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당동성당 게시판

[펌]크리스마스(너무 이른가?)

인쇄

조대식 [dschoya] 쪽지 캡슐

2002-10-17 ㅣ No.3471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민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오후부터 괜스레 설레어 있었다.

결국 민이는 그 설레임을 달래지 못하고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해 줄까?"

숙희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져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없는 그들 남매에겐 서로에게 해줄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숙희가 열일곱살. 그리고 민이는 이제 겨우 여덠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이는 숙희에게 계속 기대에 찬 말을 하고 있었다.

"오늘밤은 통닭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숙희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가 낮시간 일하고 받는 월급은 이 겨울을 나기에 너무도 빠뜻했다.

그리고 그 월급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디론가 없어지고 남은 것은 늘

빈 주머니 뿐 이었다.

이번달은 밀린 방세를 내고 나니 연탄도 사질 못했다.

억지로 외상으로 연탄집 아저씨에게 부탁을 했지만 연탄은 해를 넘기고

새달이 되어야만 줄 수 있다는 것이 엇그제의 일이 었다.

 

초저녁부터 둘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있었다.

카셋트 라디오에선 무언가 들뜬 목소리의 사회자가 성탄절의 축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나는 캐롤송이 이어졌다.

숙희는 갑자기 라디오를 껐다.

 

늘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잠 들때까지 라디오를 습관적으로 듣는 숙희였다.

그 라디오는 숙희가 월급을 타고 몇번의 갈등끝에 자신을 위해 유일하게 샀던 물건인지라

마치 산값을 다 되찾으려는듯 항상 껴놓고 있던 그 라디오를

숙희가 꺼버린 것이었다.

 

라디오가 꺼진 방안은 너무도 조용했다.

그렇지만 그 둘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둠이 깊어가고 있었고 방안에는 찬공기만 한가득 퍼질러져 있었다.

꼭 켜안은 그 둘의 체온으로 어느정도 냉기를 녹일만도 했지만

그 알 수 없는 허전함까지 녹일수는 없었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교회의 성가가 들려오고 있었다.

작은 쪽방의 깨어진 유리창에 가로등 불빛이 분홍빛 가득 흘러 들고 있었다.

 

"우리 노래 부를까?"

멀뚱이 누워있던 숙희가 민이에게 물었다.

왠지 시무룩한 민이가 건성으로 대답 했다.

"누나부터 시작해....."

"고요한~밤. 거룩한~밤"

"그 노래는 싫어!"

민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

"그....냥....."

민이가 말끝을 흐렸다.

"그럼 다른 노래하지 뭐..."

숙희는 다시 천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위에 차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부르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마음을~"

 

"누나!"

"응!"

"나. 통닭 먹고 싶다! 서양 사람들은 칠면조 고기를 먹는다는데...."

"응. 그런가봐...."

"그런데 너무 춥다...."

"둘이 꼭 껴안고 있으니까 점점 괜챦아질꺼야...."

숙희는 민이를 더더욱 꼬옥 껴안았다.

부모님이 떠난후부터 숙희에게 민이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도대체 숙희가 민이를 왜 그렇게 아끼는지 숙희 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도 추운데......통닭이나 먹으면 좋겠다. 누나 나 몰래 숨겨논 돈 없어?"

"그렇게 통닭이 먹고 싶니?"

"응!"

시무룩 하던 민이는 갑자기 무슨 희망이라도 생긴 듯이 눈을 말똥거리면

숙희를 바라 보았다.

민이는 알뜰한 숙희 누나가 자기 몰래 돈을 숨겨 놓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숙희는 잠시 말이 없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민이에게 말했다.

"옷 챙겨입고 나가자!"

"통닭 사주려고?"

"그래"

 

민이의 옷을 챙겨주고 민이가 그 옷을 입는 사이

숙희는 가방에 민이 몰래 무언가를 담아 넣었다.

그리고 옷을 다입은 민이의 목에 목도리를 한번 더 질끈 동여매 주고

한손으로 민이의 손을 잡고 한손으로는 가방을 둘러 맸다.

 

둘은 밤거리를 나섰다.

저 아래로 도시의 중심지가 보이는 이 산동네에서 통닭을 사려면

얼마 정도를 걸어 내려가야만 했다.

저 아래 보이는 시가지에는 크리스마스의 불빛들이

저마다 반짝이며 성탄절을 축하하고 있었고,

황홀한 네온으로 붉은띠를 두른 수십개의 십자가들이 저마나 크기를 뽐내며

자랑스레 번뜩이고 있었다.

성탄의 밤풍경은 마치 ‘십자가 나라‘에라도 온듯한 느낌을 주었지만

시린 밤바람은 여전히 그들 남매의 여린 얼굴을 살짝살짝 후리고 있었다.

 

거리에 나온 숙희는 선뜻 통닭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몇군데의 통닭집을

밖에서 안을 쳐다보기만 하고 그냥 지나쳤다.

"누나 왜 안들어가?"

"이곳들은 다 바쁜것 같아서...."

"바쁘면 기다리면 되쟈나?"

"..........."

 

몇군데 통닭집을 지나친후 또한군데의 통닭집이 눈에 띄었다.

숙희가 가게안을 둘러 보려 할때 민이 또래쯤 되어 보이는 한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가게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앞치마를 두룬 한남자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고 섰다.

그 남자는 무언가 즐거운 일이 있는듯 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잘가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이가 저기 골목으로 사라지자 그 남자는 가게안으로 들어갔다.

 

그 가게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숙희는 민이를 데리고 또다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둘은 말없이 걸었다.

민이는 몹시 추운듯 자꾸 숙희쪽으로 몸을 붙였다.

