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동성당 게시판

교회 음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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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venivediveci] 쪽지 캡슐

2000-01-25 ㅣ No.1641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한계를 지어놓습니다. 그중에 오늘날 가장 표면화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교회 내에서의 음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아래 게시된 글들을 보고 저의 작은 생각들을 올립니다.

 

 

나는 청년성가대 아나빔 단원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전통적인 전례곡이나 이제껏 미사에 쓰여왔던 곡들을 덜 좋아한다. 그렇다. 싫어하기 보다 덜 좋아한다는 말이 더 맞을 듯 하다.그런데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편견이 있다. 그것은 음악의 표현방법 내지 형식이 그 음악의 거룩함이나 경건함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어떤 노래가 교회 내에서 불려질 수 있는 ’성가’인가?

 

 

우리는 클래식의 형식을 지닌 음악을 대부분 무언가 경건하고 덜 세속적인 듯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음악이 지닌 메시지이며 영성이다. 아름다운(?) 현악기들로만 이루어진 어떤 곡이 그 메시지를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담고 있다면 당연히 그것은 성가가 될 수없다. 그런 곡이 교회 내에서 불려질 수 없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성서는 말한다. 하느님은 어떤 악기는 성스럽고 어떤 악기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말씀하신 적이 결코 없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모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 옛날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수금은 오늘날의 기타나 건반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른 분이 아닌 바로 그분!께 찬양드리고 싶다는 소망이며 표현이다.

 

누군가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교회의 전통을 무시할 수 있느냐고. 과연 전자기타나 긁어대는 그런 음악이 어떻게 거룩한 음악이 될 수 있느냐고..

 

교회의 전통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이기는 것이 있다. 아니 이긴다기 보다 교회 전통의 존재이유는 바로 그분 때문이다. 바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앞에 교회 전통은 무의미하다. 예수님의 행적들은 당대 교회의 전통을 뒤집은 혁명이었고 모든 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하느님을 망령케 한자라 명했을지언정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신 메시아이셨다.  

일렉트릭 기타가 거룩하지 못한 악기이고 오르간은 거룩한 악기라면,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창녀 마리아의 눈물은 더러운 눈물이고 대사제들의 보여주기식 눈물은 아름다운 눈물이라는 말인가.

 

우리는 누구의 제자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아닌가.

예수님은 형식을 타파하셨고, 하느님을 무시한 모든 전통을 거부하셨다. 그분은 진보의 선두에 계셨다.

안식일을 자기네처럼 지키지 않는 예수님의 모습에 교회 지도자들은 분개했다. 자기네처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지 않고 창녀나 세리, 사마리아인과 어울리시는 그분에게 성서에 ’빠삭’했던 바리사이파인들은 비난을 던졌다. 그들이 지어놓은 하느님의 한계선이라는 것은 절대로 그런 사람과는 가까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너무도 하느님을 작게 생각했다.

예수님을 고발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교회를 거부하고 메시아를 믿지 않는 비신도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가장 교회 전통에 충실했던 대사제와 학자들로부터 선고를 받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교회 내 보수파가 급진세력의 우두머리를 잠잠하게 한 이 사건은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 보였던 당시 유대인들의 행위는 아집에 불과했다. 참생명을 알지 못한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기보단 전통을 섬겼고 생명을 추구하기 보단 종교를 추구했다.

 

나는 오늘날 교회가 음악에 대해 너무나 소홀하다는 것에 대해 분개한다. ’거룩함’을 요구하기 위해, 중세부터 전해져 오는 음악 형식만을 고수한 채, 그외의 음악은 배척해왔다는 것은 실로 단순한 생각이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조용함’이나 ’점잖음’과는 다른 말이다. 그런 음악을 듣고 부른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며 그렇지 않은 음악을 듣는다고 해서 거룩함을 잃는 것도 아니다.

거룩함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변화의 모습’이 아닐까.

 

 

사무엘하 6:5 다윗과 온 이스라엘 백성은 수금과 거문고를 뜯고 소구와 땡땡이와 바라를 치면서 마음껏 노래부르며 춤을 추었다.

 

시편 33:2 수금 타며 야훼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 뜯으며 노래하여라.

 

시편 57:8 수금 타며 노래 읊어 드리오리다. 내 영혼아, 잠을 깨어라. 비파야 거문고야 잠을 깨어라. 잠든 새벽을 깨우리라.

 

시편 150:3 나팔 소리 우렁차게 그를 찬미하여라. 거문고와 수금타며 찬미하여라.

 

 

우리의 교회 내에서 들리는 전통적인 찬양곡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예전만큼 움직이지 못한다. 그저 책 위에 쓰여있는 가사를 읽고 가락을 따르고 박자를 맞추고..

왜 길을 가다 듣는 대중가요의 가사는 그토록 애틋하고 마치 자신의 얘기인듯 마음을 흔드는데, 성가는 단지 지루하고 빨리 2절까지만 부르고 가고 싶은 그렇고 그런 노래로 전락한 것일까. 연인간의 사랑 노래에 감동받은 사람이 하느님을 부르는 노래에 감동을 못받고 있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 초등부 아이때부터 지겨우리만치 들어온 말인데.. 왜 우리는 그런 하느님을 부르는데 그만큼의 사랑을 못 느끼고 감동을 못받고 있을까.

 

우리는 성가는 이렇고 이런 노래다라는 도그마를 미리 정해놓고 그 틀에 하느님을 끼워맞추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느님의 테두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고 깊다. 성가 또는 찬양은 교회의 전통에 속한 것도 가톨릭적 무엇을 담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높여드리고 우리의 사랑을 노래하는 표현이다.

 

우리의 음악은 변해야 한다. 어쩔 수 없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진보의 최선두에 서 계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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