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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요한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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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72

 

 

신약 요한 복음 해제

 

 

-이영헌,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4 요한 복음서, 분도출판사, 1996

 

 

 

1. 개요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사람들이 믿어서 생명(구원)을 얻도록 바라는 요한 복음서의 저자(20, 30-31)는 우선 나자렛 출신 예수를 신적인 영역에서 인간세계로 파견된 하느님의 아들로서 명확하게 제시한다(참조: 3, 16; 10, 10). 즉, 하느님의 계시자로서 예수의 신적인 선재를 내세운다. 달리 말하면, 예수는 "육신"이 되어 인간세계에 거처한(1, 14) 영원한 "말씀"(원어로는 로고스)이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고 선포한다.(1, 1-3). 이 예수는 인간세계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된 "일"을 행함으로써(5, 17. 19; 10, 30) "영광"을 드러내면서도(17, 4) 수난을 겪지만 "생명"의 근원이요(11, 25-26; 14, 6), "세상의 구원자"로 계시된다(4, 42).

  공관복음서가 주로 사건 보도 형식을 취했다면, 요한 복음서는 전승 내용들이 음미되고 심층적으로 재해석된 형식을 취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는 공관 복음서는 "육적인 복음서"요, 요한 복음서는 "영적인 복음서"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요한 복음사가를 독수리로 상징(묵시 4, 7 참조)하여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마저 볼 수 있는 독수리처럼 심오한 진리를 꿰뚫어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닌 자로 표현하는 것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에 관한 역사적 전승 내용에 터를 두고서 예수의 지상사건들을 신학적으로 심도있게 각색해 보도한 것이다. 즉, 예수의 역사적·지상적 사건들을 신앙의 눈으로 관찰하고서 거기 담긴 계시 내용을 신학적으로 서술·묘사한 것이다.

  요한 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의 정체(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를 이미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예수의 정체가 공관복음서에서는 공생활의 절정기에서 밝혀진 데(마르 8, 31 병행구 참조)에 반해서 요한 복음서에서는 공생활 준비기에 밝혀진다(1, 41-49 참조). 이와같이 요한 복음서는 공관복음서의 보도 내용처럼 예수의 정체를 점진적이고 신비스런 계시로서 개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앙의 대상으로서 예수의 신비스런 인격에 관심의 초점이 집중되어 있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가 누구냐?" 보다는 "계시된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의 여부에 그 핵심을 두고 있다.

  사실상 공관복음서의 예수는 가까이 임하는 "하느님의 왕정"을 복음의 주제로 선포 및 설교한다(마르 1, 14-15 병행구 참조). 이에 반해서 요한 복음서의 예수는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고 아들로서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생명"의 복음을 선포한다. 즉, "하느님의 왕정"의 자리에 예수 자신이 들어서 있는 셈이다. 오로지 예수를 통해서만이 하느님께로 갈 수 있고 구원을 얻게 된다(14, 2-11). 달리 말해서 예수를 믿는 자만이 "하느님의 왕정"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예수의 기적사화에서도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동정이나 자비(참조: 마르 1,41; 3,4; 마태 14,14; 루가 7,13; 13,15-16)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신적인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는데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참조 2,11; 9,3-4; 11,4.40).

  이와같이 요한 복음서는 예수의 행적이나 가르침(사도 1,1)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신비스런 인격(예수의 선재, 성부로부터 파견, 성부와의 관계, 세상에서의 역할 및 위치, 성부께로 귀환 등)에 더 역점을 두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응답 곧 믿음도 촉구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신비스런 예수를 믿고 함께할 때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된다는 메시지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공관복음서에서 인간 구원으로 선포된 "하느님의 왕정"(하느님 나라)이 요한 복음서에서는 "생명"으로 대치되고(마르 9, 42-48 병행구에서는 "하느님의 왕정"과 "생명"이 같은 의미로 언급되어 있음), 이 "생명"은 곧 예수 자신으로부터 주어지게 된다(참조: 6,35; 11,25; 14,6). 이런 의미에서 요한 복음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의 동기와 그 목적을 서술·묘사한 복음서라고 말할 수 있다(20, 30-31 참조). 또한 요한 복음서의 예수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거나 자기 자신이 고백 및 선포됨으로써 복음선포의 "주체"요 동시에 "객체"로 소개된다.

 

2. 공관복음서와의 관계

요한 복음서가 공관복음서들을 보충했다는 "보충가설"과 공관복음서를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다는 "독립가설" 그리고 공관복음서을 히셜·수정·보완하였다는 "해설 또는 개정가설", 하나의 표준 복음서를 엮었다는 "구축가설" 등이 있다.

 

1) 외형적-구조적 비교

  (1) 공관복음서에서처럼 요한 복음서도 예수의 역사를 세례부터 부활까지 연계된 하나의 틀 안에 보도한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복음전파 설교 내용(참조: 사도 10,37-41; 13,23-31)과 매우 흡사한 범위다.

