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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6일 하느님의 종 바오로 6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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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5-07 ㅣ No.2101



축일 8월6일
하느님의 종 바오로 6세 교황, OFS
Servo di Dio Paolo VI (Giovanni Battista Montini) Papa.  
Concesio, Brescia, 26 settembre 1897 - Castelgandolfo, 6 agosto 1978
(Papa dal 30/06/1963 al 06/08/1978).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바오로 6세(1897-1978). 교황(재위 : 1963-1978). 본명 Giovanni Batista Montini.
  이탈리아 브레샤(Brescia) 부근의 콘체시오(Concesio) 태생. 선대의 두 진보적 교황 비오 12세와 요한 23세를 이은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교황의 한 사람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를 종결짓고 그 개혁정신을 대대적으로 실행, 파급시켰다,



  이탈리아 북부 콘체시오의 부유한 인텔리 지주 가정에서 출생. 1920년 서품 뒤 30여년을 교황의 외교관 및 바티칸 사절로서 근무하였다. 1954년 이탈리아 산업의 심장부인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공산당의 비난하는 표적이 되었지만, 기업주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정신적 경제적인 복지 향상에 노력, '노동자의 대주교'로 호칭되었다. 



  1958년 요한 2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 1회기에 사무관으로 참석하였고 1963년 교황으로 선출되자 즉시 선임자의 과업을 이어 공의회를 속개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의 사상은 첫 회칙 (1964. 1. 4)에 집약되어 있는데 ‘평화의 사도’, ‘교회일치의 주역’으로 불렸던 이 교황의 치적은 대내적으로는 교회내의 개혁과 성청(聖廳)의 개혁, 대외적으로는 사회정의의 추구와 외교활동 및 교회일치의 노력 등으로 대별된다.


   대내적으로는 모든 인공피임을 금지한 최후의 교황회칙 <인간생명>(Humanae vitae, 1968. 7. 29)을 발표하였고, 사제독신제를 고수(1967. 6. 24)하자 ‘보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2,414조에 달하는 교회법에 대한 전면 개정작업에 착수, 혼인취소승인을 자유화하고 사순절 단식이나 금요일 금육을 어긴 자에 대한 대죄의 벌을 교회법전에서 제외시켰으며 교회의 특별한 허가 없이는 신자들이 읽을 수 없었던 금서목록(禁書目錄)도 제거하였다.



   또한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내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여성을 성청의 관련 부서에 근무하게 하였으며 주교 시노드를 열어 교황청의 자문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맡겼다. 그밖에 정의와 인권의 보호를 위한 정의평화위원회, 그리스도교 일치국, 비(非)그리스도국(局) 등을 신설하였다.



   대외적으로는 30년 동안 교황청 외교인단에서 활약한 경험을 살려 재위기간 중 한국을 위시하여 40개국 이상에 걸쳐 새로 외교관계를 수립, 그 중 반수 이상이 아프리카 국가였다. 세계의 현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제20차 유엔 총회에서의 전쟁 종식과 군비 축소를 위한 연설(1965. 10. 4),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국제노동기구에서의 연설(1969. 6. 1) 등 국제회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우간다를 방문(1969. 7. 31),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 문제에 직접 개입하였는가 하면 아프리카의 참상을 목격하고 세계기아기금 창설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8개국을 순방(1970. 11. 26-12. 15)했고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의 메이어 수상 외에 공산당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소위 ‘동방정책’을 끈기 있게 추구, 유고의 티토 대통령, 루마니아의 초세스쿠 수상 등과 개별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및 정교회와의 대화를 진전시켜 성지를 방문(1964. 1), 그리스 정교회의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와 회담하고, 1054년의 동서방교회의 분쟁에 대해 서로 화해하였다(1967. 10).



   루터교. 칼빈교, 재림교와의 대화도 추진하였는데. 그러나 대화를 통한 변화가 가능한 곳에서는 그 변화를 허락하고 장려하였지만, 그것이 교회일치의 본래의 목적에 적합한 것인가를 숙고, 필요에 따른 제재를 가하였다. 후자는 급진적 교회 일치운동가들이 서로 다른 교파간의 상호 영성체가 완전한 교리적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을 경우에 해당한다. 1978년 8월 6일 “굶주리고 병들고 일자리가 없는 자들을 잊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선종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 참고
  교회의 역사에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까지 100여년 동안 7명의 역대 교황 모두가 계속해서 재속 프란치스꼬 회원이었다는데 놀라움이 있다.
1) 복자 비오 9세(1846-1878)축일2월7일, 2)레오 13세(1878-1903), 3)성 비오 10세(1903-1914)축일8월21일, 4) 베네딕또 15세(1914-1922), 5) 비오 11세(1922-1939),  6)가경자 비오 12세(1939-1958)10월9일, 7) 복자 요한 23세(1958-1963) 축일10월11일(6월3일), 8)하느님의 종 바오로 6세(1963-1978)축일 8월6일
- 김용철OFM.,재속프란치스꼬회 회칙 비교 연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 논문,1996,108-109쪽 주석 205번에서




