직자들과 최양업 신부님(1821-1861년) 등에 의하여 우리말로 번역된 후에, 이 기도문의 이름이 "영광경"으로 교체된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730-1793_모예/1780_천주경과_상권.htm

(발췌 시작)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부터 네 번째 열까지 읽도록 하라. "光榮" 혹은 ""이, 이 기도문의 이름과 본문 둘 다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았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특히, "祝兮聖三"(축혜성삼)이라는 특이한 표현이 이 기도문의 서두에 사용되었는데, 그러나 많이 부족한 죄인인 일천(日淺)한 필자가 들여다본 대단히 방대한 분량의 한문 문헌들 어디에서도, 모예 신부(1730-1793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780년에 초간된 "천주경과"제외하고(except), 이 표현이 사용된 용례를 찾아볼 수 없었에, 또한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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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라틴어 기도문 정본인 "Doxologia Minor(소영광송)"와 이 기도문의 영어본을 읽을 수 있다:

 

출처: http://www.preces-latinae.org/thesaurus/Basics/GloriaPatri.html 

(발췌 시작)

(이상, 발췌 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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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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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 록 >>

 

다음에 나열된 바는, 2000년 대희년 기간 중에, 토미스트(Thomist)이신,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수요일 일반 알현 교리 교육용 강론 말씀들 중에서, 특히 신성적 영광(divine glory)로서의 "하느님의 영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강론들인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이들은, 1992년에 그 초판이 발행되고 그리고 1997년에 라틴어 정본이 발행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에 이어지는 교황 문헌들로서, 기도의 한 종류인 묵상(meditation)에 유익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안내해 드립니다:

 

https://catechesisofthepopes.wordpress.com/major-themes/salvation-history/audiences/ 

 

The Trinity is mysteriously present in creation: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audiences/2000/documents/hf_jp-ii_aud_20000126.html 4

 

The glory of the Trinity is revealed in history: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audiences/2000/documents/hf_jp-ii_aud_20000209.html 4

 

The Incarnation reveals the glory of the Trinity: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audiences/2000/documents/hf_jp-ii_aud_20000405.html 7

 

The promise of Tabor is fulfilled at Easter: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audiences/2000/documents/hf_jp-ii_aud_20000426.html 4

 

Christ’s passion revelas the glory of the Trinity: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audiences/2000/documents/hf_jp-ii_aud_20000503.html 4

 

The glory of the Trinity in Christ’s Ascension: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audiences/2000/documents/hf_jp-ii_aud_20000524.html 6

 

Pentecost involves the three Divine Persons: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audiences/2000/documents/hf_jp-ii_aud_20000531.html 3

 

The glory of the Trinity present in living human beings: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audiences/2000/documents/hf_jp-ii_aud_20000607.html 2

 

The Trinity in the life of the Church: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audiences/2000/documents/hf_jp-ii_aud_20000614.html 6

 

Glory of the Trinity in the heavenly Jerusalem: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audiences/2000/documents/hf_jp-ii_aud_20000628.html 4

 

The Eucharist is a celebration of divine glory:

http://w2.vatican.va/content/john-paul-ii/en/audiences/2000/documents/hf_jp-ii_aud_20000927.html 28

(발췌 시작)

JOHN PAUL II

GENERAL AUDIENCE 

Wednesday 27 September 2000

 

1. According to the programme outlined in Tertio millennio adveniente, this Jubilee Year, the solemn celebration of the Incarnation, must be an "intensely Eucharistic" year (Tertio millennio adveniente, n. 55). Therefore, after having fixed our gaze on the glory of the Trinity that shines on man's path, let us begin a catechesis on that great yet humble celebration of divine glory which is the Eucharist. Great, because it is the principal expression of Christ's presence among us "always, to the close of the age" (Mt 28: 20); humble, because it is entrusted to the simple, everyday signs of bread and wine, the ordinary food and drink of Jesus' land and of many other regions. In this everyday nourishment, the Eucharist introduces not only the promise but the "pledge" of future glory:  "futurae gloriae nobis pignus datur" (St Thomas Aquinas, Officium de festo corporis Christi). To grasp the greatness of the Eucharistic mystery, let us reflect today on the theme of divine glory and of God's action in the world, now manifested in the great events of salvation, now hidden beneath humble signs which only the eye of faith can perceive.

2. In the Old Testament, the Hebrew word kabód indicates the revelation of divine glory and of God's presence in history and creation. The Lord's glory shines on the summit of Sinai, the place of revelation of the divine Word (cf. Ex 24: 16). It is present in the sacred tent and in the liturgy of the People of God on pilgrimage in the desert (cf. Lv 9: 23). It dominates in the temple, the place - as the Psalmist says - "where your glory dwells" (Ps 26: 8). It surrounds all the chosen people as if in a mantle of light (cf. Is 60: 1):  Paul himself knows that "they are Israelites, and to them belong the sonship, the glory, the covenants..." (Rom 9: 4).