  (2) 공관복음서에서처럼 요한 복음서도 갈릴래아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의 여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활동하고(2,1-11) 즉시 예루살렘으로 향한다(2,13-3,21). 공관복음서에서는 단 한 번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고 공생활을 1년으로 잡는데 반해 요한 복음서는 이같이 세 번 예루살렘에서 해방절을 지낸다(2,13; 6,4; 11,55). 결국 공생활을 3년으로 보도한다.

  (3)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활동 장소나 지리적 여건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 장소(1,28; 3,23; 10,40), 안드레아와 베드로 그리고 필립보의 고향 베싸이다(1,44). 갈릴래아 지방의 가나(2,1-11; 4,46-54; 21,2) 야곱의 우물이 있는 사마리아 지방의 시카르(4,5.11-12.39-40) 등.

  (4) 예수의 활동이 드라마틱하게 서술·묘사된다(특히 4.9.11장). 그리고 예수의 공생활에 대한 보도를 짤 막한 회상(12,37-43)과 계시 말씀의 요약(12,44-50)으로 분명하게 매듭짓는 점이 문맥상 독특하다.

  (5) 예수의 공적인 활동이 요한 복음서에서는 "말씀"과 "표징" 내지는 "일"이란 표현들 속에 서술·묘사되어 있다. 이 두 표현들은 서로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고 예수의 계시적인 활동을 드러내 준다. 특히 "표징"이나 "일"은 공관복음서의 "기적"에 해당하는 특수 용어로서 믿는 자들에게 예수의 "영광"과 예수 활동의 구원적인 의미를 체험토록 이끌어 준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20,30-31 참조). 또한 예수의 가르치는 행위도 가끔씩 언급된데, "표징"이나 "일"에 결속된 점이 독특하다(6,59; 7,14-16.28; 8,20;18,19-20).

  그리고 요한 복음서에서는 복음이라는 표현은 없고 대신 "말씀"(로고스: 4,41; 5,14; 6,60; 8,31), "말씀들"(레마타 3,34; 6,63.68; 8,47; 17,8), "가르침"(디다케: 7,16-17; 18,19)이란 표현을 쓴다. 이런 용어들은 예수를 통해서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킨다(7,16; 17,8).

 

2) 주요 신학사상적 개념 비교

  (1) 공관복음서의 "하느님의 왕정"이 "생명"(또는 "영원한 생명")으로 대체된다. 요한 복음서의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계시자로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참조: 6,25; 11,25; 14,6), 곧 "세상의 구원자"다(4,42). 그래서 "생명"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인간 구원의 현재적인 의미로 더욱 부각된다.

  (2) 복음서에서 권세와 영광 가운데 재림할 심판자로서(마르 8,38; 14,62 병행구), 지상에서 봉사활동하는 가운데 수난을 겪는 자로서(마르 8,31; 9,12.31; 14,21.41 병행구) "사람의 아들"이 언급된다. 이에 비해서 요한 복음서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지상에서 활동하는 자로서(1,51; 6,27), 천상에서부터 와서(3,13; 6,62) 다시 천상 영광에로 들어높여지는 자로서(3,14; 8,28; 12,23.34; 13,31) 언급된다. 그리고 오로지 한 대목에서만 심판자로서의 "사람의 아들"이 공관복음서와 유사한 뜻으로 언급된다(5,27).

  (3) 요한 복음의 선포대상은 좀더 포괄적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쁜소식으로서 믿는 자 누구에게나 구원을 준다(1,7.9; 3,16). 그리고 예수는 "세상의 구원자"(4,42)요,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는 하느님의 어린양"(1,29)으로 선포된다. 따라서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 자 모두는 유다인과 이방인 구별없이 예수의 "양떼"에 속하게 된다(10,16; 15,24). 유다인 우선권은 없다.

  (4) 요한 복음서는 "회개"나 "죄인들을 구하고자 하는 예수의 독특한 사랑"이나 "죄인과 의인" 대신에 "신앙인과 비신앙인"에 관한 언급이 많다. 즉,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세상"의 자녀들이요, 예수를 믿는 자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따라서 죄인과 의인의 구별은 예수에 대한 믿음 그 자체로 인해 현실적으로 이루어진다(3,18-19.36; 5,24; 9,39.41). 그러므로 공관복음서의 "회개"는 요한의 "믿음"에 내포된다.

  (5)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성을 감추는데 비해 요한 복음서에서는 처음부터 자신의 신비스런 인격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1,41-42.49). 특히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생명의 빵이다."(6,3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등과 같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낸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동정과 사랑의 발로로써 기적을 행하시지만 요한에서는 신적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으로서 서술·묘사된다.

  이런 요한의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은 곧 인간 구원과 직결된다. 즉 예수는 단순한 하느님의 계시자가 아니라, "세상의 구원자"다.(4,42) 예수 자신은 이 사명을 잘 알고 있고(6,50-51; 10,18; 12,47), 예수의 십자가상 마지막 말 곧 "다 이루어졌다"(19,30)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자신이 지상을 떠나는 순간을 "영광스럽게 될 시간"으로 표현한 예수의 말(12,23)은 계시된 자신의 정체와 사명을 동시에 총괄한다(13,1.31-32 참조).