◆ 바티칸공의회 ◆       
한자  ∼公議會  라틴어  Concilium Vaticanum  영어  Councils of Vatican
 
[관련단어] 공의회   출처 : [가톨릭대사전] 


②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 10.~1965. 12; 21차 공의회). 요한(Joannes) 23세에 의하여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개최된 세계 공의회.

  ㉮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 등에 관한 헌장을 반포하고 이탈리아왕 빅토르 엠마누엘 2세의 로마 점령에 의하여 무기한 휴회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거의 100년 동안 세계공의회는 열리지 않고, 다만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가 대처하기 위하여 레오(Leo) 13세, 성 비오(St. Pius) 10세, 비오 11, 12세들의 회칙들만이 반포되었을 뿐이었다. 이에 교황 요한 23세는 1958년 말 교황청 국무성성 장관과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공의회 개최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1959년부터 준비토록 하여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으니, 결국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별적으로 변화된 교회의 모습을 통합시켜 새롭고 진보적인 가톨릭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을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 그 기본 성격이라 할 수 있다.

   ㉯ 1960년 6월 5일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 개최를 위한 중앙예비위원회 및 부속위원회와 사무국을 설치하여 자신이 중앙예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62년 7월에는 교황회칙 <회개하기 위하여>(Paenitentiam agere)를 반포하여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회개하여 쇄신될 것을 촉구하였고, 이 ‘회개와 쇄신’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기본정신이 되었다. 전체 4차 회의로 진행된 공의회는 회의 전 13개 예비위원회에서 67개의 논의사항을 준비토록 하였으나 실제 회기 동안에는 10개의 위원회와 한 개의 사무국이 활동하였다. 최종적인 헌장 초안을 마련하는 위원회의 위원은 모두 24명으로서 15명은 선출되고 나머지 9명은 교황이 임명토록 하여 전체적인 회의가 진행되도록 하였다. 그 밖에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하여 초대된 각 교파의 성직자들이 입회인으로 참석하였고, 이들은 또한 요한 23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일치사무국과 적극적인 접촉을 가졌다.

   ㉰ 제 1차 회기가 시작되면서 토의되기 시작한 주제들은 전례, 계시, 그리스도교의 일치, 교회의 본질, 매스 미디어로서 이들 중 전례와 매스 미디어에 관해서는 2차 회기 때 헌장과 교령이 각각 반포되었다. 

  그러나 1차 회기가 끝나갈 때, 즉 1963년 6월 3일 교황 요한 23세는 사망하고, 밀라노의 지오반니 몬티니 추기경이 바오로(Paulus)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새로운 교황 바오로 6세는 중단되었던 공의회가 계속될 것임을 발표하고, 9월 29일 속개토록 하였다. 

  제3차 회기 때 논의된 주제로는 교회, 신성한 계시, 주교들의 사목적 임무, 평신도 사도직, 그리스도교 일치, 종교적 자유, 현대세계 속에서의 교회 등이 있었다. 이들 주제들은 제4차 회기 때까지 계속되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식회기가 끝날 때에는 모두 16개의 공식발표가 있었다.
  즉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Sacrosanctum Concilium),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 <계시헌장>(Dei Verbum), <현대세계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등 4개 헌장과, <매스 미디어에 관한 교령>(Inter mirifica),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 <동방교회에 관한 교령>(Orientalium Ecclesiarum), <주교들의 교회사목직에 관한 교령>(Christus Dominus),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Perfectae caritatis),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Optatam totius), <평신도사도직에 관한 교령>(Apostolicam actuositatem),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Presbyterorum Ordinis) 등 9개 교령과,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관한 선언>(Gravissimum educationis),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 등 3개 선언이 그것이다.
  결국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화해와 쇄신을 통한 교회가 인류의 복지와 평화와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되기 위한 공의회였다고 할 수 있다. (⇒) 공의회



 

‘세라핌적 사부’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서한)


  영원한 기념으로!


  세라핌적 사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살아계실 때에도, 고귀한 죽음 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창설한 수도 가족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려는 원의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밖에도 많은 평신도가 세속에서 그 회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끄셨습니다.


