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이름을 남기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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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1동성당 [suyu1] 쪽지 캡슐

2006-02-05 ㅣ No.499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선교하셨던 신부님들이 많은 이 곳 삐메(교황청외방선교회)에서는 해마다 음력설이 되면 집 안 곳곳에 아시아의 정취가 물씬 풍겨지는 소품들로 화려한 장식을 하고 각자 자기가 선교했던 지역의 전통 복장을 차려 입은 채 중국음식을 먹는 성대한 새해맞이 파티를 벌인다.

은퇴하신 할아버지 신부님들도 오늘만큼은 왁자지껄 한껏 목소리를 높여가며 여지없이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선교지 무용담을 늘어놓느라 바쁘시고, 나같이 젊은 신부들은 열심히 듣는 척 ‘와아!’, 또는 ‘정말로요?’ 같은 추임새를 간간히 넣어가며 먹는 일에 열중한다.

올 해는 그 소란한 파티의 모습들 사이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며 써빙을 하는 한 신부가 눈에 들어온다. 역시 ‘치로’신부다. 치로는 파푸아 뉴기니에서 일하다가 잠깐 본국 휴가를 들어와서 현재 이 곳에서 머물고 있는 40대 중반의 선교사제다.

치로 신부는 우리의 설이나 추석처럼 전 가족들이 모이는 지난 성탄 때도 본부에서 근무하는 다른 신부들은 모두 집에 보내고 정작 자신은 휴가 중인데도 불구하고 성탄 내내 본부를 지키는 일을 맡았었다. 비단 그때뿐 아니라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치로는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언제나 나를 감동시킨다.

잠시 앉아 있을 새도 없이 접시를 치우랴, 포도주를 나르랴 정신없는 치로 신부에게 나와 다비데 신부가 다가가서 교대하자며 말을 건넸을 때 그에 대한 치로의 답변이 또 한 번 나를 감동시켰다.

“치로, 이제부터 우리가 할 테니까 너는 좀 앉아서 쉬고 먹고 그래. 정말 너는 신부가 어떤 모습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표양’ 그 자체야.”

“뭐? 하하하. 과대평가하지 말아줘. 나는 좋은 표양이 되고 싶은 맘도 없고 또 좋은 표양도 아니야. 난 그저 내가 좋아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라고.”

천성을 그렇게 타고 태어났는지 아니면 그 동안 공을 들여 살아온 모습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치로는 정말 남을 위해 무엇인가 작은 정성을 봉헌할 때 최고로 행복해 하는 것 같다.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로부터 자유롭게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묵묵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의 무엇을 두려워할까? 더군다나 그 일이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이라면 무엇이 그의 삶에 이미 충만한 행복을 방해할 수 있을까?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에 속지 말자. 가죽을 남기는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가죽을 벗겨내고 그 위에 자리 깔고 앉아있는 사람들이며 남겨진 가죽은 죽은 호랑이와는 무관하다. 이름 역시 스스로 욕심을 내어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존재와 함께 사라지지 않고 남겨진 이름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타인들의 헛된 주문일 뿐이다.

헛되이 이름을 남기려 삶을 허비하거나 인기를 얻으려 스스로를 희생시키면서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고 하느님 나라가 오기만을 빌며 자신의 온 삶을 봉헌하는 일만 남았다. 집착이 없으면 평화롭고 세상에 대하여 두려울 것이 없다.

“여러분은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야고4,2) / 최강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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