  (6) 요한 복음서에만 "협조자"(빠라끌레토스)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예수가 세상을 떠나 성부께로 가면 "협조자"는 제자들에게 온다(16,7). "협조자"는 "성령"이요(14,26) 동시에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 이행할 임무를 가지며(14,17; 15,26; 16,13), 지상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서 언제나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활동하게 된다(16,5-15). 단순히 하느님의 능력이나 힘으로만 이해했던 성령이 실재적이고 인격적인 실존자로 소개되어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위격으로 파악된다(참조: 마태 18,19; 2고린 13,13).

  (7) 공관복음서에서는 해방절 당일(니산달 15일)에 최후만찬에 이어서 이루어지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해방절 전날(니산달 14일) 이루어진다. 요한은 해방절 양들이 도살되는 때와 동일한 시간에 예수도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1,29.36)으로 묘사한다.

 

3. 종교 정신사적인 배경

1) 유다교와의 대립적인 상황

예수와 제자들에 대한 대립적인 적대관계 속에서 예루살렘의 여러 지도층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의미로 유다인이란 용어를 자주 쓴다(1,19; 5,15; 9,22).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불신하거나 배척한 자들로서 당시 민중들이 예수의 제자들(그리스도인)에게 대적하도록 이끄는 장본인들을 총체적으로 칭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참조: 11,45-53; 15,18-25; 16,1-4).

  유일신 사상에 익숙한 유다인들로서는 사실상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참조: 7,27.41-42; 12,34).. 그런 신앙은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5,18; 8,58-59; 10,30-33; 19, 7). 이것은 "회당에서의 추방"(9,22; 12,42; 16,2)이란 표현과 함께 회당을 중심으로 한 유다교인들과 그리스도교인들의 첨예한 대립을 강하게 시사한다.

 

2) 반영지주의적인 경향

이레네오는 요한 복음서가 당시 영지주의에 물든 이단자 체린투스와 그 무리들의 오류와 사조에 대항하여 쓰여졌다고 한다. "예수는 참으로 하느님도 사람도 아니다"라고 내세우는 영지주의적 그리스도론, 곧 "가현설"에 맞서서 "육화"에 대해 언급한다(1,14).

  선재한 "말씀"(로고스), 곧 그리스도는 지상으로 파견되어 물질계에 속한 "육"을 취함으로써 인격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드러낸 셈이다. 바로 이 육화사상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구원행위에 관한 언급(19,34-35)도 영지주의적인 구세주 신화를 배격한다. "육"을 취한 그리스도가 인간 구원을 위한 "생명의 빵"이 되고, 십자가상 피흘린 제물이 됨으로 인해서 구세주의 역사적인 실제성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3) 세례자 요한의 종파에 대한 호교론적인 입장

공관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은 지도자로서 백성에 회개를 촉구하며 희망을 주는 예언자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도래하는 "하느님의 왕정"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자들이 받는 증표다(마르 1,2-8 병행구). 그러나 세례자 요한 종파의 세례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에 쓰여진 요한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을 단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자로만 서술·묘사한다(1,6-8.15.19-27.29-34; 3,27-30).

 

4. 저자와 저작 장소 및 목적

1) 저자

예수가 "사랑한 제자"는 우선 최후만찬실에서 "예수의 품에 기대듯 자리잡을" 정도로 예수와 친밀하다(13,23). 그뿐만 아니라, 여느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가이서 체험한 자다(19,26; 20,2). 또한 베드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13,23-24; 20,2-8; 참조 18,15). 베드로와 절친한 관계를 지닌 자를 사도행전에서는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으로 소개한다(3,1-4.11; 4,13.19; 8,14). 이 요한은 예수로부터 총애를 받은 세 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공관복음서도 보도한다(마르 5,37 병행구; 마르 9,2 병행구; 마르 14,33 병행구). 특히 루가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총애를 독차지한 제자처럼 보도된다(22,8).

 

2) 저작 장소와 연대

교회의 전통과 상충되지 않고, 문헌상으로도 가장 확실한 에페소로 본다. 유다인들의 강력한 공동체(참조: 사도 18,19.24-28; 19,8-20)와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사도 19,1-7 참조) 그리고 회당과의 대립적인 상황(참조: 묵시 2,9; 3,9)등이 요한 복음서의 보도 내용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사도 요한은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117년)의 초기까지 살았다는 교부들의 증언과 80년대 후반(85-90년)에 성행했던 "회당 추방"이란 표현을 요한 복음서의 보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9,22; 132,42; 16,2) 그리고 2세기 초엽에 이미 요한 복음서가 이집트에 알려진 것으로 문헌상 증명되기에 그 저작 연대를 1세기 말엽(90-100년) 또는 더 폭넓게 2세기 초엽(100-110년 또는 140년)으로 추정한다.

