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어느 젊은사제의 죽음

인쇄

이대희 [daehi11] 쪽지 캡슐

2000-02-24 ㅣ No.1057

어느 젊은사제의 죽음

새천년 2월7일 오전 10시에 서울 강남 성모병원 마리아홀에서 적막과 같은 침울한 분위기속에서 죽은 어느 젊은 사제의 장례미사가 집전되고 있었다. 그 장례식에는 500여명의 조문객들과 그와함께 서품을 받은 동창사제들과 생전에 그와 정을 나누던 선후배 사제등 150여 명의 사제들이 함께 하였다. 분명 그의 사제 장례미사는 명동대성당에서 교구 성직자 장으로 치러야 하건만 그의 죽음의 과정과 원인이 불투명하여 공개적으로 장례식을 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는 교구청고위 성직자들의 의견이 반영되어 비공개적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서울교구 성직자 묘역에 안장 시키는 것으로 장례식을 마쳤다.      

 

 이 젊은 사제에 죽음의 양상은 한국교회 사상초유의 일이었고 왜? 이런 죽음이 고인에게 왔느냐? 하는 문제는 개인적인 생존의식으로 탓하기에 앞서 사제공동체, 교회공동체에게도 책임과 반성의 내용이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본다.

 지난 2월3일 그의 주민등록지가 있는 강원도 상동(원주교구 황지성당 소속)읍사무소를 통하여 황지성당 본당사제에게 그의 죽음과 신원확인을 하는 연락을 받았을 때에 당혹감과 괴리감! 그가 아니기를,착오이기를 바랐지만 부명 그의 시신은 지문확이을 통하여 서울교구의 젊은 사제로 상동 공소에서 6개월간 휴양하면서 사목사로 있었던 한 젊은 사제로 밝혀지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지리산 등산 코스의 어느 산중에서 등산객에 의해 발견되어 경찰에 신고와 함께 그지역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그의 신원을 알 수 있는 증명서는 전혀 없었기에 지문을 통하여 그의 신원이 확인 된 것이다.

그의 시신에서 증명서가 전혀 발견되지 못한 이면에는 그 자신의 신원이 알려지기를 전혀 원하지 않았고, 사제로서의 죽음이 교회공동체에 그릇된 영향을 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도속에서 신변정리를 하면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있었다.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엄동설한의 폭한 중에 홀로 산행의 길을 간 것을 보면 어떤 고뇌의 질곡 속에서 방황하다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극한희 상황에서 죽음의 길을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이 맞아야 할 죽음의 의미는 생존의 가치성을 전제로 하여 그 실존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 육체적 질병으로 맞는 죽음, 정신적인 고뇌와 번민속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자의에 의해 맞이하는 죽음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필자가 이젊은 사제의 죽음의 의미를 피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고인이 6개월 동안 살고 있던 곳(상등)과 나의 본당과는 가까운 이웃이었기에 유일하게 같은 사제로서, 선배, 후배로서 만남의 시간이 많았고 10번 이상 태백산맥의 산들을 같이 등반하면서 내면적인 실존의식과 40년간 살아오면서 그중에 9년간의 사목생활의 의미를 신앙과 교회체계와 실존의 가치적인 측면에서 고뇌로서 고백하는 의식들을 듣게 되었고, 지난 11월21일 상동공소를 떠나기 전날 태백산 천제단에서 5시간 등정과 하산하면서 "사제직의 정체성"에 대해 깊은 고뇌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님! 그간 선배님으로 , 때로는 아버지처럼 저를 아껴주시고 사제직의 고유성을 체험을 통해 확인시켜 주신 것은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저는 능력도 없고 의욕도 없어요. 제도교회에 폐만 끼친것같습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기에 내가 다시 찾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등산한 시간들을 고귀한 아름다운 삶의 일상으로 간직하겠어요.

 이런 인사와 함께 그와 헤어졌다. 그로부터 전혀 소식이 없던 그와 우연히 만난 것은 12월 22일 서울에서 태백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였다. 밝은 표정 속에서 남쪽 해안가에서 노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고 했고 안착하는 대로 연락도 하고 찾아뵙겠다는 말과 함께 헤어진 것이 생전에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그는 9년간의 사목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순수하고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지 않는 우직한 모습이었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삶의 투신을 사제의 덕목으로 여기고 생활하여 온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우직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주어진 현실여건과의 마찰을 하면서, 많고 깊은 상처를 안게 된 것 같다. 사제 생활 초년기에 남미의 선교사로 지원하여 1년간 남미에서 언어 수학중에 교회장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너무나도 컸고, 귀국하면서도 받은 상처가 그의 정서감에 혼란을 준 것 같다.

