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5년 12월호 [흔적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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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5-12-01 ㅣ No.38

풍수원 성지_


그림엽서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그렇게 언덕길을 걸었다. 가을이 무르익은 햇살을 받으며 바람 불 때마다 나뭇잎은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고… 발밑 가득 낙엽이 밟혔다. 풍수원성당에는 그렇게 가을이 깊어 있었다(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2리 1097).

풍수원성당은 어쩌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인지도 모른다. 느티나무가 고색창연한 성당 건물을 감싸고, 바라보고 있자면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아작아작 씹히는 것만 같다.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그것도 한국인 신부가 첫 번째로 지은 성당이다. 그리고 지금 강원도 지방 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1888년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본당 설정이 되었고, 지금도 마을 주민의 100%가 가톨릭 신자인 교우촌이다. 그뿐이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체현양대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1920년에 제1회 성체대회가 열린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한 3년간을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이어진 성체현양대회였다. 그리고 깊은 신앙심을 드러내듯 30명이 넘는 사제를 배출했다.

이쯤에도 풍수원성당이 생소한 사람에게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TV 인기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책을 들고 왔다갔다 하면 그 책이 느닷없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참 우스꽝스러운 세상. 그런 의미에서 MBC의 드라마  ꡐ러브레터ꡑ의 배경이 된 곳이라고 하면 ꡐ아, 거기!ꡑ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뜰에 가득한 안개를 헤치며 이른 아침 집을 나섰는데 6번 국도를 달리는 사이 어느새 안개는 걷혔다. 길에는 단풍철을 맞아 떠나는 행락차량이 넘치기 시작한다.

서울에서 팔당, 양수리를 지나 양평에서 홍천 방면으로 6번 국도(4차선)를 타고 가다가 보면 용두리에 이른다. 여기서 횡성 방향으로 나가는 6번 국도를 타고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란 은행나뭇잎이 눈보라처럼 쏟아지는 길을 달려 강원도 횡성 땅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하나 넘었다. 풍수원성당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수련장을 지나 조금 내려가자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여기서 왼쪽 길로 꺾으면 바로 풍수원성당이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상봉시외버스터미널에서 횡성행(6번 국도 경유) 버스를 타고 풍수원에서 내리면 된다. 부산이나 대구 쪽에서 올 때는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횡성까지 온 다음 6번 국도를 이용, 양평 방향으로 가면 된다. 20㎞ 지점이 풍수원성당이다.

길이 이어지면서 산 또한 점점 깊어진다. 이 깊은 산속에 숨어들어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단순하게 물었다. 행복했을까. 좋았을까. 여기서 살지 않으면 안 됐던 그 고단한 삶. ꡐ여기서 사는 것이 좋았을까ꡑ라고 물을 때, ꡐ거기에 바로 우리들 신앙의 원형 혹은 본질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ꡑ 그런 생각을 하며 풍수원에 닿았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에 함박눈 내리듯 나뭇잎이 떨어진다. 이곳에 신앙의 역사가 보금자리를 튼 것은 1801년 무렵. 박해의 칼날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던 신자들 가운데 신태보(베드로)라는 분이 40여 명의 교우들과 함께 8일 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가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 그 시작이었다.

성직자 없는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그들은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구워가며 생활했다. 그렇게 80여 년이 지난 후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자 뮈텔(Mutel)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르 메르(Le Merre) 신부를 파견, 본당을 창설하게 된다. 르 메르 신부는 춘천에서 원주에 이르는 12개 군의 29개 공소, 2,000여 명의 신자를 관할했다. 당시에는 20여 칸의 초가집을 성당으로 사용했었다.

