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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7일 복자 비오 9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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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5-07 ㅣ No.2099



축일 2월7일
복자 비오 9세 교황, OFS
Beato Pio IX (Giovanni Maria Mastai Ferretti) Papa 
Senigallia, Ancona, 13 maggio 1792 - Roma, 7 febbraio 1878
(Papa dal 21/06/1846 al 07/02/1878)

Pope Blessed Pius IX
Also known as : Giovanni Maria Mastai-Ferretti 
Born : 13 May 1792 in Senigallia, Italy as Giovanni Maria Mastai Ferretti
Papal Ascension : elected on 16 June 1846, installed on 21 June 1846
Died : 7 February 1878 in Vatican City of natural causes,
           buried in the basilica of San Lorenzo fuori le mura, Rome, Italy
Venerated :  6 July 1985 by Pope John Paul II (decree on heroic virtues)
Beatified : 3 September 2000 by Pope John Paul II at Saint Peter’s Square, Rome, Italy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Pius 9세(1792-1878). 교황(재위 : 1846-1878). 1792년 이탈리아에서 출생. 1819년 서품,
  교황청 해외 주재 사절로 칠레에서 근무(1823∼1825년), 1827년 대주교, 1840년 추기경을 거쳐 1846년 자유사상가로서의 명성과 더불어 압제적이었던 그레고리오 16세에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민족적 단합을 지지하였으나 1848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거부하자 이탈리아 혁명군에게 쫓겨 교황청을 떠났으며 프랑스군이 로마를 함락했을 때 교황청에 다시 돌아왔다. 그 후 정치에 있어서 자유주의를 포기, 1859년 로마냐(Romagna)를, 1860년에는 움브리아(Umbria)와 마르체스(Marches)를 잃고 1870년 로마가 함락된 후 구아란티법에 의해 교황의 모든 세속 주권을 빼앗겼다.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영성 및 교회문제에 있어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큰 성과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 밖에 영국과 네덜란드의 교계제도를 회복시키고(1850, 1851년), 유럽과 아메리카의 제(諸) 정부들과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많은 새로운 교구 및 선교 중심지를 탄생시켰다. 
  또한 성모의 무염시태 교리를 정의하고(1854년), 현대의 합리주의, 범신론, 종교적 자유주의 및 반가톨릭적 형태의 현대철학들을 단죄하여 가톨리시즘을 수호하는 데 노력하였다(1864년).
(가톨릭대사전에서)



  1792년 5월 13일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근처 세니갈리아(Senigalli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Ferretti)는 1803년 볼테라(Volterra)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간질병을 얻어 1809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로마 대학에서 공부한 후 1819년 4월 10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때 그는 예수회 회원이 되려고 하였으나 포기하고 로마의 타타 조반니(Tata Giovanni) 고아원에서 사제로서의 첫 활동을 시작하였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 칠레와 페루의 교황대사인 무치(G. Muzi) 주교를 보좌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이해와 사도적인 열성을 얻고 돌아온 그는, 1825년부터 1827년까지 로마의 산 미셸(San Michele) 구호원의 관리 책임을 맡았으며, 1827년에는 스폴레토(Spoleto)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32년에는 반성직주의와 교황의 세속권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던 이몰라(Imola) 교구의 교구장으로 전임되었다. 개혁에 대한 그의 입장은 1833년에 라벤나(Ravenna)의 대주교 팔코니에리(Falconieri)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과 1845년에 작성하여 로마로 보낸 “교황령 행정에 관한 고찰들”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자유사상과 행동을 배격하면서 바른 그리스도교적인 환경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밝혔다.



   1840년 추기경으로 임명된 조반니 마리아는 1846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 1831-1846년)가 사망했을 때는 후보자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나, 그레고리우스 16세의 체제를 계승하려는 보수파들의 대표자인 람브루스키니(L. Lambruschini) 추기경이 교황이 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이들에 의해 교황 후보자로 강력히 부상되었다. 그리고 교황 선거가 시작된 지 이틀 만인 1846년 6월 16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이몰라의 주교였던 비오 7세 교황(1800-1823년)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비오라는 이름을 택하였다.

   그는 1846년 회칙 “퀴 플루리부스”(Qui Pluribus)를 통해 사제 지원자들의 엄격한 선발과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같은 해에 수도회성을 설립하여 수도회의 개혁을 촉진하였다. 1848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이탈리아의 독립과 해방을 주장하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민족적 단합을 지지하였으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거부하여 이탈리아 혁명군에게 쫓겨 교황청을 떠났다가 프랑스군이 로마를 함락했을 때 다시 돌아왔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대칙서를 통해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선포함으로써 마리아 신심을 증진시키고 신학적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 자유주의를 포기하였고,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1859년 로마냐(Romagna) 그리고 1860년에는 움브리아(Umbria)와 마르케(Marche)를 잃었고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와 교황령을 점령하고 이듬해 일방적으로 ‘보장법’을 발표함으로써 교황의 모든 세속주권을 빼앗겼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영성 및 교회문제에 있어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큰 성과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는 또한 현대의 합리주의, 범신론, 종교적 자유주의와 반가톨릭적 형태의 현대철학들을 단죄하여 가톨리시즘을 수호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그는 이탈리아 정부와 더 멀어졌고, 공의회의 결과로 발생한 이교인 구가톨릭교(Altcatholizismus)와 서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반성직주의 운동을 목격하였다. 

   한국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교황 비오 9세는 재위중인 1857년 조선 순교자 82명을 가경자로 선포하였고, 1866년 초 조선에 병인박해가 발생했을 때 그 해 12월 19일자 편지를 통해 교우들을 위로하고 박해를 받는 이들에게 위로와 언약된 보상을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적 이지도 외교적이지도 않았으며 본질적으로 사목자였다. 하지만 그가 재임할 때의 역사적인 상황, 즉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국가 통일 운동)의 시기는 그를 정치와 연루시켰다. 그는 정치적으로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고 근대 세계와 문명에 대한 이해 또한 충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성과 교회의 엄격한 수도회의 부활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반얀센주의 신심을 일깨우고 재속 성직자와 수도자를 개혁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세속화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였고, 교회 특히 교황의 자주와 독립을 확립하였다.
   1878년 2월 7일 사망한 교황 비오 9세의 유해는 1881년 7월 13일 베드로 대성당에서 산 로렌조 성당(San Lorenzo fuori le Mura)으로 옮겨졌으며, 1985년부터 그의 영웅적인 삶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함께 시성을 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는 2000년 9월 3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복식에 참여한 약 10만 명의 신자들에게 강론을 통해 비오 9세 교황에 대해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으며 언제나 하느님과 영적인 가치들을 그 무엇보다 우위에 두었다”면서 “그분은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증오와 비방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교황 비오 9세는 1700년 이후 최연소 교황이었으며 베드로 사도 이후 가장 오랜 기간(32년) 교황직을 수행하였다.

참고자료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6권 - '비오 9세',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8년, 3777-3780쪽. 
(가톨릭홈에서)




* 참고
  교회의 역사에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까지 100여년 동안 7명의 역대 교황 모두가 계속해서 재속 프란치스꼬 회원이었다는데 놀라움이 있다.
1) 복자 비오 9세(1846-1878)축일2월7일, 2)레오 13세(1878-1903), 3)성 비오 10세(1903-1914)축일8월21일, 4) 베네딕또 15세(1914-1922), 5) 비오 11세(1922-1939),  6)가경자 비오 12세(1939-1958)10월9일, 7) 복자 요한 23세(1958-1963) 축일10월11일(6월3일), 8)하느님의 종 바오로 6세(1963-1978)축일 8월6일
- 김용철OFM.,재속프란치스꼬회 회칙 비교 연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 논문,1996,108-109쪽 주석 205번에서







◆ 바티칸공의회 ◆       
한자  ∼公議會  라틴어  Concilium Vaticanum  영어  Councils of Vatican 
[관련단어] 공의회   출처 : [가톨릭대사전]  
 
   ①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 20차 공의회). 교황 비오(Pius) 9세에 의해 바티칸에서 개최된 세계 교회회의.

  ㉮ 트리엔트 공의회가 1545년부터 1563년까지 개최된 이후 거의 300년 동안 교회회의가 소집되지 않았었다. 그 동안 일반사회 내에서는 합리주의, 자유주의, 유물주의 등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어 하느님 계시의 가능성에 대한 교리의 거부, 하느님의 실재 거부, 영혼성의 실재 거부 등 반교회적 요소들에 대한 대처와 이에 따른 교회법의 개혁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1864넌 12월 예부성성(禮部聖省) 추기경회의에서 공의회 개최에 대한 의견이 제출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공의회에서 취급되어야 할 안건들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뒤 1867년 6월 공의회 개최에 대한 공식발표를 함과 아울러 준비위원회로는 중앙위원회 산하 교의 · 교회규율 · 수도회 · 포교 등 그 부속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868년 6월 비오 9세의 칙서 의 발표로 바티칸 공의회가 1869년 12월 8일 개최되는 것이 공식화되었다.

   ㉯ 1870년 로마가 함락되어 무기한 휴회될 때까지 모두 4차 회기로 진행된 공의회에서는 많은 의제들이 논의되었지만, 공의회가 개최되기 전부터, 또 공의회 회기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은 ‘교황의 무류성’(papal infallibility)에 대한 것이었다. 14번의 총회와 64번의 연설에 걸친 토론 끝에, 결국 1870년 7월 18일 공개회의 투표에서 통과되어 교황은 정의를 발표하고 교령들의 비준을 선포하였다. 이 때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내용은 한 교령 중의 하나의 장(章)으로 채택되어 통과되었다. 이로써 공의회 우위설과 교황권 제한주의에 대해서는 종지부를 찍은 셈이나 교황 무류성에 대한 문제와 세계 공의회가 교리적 정의를 마련하기 위한 근거에서 볼 때 한낱 교황의 자문기관이냐 하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 제4차 회기가 끝난 뒤 교황에 대한 주교들의 관계 등 다른 의제들에 대한 결정이 유보된 채 이탈리아 왕 빅토르 엠마누엘 2세의 로마 점령에 의해 교황은 단 한 평의 교황령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유명무실해진 공의회를 해산시킬 적당한 이유를 마련해 줌에 따라 1870년 10월 비오 9세는 바티칸 공의회의 정회를 선포하였다. 이로써 신앙과 계시의 속성(屬性)에 대한 헌장과 이성과 신앙 및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에 대한 헌장들을 반포했을 뿐 그 밖의 문제들은 유보되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교황의 무류성을 부정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급기야는 독립된 종교단체임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로써 구가톨릭 교회가 탄생될 수 있었다.

원죄 없는 잉태 
한자  原罪~孕胎   라틴어  conceptio immaculata   영어  immaculate conception 
   
마리아가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았다는 교리.
이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에 적합하도록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미리 하느님이 섭리한신 특전이다.
교회는 ‘원죄없는 잉태’가 사도들에게 계시되어 교회 내에 전래되어 온 교리의 일부라고 가르친다.  