  전임 교황 비오 11세의 말씀대로 “프란치스코처럼 주 그리스도의 모습과 복음생활의 양식을 더 생생하고 더 비슷하게 보여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을 '위대한 왕의 사자'라고 말씀하셨고, 사람들도 그분을 ‘제2의 그리스도’라고 기탄없이 불렀습니다. 그 당시 사람과 후세의 사람은 그분을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분은 지금도 인류의 눈앞에 여전히 살아 계시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 계실 것입니다.” (Encycl. "Rite expletis" 1926.4.30 : AAS 18호 1926. 154쪽)


  현대에 인기를 노리는 교설이 인간의 마음을 하느님과 천상으로부터 이간시키려는 여러가지 경향이 만연하고 있는 중에도, 프란치스코의 은사(Charisma)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와 인류 사회의 선익을 위하여 보존되어 있음을 본인은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프란치스코 네 가족 수도회는 재속 프란치스코회라고 개칭한 재속 3회의 새 회칙 작성을 위해, 10여년간 치하할만한 연구와 공동 작업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은 시대 상황의 변천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안한 교시와 권고에 따라 적절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수도회 네 분 총봉사자는 훌륭하게 만든 이 회칙의 인준을 요청해 왔습니다.  본인은 몇 분 전임 교황의 선례에 따라 - 레오 13세 교황께서 최종적인 회칙을 인준하신 분이지만 - 기꺼이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본인은 공경하올 아시시의 성자가 가르치신 생활양식이 새로운 자극을 받아 꽃피워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습니다.  본인은 제출한 본문을 주의 깊게 검토하고 충분히 심의한 수도자 및 재속회 성(省)의 자문을 받은 다음, 이 서한을 통하여 사도적 권한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칙을 인준하고 확인합니다.


  또한 본 회칙이 수도자 및 재속회성의 공문 보관소에 보관되는 “Inter spirituales familias”(성령이 교회 안에 이룩하신 많은 영적 가족 가운데)로 시작하고, “ad normam Constitutionum, petenda”(회헌 규정에 따라 요청해야 합니다)로 끝마치는 원본과 일치하는 한, 사도적 제재권을 부여합니다.  동시에 본인은 본 서한과 사도적 권한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이전 회칙을 폐지합니다.  끝으로 본 서한이 확고한 것이며, 현재도 이후에도 온전히 그 효력을 지닌다는 것과 여기에 반대되는 것은 무효임을 확정합니다.


1978년 6월 24일

교황 재위 16년

베드로 대성전 교황청에서

어부의 반지로 날인하시다.


 
국무성 장관

요한 빌로트 추기경


국무성 공문 번호 : 352241

(발자취를 따라서-재속프란치스코회 지침서, 21-23쪽에서)























































































 

Servo di Dio Paolo VI (Giovanni Battista Montini) Papa.
 
Concesio, Brescia, 26 settembre 1897 - Castelgandolfo, 6 agosto 1978


(Papa dal 30/06/1963 al 06/08/1978).
Nato a Concesio, in provincia di Brescia, eletto Papa dichiarò immediatamente di voler portare avanti il concilio interrotto per la morte di Giovanni XXIII, di continuare la riforma del codice di Diritto Canonico e proseguire il cammino ecumenico. Portato a termine il Concilio, cominciò a mettere in opera le deliberazioni conciliari con grande coraggio, in mezzo a ostacoli di ogni segno: opposizioni reazionarie o sovversive. Importante e profonda la sua azione ecumenica, con proficui scambi e incontri con la Chiesa Anglicana e la Chiesa ortodossa: storico il suo incontro con il patriarca di Costantinopoli, Athenagoras. Inaugurò l'era dei grandi viaggi apostolici recandosi, nel 1964, a Gerusalemme, e in seguito in molte altre parti del mondo. Numerose le sue encicliche ed esortazioni apostoliche: "Ecclesiam suam", "Populorum progressio", "Evangelii nuntiandi", "Humanae vitae", "Communio et progressio", "Marialis cultus", "Gaudete in Domino". L'ultimo periodo della sua vita fu rattristato profondamente dal rapimento e dall'uccisione del suo amico fraterno Aldo Moro. Morì nella residenza di Castelgandolfo. 

 

Quando fu eletto papa, il cardinale Giovan Battista Montini, ebbe a dire profeticamente: “Forse il Signore mi ha chiamato a questo servizio non già perché io vi abbia qualche attitudine, ma perché io soffra qualche cosa per la Chiesa”. La sua acuta intelligenza gli fece intuire realisticamente, sin dal primo momento, il lato più pesante di una missione densa di incognite e di tribolazioni, che cadeva improvvisamente sulle sue spalle e che avrebbe messo a dura prova il suo carattere ed anche il suo fisico.