 

3) 저작 목적

요한 복음서는 그 저작 목적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20,30-31). 예수의 신원과 정체를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여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촉구하고서 예수를 계속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20,31). 또한 예수가 행한 "많은 표징들" 가운데 몇 가지만을 골라서 그 믿음의 근거로 제시할 뿐이라고 밝힌다(20,30). 즉 저자가 기록·보도한 예수의 "표징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에로 이끌고 또한 지속적으로 믿어서 "생명"(=구원)을 얻도록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자기가 기록한 책이 인간 구원을 알리는 기쁜 소식의 보도 내용 곧 "복음서"라는 것도 시사한 셈이다.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을 뜻하고, 그 믿음은 "표징"을 통해서 더욱 견고하게 이루어지고, 그 "표징"은 바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이며, 예수의 말씀과 행적은 증인들의 입을 통해서 증언되고(참조: 3,11; 15,27; 19,35; 21,24) 그 증언 내용은 보도 형식으로 제시된 셈이다. 그러나 믿음의 대상은 복음서가 역사의 예수를 "현존하는 그리스도"로 보여주고자 하는 바로 그분,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나 복음선포자들의 말을 통해서 견고해진 항구한 믿음은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20,31) 원동력을 가지고, "표징"은 이런 믿음을 가지도록 이끌어 주는 수단이나 매개체가 된다. 달리 말하자면, 이런 믿음이 가지는 구원의 힘은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제로 얻어지게 된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한 유일무이한 조건이다(3,18-21; 5,24). 이런 사상은 요한 복음서 전반에 걸쳐 강조 및 재확인되면서 수시로 언급된다(요한 3,16; 5,25; 6,35.68; 11,25-26; 12,32; 14,6 등).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초점을 맞춘 저자의 그리스도론은 사실상 구원론과 직결되어 있다(참조: 1,29; 3,16.36; 4,21; 5,24; 6,40.47; 11,25; 20,31).

 

5. 구조

요한 복음서는 크게 나뉘어 제1부(1-12장)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아들로서 예수의 계시적인 공생활, 제2부(13-21장) 하느님께로 귀환하는 아들로서 예수의 고별, 수난 및 죽음, 부활에 관해 다룬다.

  1부는 프롤로그(1,1-18), 예수의 공생활 준비기로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활동(1,19-34)과 첫 제자들의 소명사화(1,35-51), "세상"을 상대로 펼친 예수의 자기 계시적인 활동(2,1-12.36)이 보도되고, 예수의 공생활이 요약·정리(12,37-50)됨으로써 마친다.

  2부는 십자가상 죽음 전날 저녁에 "제자들" 앞에서 이루어진 예수의 마지막 행적(13-17장) 곧 최후만찬(13,1-30), 고별담화(13,31-16,33) 및 고별기도(17장) 그리고 예수의 수난과 죽음(18-19장) 및 부활에 관한 이야기(20,1-29)가 보도되고 끝으로 복음서의 저작 목적(20,30-31)이 언급된다. 그리고 이어서 복음서의 부록, 이른바 에필로그가 첨가되어 있다(21장).

  제1부에서 프롤로그를 제외한 부분은 주로 예수의 자기 계시가 행적과 말씀이 연계된 "표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도되었다고 하여 "표징의 책"이라 칭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제2부에서 에필로그를 제외한 부분은 예수의 "영광"이 수난의 "때"와 결부된채 설명되었다고 하여 "영광의 책", "수난의 책", "예수 시간의 책" 또는 "영광의 때"라고 칭하기도 한다.

 

6. 주요 신학사상

1) 그리스도론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면서 항구한 믿음을 촉구하고, 그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얻도록 바란다고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밝힌다. "그리스도"란 존칭으로써 예수를 오시기로 약속된 구세주로 표현한 것이다.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의 기다림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아들"이란 표현을 통해 예수는 "하느님"(3,17.34) 또는 "아버지"(5,36-37; 6,44.57; 8,18; 12,49)로부터 인간세계(3,17; 10,36; 17,18)로 파견된 자다. 예수는 결코 "자기 스스로 온" 자가 아니다(8,42). 따라서 예수는 자기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6,38) 그 일을 완성할 임무를 가지게 된다(4,34). 또한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느님의 일은 언제나 일치한다(5,17.19). 그리고 "아들"을 믿는 것은 곧 "아버지"를 믿는 것이요(12,44), "아들"을 보는 것은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 된다(12,45; 14,8-9).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와의 이런 유일무이한 관계가 하느님의 "외아들"(또는 "독생자")이란 독특한 말로써 표현된다(1,14.18; 3,16.18).