성서에는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이 없다.
그러나 사도들의 구두 가르침에 이 교리가 포함되어 있었고, 다른 명확한 가르침에 은연중 내포되어 있었는데,
이는 복음의 씨앗이 그리스도 교인의 가슴에 열매를 맺고 난 이후에 비로소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성서상 간접적인 근거로 창세 3:15와 루가1:28을 들기도 하지만,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뚜렷한 신앙은
마리아의 성덕(聖德)에 대한 일반적인 교리를 구체화하는데서 비롯되었다.

루가복음 제1장과 제2장은 마리아를 예외적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그녀의 성덕을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선택받은 사실과 관련시킨다.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루가 1:30-31),
이러한 마리아의 성덕은 성모 영보 때 뿐 아니라
마리아의 잉태 순간부터 갖추었음이 수세기가 지난 후에 비로소 밝혀졌다.

① 초기의 발전 :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마리아를 거룩하다고 여겼으나 죄의 흔적이 없다고 보지는 않았다.
시일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서는 마리아의 성덕에 대한 신심으로 발전하였고,
한편 마리아가 잉태될 때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신심의 발전을 보았다.
이 신심은 8-9세기까지 비잔틴 세계 일대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서방세계에는 전파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이와 같은 신심의 발전은 마리아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나 명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교인들의 가슴속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신앙감(sensus fidei) 때문이었다.
복음을 실천하는 일상생활 가운데 그들은 이 진리를 긍정하고 싶은 내면적 요구를 경함한 것이다.
이 신심은 원죄 교리와 조화시키지 못했으나 이 시기에는 별다른 논쟁이 없었다.

② 중세 서방교회 :
서방교회는 1125년경 마리아의 잉태를 기념하는 축일을 부활시켰는데,
이때에 즈음하여 미리아의 잉태가 지닌 성격이 논점으로 부각되었다.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하면, 마리아가 원죄에 물든 적이 없다면
만인(萬人)의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았다고 할 수 없지 않느냐 하는 점이 문제되었다.
즉 원죄 없는 잉태와 구원의 보편성을 조화시키는 문제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가 원죄에 물들었으나 탄생 전에 원죄의 사함을 받았다고 설명했으나,
요한 둔스 스코투스는 선행구속(先行救贖)이란 개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즉 마리아는 아담의 후손이므로 의당히 원죄의 죄과를 받아야 했지만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예견(豫見)된 공로에 비추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면제해 주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③ 교의(敎義)의 규정 :
역대의 교황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신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 남기었다. 
17세기에 이르러 이를 믿을 교리로 규정에 달라는 신자들의 빗발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여러 교황은 거절하였다.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성령은 이 신비의 비밀을 열어 보이지 않고 있다”고대답하였다.
마침내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주교들과 신학자들의 협의를 거쳐 이를 교의로 선포하였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  

이처럼 단정하는 근거는 성령의 도유를 받은 신자들의 총체가 공통적 신앙감을 지니고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같은 견해를 표시할 때 그 총체는 믿음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교회 헌장 12참조).
-가톨릭대사전에서-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의 원죄없음이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능력을 삭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이해 하였다.   

그는 세가지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한 순간도 원죄의 지배 하에 있지 않도록 하실 수 있다.
둘째, 어느 한 순간만 원죄의 지배 하에 있게 하실 수 있다.
셋째, 마리아가 원죄의 지배를 받더라도 일정 시기가 지난 다음 원죄로 부터 성화하실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 세 가지 가능성에서 가장 좋은 것을 마리아에게 이루셨으리라고 확신하였다. 

이로써 "하느님은 하실 수 있었고, 원하셨으며, 따라서 그렇게 하셨다."
(Potuit, voluit, fecit)라는 유명한 공식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관한 논쟁은 1854년 12월 8일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Ineffabilis Deus )에 의해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가 교의로 선포되기까지 계속되었다.
(마리아론-조규만지음.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복자 둔스 스코투스 축일:11월8일.게시판1460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Beato Pio IX (Giovanni Maria Mastai Ferretti) Papa
7 febbraio 
Senigallia, Ancona, 13 maggio 1792 - Roma, 7 febbraio 1878


(Papa dal 21/06/1846 al 07/02/1878)
Durante il suo pontificato, malgrado fosse costretto ad impegnarsi drammaticamente sul piano politico, non dimenticò mai di assolvere i compiti spirituali convinto di essere responsabile, di fronte a Dio, della difesa dei valori cristiani. Promosse nuove forme di culto e di vita spirituale, come la devozione eucaristica, quella verso il Sacro Cuore e quella mariana.
Dette slancio all'attività missionaria in Asia e in Africa. Definì il dogma dell'Immacolata Concezione e celebrò il Concilio Vaticano I dove fu fissato il dogma dell'infallibilità del Pontefice quando parla ex cathedra.

Martirologio Romano: A Roma, beato Pio IX, papa, che, proclamando apertamente la verità di Cristo, a cui aderì profondamente, istituì molte sedi episcopali, promosse il culto della beata Vergine Maria e indisse il Concilio Ecumenico Vaticano I.

  

Nella sua città natale, quando era bambino, lo chiamavano “Giovannino il buono”. Educato alla vita cristiana dai suoi cattolicissimi genitori, giocava allegrissimo come tutti i ragazzi, ma al venerdì, dopo il gioco, tenendo alzato tra le mani il Crocifisso, raccoglieva sulle piazze gruppi di coetanei e predicava il Vangelo. Spesso si fermavano ad ascoltarlo anche degli adulti, ammirati.
È nato il 13 maggio 1792 a Senigallia (Ancona), in una notte gremita di stelle, rotta solo dallo sciabordio delle onde del mare sulla spiaggia; Si chiama Giovanni Maria Mastai Ferretti. Nel cuore gli brillava un grande ideale: diventare sacerdote di Gesù. Gli studi li compì a Volterra, nel Collegio degli Scolopi. Fu brillante ed esemplare. Aveva un grandissimo amore a Gesù: sovente si avvicinava a Lui nella Confessione e nella Comunione eucaristica. A 17 anni, decise: “Voglio farmi prete”. Nel 1809, a Roma, iniziò gli studi nel Collegio Romano, preparandosi a salire all’altare. In quel tempo, sacerdoti e religiosi erano derisi e minacciati dai rivoluzionari venuti dalla Francia. Papa Pio VII venne imprigionato e deportato in Francia da quel piccolo corso prepotente che, chiamandosi Napoleone, credeva di essere il padrone del mondo.

Il buon Pastore

Ma una lunga malattia lo ferma in un tunnel oscuro per alcuni anni. Si affida alla Madonna e vive da cristiano esemplare nella sua famiglia. Finalmente, nel 1814, miracolosamente guarito dopo aver pregato a lungo la Vergine SS.ma nel santuario di Loreto, ritorna a Roma e riprende il cammino verso l’altare.
Si occupa come catechista dei ragazzi poveri dell’Istituto “Tata Giovanni”, studia e ascolta i preti santi suoi contemporanei: Vincenzo Strambi, Gaspare Del Bufalo, Vincenzo Pallotti, ardenti di amore a Gesù. Il 10 aprile 1819, don Gian Maria è ordinato sacerdote dall’Arcivescovo Mons. Caprano nella cappella di Palazzo Doria. Ha un solo desiderio: farsi santo e guadagnare a Gesù quante più anime possibile. Dirige il “Tata Giovanni”, confessa e predica nelle chiese dell’Urbe, prega intensamente. Rivolto a se stesso, nelle sue “note d’anima”, scrive: “Pensa all’amore grande che Gesù ti porta. Compi l’atto eroico della tua offerta definitiva a Lui, da cui avrà principio la tua santità. Tutto soffri in pace per Lui che tanto ama te”.
Per amore a Lui, nel 1823, rischiando la vita, accompagna come missionario il “Vicario apostolico” Mons. Muzi, inviato dal Papa in Cile. Al suo rientro a Roma, nel 1825, è posto da Papa Leone XII a dirigere il Collegio “S. Michele a Ripa”, a servizio dei giovani e degli anziani e di diverse “anime in pericolo”. La sua missione nella Chiesa sta per “esplodere”.
Il 3 giugno 1827 a soli 35 anni, è consacrato Vescovo di Spoleto dal Card. Saverio Castiglioni (il futuro Papa Pio VIII). Per sei anni, in momenti difficili, tra contrasti religiosi e politici e calamità naturali, è il buon Pastore della carità, mai disgiunta dalla verità, anche quando costa dirla e urtare qualcuno. Nel 1833, è trasferito a Imola, nella difficile Romagna, proprio perché sappia risolvere gravi difficoltà e incoraggiare l’annuncio del Vangelo e la vita cristiana. Il 14 dicembre 1840, apprezzatissimo da papa Gregorio XVI per la sua opera, Mons. Mastai è insignito della porpora cardinalizia. È sempre e innanzi tutto sacerdote, proprio come diceva di lui appena trentenne, il fratello Gabriele: “Gian Maria è prete. Tagliatelo a pezzi, ma ricomponendo i pezzi, vedrete che non potrà venir fuori altro e sempre che il prete”. Un prete vero che vive di Gesù solo, che è un “altro-Gesù”.

“Tu sei Pietro”

È il tempo in cui pubblicisti, politici e rivoluzionari, mobilitati dalla massoneria, lavorano per scristianizzare l’Europa e l’Italia, per togliere di mezzo
la Chiesa e annullare il Credo Cattolico, e per attrarre il Clero e la gioventù sotto la loro influenza. Il loro scopo finale –
era stato scritto fin dal 1819-20 – è quello di Voltaire e della rivoluzione francese, cioè l’annichilimento del Cattolicesimo e perfino dell’idea cristiana”.
Il Card. Mastai Ferretti ben conosce i progetti di costoro e lavora in prima linea per radicare Gesù nelle anime e nella società. Sa che Gesù regna sul mondo per mezzo di Maria SS.ma e per questo promuove e diffonde la preghiera del Rosario e le Confraternite del Cuore di Maria, con un solo fine: schiacciare la testa al serpente infernale e condurre tutti a Cristo. Dopo la morte di Gregorio XVI, il Card. Mastai-Ferretti, il 16 giugno 1846, è eletto Papa. Prende il nome di Pio IX! Ha solo 54 anni.
Preti e cristiani di Roma lo incontrano in preghiera nelle chiese e possono parlargli come a un buon parroco. Dà inizio a una serie di riforme, per le quali si grida subito dappertutto “Viva Pio IX!”, considerato da molti un Papa liberale, ma è un “evviva” interessato: sacerdote di Gesù e di nessun altro, non può essere “liberale” quando ciò significa in fondo che solo l’uomo – e non Dio – è legge per l’uomo. Nel 1848, il 10 febbraio, Pio IX prega: “Benedite, gran Dio, l’Italia e conservatele il dono di tutti il più prezioso, la Fede”. È la preghiera che dobbiamo ripetere ogni giorno anche oggi.
Tra l’estate e l’autunno del 1848, a Roma, a causa dei mestatori che vogliono sbarazzarsi del Papa, c’è forte agitazione. Il 15 novembre, Pellegrino Rossi, l’uomo che Pio IX ha chiamato al governo per rimettere ordine e garantire le buone riforme da lui avviate, viene assassinato. Il circolo massonico appare padrone della città, anche se è esigua minoranza. Il Quirinale è preso d’assalto dai rivoltosi che vogliono imporre al Papa le loro condizioni per governare. Pio IX rifiuta con calma e fermezza ciò che ripugna alla sua coscienza, che Roma e il suo stato cadano in mano a uomini nemici di Dio e della Chiesa.
Il 24 novembre 1848, vestito da semplice prete, Pio IX parte per Gaeta. A Roma, senza alcun consenso del popolo, si instaura la “repubblica romana”, capeggiata da Mazzini che dichiara decaduto il Papato dal governo temporale. Da Gaeta, Pio IX chiede l’aiuto dei principi cattolici contro gli usurpatori. Sconfitta la “repubblica romana” per intervento dei francesi, il 12 aprile 1850, il Papa è accolto a Roma che lo acclama Padre e Maestro. Ora egli ha una coscienza ancora più lucida del suo ministero: a costo dell’impopolarità non potrà mai avere accordo con i negatori di Dio e i nemici di Cristo.