지금의 이 아름다운 성당을 지은 이는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였다. 그는 중국인 기술자 진(베드로)의 도움을 받아가며 1905년에 공사 착수, 1909년 낙성식을 가졌다. 이때 신자들은 직접 벽돌을 굽고 나무를 해 오는 등 성당 공사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이렇게 지어져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는 벽돌 연와조 120평의 성당건물은 전형적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니, 출입문이 잘 열리지 않는 듯 ꡐ힘 있게 미세요ꡑ라고 적혀 있다. 건물의 오랜 역사를 웅변해주는 이 말이 출입문이 아니라 믿음의 문을 힘껏 열라는 것처럼 다가온다. 성당 안은 좌우로 늘어선 6개씩의 기둥과 둥근 아치형의 천장이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반원형의 제대 뒷부분에는 3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내뿜고 있다. 의자가 아닌 마룻바닥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는 성당이 낯익다. 어느 핸가의 겨울, 이곳에 왔을 때 성당 안에 앉아 잠시 묵상하는 사이 무릎이 시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성당 왼편에 유물전시관이 있다. 1997년에 개관한 이 건물은 원래 사제관이었다. 전시품 320여 점이 이 성당의 오랜 역사를 진한 향기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박해시대에 사용했다는, 흙으로 빚은 십자가가 인상적이다. 정규하 신부가 쓰던 책상이며, 김학용(시몬) 신부가 사용했던 일제 야마하 오르간도 있다. 김학용 신부는 정규하 신부가 선종한 후 1963년까지 주임신부로 계셨던 분이다.

성당 옆, 뒷동산으로 오르면 왼편이 계단으로 된 <십자가의 길>이고, 오른편은 산책로 <명상의 길>이다. 낙엽이 발등을 덮게 쌓인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십자가의 길이 끝나면 동산 마루턱에 축구공만한 돌 묵주를 땅에 박은 <회개 동산>이 펼쳐진다.

십자고상이 소나무 가지를 등지고 서 있고 그 앞에 제대가 놓여있다. 제대 오른쪽에는 바뇌의 성모상이 서 있다. 성모상 발밑에 급수대가 있어 물이 흐른다. 그리고 소나무가 둘러선 둥근 터에 묵주알을 박아 로사리오를 드릴 수 있게 했다. 동산 밑으로 세 신부님의 묘가 있다.

그의 생애가 곧 풍수원성당의 역사가 되는 정규하(1863~1943년) 신부. 그는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1896년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우리나라 세 번째 신부이다. 사제품을 받고 풍수원본당에 부임하여 선종할 때까지 47년을 오직 이곳에서만 사목하면서, 한국인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성당을 지었다. 그는 여기 묻힐 때까지 평생을 이 본당을 위해 바쳤다. 정기 공소 순방만도 3개월이 걸리는 드넓은 지역을 관할하면서도 1910년에는 <삼위학당>을 설립하여 한글은 물론 수학, 역사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후에 광동국민학교로 발전한다.

옆에 김학용 신부의 묘가 있다. 전시관에서 본 그 오르간을 치던 분이다. 오르간은 검붉게 빛을 내며 여전히 살아 있는데, 그것을 치던 분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조금 떨어져서, 또 다른 묘소가 있다. 풍수원 출신 강영석(요셉) 신부의 묘다. 1947년, 서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신부님이다.

ꡐ아, 나는 참 많이도 살았구나.ꡑ 서른에 세상을 떠난 신부님의 묘소를 바라보며 그런 탄식을 한다. 내가 태어날 때 떠나신 분이다.


지금 풍수원 성당은 ꡐ바이블파크(Bible Park)ꡑ 동산을 조성하는 성역화 사업이 한창이다. 총 95억 원의 예산으로 진행되는 이 사업이 마무리되면 지하성전과 피정의 집을 비롯하여 미술관, 정규하 신부 동상 등 다양한 구조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오랜 역사와 깊은 신앙이 어우러져 그것이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풍수원성당. 떠나길 아쉬워하며, 몇 번을 돌아보고 돌아보면서… 그림엽서 속을 나오듯 낙엽이 가득한 성당 앞 비탈길을 걸었다.

풍수원성당을 찾는 교우들에게는 가까이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최경환 후손 묘지>를 참배할 것을 권하고 싶다. 오던 길을 따라 왼편의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은 다음 만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바라보면, 왼편 산기슭으로 오르는 길이 있고, 간이화장실과 컨테이너 하나를 놓은 것이 보인다. 바로 그 뒤편에 최 프란치스코 후손들의 묘역이 있다.

_한수산/요한 크리소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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