  이런 파견사상에는 그리스도의 선재가 전제되거나 내포되어 있다. "아들"은 하늘에서 와서(6,38; 8,42; 16,28) 다시 하늘로 돌아가고(7,33; 16,5.28), 파견되기 이전에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7,29; 참조: 1,1). 따라서 "아들"이란 칭호는 그리스도의 선재와 파견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의 파견 의도(3,16: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실천)를 함축적으로 시사한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인간세계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완전한 현존이요(참조: 1,18; 14,6) 동시에 믿음의 대상이다(3,17.36; 5,23; 20,31). 반면에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참으로 인간임도 서술·묘사된다(1,14; 4,6-7.31; 10,33; 11,5.33.35). 또한 나자렛 출신으로서(1,45) 예수의 부모 형제들까지도 당시에 두루 알려진 것으로 보고된다(2,1.12; 6,42; 7,3.5.27). 예수의 이런 신비스런 인격(신성과 인성)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세계로 파견되어 다시 하느님께로 귀환하는 "아들"로서의 모습 안에 나타난 셈이다.

  메시아적인 의미로 사용된 또 다른 칭호는 "하느님의 어린양"(1,29), "세상의 구원자"(4,42), "예언자"(6,14; 7,40)가 있는데, 특히 "예언자"란 칭호는 그리스도와 구별되기도 한다(7,41). 그리고 "주님"이란 존칭은 지상 예수가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대목에서만 언급된다(20,2-28; 21,7.12).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자로서의 지상 예수를 "사람의 아들"로 칭한다. 공관복음서에서처럼 "사람의 아들"이 수난을 겪고 죽어야만 한다고 서술·묘사(마르 8,31 병행구)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수난사상과 결부된 것은 사실이다.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는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1,29)이요,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주는 "빵"(6,51-54)이며, 하느님께로 이르는 "길, 진리, 생명"(14,6)이라는 형상어와 같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또한 특기할 만한 것은 이른바 육화 그리스도론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인간 가운데 거처하였고, 인간은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는 내용이다(1,14). 이런 내용을 중심으로 언급된 요한 복음서의 머리말, 이른바 로고스 찬미가(1,1-18)는 요한 복음서의 고유한 그리스도론에 속한다. 이 찬미가에서 "말씀"은 영원 속에 실재한 "하느님"이지만 하느님과 구별되는 위격으로서 하느님과의 결속관계를 유지한다(1,1-2).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동참할 뿐 아니라(1,3) 인간에게 "빛"과 "생명"을 줌으로써 구원도 함께 행한다(1,4.9). 또한 이 "말씀"은 지상에서 인간적인 실존을 취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고(1,14), 인간은 실제로 "육신이 되신 말씀"으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거듭 받았다(1,16)는 것이다. 이런 그리스론적인 "말씀"의 위격은 사실상 역사상 예수를 "그리스도-말씀"으로 고백한 데서 비롯하여 발전된 내용이다. 예수의 말을 듣고 신앙으로 받아들인 자는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내용의 요지는 요한 복음서의 도처에서 볼 수가 있다(참조: 5,24; 8,51; 12,48; 14,24; 15,3; 17,14.17 등). 즉, 예수의 말은 하느님의 말씀이요(12,49; 17,14). 예수의 말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이루어진다(14,10.24;17,8). 따라서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며(3,34),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11,49-50; 14,10),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을 말할 뿐이다(8,28; 12,50). 그래서 예수의 말을 듣고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육화 그리스도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느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계시하는 하나의 위격체로서의 "말씀"으로 선포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동일시됨으로 인해서 "말씀"이 새로운 개념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이 "말씀"은 신적인 본질을 갖춘 참 하느님이요 동시에 지상에 실존한 역사적인 참 사람이다. 이런 신학사상은 사실상 예수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다라는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언급될 수 있는 내용인 것이다. 아무튼 "말씀"의 새로운 개념, 곧 "말씀의 육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의 역동적인 현존을 가리킨다(참조: 1,18; 3,32; 14,9). 하느님은 "육신이 되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당신의 모든 계획과 목적을 이행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서 하느님의 계시자요 인간의 구원자로 선포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그리스도론적인 칭호들의 개념은 예수의 자기 계시적인 전형 문구 이른바 "에고 에이미"(나는 있다 또는 나는 … 이다)란 말 속에 함축된다. 이 문구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로서 하느님을 대신한다는 의미를 주로 가리킨다. 예수 안에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이루어진다.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의 구원행위가 하느님을 계시하는 예수의 인격에 결속되어 있다. "에고 에이미"는 서술적 형상어와 함께 사용됨으로써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의 자기 계시가 이루어진다. 즉, "나는 생명의 빵이다."(6,35.51)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나는 문이다."(10,7.9) "나는 착한 목자다."(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된 포도나무다."(15,1.5.9) 등이 그 예다. 예수의 이런 자기 계시적인 표현들도 오로지 예수를 통해서만 인간 구원이 참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와같이 볼 때, 요한 복음서의 그리스도론은 한마디로 구원론에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의 정체만을 밝혀주는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진 구원행위, 곧 하느님의 계시자로서 예수를 아울러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면서 믿음을 촉구하고 또한 그 믿음으로 인해 "생명"(구원)을 얻도록 바라는 저작 동기와 목적(20,30-31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에 일치한다.