Il primato della Verità

La Chiesa da secoli venera Maria come Immacolata fin dal suo concepimento e Pio IX sa che se Ella è stata preservata dal peccato originale in vista dei meriti del Figlio suo, è perché nella Chiesa ha la missione di vincere satana in tutte le eresie che diffonde a perdizione dei credenti. Ancora esule a Gaeta, fa studiare la “questione” e interpella i Vescovi di tutta la Chiesa, indicendo pubbliche preghiere per avere da Dio la luce che gli occorre.
L’8 dicembre 1854, solennità dell’Immacolata Concezione di Maria, in S. Pietro a Roma, Pio IX nella pienezza del suo potere dottrinale, definisce dogma di fede che Maria è stata concepita senza peccato d’origine ed è Tutta Santa fin dall’inizio della sua esistenza. Maria Immacolata, da lui sempre amata fin da bambino, ora sarà la “Stella fulgida” del suo pontificato e di tutta la Chiesa, così da essere giustamente chiamato “il Pontefice dell’Immacolata”. “La proclamazione di questo dogma racchiude in germe tutto il disegno di Pio IX” – dirà il card. L. M. Parocchi.
Lo “spirito del secolo” diffuso dall’illuminismo, dalla massoneria e dai negatori di Dio, afferma che l’uomo è legge assoluta per l’uomo. Pio IX, con il dogma dell’Immacolata, afferma invece che l’uomo è ferito dal peccato fin dalla sua origine e che Gesù Cristo, il Figlio di Dio incarnato e morto sulla croce in espiazione del peccato, è l’unico Salvatore dell’uomo e del mondo. Maria dunque conduce a Cristo, spezzando tutte le eresie nel mondo intero e racchiude in se stessa e nel Cristo che dona al mondo, tutta la Rivelazione.
Proprio in quegli anni, lo spirito del secolo ha disseminato a piene mani in ogni campo errori di ogni genere: se Dio non c’è o non c’entra e la terra appartiene solo all’uomo, l’uomo si organizzi come gli pare e gli piace. Ma questo è contro Dio che ha dato a Cristo ogni potestà in cielo e sulla terra (Mt 28,18). Per questo, Pio IX, l’8 dicembre 1864, ancora nella solennità dell’Immacolata, emana l’enciclica Quanta cura e il Sillabo, elenco degli errori più gravi discendenti dalla negazione di Dio e li condanna con la luce e la forza irresistibile della Verità assoluta ed eterna, contro cui nulla regge.
Negatori di tutte le risme, si scagliano con violenza contro il Papa accusandolo di oscurantismo, fanatismo, di essere contrario alla ragione e alla civiltà. È certo che il Sillabo ha colpito un’intera visione della vita e della storia, quale è comune a tutte le ideologie nate dalla negazione di Dio. Ma oggi, che vediamo il fallimento di tutte le ideologie e il suicidio di società intere costruite su quei tragici errori, Pio IX con il Sillabo appare il più grande maestro e profeta della sua ora e dell’avvenire. Se l’avessimo messo in pratica, non avremmo avuto nessuno degli orrori del secolo XX, il più empio e il più sanguinario della storia.
Lo spirito del secolo ha esaltato il potere dell’uomo e celebrato le conquiste della ragione come unica norma di verità, rifiutando la Rivelazione ma finendo nella disperazione di chi neppure sa da dove viene e dove va. L’8 dicembre 1869 – ancora una volta nella solennità dell’Immacolata – Pio IX apre a Roma il Concilio Vaticano I cui prendono parte i Vescovi di tutto il mondo. Il 24 aprile 1870, il Papa promulga la Costituzione Dei Filius, luminosa esposizione della dottrina cattolica su Dio, la Rivelazione, la vita di Fede, in opposizione al razionalismo e al naturalismo moderni, confutati e condannati in nome di Cristo, unico Signore e Maestro e Salvatore dell’umanità.
Il 18 luglio 1870, con la costituzione Pastor aeternus, Pio IX, proclama il dogma dell’infallibilità del Papa, quando come maestro della fede e della vita cristiana, insegna ex cathedra con l’autorità di Cristo.
Ora davvero la Verità è affermata nel suo primato su tutto. Le potenze dell’inferno si scatenano contro Pio IX, ma forse mai altro pontefice ebbe tanti santi a sostenerlo e fu tanto amato dagli umili e dai grandi della Chiesa e del suo tempo, primo fra tutti quel Modello e Maestro di santità che si chiama Don Bosco. Nei loro frequenti incontri a Roma, come narra lo storico don G. B. Lemoyne – Pio IX e Don Bosco si compresero in una intensissima comunione di anime con Gesù al centro: Pio IX trovò in Don Bosco il prete più ardito per le imprese più ardue nelle ore più buie; Don Bosco trovò in Pio IX il sostenitore deciso della sua opera, fino al punto di ritenerlo il 2° fondatore della Società salesiana e a profetizzarne, giustamente, dopo la sua morte, la canonizzazione.
Con questo stile, Pio IX, governò la Chiesa per 32 anni, fino al 7 febbraio 1878. Fu uno dei Papi più grandi della storia, un gigante di luce e di santità. Il 3 settembre 2000, finalmente, da Giovanni Paolo II è stato elevato alla gloria degli altari. Occorre invocarlo per la Chiesa e per il mondo di oggi, vivendo con la sua certezza, così come egli diceva ai giovani di Azione cattolica, da lui avviata: “I nemici di Dio spariscono uno per uno, e la Chiesa resta. Saremo tribolati, ma vinti mai!”.

Autore: Paolo Ri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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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o biografico

Nella storia, ogni tanto, fan la loro comparsa straordinarie persone: straordinarie perché dotate di qualità non comuni e perché evidentemente chiamate a compiti altrettanto non comuni. Persone carismatiche, con doni proporzionati alla missione loro assegnata. Persone, quindi, della divina Provvidenza.
Chi potrebbe mai dubitare che il Pontefice felicemente regnante, Karol Vojtyla, sia una di tali persone? La sua statura morale, la ricchezza carismatica che lo distingue e la coerenza con la quale ad essa corrisponde non lasciano dubbi sul compito divinamente affidatogli, non solo di "pascere la Chiesa di Dio" (At 20,28), ma di traghettarne la barca tra i marosi del tempo, il più felicemente possibile, dall’uno all’altro millennio.
Si è stati testimoni di questo passaggio: la figura del vecchio e malandato Pilota ha giganteggiato dinanzi al mondo intero e si è consegnata alla storia come protagonista assoluto del passaggio stesso.
E’ una figura che, per analogie storiche ma non personali, ne evoca un’altra, anch’essa protagonista al di sopra di altri: quella di Pio IX. Vistosamente diverso da Giovanni Paolo II per temperamento e per altre qualità naturali, non meno di lui ricco di grazia e di destino, proprio da lui, dal vecchio e malandato papa polacco, ha ricevuto l’aureola della santità ufficiale
Anche Pio IX ebbe dalla divina Provvidenza un compito immane da svolgere e doni proporzionati a quel compito: in tempi anche più procellosi dei nostri, resistendo alla furia delle onde in rivolta e vincendola, traghettò egli pure il naviglio di Pietro da un’epoca ad un’altra. Il confronto tra i due Pontefici mette in evidenza difficoltà di pilotaggio incomparabilmente maggiori nel caso di Pio IX rispetto a quello di Giovanni Paolo II: questi è passato da un millennio all’altro, certo non senza avvertire l’urto di forze avverse (comunismo, secolarismo e la strisciante "inimica vis" che mai demorde); l’altro, sotto i colpi del liberalismo massonico ed anticlericale, portò la Chiesa da un mondo ad un altro salvando tutto il patrimonio della tradizione cattolica, rifiutando nettamente ogni attentato ad essa, ma con essa componendo, nei limiti del possibile, i valori del moderno e del nuovo. Non è né un caso, né un’esagerazione il fatto che l’ultima biografia del grande Pontefice porti come titolo: Pio IX; papa moderno.
Fu, il suo, un pontificato epocale. Una mentalità, una cultura, una Weltanschauung stava consumando i suoi guizzi residui; egli non le permise di travolgere il patrimonio affidato alla sua tutela. Nasceva e s’imponeva una diversa visione delle cose e dinanzi ad essa tremò, ma senza mai capitolare. Alla visione incentrata in Dio e nella sua rivelazione tentava di sostituirsi quella incentrata nell’uomo, nella sua ragione, nella sua libertà e nei suoi diritti. Martire della prima, fu il primo papa che seppe saggiamente aprirsi alla seconda. Gli altri han continuato la sua strada.
Le condizioni socio-politiche d’allora misero spesso le due mentalità in irriducibile contrasto, quasi che l’una volesse sostituirsi all’altra non solo come diversa nella sua genesi e nel suo orientamento, ma come alternativa, ed alternativa diametralmente opposta. Per divina disposizione, a Pio IX toccò in sorte di fronteggiare codesta enorme contrapposizione, ma anche d'assumerne alcuni elementi di sicuro valore (p. es. sul piano delle istituzioni sociali) e d’impedire che la scomposta affermazione di altri elementi ridondasse a danno di quel patrimonio, per la cui salvaguardia era al timone della Chiesa.
Di questo Pontefice, che chiamar grande è poco, non ripercorrerò la lunga vicenda né mi soffermerò su di essa con intenti biografici. L’interesse biografico è già stato ampiamente soddisfatto ed "ogni lingua" (Rm 14,11; Ef 2,11) ha tessuto le lodi di papa Mastai Ferretti. Intere biblioteche, infatti, o parti di esse, son intitolate al suo nome.
Qui l’interesse è volto, in perfetta continuità con l’evento della sua beatificazione, al perché di esso, cioè alla santità di cui l’evento stesso testimonia non senza provocarne l’approfondimento e l`analisi. S’intende, in altri termini, rispondere, sia pur brevemente, alla domanda che ognuno potrebbe porsi in questi giorni: perché beato? che senso ha per la Chiesa e per il mondo questa beatificazione?
Ovviamente si dovrà procedere con ordine in mezzo alle non poche difficoltà di lettura del passato e interpretazione di esso.