 

3. This divine glory, which is manifest to Israel in a special way, is present in the whole world, as the prophet Isaiah heard the seraphim proclaim at the moment of receiving his vocation:  "Holy, holy, holy is the Lord of hosts; the whole earth is full of his glory" (Is 6: 3). Indeed, the Lord reveals his glory to all peoples, as we read in the Psalter:  "all the peoples behold his glory" (Ps 97: 6). Therefore, the enkindling of the light of glory is universal, so that all humanity can discover the divine presence in the cosmos.

 

It is especially in Christ that this revelation is fulfilled, because he "reflects the glory" of God (Heb 1: 3). It is also fulfilled through his works, as the Evangelist John testifies with regard to the sign of Cana:  Christ "manifested his glory; and his disciples believed in him" (Jn 2: 11). He also radiates divine glory through his word which is divine:  "I have given them your word", Jesus says to the Father; "the glory which you have given me, I have given to them" (Jn 17: 14, 22). More radically, Christ manifests divine glory through his humanity, assumed in the Incarnation: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 full of grace and truth; we have beheld his glory, glory as of the only Son from the Father" (Jn 1: 14).

4. The earthly revelation of the divine glory reaches its apex in Easter which, especially in the Johannine and Pauline writings, is treated as a glorification of Christ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cf. Jn 12: 23; 13: 31; 17: 1; Phil 2: 6-11; Col 3: 1; 1 Tm 3: 16). Now the paschal mystery, in which "God is perfectly glorified" (Sacrosanctum Concilium, n. 7), is perpetuated in the Eucharistic sacrifice, the memorial of the death and resurrection entrusted by Christ to the Church, his beloved Spouse (cf. ibid., n. 47). With the command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Lk 22: 19), Jesus assures the presence of his paschal glory in all the Eucharistic celebrations which will mark the flow of human history. "Through the Holy Eucharist the event of Christ's Pasch expands throughout the Church.... By communion with the Body and Blood of Christ, the faithful grow in that mysterious divinization which by the Holy Spirit makes them dwell in the Son as children of the Father" (John Paul II and Moran Mar Ignatius Zakka I Iwas, Joint Declaration, 23 June 1984, n. 6:  Enchiridion Vaticanum, 9, 842).

 

5. It is certain that today we have the loftiest celebration of divine glory in the liturgy:  "Since Christ's death on the Cross and his resurrection constitute the content of the daily life of the Church and the pledge of his eternal Passover, the liturgy has as its first task to lead us untiringly back to the Easter pilgrimage initiated by Christ, in which we accept death in order to enter into life" (Apostolic Letter Vicesimus quintus annus, n. 6). Now, this task is exercised first of all through the Eucharistic celebration which makes present Christ's Passover and communicates its dynamism to the faithful. Thus Christian worship is the most vivid expression of the encounter between divine glory and the glorification which rises from human lips and hearts. The way we "glorify the Lord generously" (Sir 35: 8) must correspond to "the glory of the Lord that filled the tabernacle" (cf. Ex 40: 34).

 

6. As St Paul recalls, we must also glorify God in our bodies, that is, in our whole existence, because our bodies are temples of the Spirit who is within us (cf. 1 Cor 6: 19, 20). In this light one can also speak of a cosmic celebration of divine glory. The world created, "so often disfigured by selfishness and greed", has in itself a "Eucharistic potential":  it is "destined to be assumed in the Eucharist of the Lord, in his Passover, present in the sacrifice of the altar" (Orientale lumen, n. 11). The choral praise of creation will then respond, in harmonious counterpoint, to the breath of the glory of the Lord which is "above the heavens" (Ps 113: 4) and shines down on the world in order that "in everything God may be glorified through Jesus Christ. To him belong glory and dominion for ever and ever. Amen!" (1 Pt 4: 11).

 

* * * 

 

I warmly welcome the Jubilee pilgrimages from the Dioceses of Sioux Falls, led by Bishop Robert Carlson; Providence, led by Bishop Louis Gelineau; Trenton, led by Bishop John Smith; and Portland, led by Bishops Joseph Gerry and Michael Cote. Upon all the English-speaking pilgrims and visitors, especially those from England, Ireland, Scotland, Norway, Denmark, the Philippines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 invoke the joy and peace of our Lord Jesus Christ.

 

© Copyright 2000 - Libreria Editrice Vaticana

(이상, 발췌 끝)

 

All are called to build God’s kingdom: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audiences/2000/documents/hf_jp-ii_aud_20001206.html 2

(발췌 시작)

1. In this Great Jubilee year, the basic theme of our catecheses has been the glory of the Trinity as revealed to us in salvation history. We have reflected on the Eucharist, the greatest celebration of Christ under the humble signs of bread and wine. Now we want to devote several catecheses to what we must do to ensure that the glory of the Trinity shines forth more fully in the world.

(이상, 발췌 끝)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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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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