 

2) 구원론

요한 복음서의 구원론은 한마디로 우주론적이며 보편적이고(참조: 3,16; 1,29; 4,42; 6,33.51; 10,16; 11,52; 12,24.32), 또한 그리스도론에 직결되어 근본적으로 규정되고 동시에 귀결되어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단절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옴으로 인해서 그 단절이 극복된 것이다(참조: 1,4; 3,13.16-17.31-32; 5,24; 6,33; 8,23-24; 12,31-32.4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세상"을 결합시킨 구세주다. 이 구세주는 사라져가는 "육"을 취해(1,14) 이 세상에서 살다가 하느님께로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6,62), 몸소 그 "길"이 된 것이다. 이 "길"은 "진리요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께 가는 구원의 길이다(14,6.9). 따라서 구세주 안에서, 구세주를 통해서 인간은 구원을 얻게 된다.

  선재한 그리스도가 취한 "육"(1,14)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바쳐지는 "몸"(육)으로서(6,51-56) 구원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말씀의 육화"는 하느님과 "육"의 영역(세상)을 결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상 희생까지 가능케 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구세주는 "육의 영역"(3,6)에 들어와서 인간과 함께 실제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1,14),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참된 음식"과 "참된 음료"로 제공되고(6,55), 십자가상 제물이 될 "육"까지 이미 취한 셈이다(19,34-35).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체는 "하느님의 어린양"(1,29), 곧 속죄제물로 고찰된 것이다.

  이런 구원관은 당시 성행했던 "영지"(그노시스: 앎)에 의한 구원관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영지"는 "안다"(기노스케인)란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서 "안다"는 개념은 "믿는다"와 거의 같은 뜻이다(6,69; 3,15 + 17,3). 즉, "안다"는 것은 어느 한 인격체와의 관계까지도 내포한다. 따라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인격적인 일치를 가리킨다. 이런 일치가 바로 구원으로 표현된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인간 구원은 특히 "영원한 생명"이라는 용어로서 표현된다. 이 "생명"(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선물로 주어진다(10,28; 참조: 3,15-16.36; 4,14 등). 그리고 이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5,24).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 여기서" 실제로 "생명"을 얻게 된다(11,25). 이런 "생명"은 인간의 마음 속 깊숙히 새겨진 그러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고 상호 내주하는 공동체적인 삶을 가리킨다(6,56; 14,20; 17,3.20-21). 이런 삶은 특히 "목자와 양들에 관한 비유"(10,1-16)와 "포도나무 비유"(15,1-17)로써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런 삶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에로 나아가는 종말론적인 차원이다(17,22-23 참조).

 

3) 종말론

요한 복음서의 종말론은 현재적인 의미가 두드러지게 부각되기 때문에(4,23; 5,25; 참조: 3,19; 4,36) 일반적으로 "현재적 종말론" 내지는 "현실화된 종말론"이라고 부른다. 즉, 종말에 얻게 될 인간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 여기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참조:3,15-16.26; 5,24 등). 또한 미래에 완성될 인간구원관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종래의 미래적인 종말이나 대망도 내표된 종말론이다(참조: 5,27-29; 6,3940.44.54; 12,48).

  이와같이 인간 구원이 현재적으로 가능해짐으로 인해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종말사건이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 여기서" 실제로 구원을 얻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심판도 받게 된다(3,17-20; 5,20-30). 이런 신학사상은 인간 세계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구원체험(부활의 현재적인 체험)에 그 바탕을 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는 종래의 종말 대상이 완화된 채 "영원한 생명"의 현세적인 의미가 강조되었을 따름이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기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된 채 "복음"으로 선포된 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11,25) 그를 믿고 그와 함께 사는 삶 그 자체가 바로 부활이요 생명인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지평선상에 놓여진 긴장된 삶이다.

 

4) 성령 - 빠라클레토스(협조자)

요한 복음서에서 성령은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해주고,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해준다(4,23-24). 이와같이 성령이 인간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바로 "영"이요(4,24), "영"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6,63). 예수도 "영"을 받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1,33)이나, 예수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베드로의 고백(6,68) 역시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들은 "영"이며 "생명"이라고 선포되기도 한다(6,63). 따라서 예수의 말씀들을 올바르게 알아듣기 위해서도 인간은 성령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성령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인간에서 선사된다고 요한 복음서는 보도한다(7,39). 즉,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이 이루어진 다음에 비로소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을 이해할 수 있고(2,22; 12,16; 20,9), 예수의 신원과 정체도 깨달을 수 있다(14,20).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의 부활로 시작되는 구원사건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결속의 관계는 "빠라클레토스"(협조자)에 관해 언급에서 더욱 분명해지며 재확인된다(14,16-17.26; 15,26-27; 16,7-11.13-15).

  "영"(7,39) 또는 "성령"(1,33)이 "빠라클레토스"로 표현되는 것은 요한 복음서에서만 볼 수 있다(14,26).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결속된 "빠라클레토스"로 언급된 점도 매우 특징적이다. 즉, 예수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빠라클레토스"를 파견하신다(14,16.26). 또 예수가 직접 파견하기도 한다. "빠라클레토스"의 파견이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의 일치 가운데 이루어짐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은 "빠라클레토스" 파견의 근원이다.