I - Dalla nascita al sacerdozio

Benché il presente scritto prescinda dal genere biografico, la vita di papa Mastai ed i fatti salienti che lo videro in prima fila non possono esser ignorati del tutto.
Egli dunque nacque a Senigallia il 13 maggio 1792, nono figlio di Girolamo Benedetto Gaspare dei conti Mastai Ferretti e di Antonia Caterina Maddalena Solazzi, del patriarcato locale. Dei figli maschi era il quarto, dopo Gabriele, Gaetano e Giuseppe. Fu battezzato il giorno stesso della nascita col nome di Giovanni Maria Battista Pellegrino Isidoro da uno zio, il canonico Angelo Mastai, poi vescovo di Pesaro.
Era di delicata costituzione fisica, ma d’intelligenza sveglia e d’indole ottima. Appena poté, andò a messa ogni giorno con la pia mamma. Rivelò presto la sua devozione eucaristica e mariana. Fu dedito alla pratica dei "fioretti". Era stato cresimato il 6 giugno 1799 dall’Em.mo B. Honorati, vescovo di Senigallia, ed ammesso alla prima comunione nella cappella della Madonna della Speranza in cattedrale il 2 febbraio 1803.
Il 20 ottobre di quel medesimo anno entrò nel Collegio dei Nobili, tenuto in Volterra dai Padri delle Scuole Pie. V rimase fino al 26 settembre 1809, dando prova d’ingegno vivace e d’esemplare comportamento.
Lo zio Paolino Mastai, canonico vaticano, l’accolse presso di sé, quando, nel 1809, Giovanni Maria lasciò Volterra e venne a Roma per gli studi superiori presso il Collegio Romano. Il giovane conte, a quell’epoca, non aveva dato ancora la sterzata decisiva alla sua vita in direzione del sacerdozio. Era ancora "in stato secolare", come egli stesso s’esprime, quel 10 aprile 1810, quando, a conclusione d’un ritiro spirituale, gettò le basi di tutta la sua futura esistenza: lotta al peccato, fuga da ogni occasione moralmente pericolosa, studio "non per l’ambizione del sapere" ma per il bene altrui, abbandono di sé nelle mani di Dio. E non mancò di rivolgere a sé stesso un’esortazione finale, per impegnarsi con tutte le sue forze all’osservanza dei suoi buoni propositi: "Eseguisci il sistema divino che hai disegnato".
Quel programma (o "sistema divino") era sintomatico della limpidezza interiore del giovane studente, già soprannaturalmente orientato, purtroppo non eran floride le sue condizioni di salute. Soffriva d’improvvisi attacchi che qualcuno considerò epilettici, anche se non si han prove sicure al riguardo. La cosa certa è che fu per questo costretto ad interrompere gli studi. Nel 1812, la malattia gli ottenne 1’esonero dalla chiamata di leva nelle Guardie d’onore del Regno. Chiese, invece, ed ottenne nel 1815 di far parte della Guardia Nobile Pontificia; ma a causa del suo male, ne fu presto dimesso. Paradossalmente, proprio in quello scorcio di tempo, San Vincenzo Pallotti gli vaticinò il supremo pontificato e la Vergine di Loreto lo liberò, sia pure in modo graduale, dal male che l’affliggeva.
Sempre nel 1815 fu tra i volontari che prestavano la loro opera educativo-didattica ai ragazzi del Tata Giovanni, un istituto dove prenderà poi dimora e che gli resterà caro per tutta la vita. Nel 1816 ebbe una parentesi senigalliese come catechista in una memorabile missione popolare. Poco dopo, nella Chiesa dell’Orazione e Morte, dove aveva appena finito di servire una messa, si decise per il sacerdozio, ponendo fine ad un quinquennio d’ondeggiamenti. Vesti l’abito talare, riprese gli studi, ebbe gli ordini minori il 5 gennaio 1817, il suddiaconato il 20 dicembre 1818 ed il diaconato il 6 marzo 1819. Un mese dopo, il 10 aprile, per grazia personale di Pio VII, venne ordinato prete. Ed egli, con chiara consapevolezza del suo nuovo stato, s’impegnò formalmente con se stesso ad evitare la carriera prelatizia per rimanere sempre e soltanto al servizio della Santa Chiesa. Vi rimase di fatto, anche nella carriera e nonostante gli inarrestabilì scatti di essa.

2 - Prete e vescovo

Celebrò la sua prima messa ai suoi cari ragazzi del Tata Giovanni, nella Chiesa di Sant’Anna. Nominato rettore di quell’istituto, vi si fermò fin al 1823.
Fu subito evidente con quale spirito fosse andato incontro al sacerdozio. Assiduo alla preghiera, al ministero della parola, alle sacre funzioni, al confessionale, il prete Mastai era ormai l’uomo per gli altri, specie per i più umili e bisognosi. Univa il raccoglimento alla disponibilità più generosa, I’unione con Dio all’attività del ministero vissuto sulla breccia, la vita contemplativa alla predicazione ed a qualunque altro servizio gli richiedessero le attese e le necessità delle anime. Foglietti provvidenzialmente sfuggiti alla distruzione costituiscono la più probante testimonianza della sua vita interiore di giovane prete, dei suoi spietati esami di coscienza, del suo rifugiarsi nel Cuore sacratissimo di Gesù ed in Maria.
Nel 1823 parve prender concretezza il suo sogno segreto: farsi missionario. Il 3 luglio lasciò Tata Giovanni per accompagnare in Cile il Nunzio Apostolico S. E. Mons. Giovanni Muzi e vi restò fin al 1825. Per tale missione, il Segretario di "Propaganda Fide" l’aveva così presentato: "E’ difficile ritrovare persone che riuniscano tutti i requisiti che s’incontrano in questo rispettabilissimo sacerdote. Pietà singolare e soda, dolcezza di carattere, prudenza ed avvedutezza non ordinarie, zelo grandissimo accompagnato dalla scienza che in lui bene si trova in abbondanza,...desiderio di servire Dio e di essere utile al prossimo per le missioni presso gli infedeli".
La madre ne fu profondamente addolorata, soprattutto per l’incognita della salute. Ma né la costernazione materna, né altre contrarietà fermarono l’ardente "missionario’`.
La missione si rivelò più difficile del previsto e richiese soprattutto saggezza, prudenza e spirito di Fede. Eran le doti precipue del giovane Mastai, le uniche armi ch’egli impugnò per il bene della società cilena e l’onore di Dio. Non era un diplomatico; non lo sarà mai in tutta la vita. Era un prete. E come tale si comportò anche in un contesto diplomatico come quello della missione cilena.
Sarebbe rimasto molto volentieri in quella terra ormai da lui amata. Ma Roma lo reclamò per altri e non meno delicati servizi. Obbedì serenamente.
Nel 1825 fu eletto preside dell’Ospizio Apostolico di San Michele: un’opera complessa e grandiosa, ma per non pochi motivi non più all’altezza dei suoi compiti e bisognosa perciò di seria riforma. E’ quel che fece il Mastai con oculatezza pari all’intraprendenza. Gli esiti furon lusinghieri.
Ma il campo nel quale egli prodigava i tesori di natura e di grazia di cui era straordinariamente dotato, restò sempre quello pastorale. Fu un vero apostolo.
Aveva appena 35 anni, quando Leone XII, il 3 giugno 1827, lo destinò all’arcidiocesi spoletina. Il novello Pastore vi fece solenne ingresso il 7 luglio. L’obbedienza al successore di Pietro ne vinse la non formale resistenza, non si sentiva meritevole di tanto e soprattutto era convinto d’essere impari a quanto la responsabilità episcopale gli avrebbe richiesto. Ma il Papa fu fermo nel suo disegno e fece di lui, in quell’occasione, il seguente elogio: "Uomo commendevole per gravità, prudenza, dottrina, rettitudine di costumi, esperienza delle cose".
L’elogio rivelava la grande fiducia del Pontefice nel suo collaboratore, il quale lo ripagò da par suo: a Spoleto fu un prodigio di zelo pastorale, che vinse diffidenze ed ostilità di prevenuti, questi a sé conciliando ed assimilando a quanti lo stimavano amavano e seguivano.
Il suo zelo, peraltro, fu fecondato anche da non poche sofferenze. La rivoluzione nel febbraio del 1831, imperversò in tutta 1’Umbria, dopo aver preso le mosse dai ducati di Parma e di Modena, lasciando il segno del suo passaggio a Bologna e perfino a Roma. A Spoleto trovò la strada spianata da frodi e tradimenti, che resero ancor più pesante la difficile situazione sul cuore dell’Arcivescovo. Questi segui la vicenda, rivivendone intimamente il dramma. Con dolore acconsentì alla difesa, ma non allo spargimento di sangue fraterno. E quando la calma fu ristabilita, elargì a tutti, anche a chi non lo meritava, il suo paterno perdono.
Dopo Spoleto l’attendeva un’altra non facile diocesi. Il vecchio card. Giacomo Giustiniani non aveva potuto far altro che dimettersi dalla guida della diocesi di Imola. E Gregorio XVI nulla di meglio intravide che trasferire ad essa lo zelante ed affermato vescovo di Spoleto: era il 22 dicembre 1832.
Il compito, difficile oltre ogni ragionevole sospetto, non sgomentò il Mastai, il quale, della sua nuova diocesi, fece il teatro della sua fede invitta, della sua carità senza limiti, del suo instancabile zelo. Ad Imola, infatti, si confermò uomo di profonda preghiera, predicatore facondo e suasivo, col cuore aperto a tutti, di ogni ordine e ceto; ricercatore indefesso del bene soprannaturale, ma anche materiale, dei suoi diocesani; difensore strenuo della giustizia contro ogni intemperanza e sopruso; promotore d’opportune forme d’educazione giovanile; spiritualmente e materialmente vicino ai monasteri di vita contemplativa, alla cui importanza ed alle cui esigenze sarà anche in seguito sensibilissimo; infiammato per la devozione al Sacro Cuore di Gesù e alla Madonna; tutto premure, se pur fermo sui principi, per i suoi preti ed il suo seminario.
Aveva appena 48 anni, quando, il 10 dicembre 1840, gli fu conferito 1’onore della sacra porpora.

