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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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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vivianlee] 쪽지 캡슐

2000-12-04 ㅣ No.5637

박범신 님(소설가)

 

 

 

아버지가 똥물을 먹는 걸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아버지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오히려 젊은 때였을 것이다. 그 무렵의 아버지는 원인 불명의 속병이 들어 신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서 똥물을 먹어야 한다고 들었는지 어쨌는지, 아버지는 재래식 변소에서 퍼온 똥물을 하룻밤 놔두셨다가 위에 뜬 물을 눈 감고 단숨에 마셨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핏발 선 아버지의 눈에 쨍 하니 서리던 이상한 광채를 잊을 수 없다.

 

 

 

어떤 햇빛 밝은 날.

 

 

 

아버지와 나는 툇마루에 두어 자 떨어져 앉은 채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엄지와 검지손가락이 슬그머니 아버지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무엇인가 입 안에서 찾는 듯 뽑는 듯 손을 움직이다가 미간을 툭 찌푸렸다. 아버지의 손가락에 들려나온 것은 뿌리가 썩은 어금니였다.

 

 

 

“글쎄, 이게 쑥, 빠지는구나.”

 

 

 

아버지는 겸연쩍은 듯 말했다.

 

 

 

내 시선에서 고개를 모로 돌리면서 어험, 하고 헛기침을 날리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병이 깊었을 때, 아버지는 자주 언필칭 ‘배 운동’을 했다. 양 허리짬에 손을 짚고 앉아 배를 한껏 당겼다 풀어 놨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병마에 시달려 아버지는 꼬챙이처럼 말라 있었다. 배를 힘껏 당기는 순간이면 갈비뼈가 있는 대로 모두 위로 솟아 올라왔다. 아버지는 때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배 운동을 했다. 아, 그때의 아버지 갈비뼈들과 땀방울과 깊은 눈이 잊히지 않는다. 너 땜이야, 라고 아버진 속으로 말씀하셨을까. 너 때문에 좀더 내가 살아야 한다고, 좀더 살고 싶다고, 아버진 소리치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벌써 십 수 년.

 

 

 

날이 갈수록 아버지의 그런 저런 모습이 더욱더 선연해진다. 바보같이, 나는 아버지가 잔인하고 흉포한 시간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누구의 아버지가 아니라, 사회 속의 한 시민으로가 아니라, 원초적 인간으로 아버지가 짐져야 했던 고독하고 눈물겨운 그 싸움을 나는 왜 이제야 만나고 있는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그렇다. 통절하게 가슴 아픈 건, 당신들이 이 땅에 남아 있지 않을 때 비로소 자식들이 당신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 좋은 생각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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