  "빠라클레토스"는 "아버지"로부터 파견되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 곧 하느님의 "영"으로 언급된다(15,26). 예수 외의 "또 다른 빠라클레토스"(14,16)는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의 관계가 위격적이듯이 그러한 관계를 가지는 하나의 신적인 위격체로 계시된 셈이다(참조: 마태 28,19; 2고린 13,13). 그리고 "빠라클레토스"는 "진리"를 이끄는 일을 함으로써(14,26; 16,13) "진리의 영"(14,17; 15,26; 16,13) 또는 "성령"(14,26)으로도 표현된다. 또한 "빠라클레토스"는 "세상"을 심판하는 일(16,7-11), 제자들을 가르치고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을 상기시켜 주는 일(14,26), 제자들과 함께 머무는 일(14,16-17), 제자들과 함께 예수에 관해서 증언하는 일(15,26-27)을 한다. "빠라클레토스"의 이런 일들은 예수의 계시적인 활동을 지속시키는 일이며, 예수의 자리를 대신하는 예수의 후계자로서의 역할을 시사해 준다(16,13-15 참조). 또한 "빠라클레토스"는 이런 역할이 구체적으로 언급됨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이나 힘 등으로 추상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처럼 하나의 분명한 위격체로 소개된 것이다.

  "빠라클레토스"-성령은 이 세상에서 예수와 같이 활동한다. 즉, 예수가 계시한 내용을 상기시키고, 예수처럼 진리 안에서 가르치며, 예수가 증언한 내용을 또한 증언한다. "빠라클레토스"-성령의 이런 활동은 제자들의 증언이나 선포행위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14,26; 15,26-27). "빠라클레토스"-성령은 지상 예수가 "아버지" 하느님을 계시하듯이 이제 부활 승천한 그리스도를 제자들을 통해서 계시한다. 따라서 부활 승천한 그리스도, 곧 존재의 차원을 달리한 그리스도는 "빠라클레토스"-성령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 계속 활동하며, 그 가운데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함께 활동하신다(참조: 16,14-15; 20,22-23). 이와같이 요한 복음서에는 성령의 정체나 역할만 언급되었을 뿐, 사도행전(2장)이나 바오로 서간(1고린 12장)에서 볼 수 있는 성령의 현상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5) 성사론(세례와 성체성사)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3,5) 이 구절은 "물과 영", "새로운 탄생"(3,3: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남),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감"(구원) 등의 세례성사적인 용어와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참조: 디도 3,5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 재생의 목욕과 성령에 의한 소샌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인간은 새로운 삶(구원의 삶)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는다고 언급되어 있다. 즉, 인간의 새로운 삶은 세례를 통해서 받은 성령에 그 바탕을 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탄생 및 구원은 세례성사에 직결되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세례성사를 효과적으로 받으려면 반드시 믿음이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세례성사는 신앙고백 행위와 함께 이루어지는 성사다.

  "하늘의 빵"에 관한 계시담화에서 예수는 자기 자신을 한마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계시한다(6,26-51ㄴ). 그리고 이 빵을 먹는 자는 곧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이며(6,54.56)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6,51ㄷ-58).고 가르친다. 요한 복음서의 성체성사적 가르침에서 강조된 점은 성체성사와 결속된 인간 구원관이다. 즉,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된다는 점(6,53-54)과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와 개별적으로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6,56). 따라서 믿는 자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개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룸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은 요한 복음서의 성체성사적 가르침의 요체다.

  그리스도의 육화(강생)와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인간 구원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목적이요 의의다(3,16-17).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흘린 "피와 물"(19,34)은 물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죽었다는 그 실제성을 확인시켜 주는 증언 내용이다(1요한 5,6 참조). 동시에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인간 구원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7,38 참조). "피"는 성체성사를, "물"은 성세성사를 상징적으로 시사한다(1요한 5,6-8 참조).

그러므로 이런 성사 안에서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이 재현되고, 이런 성사를 거행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고백되며, 그 믿음은 더욱 풍요롭게 된다. 이와같이 성사는 근본적으로 믿음을 필요로 하고, 그 성사를 통해서 인간 구원은 구체적으로 완성되어 간다.

 

6) 교회론

요한 복음서의 예수는 인간세계 전체를 복음선포의 대상으로 삼는다(참조: 3,16; 12,46). 예수의 활동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형성하는데로 방향지어졌다는 점이 강조되었다(1,11-13 참조).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교회)가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예수가 형성하고자 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공동체의 표상은 "목자와 양들에 관한 비유"(10,1-18)와 "포도나무의 비유"(15,1-17)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비유들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형성과 그 유지다. 양들이 개별적으로 한 목자에게, 포도나무 가지마다 한 나무에 머물러야만 살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도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개별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공동체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래야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도 그들을 알게 되며(10,3.14 참조), 그들도 서로 알게 되어 "한 우리" 안에서 일치를 이루게 된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교회의 신비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하여 언급한 표상과 맥락을 같이한다(1고린 12,12-31; 로마 12,4-5).