그런 민이 때문에 발걸음은 처음보다 많이 늦어졌다.

 

그렇게 얼마를 거리를 헤집고 다녔을까.

거리에 사람들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걷기만 하기에도 이젠 많이 지쳤다.

여기저기를 돌다보니 어느덧 둘은 또다시 아까 전의

아이가 문을 열고 나섰던 그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숙희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동생의 손을 끌고 그집으로 들어섰다.

출입문가 의자에 민이를 앉힌 숙희는 조용히 저 안쪽에 있는

앞치마를 두른 통닭집 주인 아저씨에게로 다가갔다.

 

"무엇으로 해드릴까요?"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으로 통닭집 앞치마 아저씨가 물었다.

"저어..........."

잠시 주저한 듯 하던 숙희가 가방을 열고 무언가를 거냈다.

카셋트 라디오였다.

"동생이 통닭이 너무 먹고 싶다고 그래서 그런데요,

이 카셋트 라디오를 맡길테니 통닭 한마리만 외상으로 주실수 없나요?

제가 얼마후에 꼭 갚아 드릴께요......."

숙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마쳤다.

 

숙희의 말을 다들은 앞치마 아저씨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듯 말이 없었다.

그리고 문가에 앉아있는 민이를 바라보다 천천이 입을 열었다.

"저기.....그럼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오늘 집에 들어갈때 케잌을 사가기로 했는데 내가 아직 케잌을 못샀거든.....

내가 돈을 줄테니 케잌 좀 사다줄래?

내가 그사이에 통닭을 튀겨 놓을께......."

 

숙희는 이내 그럼 그러자고 했다.

앞치마 아저씨는 숙희에게 돈을 쥐어주며 ‘신라당 제과점‘이

가장 오래되고 맛있는 집이라며 꼭 그곳으로 다녀오라고 했다.

 

그리고 숙희가 가게 문을 나서자 통닭을 튀기기 시작 했다.

 

혼자남은 심심함에 민이는 몇번의 하품을 하다가 잠시 엎드렸다.

슬슬 졸음이 오는것 같았다.

피곤과 졸음이 조용히 민이를 껴안았다.

그런데 통닭을 생각하니 갑자기 졸음이 달아난 것일까.

민이는 고개를 들었다.

알고보니 앞치마 아저씨가 가볍게 민이의 어깨를 두드렸던 것이었다.

 

앞치마 아저씨가 그런 민이를 보고 희죽 웃었다.

민이도 따라 웃었다.

그런 민이를 보며 앞치마 아저씨가 말했다.

"아저씨가 갑자기 급한일이 있어 빨리 가야 하거든...

누나가 돌아올 시간이 다 되었으니 문앞에서 기다리다가 누나 돌아오면 같이 들어가거라.....

그리고 이거 누나에게 전해주고...."

앞치마 아저씨는 민이에게 통닭 봉지와 카셋트 라디오 봉지를 들려주었다.

민이를 내보낸후 앞치마 아저씨는 가게의 문을 잠그고 불을 껐다.

 

얼마후 숙희가 케잌을 사들고 돌아왔다.

하지만 가게 불은 꺼지고 동생만이 문앞에서 숙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이는 숙희에게 앞치마 아저씨의 말을 전하며

통닭 봉지를 내밀었다.

가만히 보니 통닭 봉지 위에 크리스마스 카드가 한장 놓여 있었다.

그 카드에는 단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만 써 있었다.

 

불꺼진 간판을 올려보던 숙희는 동생의 손을 꼬옥 잡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두남매가 저만치 가로등속으로 사라질 즈음 통닭집의 이층 계단에 난

작은 창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앞치마 아저씨가 그 둘의 뒷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사실 그 두남매가 오기전 그 앞치마 아저씨의 아이가 가게를 찾아 왔었다.

아이는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이니 집에 일찍 같이 들어가 파티를 하자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날인지라 많은 주문이 밀려 있었다.

아이는 자꾸만 들어가자고 졸라 댔지만

도저히 오랜만에 모처럼 밀린 주문 때문에 일을 멈출수는 없었다.

 

결국 앞치마 아저씨는 졸라대는 아이를 달래려고 이상한 거짓말을 했다.

"사실 아빠는 크리스마스의 밤이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의 썰매를 끄는 루돌프로 변신한단다.

지금 빨리 어린이들에게 줄 통닭을 튀겨 갖고 산타 할아버지에게 가야 하거든...

그래서 지금 도저히 집에 갈수가 없단다."

"정말?"

"그럼...방금도 연락이 왔어. 늦었으니 빨리 오라고...."

"저기...아빠! 그런데 나도 선물 받는거야?"

"물론이지..착한일을 많이 했으니.."

"그러면 아빠 내 친구 준영이도 선물 받는거야?"

"그건 왜?"

"준영이는 선물을 한번도 받지 못했데...참 착하거든...아빠가 산타 할아버지에게 꼭 말해줘...

준영이도 착하니까 꼭 선물 주라고..."

"알았어...그 대신에 너는 아빠가 절대 산타 할아버지의 루돌프로 변신한다고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돼.....비밀이야..."

"응. 비밀 꼭 지킬께..."

 

그날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근래 드물게 함박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축복했다.

그 축복속에서 유난히 아름다운 축복을 받은 몇사람이 있었다.

 

또한 그 축복속에서 산타크로스의 약속과 비밀은 지켜졌다.

우리가 그 약속과 비밀을 지키며 살아가는한

이제 우리의 인생에 또다시 돌아오는 크리스마스는 늘 축복속에 함박눈이 내릴것이다.

 

 

그렇게 올해의 크리스마스에도 함박눈은 내려 질 것이다.



10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