La famiglia, la gracile salute, il carattere
Il futuro papa, Giovan Battista Montini nacque a Concesio (Brescia) il 26 settembre 1897 e alla nascita era talmente gracile e debole, che i medici che assistettero al parto, sentenziarono: “Durerà soltanto fino a domani”. I genitori Giorgio Montini e Giuditta Alghisi, possedevano la villa di campagna a Concesio, dove avvenne il parto e dove trascorrevano l’estate, secondo l’usanza delle famiglie borghesi e benestanti di Brescia e dell’epoca.
Il bambino si riprese, ma crescerà stentatamente e malaticcio; come carattere prese soprattutto dalla madre, nobildonna delicata e gentile, piena d’amore per la sua famiglia, ma non espansiva, di poche carezze che manifestassero esteriormente questo affetto.
Il padre Giorgio era impegnato attivamente a rompere l’isolamento, in cui vennero a trovarsi i cattolici, dopo la proclamazione di Roma a capitale d’Italia; giovane avvocato era fautore di idee e lotte stimolanti contro l’anticlericalismo imperante; nel 1881 fu chiamato a dirigere il quotidiano cattolico “Il Cittadino di Brescia”, che guidò fino al 1912.
La passione per la stampa, le polemiche roventi ma sempre civili del padre, si trasmetteranno presto al figlio Giovan Battista, che dimostrò sempre una predilezione per lo scrivere, che faceva intravedere una futura carriera di scrittore o critico letterario. Crebbe all’ombra e sotto la guida del padre, che in quegli anni fu un gran suscitatore di iniziative cattoliche, come le “Leghe bianche” nelle campagne bresciane, l’Unione del Lavoro; il pensionato scolastico; fondatore di una Casa Editrice “La Scuola”; impegnato in cariche pubbliche; dirigente, per incarico del papa Benedetto XV di una Sezione dell’Azione Cattolica; deputato per tre legislature.
La casa dei Montini per anni vedrà la presenza di don Luigi Sturzo e Romolo Murri che insieme a Giorgio Montini saranno i fondatori del Partito Popolare Italiano, di estrazione cattolica, dal quale nel 1943 nascerà la Democrazia Cristiana; il giovane Giovan Battista assisteva alle discussioni e assimilava i concetti che poi elaborava nel suo studio; fra i frequentanti della casa c’era anche Alcide De Gasperi.
Bisogna dire che il futuro papa, ebbe sempre un carattere severo e malinconico, in contrasto al clima gioioso e di concordia della sua famiglia, allietata da tre figli Ludovico, Giovan Battista e Francesco e da tanti parenti della patriarcale famiglia, agiata e senza ristrettezze economiche.
Eppure su quest’adolescenza privilegiata del giovane Battista c’era come un incubo, la sua gracilità fisica; aveva febbre improvvisa che lo abbattevano, fu dato ad allevare per 14 mesi ad una coppia di contadini, ma il suo ritorno a Brescia continuò ad impensierire i medici per il suo sviluppo; certamente è da rintracciare in quel periodo infantile, caratterizzato da debolezza, i motivi della leggera nevrosi che impregnerà il suo temperamento nell’età adulta, con timidezza, ipersensibilità, una certa insicurezza e molte altre angosce che non riuscì mai a nascondere.

Gioventù, studi, sacerdozio
Alternò brevi periodi di studio negli Istituti dei Gesuiti, sempre interrotti per motivi di salute e proseguiti privatamente, ciò gli impedì di avere quei contatti così necessari con altri compagni di scuola. Ciò nonostante tentò di arruolarsi nella Prima Guerra Mondiale, ma naturalmente fu scartato, probabilmente fu una fiammata d’amor di Patria e idealistica, comune ai giovani dell’epoca.
Amante della velocità, la cui paura aveva vinto a forza di volontà; in una discesa folle sulla bici, accusò un malore che verrà diagnosticato come uno scompenso cardiaco, che se pur scomparendo nel tempo, gli vieterà comunque quei giochi che richiedevano qualche sforzo; tutto ciò aumentò la sua timidezza e il suo distacco, che nelle foto dell’epoca lo fanno apparire come invecchiato precocemente, pallido, magro, solo gli occhi brillano per una continua attenzione.
La vocazione al sacerdozio non fu folgorante, ma graduale, frequentando sacerdoti e respirando il clima religioso della sua famiglia. Ebbe come padre spirituale l’oratoriano padre Giulio Bevilacqua, con il quale instaurò un’amicizia profonda; da papa vorrà dimostrargli la sua gratitudine, creando il vecchio parroco bresciano, cardinale, nonostante il suo meravigliato rifiuto.
Frequentando da esterno il Seminario bresciano, sempre per i noti motivi di salute, con l’aggiunta di un lungo esaurimento nervoso; giunse ad essere ordinato sacerdote il 29 maggio 1920, dal vescovo di Brescia Gaggia. Certamente in questo cammino agevolato verso il sacerdozio, che a rigor di logica per la sua salute non avrebbe potuto raggiungere, ebbe un particolare riguardo essendo il figlio dell’impegnatissimo in campo cattolico avvocato Montini; e il vescovo decise per lui una destinazione per Roma; prima si laureò in cinque mesi, a Milano in Diritto Canonico, poi nell’autunno del 1920, il giovane sacerdote arrivò a Roma, alloggiando al Collegio Lombardo e si mise subito all’opera iscrivendosi alla ‘Gregoriana’ per la Teologia e contemporaneamente all’Università Statale, alla Facoltà di Lettere.