  부활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부여한 사목직도 "목자와 양들에 관한 비유"에 바탕을 두고서 언급된다. "내 양들을 먹여 기르시오."(21,15.17) 또는 "내 양들을 지켜 돌보시오"(21,16) 즉, "양"들은 그리스도의 소유요 그 "양들"을 먹여 기르거나 지켜 돌보는 것은 베드로의 임무다. 따라서 베드로의 이 사목직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곧 보편교회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마태 16,18-19 참조).

  요한의 공동체는 특히 여성의 지위나 역할도 인정한다. 공관복음서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마르 8,29 병행구)이 요한 복음서에서는 마르타의 입을 통해서 고백된다(11,27).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한 여인의 말을 듣고서 예수를 믿고 "세상의 구원자"로 고백하게 된다(4,39-42). 부활한 예수를 제일 먼저 체험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하도록 위임을 받고서 그들에게 그 복음을 전한다(20,16-18). 즉,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부활 소식을 복음으로 전하는 사도들 가운데 한 여성으로서 언급된 것이다. 로마 공동체에서도 유니아는 안드로니고와 함께 사도들(=전도사들!) 가운데서 출중하게 활동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로마 16,7).

  요한 복음서의 교회론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위상은 돋보여지고 독특한 면이 있다. 마리아는 우선 예수의 공생활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 성실한 여인으로서 소개된다. 즉, 가나의 혼인잔치(2,1-10)에서부터 십자가상 죽음(19,25-27)에 이르기까지 지상 예수를 동반한 어머니요 한 여인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부인"(또는 "여인")이라고 부른다(2,4; 19,26). 예수는 혈육의 관계를 뛰어넘어서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본 것이다. 이런 마리아를 예수는 십자가상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사랑한 제자"의 어머니로 선언하고 또한 어머니로 모시도록 그에게 당부한다. 즉 어머니로서 마리아의 위상도 언급된 것이다(19,26-27). 이리하여 마리아는 요한의 공동체에서뿐만 아니라 보편교회 안에서도 어머니로서 위상을 굳힐 수 있었다.

 

7) 표징과 믿음

요한 복음서는 첫장에서부터(1,12)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20,31)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믿음이 강조된다. 그리고 믿음의 동기로서 특별히 "표징"(세메이아)을 언급한다(20,30). "믿음"이란 명사는 없고 "믿는다"란 동사로만 사용된다. "믿는다"란 동사는 "안다"는 동사와 병행해서 사용된다(6,69; 17,80). 그뿐만 아니라 믿음으로써 알게 되고(16,30), 앎으로써 믿게 된다(10,38)고도 언급한다. 믿는 행위가 계속 유지될 때만 그 믿음을 아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8,31-32).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적인 "일", 곧 하느님의 역사하심에로 향방되고(5,17.19), 특히 기적과 관련된다(3,2; 7,3-5; 11,47).

  예수의 기적은 요한 복음서에서 두가지 용어로 서술된다. 하나는 예수가 행한 "일들"(에르가)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가 드러낸 "표징들"이다. 이 "일들"은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함께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킨다(10,37-38; 14,11). 그리고 예수는 하느님께 순명함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고(4,34), 하느님의 일은 예수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14,10). "일들"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 내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표징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강하다.

  "표징"은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 곧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기 때문에 예수의 영광도 드러내고 믿음도 불러일으킨다(2,11; 4,53; 6,14; 7,31; 11,47-48; 20,30-31). "표징"은 예수의 정체와 사명을 드러내는데에 기여한다. 따라서 기적이 "표징"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예수의 자기 계시와 예수에 대한 믿음에 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단계적인 믿음이 시사되어 있다. 예수가 보여준 기적(표징)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이들은 표징을 요구한다(2,18; 6,30).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예수가 행한 "일들"을 봐서라도 믿으라고 촉구한다(10,37-38; 14,11).

  그러나 더 차원 깊은 믿음은 "표징"과 "일"을 뛰어넘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명시된다(2,22; 4,41-42; 17,20). 특히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4,4-42)에서 "믿음"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부각되고, "어떤 왕궁 관리의 아들 치유사화"(4,46-54)에서는 "표징"도 없이 오로지 예수의 말만을 듣고서 믿는 실천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서술된다. 따라서 참된 "믿음"이란 단지 예수의 기적, 곧 예수가 행한 "표징들"이나 "일들"로 인해서 이루어진 그런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전인적인 응답행위다. 분명한 증거에 직접 접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토마가 자신의 모든 회의를 극복하고서 믿음에 이르게 된 것도 사실상 "믿지 않은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시오"라는 예수의 말을 진정으로 듣고 거기에 응답함으로써였다(20,24-28).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단계의 믿음은 눈으로 보지 않고서도 믿는 그런 믿음인 것이다(20,29). 이런 믿음은 예수의 "말씀"이나 그 증언으로 인해서 이루어질 수가 있다(4,50; 14,1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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