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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수호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상) 그는 왜 보수적 신학자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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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2-23 ㅣ No.55

진리의 수호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상) 그는 왜 보수적 신학자가 되었나

무신론ㆍ세속주의에 맞서 가톨릭 진리 수호





- '천재적 신학자'로 불리는 교황은 뛰어난 지적 능력과 도덕적 강인함, 그리고 날카로운 논변으로 가톨릭 교의와 정통성을 수호했다.


이달 말로 제265대 교황직에서 사임하는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한마디로 평하면 '진리의 수호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 범람하는 세기말적 사상과 교설(巧說)에 맞서 가톨릭 정통성을 수호했다. 교황 재임 8년 동안에는 교회가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의 풍랑에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썼다. 지난했던 그의 영적 투쟁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그가 지금까지 헤쳐온 풍랑은 동시대 그리스도인들과 후임 교황에게 여전히 계속되는 도전이 될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언젠가 "교황으로 선출(2005년)됐을 때 기요틴 도끼날이 떨어진 것 같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요틴(guillotine)은 프랑스혁명 당시 등장한 사형기구 단두대이다.

교황직의 중압감을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도끼날'에 비유할 만도 했다. 그는 콘클라베가 열리기 며칠 전 78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만 해도 설레는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은퇴계획을 늘어놓았다. 은퇴 나이도 한참 지난 터였다. 그런 마당에 12억 가톨릭교회 수장(首長)이라는 중책이 떨어졌으니 도끼날은 아니더라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는 고요하고 평온한 영혼의 소유자다. 그의 평전을 쓴 미국 가톨릭 내셔널지의 바티칸 통신원 존 알렌은 "그를 만날 때마다 수줍음과 넘치는 기지를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교황 자신도 한 인터뷰에서 "(교황이) 끊임없이 군중 앞에 모습을 보이고 마치 스타처럼 사람들 시선을 받는 것이 정말로 옳은 일인가?"하고 기자에게 반문한 적이 있다.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만 봐도 그는 군중 앞에서 손을 흔들어 환호에 답하는 스타형이라기보다는 책에 파묻혀 진지한 눈빛으로 뭔가를 연구하는 학자풍이다. 실제 그는 교황 피선 직후 다른 건 몰라도 수 십 년 손때 묻은 책과 책장으로 가득한 연구실(서재)만은 통째로 교황청으로 옮겼다.


광신적 이데올로기 공세에 충격

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보수주의자다. 그가 교황에 선출됐을 때 유럽 언론들이 '철갑 추기경' '신의 로트와일러(독일산 맹견)' 같은 우스꽝스런 별명을 붙여 그를 소개했을 정도다. 1981년부터 24년간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가톨릭 교의와 전통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사상과 신학적 조류에 한 치 양보 없이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공산주의와 싸웠다면, 그는 세속주의 및 도덕적 상대주의와 성전(聖戰)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무기는 뛰어난 지적 능력과 도덕적 강인함, 그리고 날카로운 논변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보수적 시각을 견지한 것은 아니다. 본, 뮌스터, 튀빙겐 등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만 해도 그는 개혁적 성향의 신학자로 통했다. 교의신학과 기초신학을 가르치는 강의실은 항상 초만원이었다. 솔직성과 관용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바티칸 책임자들이 교회를 경직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서슴없이 쏟아냈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듯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에서 칼 라너와 함께 공의회에 쇄신의 바람을 불어넣은 핵심적 인물이다. 당시 독어권에서 영향력이 높았던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의 신학 자문역으로 공의회에 참석한 그는 회의장 분위기가 현실에 안주 내지는 과거 회귀 쪽으로 기울자 교리ㆍ교의ㆍ전례 분야에서 번뜩이는 논리로 흐름을 바꿔놓았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 그를 '공의회 파괴자'라고 몰아붙였다. 당시 신학자들은 문서 초안을 작성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주교들 토론을 준비하는 일을 맡았는데 그는 회기 내내 핵심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신학사상과 교회문제에 대한 시각은 급격히 바뀌었다. 1960년대 후반 유럽 대학가를 휩쓴 네오 마르크시즘 열풍과 공의회 이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 급진적 주장 때문이다. 그는 교편을 잡고 있던 튀빙겐대학 신학과가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중심지가 되어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신약성경은 대중을 기만하는 비인간적 문헌", "예수에게 저주를!" 따위의 전단과 구호가 교정에 난무했던 시절이다. 그는 그 혼돈 속에서 '그리스도의 옷'을 걸치고 사회와 교회에 파고드는 광신적 이데올로기를 목격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나는 무신론적 열정에 사로잡힌 흉한 얼굴, 심리적 불안, 모든 도덕적 성찰을 부르주아의 썩은 냄새라고 내던져 버리는 열등의식, 이런 것들이 베일을 벗는 장면을 목도했다"고 말했다. 교회 내적으로도 공의회의 개혁 정신에 열광한 나머지 전체 교회에 대한 인식을 상실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못보는 데 대한 지적이었다.

프랑스 언론인 베르나르 르콩트는 저서 「마지막 유럽 교황, 베네딕토 16세」에서 "분명히 그는 미화된 중세적 과거에 집착하는 '시대에 뒤진 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도, 공의회 개혁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아쉬워하는 '순진한 근대주의자들'과도 거리를 두는 데 신경을 썼다"고 밝혔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 '진리의 수호' 측면에서 봐야 그의 사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성장 환경과 신학사상의 텃밭을 아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는 독일 바이에른 출신이다. 지리적으로 유럽 중앙에 위치한 바이에른은 16세기 종교개혁 바람이 대륙을 뒤흔들 때 그 바람을 막아낸 유일한 게르만 지방이다. 바이에른은 가톨릭 전통과 색채가 매우 강한데다 주민들 성향도 독립적이다. 그런 지방에서 태어나 공부하고 성소를 결정했기에 가톨릭 진리 수호에 대한 집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난 결연한 아우구스티노주의자다"
 
더구나 그는 신학생 시절부터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교부로 칭송받는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의 신학 노선을 따랐다. 그는 1996년 "난 결연한 아우구스티노주의자다. 만일 무인도에 가서 살아야 한다면 성경과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두 권을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아우구스티노는 예수 그리스도 다음가는 대스승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그의 영적 투쟁은 로마-그리스의 이교도 문화와 싸워가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사유를 철학적 틀 속에 정립한 아우구스티노의 그것과 닮았다.

그는 1981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발탁돼 바티칸에 입성했다. 그때부터 현대 사회의 무신론, 세속주의와 상대주의, 가톨릭교회 근본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급진적 주장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열풍을 잠재우고, 교황 무류성에 대한 의혹과 맞서 싸운 게 대표적 예다.

[평화신문, 2013년 2월 24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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