Nella Curia Romana, carriera, Assistente FUCI romana e Nazionale, formatore di futuri politici
Venne segnalato da un’influente deputato bresciano, che lo conosceva da ragazzo, al cardinale Segretario di Stato Gasparri e così Montini dopo poche settimane entrò nell’Accademia dei nobili ecclesiastici, passaggio necessario per tutti i diplomatici della Chiesa, dove s’impara la difficile arte di trattare con i potenti e curando i rapporti internazionali.
Nella Curia romana si distinse per la sua attenzione, la rapidità nell’apprendere lingue straniere e tecniche di governo, studiosissimo, attirò l’attenzione di mons. Pizzardo, incaricato per gli Affari Straordinari della Segreteria di Stato e quindi dopo un anno, divenne ‘minutante’ nell’importante ufficio posto al vertice della politica vaticana.
E nel giugno 1921 con pochi effetti personali e tanti libri si trasferì in Vaticano, a 24 anni, da dove uscirà trent’anni dopo, si laureò in Teologia, conseguì il Diploma dell’Accademia per la diplomazia, ma dovette lasciare la Statale e il suo desiderio di laurearsi in Lettere.
Fu chiamato il “pretino che non prende mai le ferie”, lavoratore instancabile, la sua scrivania era sempre piena di pratiche da sbrigare; ebbe come compagni, futuri monsignori, vescovi, cardinali, come Ottaviani, Tardini, Spellmann, Maglione, Tedeschini, ecc. Morto papa Benedetto XV nel 1922, salì al trono pontificio l’arcivescovo di Milano Achille Ratti, che prese il nome di Pio XI; sotto il suo pontificato cominciò l’ascesa nella Curia di Montini, che si fermerà solo al vertice.
Il cardinale Gasparri, suo superiore e protettore lo inviò per tre mesi a Parigi per approfondire gli studi, poi per quattro mesi alla segreteria del Nunzio di Polonia a Varsavia, ma il freddo del Nord lo fece ammalare sempre di più, quindi ritornò a Roma. Per il suo desiderio di un’esperienza pastorale, così necessaria per un prete, gli fu affidato il compito di Assistente spirituale del Circolo Universitario Cattolico di Roma.
Trascorsero così due anni di apostolato gioioso, oltre il suo lavoro in Curia; gli studenti lo chiamarono “don Gibiemme” e gli davano del tu, si può dire che scoperse la sua gioventù, con scampagnate ai castelli romani, l’organizzazione di giochi e corsi didattici, provocando le uniche risate spontanee della sua vita; in seguito al massimo sorriderà con un dolce, consenziente, a volte mesto sorriso, ma mai allegro.
Nel settembre del 1925, nel pieno del clamore della ‘Marcia su Roma’ fascista, papa Pio XI gli diede l’incarico di Assistente Nazionale della FUCI (Giovani universitari cattolici), carica che tenne dal 1926 al 1933, periodo difficile per la propensione del fascismo ad avere il controllo della gioventù, specie quella universitaria, tramite il GUF (gioventù universitari fascisti); in questo periodo egli lavora per raccogliere le migliori intelligenze cattoliche che escono dalle Università, per indicare le future mete politiche e sociali, fra loro vi furono Aldo Moro, Amintore Fanfani, Giulio Andreotti, Paolo Emilio Taviani, Giuseppe Dossetti, Giorgio La Pira, Guido Carli.