3 - Papa

Pur rifuggendo dagli onori per indole e per decisione, si trovò presto sotto il loro peso, tanto più grave quanto più alto fosse l’onore stesso.
Il 1 giugno 1846 morì Gregorio XVI; due settimane dopo, il 14, cinquantadue cardinali si riunirono in conclave per eleggerne il successore. Sulla sera del 16, il card. Giovanni Maria Mastai Ferretti era già papa con il nome di Pio IX. Rimarrà sul soglio di Pietro per 32 anni, dando vita al più lungo pontificato della storia.
Non è stato, e non è facile, per l’incrocio di circostanze varie e segnatamente per la presenza di passioni politiche, darne un giudizio univoco. Qualcuno definì Pio IX una "figura complessa", c’è perfino chi lo giudica mediocre e non adatto all’altissimo compito, gli uni e gli altri dando prova di non poca superficialità e di scarsa informazione. Come ieri, così anche oggi la passione e l’emotività sono spesso una griglia deformante nei riguardi della sua figura e del suo operato. Il pontificato di Pio IX fu indubbiamente difficile, tra i più difficili in tutto l’arco della storia ecclesiastica; il santo Pontefice lo visse tutto raccolto nella sua autocoscienza di Vicario di Cristo, che non gli consenti mai né transazioni né compromessi, pagando di persona la sua coerenza.
Sta qui, in gran parte, la spiegazione delle difficoltà da lui incontrate e delle obiezioni che gli vennero mosse. Al di sopra delle une e delle altre, giganteggia il suo animo di prete, di pastore e di padre.
Il 16 luglio 1846, dimostrando per 1’ennesima volta il sentire cristiano che l’animava, promulgò l’amnistia per tutt’i detenuti politici. Di qualche mese dopo è la sua prima enciclica: la Qui pluribus, del 9 novembre, un documento impressionante per la sua chiarezza, il suo realismo, la sua ampia visione degli incombenti pericoli e dei necessari rimedi. "In nuce" c’era già tutto Pio IX, almeno sul piano magisteriale. I punti essenziali del Vaticano I vi erano anticipati; gli errori di fondo eran nettamente percepiti e condannati; la delimitazione tra verità ed errore in materia di fede e della sua traduzione morale era decisamente segnata ed altrettanto quella tra Chiesa e società segrete.
Che non si trattasse di miopia culturale e di spirito reazionario è comprovato dal fatto che, poco dopo, il 13 marzo 1847, concesse per decreto ampia e sorprendente liberta di stampa.
1l 5 ottobre fu la volta della Guardia civica, nel quadro di altre aperture liberali Pio IX si rivelava in tal modo un sovrano saggio ed aperto, capace d’indiscussa fedeltà alla tradizione, ma non per questo meschinamente ottuso dinanzi alla cultura emergente. Il suo acuto discernimento, pur intuendone i pericoli, ne colse anche i pregi. Ed a tale discernimento restano legati i suoi primi atti di governo, i più difficili proprio perché i primi: I’istituzione del Municipio, del Consiglio comunale e della Consulta di Stato, rappresentativa di tutte le province, ed infine dello Statuto. Ben nota e fin da allora non ben capita fu l’allocuzione del 10 febbraio 1848, che conteneva l’implorazione: "Benedite, Gran Dio, I’Italia e conservatele sempre questo dono di tutti preziosissimo, la Fede".
Un’altra allocuzione, di portata storica, fu quella del 29 aprile. Confermando in essa il suo "paterno amore" per tutt’i popoli e non per quello italiano soltanto, Pio IX si alienò l’animo dei più accaniti liberali. A poco valse la sua convinta difesa dell’indipendenza italiana in un dispaccio all’imperatore d’Austria; per non pochi, più facinorosi e prevenuti che patrioti, egli fu semplicemente un traditore. Ed anche in seguito perfino nei libri di scuola, non gli han perdonato un tradimento che non c’era mai stato.
Il 15 novembre fu ucciso il capo del governo, Pellegrino Rossi, nove giorni dopo lo stesso Pio IX si vide costretto a lasciare la sua Roma, rifugiandosi a Gaeta.
Le cose in effetti si facevano ogni giorno più difficili. Il 9 febbraio 1949 venne proclamata la Repubblica Romana. L’augusto Esule prima si trasferì a Portici (4 settembre), quindi rientrò nell’Urbe e si stabili in Vaticano (12 aprile 1850), dando da allora in poi un’ancor più definita impronta pastorale al suo pontificato. Tutte le genti e tutti i non prevenuti sentivano d’aver in Lui un vero padre, così come, per i suoi sudditi, fu un sovrano amabilissimo.
Subito riordinò il Consiglio di Stato (12 settembre 1850), istituì la Consulta per le Finanze, elargì una nuova e più ampia amnistia. Il giorno 20 ristabilì la regolare gerarchia cattolica in Inghilterra; altrettanto fece, tre anni dopo, per l’Olanda.
L’11 marzo l853 condannò le dottrine gallicane ed il 28 giugno fondò il Seminario Pio. Anche le Catacombe, nel maggio del 1854, furon oggetto della sua generosa sollecitudine; nello stesso tempo istituì la Commissione d’Archeologia Cristiana e ne nominò il presidente nella persona del grande Giovanni Battista de’ Rossi. E’ poi doveroso aggiungere che il 1854 sarebbe rimasto scolpito a caratteri d’oro nella storia personale di Pio IX ed in quella della Chiesa cattolica per la solenne proclamazione dogmatica dell’Immacolato Concepimento di Maria (8 dicembre); in questo dogma, oltre che in quello sull’infallibilità papale (18 luglio 1870), il magistero di papa Mastai raggiunse il suo vertice. E non basta, il 1854 è degno di nota anche per la ricostruita Basilica di San Paolo, distrutta dall’incendio del 15 luglio 1823.
Le iniziative magisteriali, contestualmente a quelle sociali e politiche, si succedevano con ritmo incalzante, confermando insieme la prudenza e l’apertura del grande Pio. Il 3 aprile 1856 egli approvò il piano della strada ferrata nello Stato pontificio la cui prima attuazione (tratta Roma-Civitavecchia) venne inaugurata il 24 aprile 1859. Il Papa visitò i suoi territori dal 4 maggio al 5 settembre 1857, ovunque accolto da popolazioni in tripudio. Tra il 1855 ed il 1866 inviò missionari tra gli Esquimesi ed i Lapponi del Polo nord, in India, in Birmania, in Cina ed in Giappone. Intensificò le relazioni diplomatiche in Europa e nel mondo. Continuò la sua carità, ora alla luce del sole, ora nascosta, quotidiana, minuta ma significativa. Giorno dopo giorno, era al suo posto, con il cuore e con le mani aperte per chiunque, persone ed opere, avesse avuto bisogno di Lui.
L’orizzonte però s’ottenebrava. I moti risorgimentali, le annessioni piemontesi che smantellavano lo Stato pontificio, l’usurpazione delle Legazioni con discutibili plebisciti e vessazioni anche più sottili perché giuridicamente camuffate da alta e responsabile considerazione per la Chiesa e per la Sede Apostolica, obbligarono Pio IX a porsi sulla difensiva a tutela della libertà e dei diritti inalienabili dell’una e dell’altra. Mantenne sempre, peraltro, il suo sguardo attento al bene delle anime come "suprema legge" del suo e d’ogni altro ministero ecclesiastico. Nel 1862 eresse un dicastero speciale per gli affari con i cristiani di rito orientale e l'8 dicembre 1864 emanò una delle sue più famose encicliche, la Quanta cura seguita dal non meno famoso Syllabus, per condannare l'insieme degli errori moderni.
Le sempre crescenti difficoltà politiche avevan l’effetto d’impegnarlo ancora di più, se possibile, nella cura pastorale. Il 29 giugno 1867 celebrò con straordinaria solennità il XVIII centenario del martirio di Pietro e Paolo. Il 2 maggio 1868 approvò la "Società della Gioventù Cattolica Italiana", fondata il 29 giugno 1867 da M. Fani e G. Acquaderni. L'11 aprile 1869, ricorrendo il suo giubileo sacerdotale, ebbe dal mondo intero uno straordinario omaggio di gratitudine e d’attaccamento alla sua venerata persona.
C’è, tra i suoi fasti, un avvenimento d’eccezione: il Concilio Ecumenico Vaticano I, ch’Egli aprì il 7 dicembre 1869 e chiuse il 18 luglio 1870.
Con la caduta di Roma (20 settembre 1870) e la perdita dello Stato, amareggiato ma non domo Pio IX si chiuse in volontaria prigionia in Vaticano. Resistette alla Legge per le Guarentigie, celebrò il giubileo del suo pontificato (23 agosto 1871), approvò 1’"Opera dei Congressi" (1874), consacrò la Chiesa al Sacro Cuore di Gesù (16 giugno 1875), disciplinò la partecipazione dei cattolici italiani alla vita politica (29 gennaio 1877), restaurò la regolare gerarchia in Scozia (29 gennaio 1878).
Già minato nella sua salute, tenne il suo ultimo discorso ai parroci dell’Urbe il 2 febbraio 1878. Pochi giorni dopo, esattamente il 7, a 85 anni, spirò piamente.

L’Uomo

Dire dunque di Lui che fu eccezionale, è dire una verità sulla quale soltanto il settarismo e la prevenzione osano d’eccepire. Occorre però precisare meglio sia la portata della sua eccezionalità, sia i livelli specifici sui quali essa s’impone alla serena ed obiettiva considerazione.
Non credo che tale eccezionalità sia da qualcuno intesa nel senso d’una proiezione del personaggio oltre i limiti della documentazione storica e della sua stessa condizione umana; e neanche nel senso d’una sua eccellenza in tutt’i settori dell’umano. Era anch’Egli un uomo: con doti eccelse, si, ma anche con il loro limite il quale, non riducendone le dimensioni, lo caratterizza come quel "singolo" uomo. Doti e limite son così ampiamente documentati, che di Lui si conosce ormai tutto, e solo secondo questa documentazione bisogna parlarne. Non si può dire, p. es., che fu un politico nato, solo perché lo si è detto eccezionale; ma non si dirà nemmeno che fu un politico fallito, solo perché dovette assistere al frantumarsi del suo Stato. Sarà peraltro opportuno che anche il giudizio sul suo operato politico, probabilmente al di sotto di tutti gli altri suoi meriti, venga vagliato al filtro documentale, non a quello ideologico o a quello emozionale.
Sbaglierebbe però, ed alcuni di fatto hanno sbagliato, chi prendesse spunto dal ricordato limite per un giudizio genericamente riduttivo su Pio IX, o peggio per l’attenuazione se non anche la negazione d’ogni valore al suo governo ed alla sua politica. I meriti di Lui restano nella loro intatta realtà, anche se dai documenti risultano più accentuati in un campo e meno in altri. Alla critica storica spetta di far luce a tale riguardo.
Mi pare di poter sostenere che l’eccezionalità di Pio IX, grazie appunto alla critica storica, è oggi un giudizio scientificamente fondato, riguardante tanto le qualità umane di Lui quanto le sue virtù. Delle une parlerò in questo capitolo; alle altre andrà la mia attenzione strada facendo.