몇 년간의 보좌신부로서 사목을 하면서 만났던 신자들은 그의 때묻지 않는 희생심과 그의 성품의 하자를 뛰어넘어서서 정말 성실한 사목자라고 칭찬의 말들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순진한 이상은 첫 본당신부로서 소임을 시작하면서 치유가 힘든 상처로서 만나게 되었다. 수도자들과의 마찰, 사목위원들과의 의견대립, 그리고 교구청 장상과의 문제......이런 상처를 안고 그는 본의 아닌 휴양의 시간이 이곳 태백산 계곡에서 있게 된 것이다.

 등반하면서 고인이 내 놓은 화두가 회상된다.

 "신부님 인간으로 형성된 모든 조직체계는 기득권 보호가 우선인 것 같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죠! 문제제기를 만들지 않고 주어진 환경하에 현명하게 처세하면서 장상에게 잘보이고 사제젝을 기본적으로 지키면 되는데,저는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요. 제도 교회의 위선이 복음의 진실로 선포되는 인상을 보기가 힘들어요! 희생.투신,정의,참 나눔이 교회의 본연의 모습인데요! 나의 성격으로 상처준 모든이에게 죄송해요.!

 내가 이곳 산골에 와서 오히려 평화와 안정을 찾는 듯 해요! 나는 현대에 안 맞는 성직자인 것 같아요! 내 생활비도 내가 직접 노동해서 벌어야 하는데.....

 그는 제도 교회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장상에 대한 원망은 전혀 표현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족성과 현명치 못한 처세에 대해서 자학적인 정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상동공소 생활에서 그는 노동의 시간을 많이 가졌고,특히 노인들과 어린이들에게는 참다운 이웃이고 벗이었다. 신영성체 준비 아동들을 위해 본당교리반에 교통폍을 제공하는 고마운 운전수 이기도 했다. 외로운 노인들의 말벗이기도 했다. 상동공소의 생활이 그에게는 참 평화와 안정의 시간이었다. 그는 자립해야할 방법으로 대형 자동차 면허증을 얻는다고 자동차학원에도 다녔다. 가끔 다른 본당의 초청이 있으면 성심 성의껏 성사를 집행했다. 그는 두달간 모 본당 사제관에서 식복사 노릇까지 기쁘게 하면서 지냈고 나와의 대화중에는 음식 만드는 솜씨까지 자랑도 했다. 그는 가난한 삶을 즐기는 듯 햇다. 그러면서도 물질에 풍요를 지닌 이들의 삶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런 성품의 젊은 사제에게 왜 죽음이 왔는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면 그 강한 의지로 사제직의 올바른 정체성을 보일수가 있지않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 할수 있다.또한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면 그는 하느님의 뜻과는 상반된 것이고 생명의 고귀성을 파괴한 이로서 사제직의 부당했던가?

그렇다면 회교도의 강압종교정책의 항의 하면서 스스로 권총 자살한 파키스탄의 한 주교임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1970-80년대 민주화와 인권회복과 노동자의 권입을 부르짓으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33명의 젊은이들의 희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1988년 5월15일 명동성당에서 "통일"을 외치면서 투신한 고 조성만 군은 "지금, 이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길을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천박한 팔레스티나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것도 같습니다."하고 유서를 남겼다. 비록 자신의 죽음의 소식까지도 거부하면서 세상을 떠난 이젊은 사제는 유언의 언어는 없었다. 그러나 제도 교회의 모슌성을 쇄신해야 한다는 무언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간 것이 아닐까?

 오늘의 교회, 오늘의 사제의 위상은 어떠해야하는가? 사제단 25주년 기념 사제헌장에서 선언한대로 십자가 없는 교회와 사제는 그의미를 상실한다는 것과 같이 십자가의 고뇌를 안고 가야한다는 대명제의 교훈을 주고 그는 이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전제로 한 교훈은 최고의 가치와 힘을 갖는다.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희생이 이모든 의미를 종합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이 젊은 사제가 죽음을 선택한 것을 칭송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지녔던 사제로서의 고뇌와 그가 택한 죽음에서 보다 큰 의미와 교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 선택과 원인이 으 개인만의 것이라고 치부해서도 안된다.그가 사제가 아니라면 이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자명한 사실에서 우리는 이 아픔의 의미를 안고 희망과 기쁨의 미래를 형성하기 위해 현주소를 찾아야 한다.

 이글을 마치면서 필자는 그와 함께 가장 기쁘고 청순한 마음을 그러나 지독한 피곤하고 힘들던 두뒤봉 산길을 그의 영혼과 대화하면서 다시 가보련다.

 

          안승길로베르토신부

             천주교 고한성당 주임

첨부파일: bej.hwp(31K)

169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