Monsignore, collaboratore del Segretario di Stato, ‘Sostituto Affari Ordinari’
Intanto nella Curia continuava a salire di grado; nel 1934 era monsignore, quando morì il card. Gasparri, subentrandogli il romano cardinale Eugenio Pacelli e il nuovo Segretario di Stato nel riorganizzare i suoi collaboratori, chiamò Montini, che aveva già notato per le sue specifiche doti.
Li dividevano 20 anni di età, ma erano tanto affini, in pratica due aristocratici, la loro carriera nella Chiesa si era svolta tutta al di fuori della cura d’anime; entrambi dotati di suggestione mistica e dello stato di angoscia che prende le anime raffinate, quando devono decidere. Lasciata con rammarico la FUCI, Montini si dedicò con la dovuta passione ad essere collaboratore stretto del card. Pacelli e nel 1937 ad appena 40 anni, venne nominato “sostituto degli Affari Ordinari”, terzo gradino della gerarchia vaticana.
Nel contempo all’altro ufficio di “sostituto degli Affari Straordinari” venne chiamato il suo ex compagno ‘minutante’ Domenico Tardini; i due collaboratori di Pacelli si stimeranno sempre, ma non si ameranno mai; tanto erano diversi nel carattere; tradizionalista ed esuberante Tardini; aperto alle novità, ma prudente Montini.
La Curia per i 18 anni che vide il binomio Tardini – Montini, si divise in due fazioni che per molti divennero dei ‘conservatori’ e dei ‘progressisti’. Montini diventò l’ombra del cardinale Segretario di Stato, custode dei suoi segreti diplomatici ne curò la corrispondenza.

Braccio destro di papa Pio XII
Nel 1939 papa Pio XI morì quasi improvvisamente e Pacelli venne eletto papa con il nome di Pio XII, i due ‘sostituti’ rimasero al loro posto e il cardinale Luigi Maglione venne nominato Segretario di Stato, ma quando questi nel 1944 morì, papa Pacelli decise di non sostituirlo, lasciando la carica vacante; così i due ‘Sostituti’ divennero i numeri due della gerarchia vaticana.
Il pontificato di Pio XII, vide il grande sconvolgimento della Seconda Guerra Mondiale, che lo rese drammatico ed angosciante nel suo ministero pontificale; la Storia chiarirà in seguito la sua segreta opera di mediazione fra le parti, la salvezza di Roma, gli aiuti nascosti per ebrei e rifugiati politici, la Pontificia Opera di Assistenza, la rinascita politica, culturale, ed economica dell’Italia sconfitta e devastata.
E al suo fianco, discreto ma attivo, sempre nell’ombra, il suo Sostituto Montini che a suo nome agiva in tutti i campi, dall’organizzazione dei soccorsi nel neutrale Vaticano, all’opera diplomatica fra i contendenti, per colmo cattolici da ambo le parti.
Allo sfacelo della Seconda Guerra Mondiale, fece seguito la divisione del mondo in due blocchi: Occidente ed Oriente, democrazia e comunismo, Stati Uniti e Unione Sovietica, con in mezzo la vecchia e disastrata Europa; che si tramutò ben presto in una lotta fra il cristianesimo e l’ateismo; in Italia si visse con lo slogan “O Roma, o Mosca”.
Il Sostituto Montini, moderato per natura, fu in contrasto con il Presidente dell’Azione Cattolica Luigi Gedda, che ligio alle disposizioni di Pio XII di cui era diventato il pupillo, cercò di organizzare i giovani d’A.C. in forma estremistica e di lotta aperta al comunismo; ormai in Vaticano egli era “Montini il progressista”.
Con 16 ore di lavoro al giorno organizzò l’Anno Santo del 1950; fondò le ACLI e la Pontificia Opera di Assistenza. Fu il braccio destro del papa, ricevé ogni tipo di personalità; era primo ministro e insieme ministro degli esteri, eppure Pio XII non lo elevò dal semplice grado gerarchico di monsignore; rimase pur essendo il numero due del Vaticano, un uomo modesto, sobrio, viveva in un semplice appartamento.
Nel Concistoro del 1953, il primo dopo molti anni, i nomi di Montini e Tardini non comparvero, pur essendo i più qualificati alla promozione cardinalizia e rimasero monsignori. La lotta fra ‘conservatori’ e ‘progressisti’ aveva avuto i suoi effetti; ma Montini impose il suo appoggio a De Gasperi nelle elezioni amministrative del 1952, il quale era allora inviso al Vaticano; i conservatori della Curia e lo stesso Pio XII, non perdonarono la sua scelta e il 3 novembre 1953 Montini fu allontanato, perché di questo si trattò, promovendolo nel contempo arcivescovo di Milano.