I - L "imperterrita serenità"

Parlando di documentazione, non bisogna ignorare quella iconografica, là ovviamente dove esista. E nel nostro caso esiste; addirittura in abbondanza. Di Pio IX si conserva anzi il dagherrotipo della prima fotografia d’un papa.
L’impressione che se ne ricava è quella d’una persona di bell’aspetto anche in età avanzata, dai tratti regolari, lo sguardo sereno, il volto non privo di forza accattivante ed il portamento in pari tempo aristocratico e semplice. Dall’insieme si sprigiona una nota di maestosità, che tuttavia non incute timore. La documentazione iconografica conferma così quella scritta e testimoniale.
Pio IX aveva in effetti un’innata dolcezza ed una singolare delicatezza d’animo, che si notavano in ogni suo gesto e movimento. Armonizzava insieme dolcezza e delicatezza, qualora ciò fosse stato necessario, con una virile energia ed una forza irriducibile.
Bella era la sua voce e robusta. Cantasse o parlasse, affascinava la gente. Un testimone lo ricorda proprio per questo, senza esclusione, beninteso, d’altri motivi: "Non ho mai udito un oratore che avesse così calda e squillante la voce, così sovrani il gesto e lo sguardo". I1 fascino della sua voce e di tutta la sua persona non colpiva soltanto i suoi amici ed estimatori, suscitandone o confermandone l’entusiasmo; ma incideva anche sul sospettoso e talvolta astioso atteggiamento dei suoi dichiarati avversari.
L’indole sua, il temperamento, il carattere depongono a favore di quella "imperterrita serenità" che Giuseppe Toniolo, del quale pure è oggi in corso la causa di beatificazione, rilevò nel papa marchigiano poco prima del suo pio decesso. In queste due parole, il cui accostamento dà ragione dell’animo forte e soave poco sopra affermato, sta forse la più obiettiva raffigurazione di Giovanni Maria Mastai Ferretti sul piano naturale. Su tale raffigurazione concorda in genere la critica, eccezion fatta per pochi ed irrilevanti giudizi o diversi o contrari: anche il sole ha le sue ombre a conferma della sua luce. Depone infatti per la sua fortezza quell’aggettivo "imperterrita" in cui è pienamente riconoscibile il Pio IX che, senza mezzi termini, denuncia i soprusi subiti, non si piega all’ingiustizia, condanna gli errori, difende la Fede, la Chiesa, la Sede Apostolica. I1 sostantivo "serenità" lo riproduce qual effettivamente era: non "una canna agitata dal vento" (Mt 11,8), non 1’uomo sopraffatto da avvenimenti incontrollabili o, almeno in apparenza, più grandi di Lui, non il fallito che tira i remi in barca e si lascia andare rassegnato alla deriva, ma l’uomo che, forte della propria autocoscienza, innalza una diga di coerenza e di soprannaturale fiducia dinanzi al dilagare delle cose avverse.
E di cose avverse fu lastricato il suo lunghissimo ministero papale. I1 predecessore Gregorio XVI, a suo modo anch’egli grande, gli aveva lasciato un’eredità pesante. Intransigente, autoritario ed anche ostinato, Gregorio aveva combattuto invano sia la vaga religiosità del romanticismo, sia le rivendicazioni antidogmatiche del naturalismo razionalistico, sia il subdolo (quando non era burbanzosamente scoperto) accerchiamento delle sette segrete. La massoneria imperversava; nelle sue avide mani era ormai ogni potere; la presenza d’una Chiesa dotata non solo del potere spirituale, ma anche di quello temporale, era per essa non più sopportabile. E così, sul pontificato di Gregorio XVI soffiarono venti fortissimi, che ne provocarono reazioni decisamente autoritarie. Non si trattava di qualche leggero e piacevole zefiro, o di qualche movimento di fronda, erano venti che travolgevano: discordie dinastiche; difficoltà diplomatiche; filosofie in antitesi col pensiero cattolico, teorie teologiche e filosofico-politiche, come il gallicanesimo ed il febronianismo, in contrasto con l’ecclesiologia cattolica e con il diritto pubblico ecclesiastico, contro il primato petrino e contro il suo universale magistero, protestanti e cattolici in lotta, specialmente in Svizzera; I’America latina dilaniata dalla rivoluzione; le idee eversive di Hermes, Guenther e del semirazionalismo in genere. Si, questi erano i venti, questo l’asse ereditario che piombò d’improvviso sulle spalle del card. Giovanni Maria Mastai Ferretti e che avrebbe fatto impallidire chiunque altro, non lui: "Ecce indignus servus tuus, fiat voluntas tua", esclamò con le lacrime agli occhi nel divenire Pio IX, arieggiando Lc 1,38 in cui Maria assicura a Dio la sua totale disponibilità: "Sono la tua serva; fai di me quanto hai deciso di fare".
Il cambiamento di rotta, rispetto a quella di Gregorio XVI, non fu un calcolo. Fu l’effetto della sua innata affabilità, della sua dolcezza, della sua mitezza, della sua inclinazione alla comprensione e alla clemenza. La gente lo capì e ne fece il più celebrato personaggio dell’epoca, l’uomo più popolare del suo tempo.
La clemenza non era acquiescenza. Né poteva risolversi in cedimento. Dolce e mite, comprensivo e clemente, Pio IX fronteggiò sempre l’eversione rivoluzionaria e non si dette mai per vinto dinanzi alle sue prepotenze. Fu proprio dinanzi ad esse che emerse la "imperterrita serenità" dell’uomo superiore: concesse senza scendere a patti compromissori, resistette senza violentare l’innata mitezza. L’amnistia generale, da Lui decretata nel 1849, e gli altri provvedimenti sociali che la contornarono e le fecero seguito son la riprova della "soave fortezza" di questo troppo spesso non capito e talvolta bistrattato Pontefice.
E’ facile scorgere, come concause d’un siffatto atteggiamento, un’intelligenza acuta e penetrante ed una volontà pronta e conseguente. Intelligenza e volontà che, in Lui, si sintetizzano con l’unità e l’armonia della sua "imperterrita serenità". Vedeva la sostanza delle cose, le controllava agevolmente, spesso le antivedeva e decideva: esattamente come avviene in ogni persona di chiaroveggente ingegno e di risoluta determinazione.
La grandezza non comune di Pio IX maturò in codesta sintesi. Riconobbe i tempi e ne lesse i segni. Capì di dover accompagnare e pilotare il naviglio di Pietro in una turbolenta fase di transizione tra la cultura imperante fin alla rivoluzione francese e quella dei tempi nuovi, non ancora compiutamente evolutisi. Il trapasso non era per nessuno neanche per Pio IX, di facile gestione, non privo essendo d’incognite, di scogli non facilmente superabili e dei correlativi pericoli. Si può perfino convenire, con il senno del poi, che avrebbe potuto esser gestito meglio. Pio IX lo gestì da Pio IX: con una fedeltà che Egli, lungimirante come non pochi, antepose alla lungimiranza; con la difensiva più che con il pionierismo, combattendo a spada tratta l’errore, dovunque affiorasse, per assicurare alla Fede e alla Chiesa un presente ed un domani conformi ai fasti del passato.

2 - Sentimenti ed affetti

Ogni epistolario, così come ogni diario, è sempre una finestra aperta sulle più recondite pieghe dell’animo e della vita intima di chi scrive. Pio IX non fa eccezione. In ogni sua missiva si scopre qualcosa di Lui. Ed altrettanto in quei fogli, numerosissimi e vari, che, sottratti alla dispersione o al cestino, hanno permesso alla critica la ricostruzione storica di vicende giornaliere e della temperie nella quale esse si svilupparono. Si sono così conosciuti particolari interessantissimi anche se non roboanti, relativamente a ciò ch’Egli senti pensò e fece, improvvise stimolazioni sui suoi stati d’animo, vibrazioni intensissime della sua sensibilità e personalità, perfino qualche zona d’ombra, appena percepibile, della sua umana natura.
Non poche delle dette lettere e degli scritti sopra accennati permettono una concreta e realistica visione di particolari momenti che segnarono la vita di Pio IX e quasi una partecipazione ai medesimi; una maggiore e sempre più obiettiva conoscenza della sua famiglia e dei rapporti con essa mantenuti; le ripercussioni che ebbe sul suo animo la morte del padre, della madre e dei fratelli; le sollecitudini ed i gestì di non discutibile carità (mai del resto scantonati nel privilegio e nel nepotismo), da Lui compiuti in più d’una occasione a favore di fratelli parenti ed amici.
Da tutto l’insieme emerge un’ulteriore pennellata per una definizione più puntuale della sua immagine, della sua indole, del suo mondo interiore, insomma dei suoi sentimenti ed affetti.
Quando non eran in gioco i diritti di Dio, la libertà della Chiesa e della Sede Apostolica, il bene delle anime e la giustizia, prevaleva in Pio IX la tendenza a temperare ogni spigolosità, a scusare le altrui miserie, a presumere una bontà di fondo, almeno intenzionale, anche in chi lo contrastasse. Si capisce molto bene, tuttavia, che quel suo fare conciliante né indicava, di per sé, una natura imperturbabile, né era del tutto alieno da una forte disciplina interiore. Pio IX aveva, infatti, conosciuto ben presto i suoi difetti e su di essi esercitò sempre un controllo che qualcuno, mal interpretando le sue facezie, le battute spiritose e la capacità di rilevare con immediatezza i punti deboli delle persone e delle cose, stenta ancor oggi a riconoscergli. Non era certo colpa sua se aveva occhi per vedere ed orecchi per intendere. Quando s’accorgeva della piega che le circostanze prendevano, non esitava a manifestare il timore che "sotto ci sia qualche giraccio", che responsabili ne fossero i soliti giochi di potere, che le beghe l’avevano profondamente "turbato", anche se si ricomponeva presto nella sua "imperterrita serenità". Non s’equivochi tra questo `imperterrita" e 1’"imperturbabile" poco prima accennato: questo è dello stato d’animo che non s’increspa mai, quello della serenità raggiunta con l’autocontrollo e la costante disciplina.
L’innata dolcezza non neutralizzava in Lui la vivacità temperamentale, gli capitava perfino, in qualche rara occasione, di rispondere alle sollecitazioni indiscrete con uno scatto improvviso; qualcuno parla d’irascibilità e di collera. Qualche altro perfino di sarcasmo. Ma l’analisi della documentazione riconduce quei rari fenomeni alle loro effettive dimensioni. Pio IX si controllava. Riportava tutto ciò che sapesse di screzio "al petto dell’amicizia" e l’annullava con la sua carità.
D’altra parte, quella sua immediatezza che gli rendeva rapida l’intuizione e la percezione, e ne accelerava di conseguenza l’espressione, non riguardava i casi gravi; non di rado il tutto non era che una battuta di spirito dinanzi alle piccole cose d’ogni giorno.
Direi allora: immediato si, ma non impulsivo. Ed ancor meno irriflessivo. Grazie infatti alla riflessione, si facevano strada in Lui la chiarezza, la comprensione, la carità. Metteva a fuoco le situazioni e le altrui posizioni giudicandole secondo la loro realtà, cercava di capirne le motivazioni anche se non tutte poteva scusarle, su tutte però stendeva il manto della carità e là dove s’arrestava la sua capacità d’intervento, tutto rimetteva nelle mani di Dio.
La carità non era per Lui un pretesto per tacere, al contrario il suo parlar chiaro era vera carità, come quando scriveva al nipote Luigi: "Siccome avete mantenuta la relazione mi pare indubitato il dovere che vi resta d’adempiere. Me ne furono fatte premure nei febbraio ed io ve ne scrivo in luglio. Vedete che scrivo veramente a caso pensato".
A parte questi doverosi puntini sulle "i", fu sempre, con i suoi interlocutori parenti o no, d’una dolcezza squisita, anche se ferma e mai goffa. Parlavo chiaro, quando era il momento di parlar chiaro: "Protesto di non farne più parola, né di ritornare su questo argomento con chi che sia". Ma sulla chiarezza prevaleva sempre il nobile sentire e soprattutto la bontà del cuore: "Il desiderio di tornare a vedervi è grande", "Divertitevi nel vostro gabinetto, ricordatevi di me qualche volta e crediatemi (sic, ed è spesso ricorrente) costantemente..."; "Voglio credere che i vostri cari figli stiano tutti bene, e ardisco pregarvi di darci un bacio a mio nome". Piccoli ma significativi attestati di quanto vivo fosse il suo sentimento di premuroso affetto per chiunque, a qualunque titolo, fosse entrato in contatto con Lui.
Mantenne con i familiari e i parenti un rapporto improntato al rispetto non formale dei legami di sangue, ossia alla sincerità e verità dell’amore. "Vi benedico e vi abbraccio", era la conclusione più ricorrente delle sue lettere. Ma proprio nel culto di tale verità, non volle mai immischiarsi nelle grandi manovre matrimoniali sociali e finanziarie della sua nobile famiglia. Qualche consiglio, qualche modesto e raro aiuto finanziario tratto dal suo peculio personale ed in casi di provata impellente necessità ("In questo caso ho già stabilito l’aiuto da darti"), o un defilarsi garbato ma fermo: "Il Papa ha sempre dichiarato che niuna parte vuol avere in questo matrimonio"; "Mi dispiace di non poter secondare i vostri desideri; per cui troverete maniera di rassegnarvi". Riemergeva insomma, anche dalle sue relazioni con familiari e parenti, quell’autocoscienza papale, che gli ricordava i "figli" avuti dalla Divina Provvidenza e per i quali, prima che per altri, fossero anche del suo sangue, si dichiarava disposto a dare tutto quanto possedeva. Del resto, come "potrebbe somministrare denari" chi "vive di soccorsi"?
Non permetteva comunque che qualche suo giustificato rifiuto pregiudicasse l'armonia del rapporto: "Io non ho intenzione di irritarmi con chi che sia e solo desidero ardentemente la concordia e la pace in Famiglia". Aveva però una spina nel cuore e ne soffriva immensamente. Sua sorella Maria Isabella, sposa d’Isidoro Benigni e madre di Giovanni, s’era separata dal marito per incompatibilità di carattere. Era lei la spina: "Per le cose mie domestiche, niun motivo di doglianza...quello che mi affligge si è la causa ..di questa mia sorella". Un risvolto non esaltante, che peraltro dà, sul piano affettivo la misura d’un Uomo veramente superiore.

3 - Bonomia ed ilarità

Desidero insistere ancora sulla sfaccettatura d’una personalità da qualcuno "equivocata" in base ad alcuni del suoi tratti meno convenzionali.
Parlando d’un nobile e per giunta non dei nostri giorni, si è indotti ad immaginarlo tutto compreso del suo alto lignaggio e delle distanze che lo separano dalla gente comune. Trattandosi però del conte Giovanni Maria Mastai Ferretti, papa Pio IX, il ritratto da fare è esattamente l’opposto.
Un papa tra la gente oggi non fa più meraviglia; Giovanni Paolo II ci ha abituati ad una forse programmata rottura degli schemi burocratici ed anche se non si può pensare d’andar liberamente a stringere la mano del Pontefice, è spettacolo frequente quello del Pontefice che stringe la mano ai più vicini, ai lati che fiancheggiano il suo passaggio.
Lo schema, a dir il vero, era già stato infranto: Paolo VI, Giovanni XXIII, Pio XII lo fecero in diverse occasioni. Nessuno può evocare, senza commuoversi, la bianca figura del Pastor Angelicus imbrattata di sangue in mezzo alla popolazione di San Lorenzo, dove un bombardamento era appena cessato. Pio IX non conobbe limiti a questo immediato contatto con la sua gente. Ogni occasione era buona per abbandonare la carrozza ed intrattenersi bonariamente con i suoi Romani, o per cancellare il cerimoniale fastoso ed imponente dei tempi passati a tutto vantaggio della comunicazione in alto ed in basso. Quasi ogni giorno rinnovava questa comunicazione diretta e non aspettava d’esser in campagna o fuori porta, come il cerimoniale gl’imponeva, per scender di carrozza, camminare a piedi, fermarsi con i primi incontrati, interessarsi ai loro problemi, ascoltarne gli umori, lasciar loro una buona parola e non soltanto quella.
Di fatto si poteva incontrarlo al Pincio, al Corso o in Piazza del popolo, al centro o in periferia, nell’atto di rispondere ad un saluto, di colloquiare affabilmente, d’ascoltare con paterno interesse chiunque avesse avuto bisogno d’esporgli il suo caso. A distanza di pochi metri, il segretario distribuiva danaro ai poveri: una scena tanto frequente da esser considerata un copione.
Era tanta l’affabilità del Pontefice, tanta la sua semplicità e tanto l’interesse prestato alla consueta litania di suppliche e lagnanze, che la gente si sentiva invogliata a rivolgergliele. Questo atteggiamento era indubbiamente dettato da un animo aperto e buono, condiscendente e compassionevole, ma Lui, Pio IX, l’aveva anche temprato in tal modo fin da giovane, quando prestava la sua opera tra i ragazzi di Tata Giovanni, e più tardi, quando gli fu affidato il difficile complesso di San Michele, dove toccò con mano la sofferenza e la solitudine dei poveri.
Per essi non rifuggiva nemmeno da qualche gesto fuori le righe. Come quando entrò personalmente nel negozio d’un vinaio, acquistò un buon fiasco ad Orvieto e lo regalò ad un ragazzo piangente dinanzi ai vetri rotti del fiasco scivolatogli di mano. Altre volte, per evitare che i beneficiati si sentissero in obbligo di ringraziarlo, riusciva a far loro pervenire l’aiuto nel modo più anonimo, perfino calandolo da una finestra o introducendolo furtivamente da una porta.
A testimonianza del suo legame con la gente, è da tener presente anche il ragguardevole elenco di fondazioni ed istituzioni varie, volute per sollevare i poveri dalle necessità materiali e morali: dalla fame, dall’ignoranza, dalla solitudine, dalla malattia, dal bisogno. Segno anch’esse del "cuor ch’egli ebbe".
Richiamo infine l’attenzione su un aspetto tra i non meno rilevanti della personalità di Pio IX e nel quale affrettati o prevenuti critici han trovato materia per riserve ed accuse da suggerire all’"avvocato del diavolo". Tale aspetto trova la sua spiegazione nel quadro di quell’immediatezza che fu già rilevata e sottolineata. Alludo alla sua arguzia, alla sua ilarità, al suo umorismo. Ne nascevano battute anche pungenti, o salaci, che o sconcertavano l’interlocutore o lo mandavano in visibilio. Dicono che l’arguzia sia tra le caratteristiche dei marchigiani; certo è che Pio IX ne era abbondantemente dotato. E ne faceva uso non raro, specie se si trattava d’addolcire l’atmosfera un po’ troppo tesa, di sollevare l’ilarità altrui, di sdrammatizzare qualche momento difficile. In certi casi, basta una parola per troncare un discorso, sviare l’attenzione, suscitare una provvidenziale risata. Pio IX, a questo riguardo, era un vero maestro.
Nella sua vita abbondano gli aneddoti legati al suo umorismo. Non posso raccontarne molti; ne segnalo alcuni a solo titolo esemplificativo .
Sono noti, p. es., quelli che ebbero per protagonista un certo Mons. Casali, un buon uomo, ma non un pozzo di scienza né una mente acuta. Un giorno, mentre si parlava dinanzi a Pio IX di Papa Sisto V, il buon Casali se ne usci in quest’esclamazione: quelli si che eran veri papi ! Pio IX, nient’affatto offeso, replicò: se lo dice lui ! E quando Mons. Casali riferì al Pontefice d’aver ricevuto uno schiaffo dalla madre, Pio IX domandò: uno solo? Ve ne doveva dare almeno due, uno anche per conto mio!
Ad un benedettino che smaniava per la porpora rivelò: ho intenzione di far cardinale un benedettino. Si fermò per tenere in tensione il buon padre, poi continuò: il suo cognome incomincia con la P. Si dà il caso che con la P incominciasse quello dell’aspirante cardinale (Pescetelli), il quale però si senti andar il sangue in acqua, quando il Papa concluse: ma non è un italiano.
Ad un genitore che Gli chiedeva di sistemare il figlio di modesto ingegno, Pio IX dette la seguente assicurazione: ho trovato, ne faremo un impiegato della Reverenda Camera Apostolica!
Equivocando un giorno sul significato metaforico di "pettinare", mise le mani sui capelli d’una piccola accompagnata dalla mamma, vi nascose 2000 scudi e, con riferimento al padre che aveva ridotto la famiglia in miseria, invitò la bambina a farsi pettinare soltanto dalla mamma.
Aveva la bocca piena e masticava a quattro palmenti un avventore uscito da un’osteria per vedere Pio IX che passava, e gridarGli: "Santità, muoio di fame". E il Papa:"lo vedo, lo vedo!".
Un prete di Romagna, per il quale Pio IX aveva pagato di tasca propria un corso di Esercizi Spirituali in riparazione di sfuriate romagnole, al Papa che lo invitava a non commetterne mai più rispose: non dubiti, Padre Santo, ho imparato a mie spese. Ma il Papa corresse: vorrete dire a mie spese.
Durante un’udienza, Gli fu presentata una signora dal cui cappello svettavano altissime piume. Appena seppe che si chiamava Guerrieri, osservò: già, me n’ero accorto dal cimiero!
Un friggitore, sfrattato dal Municipio, fermò la carrozza di Pio IX e Lo pregò di poter continuare a friggere. Il Papa, avuta una penna ed un foglio di carta, emanò il più faceto rescritto di tutta la sua vita: frigga come vuole, frigga dove vuole, frigga quanto vuole.
A chi Gli faceva notare che il Concilio sarebbe costato ogni giorno un numero esorbitante di scudi, Pio IX rispose: non so se da questo Concilio il Papa uscirà fallibile o infallibile, so però che ne uscirà fallito!
Continuare? sarebbe piacevole, ma non aggiungerebbe più nulla alla definizione della sua fisionomia, ormai ben tratteggiata. "Ecco l’uomo", disse un giorno Pilato di Nostro Signor Gesù Cristo (Gv 19,5); "questo è 1’uomo", si può ora dire di Giovanni Maria Mastai Ferretti.