Arcivescovo di Milano
La consacrazione a vescovo fu celebrata dal decano dei Cardinali Tisserant, il papa ammalato, fece sentire la sua voce con un collegamento radiofonico nella Basilica di S. Pietro, che benediceva il “diletto figlio”, che era stato suo diretto collaboratore per tanti anni.
Il nuovo arcivescovo partì da Roma il 6 gennaio 1954 dopo 30 anni, per intraprendere nella grande diocesi ambrosiana, la sua nuova esperienza pastorale, qualità che mancava alla sua formazione di alto uomo di Chiesa, quindi anche se fu considerato da molti un esilio, alla fine fu un disegno della Provvidenza Divina.
Nella diocesi di S. Ambrogio, Montini trovò una situazione socio-politica in piena evoluzione, si era nel periodo della ricostruzione civile e industriale post-bellica e ogni giorno arrivavano treni carichi di immigrati dal Sud. L’angoscia di vedere una società che convulsamente, era tutta impegnata alla costruzione di un mondo profano e materiale, lo sconvolse al punto di essere tentato di abbandonare tutto.
Ma nel discorso d’insediamento, presenti tutte le componenti della società milanese, egli si dichiarò il pastore alla ricerca delle pecore smarrite, deludendo chi si aspettava di sentire il politico raffinato qual’era. In poco tempo riformò tutta la diocesi con piglio e metodi manageriali, ristrutturò il palazzo arcivescovile in abbandono; il suo attivismo attirò l’attenzione di tutto il mondo cattolico, che vide Milano come contraltare della Santa Sede.
In breve lasciò le vecchie abitudini della Curia romana, per assumere il ritmo di lavoro ed efficienza dei milanesi; girò da una fabbrica all’altra incontro al mondo del lavoro; convinse l’alta finanza della città a sostenere la costruzione di nuove chiese. Restò a Milano per otto anni e fino alla morte di Pio XII avvenuta il 9 ottobre 1958 a Castelgandolfo, rimase arcivescovo senza ricevere la dignità cardinalizia, com’era privilegio della diocesi di Milano.

Cardinale con Giovanni XXIII, diventa papa Paolo VI, il suo tormentato pontificato
Nel Conclave che seguì si avvertì l’ombra del grande assente, venne eletto papa Giovanni XXIII, l’anziano Angelo Roncalli, patriarca di Venezia, il quale come suo primo scritto inviò una lettera all’arcivescovo di Milano per comunicargli la sua intenzione di nominarlo cardinale. In altre occasioni Giovanni XXIII disse: “Quel nostro caro figlio che sta a Milano, noi siamo qui a tenergli il posto” e lo mandò in giro per il mondo a rappresentarlo, gli fece conoscere ed approfondire non solo il mondo cristiano ma anche quello di altre religioni; proprio come un tirocinio per ogni futuro papa.
E così dopo il breve pontificato di papa Giovanni, il papa che aveva indetto il Concilio Ecumenico Vaticano II, alla sua morte avvenuta fra il compianto generale il 3 giugno 1963, nel successivo conclave il 21 giugno 1963, veniva eletto 265° successore di S. Pietro, Giovan Battista Montini, il gracile pretino di Brescia, con il nome di Paolo VI, aveva 66 anni.
Un compito pesantissimo per chiunque dopo il rivoluzionario pontificato di papa Giovanni, che aveva scosso dalle fondamenta la Chiesa, e che aveva cercato ciò che ci unisce, non ciò che ci divide. Toccò a lui di continuare il Concilio e portarlo a termine, ma il compito più immane fu quello di promulgare e attuare i decreti rivoluzionari per la Chiesa, che ne scaturirono, anche se per alcuni il suo pensiero capovolse alcuni dettati conciliari, come quello sul celibato dei preti.
Scrisse encicliche basilari per la dottrina della Chiesa, come l’”Ecclesiam suam”, la “Misterium fidei”, la “Populorum progressio”, l’”Humanae vitae”, quest’ultima sul controllo delle nascite e sulla ‘paternità responsabile’, che tante polemiche suscitò e che costrinse per la prima volta un papa a difendersi pubblicamente.
Dopo secoli fu il primo papa ad uscire dall’Italia e ad usare l’aereo; come prima tappa dei suoi futuri viaggi apostolici si recò in Palestina il 4 gennaio 1964, suscitando un delirio di entusiasmo nelle strette vie di Gerusalemme, rischiando di rimanere soffocato dalla folla. Incontrò il patriarca ortodosso Atenagora, dopo 14 secoli un papa e un patriarca si incontravano dopo lo scisma; nel 1967 andò ad Istanbul andando così incontro umilmente alla Chiesa d’Oriente.
Abolì stemmi, baldacchini, la tiara pontificia, i flabelli bizantini delle fastose cerimonie pontificie, la sedia gestatoria, le guardie nobili, i cortei di armigeri, il trono fu sostituito da una poltrona, la Guardia Palatina; con suo decreto stabilì che i cardinali dopo gli 80 anni non potevano entrare in conclave; fece costruire la grandiosa aula delle udienze, che oggi porta il suo nome.
Rimodernò uffici e strutture del Vaticano, il modo di vestire, l’uso della lingua inglese al posto della latina; vennero introdotti computers e telescriventi collegati con tutto il mondo. Riformò le cariche e i dicasteri della Curia, ridimensionò il Sant’Uffizio; invece dei soliti romani, chiamò da tutto il mondo uomini nuovi internazionalizzando il Vaticano; furono inserite le prime segretarie.
Dovette affrontare e contestare le novità del ‘Nuovo Catechismo olandese’, la disubbidienza dilagante di fedeli e sacerdoti, cosa che l’angustiava oltremodo; il dissenso di vescovi e conferenze episcopali, la contestazione anche violenta come a Cagliari.
Andò in India, all’ONU, a Fatima in Portogallo, in Colombia, a Ginevra, in Uganda, nelle Filippine, dove scampò ad un attentato, nelle Isole Samoa, l’Australia, l’Indonesia, Hong Kong e naturalmente in tante città italiane e parrocchie romane.
Combatté contro il divorzio che veniva introdotto in Italia, più lacerante fu la lotta contro l’aborto, ambedue perse con suo grande dolore. Gli ultimi anni oltre la decadenza fisica, con l’artrosi che l’affliggeva, una operazione chirurgica alla prostata, furono amareggiati dalla ribellione del vescovo tradizionalista francese Marcel Léfèbvre, che suscitò quasi uno scisma e poi il dolore della morte del suo antico amico Aldo Moro, ucciso in pieno periodo di terrorismo, dalle Brigate Rosse nel maggio 1978, nonostante il suo toccante appello a rilasciarlo vivo.
Pochi mesi prima della sua morte, avvenuta a Castelgandolfo il 6 agosto 1978, aveva scritto una intensa preghiera per il funerale dell’on. Moro, che aveva personalmente officiato in Laterano e che presagiva la fine del suo pontificato, durato 15 intensi e tormentati anni e della sua vita durata 81 anni, nonostante che sarebbe dovuto morire il giorno dopo la nascita: “Fa o Dio, Padre di misericordia, che non sia interrotta la comunione che, pur nelle tenebre della morte, ancora intercede tra i defunti da questa esistenza temporale e noi tuttora viventi in questa giornata di un sole che inesorabilmente tramonta…”.


Autore: Antonio Borrelli

 


Spunti bibliografici su Paolo VI - Papa Montini a cura di LibreriadelSanto.it

De Giorgi Fulvio, Mons. Montini, Il Mulino, 2012 - 320 pagine
Paolo VI, Scritti liturgici, Studium Edizioni, 2011 - 304 pagine
Paolo VI, Un disegno realizzato, Cittadella, 2011 - pagine
Stramare Tarcisio, Citera Gennaro, San Giuseppe, Shalom, 2011 - 256 pagine
Tornielli Andrea, Paolo VI, Mondadori, 2010 - 721 pagine
Palini Anselmo, Sui sentieri della profezia, Edizioni Messaggero, 2010 - 160 pagine
Angelo Bonetti, Montini e gli altri, Vivere In, 2009 - pagine
Tornielli Andrea, Paolo VI. L'audacia di un papa, Mondadori, 2009 - 480 pagine
Bonetti Angelo, Paolo VI e le donne e altri temi montiniani, Vivere In, 2009 - 224 pagine
Bosco Teresio, Foccoli Gianni, Paolo VI. Giovanni Battista Montini, Elledici, 2009 - 48 pagine
Paolo VI, Ricostruire la Chiesa. Chiamati nel cantiere..., Chirico, 2009 - 128 pagine
Tettamanzi Dionigi, Paolo VI, San Paolo Edizioni, 2009 - 352 pagine
Cristina Siccardi, Paolo VI. Il Papa della luce, Paoline Edizioni, 2008 - 432 pagine
Gabriele Della Balda, Paolo VI. Il coraggio della coerenza, Edizioni Messaggero, 2008 - 192 pagine
Bruno Rossetti, La spiritualità sacerdotale di Paolo VI...., San Paolo Edizioni, 2008 - 440 pagine
Altri suggerime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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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10-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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