4 - Due questioni a parte

Alcuni storici e personalità pubbliche di Senigallia non esitarono a fare di Pio IX il giustiziere spietato ("sordo non pure ad ogni voce di giustizia, si anche ad ogni richiamo di pietà che gli veniva dal dolce luogo natio") del colonnello della Guardia civica Gerolamo Simoncelli. I fatti son tristemente noti. Due sentenze, l’una del 31dicembre 1851 e 1’altra del 21 febbraio 1852, con votazione quasi plebiscitaria fanno del Simoncelli il capo indiscusso d’una fazione operante a supporto della "Compagnia Infernale o degli Ammazzarelli". Per la carica da lui ricoperta, che ne faceva non tanto un uomo d’ordine quanto il responsabile dell’ordine pubblico, su di lui furon fatti ricadere, prima che su altri, i misfatti della "Compagnia Infernale" e per essi venne condannato a morte insieme con altri 12 imputati. Il Sovrano, cioè Pio IX, indubbiamente avrebbe potuto graziare il Simoncelli allo stesso modo che graziò, per le condizioni della sua famiglia, il Simonetti. Tentativi a tale scopo non mancarono, ed alcuni autorevolissimi; ce ne fu uno perfino della sorella di Pio IX, Teresa Mastai Giraldi. Le sentenze ebbero però attuazione e gl’imputati vennero messi a morte.
Bisogna, al riguardo, procedere con somma cautela. Non consta che la domanda di grazia sia mai stata avanzata dal Simoncelli in persona; a suo favore intervennero le sorelle, non lui. Il silenzio significò pertinacia, non pentimento; e la grazia si concede ai pentiti. Consta d’altra parte che Pio IX era ben disposto alla grazia, solo aspett


Autore: Diocesi di Senigallia


Fonte:    papapionono.it

 

Spunti bibliografici su Pio IX a cura di LibreriadelSanto.it

De Mattei Roberto, Pio IX, Cantagalli Edizioni, 2011 - 300 pagine
Negri Luigi, Pio IX. Attualità e profezia, Ares Edizioni, 2006 - 240 pagine
Romano Sergio, Libera Chiesa. Libero Stato? Il Vaticano e..., Longanesi, 2005 - 154 pagine
Kertzer David I., Prigioniero del Vaticano. Pio IX e lo..., Rizzoli, 2005 - 362 pagine
Valente Massimiliano, Diplomazia pontificia e Kulturkampf. La..., Studium Edizioni, 2004 - 284 pagine
Pio IX, Costituzione apostolica. «Ineffabilis Deus»....,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 27 pagine
Zizola Giancarlo, L'informazione in Vaticano. Da Pio IX a..., Pazzini Editore, 2002 - 168 pagine
Bouchard Giorgio, Pio IX. Un papa contro il Risorgimento, Claudiana, 2001 - 64 pagine
Cionchi Giuseppe, Il Pio IX nascosto, Shalom, 2000 - 256 pagine
Spagnesi Gianfranco, L'architettura a Roma al tempo di Pio IX..., Studium Edizioni, 2000 - 208 pagine
Del Rio Domenico, Anche questo succedeva ai tempi di Pio IX...., Monti, 2000 - 160 pagine
Del Rio Domenico, Anche questo succedeva ai tempi di Pio IX...., Monti, 2000 - 160 pagine
Masciarelli Michele G., Pio IX e l'Immacolata,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0 - 96 pagine
Gnocchi Alessandro, Palmaro Mario, Formidabili quei papi. Pio IX e Giovanni..., Ancora, 2000 - 112 pagine
De Mattei Roberto, Pio IX, Piemme, 2000 - 256 pagine
Altri suggerime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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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11-04-03

 






Pope Blessed Pius IXSep 072009 
Also known as
Giovanni Maria Mastai-Ferretti

Memorial
7 February


Profile

Son of Gerolamo Ferretti and Caterina Solazzi, local nobles, the family’s ninth child. Frail, intelligent and pious boy who suffered from epilepsy when young. Educated at the Piarist College, Volterra, Italy from 1802 to 1809. Studied in Rome from 1809 to 1810 due to political disturbances in the city. He returned in 1814 and asked for admission to the Papal Noble Guard, but was turned down due to his epilepsy. Studied theology at the Roman Seminary from 1814 to 1818, during which his epilepsy disappeared. Ordained on 10 April 1819 in Rome. Spiritual director of the orphan asylum of Tata Giovanni, Rome. Auditor of the apostolic delegation to Chile from 1823 to 1825. Canon of San Maria in Via Lata, Rome. Director of San Michele hospital in Rome. Chosen archbishop of Spoleto, Italy on 21 May 1827. Named assistant at the Pontifical Throne on 1 June 1827. Archbishop of Imola, Italy on 17 December 1832. Created cardinal on 23 December 1839 by Pope Gregory XVI. Chosen 255th pope in the conclave of 1846.

Last pope to hold temporal power, that is, to rule a secular state. His election raised the hopes of patriotic and liberal circles of Catholics. One of his first acts was an amnesty for all political prisoners. Defined the dogma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on 8 December 1854. Celebrated the First Vatican Council from 1869 to 1870, which was interrupted by the Franco-Prussian War. This council defined the dogma of papal infallibility. He supported several reforms in the Papal States, which included central Italy, and several outlying areas, such as Assisi, but lost the territory due to the unification of the Kingdom of Italy in 1870 and 1871. Created 123 cardinals. Gained a reputation for being a patriotic, and reforming Pope, and only Saint Peter the Apostle served longer.

Pius IX’s cause for beatification was one of the longest and most difficult in Church history. Begun under Pius X on 11 February 1907, re-launched by Benedict XV without much success, later by Pius XI, and then by Pius XII on 7 December 1954. The decree on the heroic exercise of theological and cardinal virtues was finally promulgated by the Congregation for the Causes of Saints on 6 July 1985, allowing his proclamation as Venerable. Among Pius IX’s most outstanding virtues were his unconditional love for the Church, his charity, and his high regard for the priesthood and for missionaries. The miracle attributed to him, verified by the Medical Commission on 15 January 1986, and proclaimed definitive in December 1999, was the inexplicable cure of a French nun.

Born
13 May 1792 in Senigallia, Italy as Giovanni Maria Mastai Ferretti


Papal Ascension
elected on 16 June 1846
installed on 21 June 1846


Died
7 February 1878 in Vatican City of natural causes
buried in the basilica of San Lorenzo fuori le mura, Rome, Italy


Venerated
6 July 1985 by Pope John Paul II (decree on heroic virtues)


Beatified
3 September 2000 by Pope John Paul II at Saint Peter’s Square, Rome, Italy


Canonized
if you have information relevant to the canonization of Blessed Pius, contact
   Comitato “Beatificazione Pio IX”
   Via Mastai, 14
   60019 Senigallia (AN), ITALY
      - or -
   Opera Pia Mastai Ferretti
   Via Cavallotti, 38
   60019 Senigallia (AN),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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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itional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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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s
Pope Pius IX: Ineffabilis Deus - The Immaculate Conception
Pope Pius IX: Optime Noscitis - On Episcopal Meetings, 5 November 1855
Pope Pius IX: Praedecessores Nostros - On Aid for Ireland, 25 March 1847
Pope Pius IX: Qui Pluribus - On Faith And Religion, 9 November 1846
Pope Pius IX: Ubi Primum - On The Immaculate Conception

Pope Pius IX: Nostis et Nobiscum - On The Church In The Pontifical States, 8 December 1849
Pope Pius IX: The Syllabus of Errors, 1864
Pope Pius IX: Ubi Primum - On Discipline for Religious, 17 June 1847
Exultavit Cor Nostrum: On the Effects of the Jubilee, 21 November 1851
Nemo Certe Ignorat: On Discipline for Clergy, 25 March 1852
Probe Noscitis Venerabiles: On the Discipline for Clergy, 17 May 1852
Inter Multiplices: Pleading for Unity of Spirit, 21 March 1853
Neminem Vestrum: On The Persecution Of Armenians, 2 February 1854
Optime Noscitis: On The Proposed Catholic University Of Ireland, 20 March 1854
Apostolicae Nostrae Caritatis: Urging Prayers For Peace, 1 August 1854
Singulari Quidem: On the Church in Austria, 17 March 1856
Cum Nuper: On Care for Clerics, 20 January 1858
Amantissimi Redemptoris: On Priests And The Care Of Souls, 3 May 1858
Cum Sancta Mater Ecclesia: Pleading for Public Prayer, 27 April 1859
Qui Nuper: On Pontifical States, 18 June 1859
Nullis Certe Verbis: On the Need for Civil Sovereignty, 19 January 1860
Amantissimus: On the Care of the Churches, 8 April 1862
Quanto Conficiamur Moerore: On Promotion of False Doctrines, 10 August 1863
Incredibili: On Persecution in New Granada, 17 September 1863
Maximae Quidem: On the Church in Bavaria, 18 August 1864
Quanta Cura: Condemning Current Errors, 8 December 1864
Syllabus of Errors, 8 December 1864
Meridionali Americae: On the Seminary for Native Clergy, 30 September 1865
Levate: On the Afflictions of the Church, 21 October 1867
Respicientes: Protesting the Taking of the Pontifical States, 1 November 1870
Ubi Nos: On Pontifical States, 15 May 1871
Beneficia Dei: On The Twenty-Fifth Anniversary Of His Pontificate, 4 June 1871
Saepe Venerabiles Fratres: On Thanksgiving For Twenty-Five Years Of Pontificate, 5 August 1871
Quae in Patriarchatu: On the Church in Chaldae, 16 November 1872
Quartus Supra: On the Church in Armenia, 6 January 1873
Etsi Multa: On the Church in Italy, Germany, and Switzerland, 21 November 1873
Vix Dum a Nobis: On the Church in Austria, 7 March 1874
Omnem Sollicitudinem: On The Greek-Ruthenian Rite, 13 May 1874
Gravibus Ecclesiae: Proclaiming a Jubilee for 1875, 24 December 1874
Quod Nunquam: On the Church in Prussia, 5 February 1875
Graves ac Diuturnae: On the Church in Switzerland, 23 March 1875


MLA Citation
“Pope Blessed Pius IX”. Saints.SQPN.com. 31 March 2012. Web. {today’s 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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