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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사도 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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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70

 

 

신약 사도 행전 해제

 

 

-정태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5 사도행전, 분도출판사, 1995

 

 

 

신약성서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는 루가의 두 저서 제3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연구는 예수의 삶과 인격과 가르침뿐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실생활에 적용하려 했던 초대 교회의 체험도 함께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더구나 루가의 저서는 문학적으로 풍부한 어휘와 신학적으로 깊고 폭넓은 사상을 내포하고 있어서 수세기를 두고 수많은 성서학자들과 일반 독자들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차지해 왔다.

  루가의 두 저서에 대한 개괄적인 해제는 이미 정양모 역주의『루가 복음서』(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 3) 편에 소개되었다. 여기서는 사도행전과 관련된 사항만을 뽑아 집중적으로 해설하고자 한다.

 

1. 필자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전하는 네 복음서들처럼 사도행전도 그 저자의 이름이 감추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편의상 루가라고 부르는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밝혀 주는 확실한 문헌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제3 복음서의 저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두 책의 서문들이 이를 증언하고 있을 뿐 아니라 두 책의 문체와 사상이 같기 때문이다. 한편 "루가에 의한 복음"이라는 제3 복음서의 제목은 이 책의 가장 오래된 필사본 보드머 파피루스XIV(P75 175∼225년)에 최초로 등장한다. 이즈음에 다른 복음서들에도 저자의 이름이 부여되었던 것 같다.

  전통적인 견해로는 이 저자가 "바오로의 협조자"(필레 1,24; 골로 4,14; 2디모 4,11)인 "의사 루가"(골로 4,14)라고 한다. 180년경 로마에서 작성된 무라또리오 경전 목록과 2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의 『반이단론』(3,1,1)이 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하였다. 최근에 이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하기 위해 "만일 12사도의 그룹에 끼지도 못한 평범한 이름의 루가가 제3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실제 저자가 아니었다면 초세기의 교부들이 어떻게 그토록 한결같이 그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것으로 대체하지 않고 보전하고 증언해 줄 수 있었겠는가?" 하는 그럴듯한 이론도 제기되었다(J. M. 크리이드). 그러나 4 복음서의 저자들 중에는 마태오나 요한처럼 12 사도들과 관련된 저자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루가 이외에도 마르코처럼 12 사도들과 무관한 이름의 소유자도 있다. 그리고 130년 빠삐아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증언되었던 마르코 복음의 저자를 베드로의 통역자요 바오로의 협력자로 보는 전통적 견해도 성서학계에서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정양모 역주 『마르코 복음서』7-8쪽). 따라서 루가나 마르코와 같은 평범한 인물이 초기 문헌들에 의해서 증언되는 현상 그 자체가 그들의 친저성(親著性)을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될 수는 없다.

  이상의 문헌적 고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겠다. 2세기에 신약성서 안에 산발적으로 제시된 빈약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복음서의 저자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상황에서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에게도 바오로계의 문헌을 근거로 "루가"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이후 신약성서의 기록들을 비판적인 눈으로 대하지 않았던 교부들에 의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같은 결론은 바오로 자신이 소개하는 바오로상과 사도행전에 소개된 바오로상이 판이하게 다른 점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율법에 대해서 철저하게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던 바오로가 사도행전에서는 나지르의 예식을 치르고 디모테오에게 할례를 베풀기도 한다(사도 16,3)

2) 연설가나 웅변가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2고린 10,10) 바오로에 대하여 루가는 광분하는 유대인들, 이방인들, 로마의 총독과 그리스 철학자들을 모두 설득시킬 수 있는 뛰어난 연설가로 묘사한다.

3) 바오로의 회심이 그의 서간에서는 내적 체험으로 간단하게 소개된 반면(갈라 1,15-16; 1고린 9,1; 15,8; 필립 3,12). 사도행전에서는 극적인 외부 사건으로 묘사된다(사도 9,1-19; 22,3-21; 26,9-18).

 

  사도행전과 루가 복음의 저자가, 바오로가 증언하는 의사 루가가 아니라면 과연 누구일까? 우리는 단지 그가 바오로의 협력자라기보다는 바오로 이후 시대 사람으로서, 사도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자기가 얻어낸 자료를 바탕으로 나름대로 서술하고자 애썼던 인물로 추정한다. 그리고 그가 팔레스티나 지리에 대해 어둡고 유대인들의 관습이나 풍물에 대해서도 착각하고 있는 점들로 미루어 이방계 그리스도인이라고만 확인할 뿐이다.

 

2. 독자

성서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도행전과 루가 복음의 저자가 마음에 둔 독자는 이방계 그리스도인 또는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였다고 인정한다. 이 견해의 근거로 우선 루가의 문학적 기법이 당대에 풍미하던 그리스 로마 문화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사도행전과 루가 복음의 서문에서 집필 대상과 동기를 밝히는 헌정사가 발견되는데, 이는 당대의 그리스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문학적 관습이었다. 이 헌정사에 나오는 후원자는데오필로("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 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이름은 3세기경부터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에 의해서 흔히 사용되었던 인명이다. 데오필로를 그리스도인 독자를 상징하는 가상적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 이름에 대한 상징적 해석은 3세기의 오리게네스 이후에나 발견되기 때문에 루가 복음의 서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데오필로가 실제의 인물이라고 보고 당대의 관습대로 그에게는 루가에게서 헌정받은 이 작품을 필경사들의 노고를 빌려 복사하고 판매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을 것이다. 루가 복음의 서문이 뜻하는 바로는 그의 신분이 아직 예비자이거나 갓 입교한 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루가 복음서』28쪽 각주 참조).

  사도행전과 루가 복음의 명시적인 독자가 데오필로라 할지라도 저자가 정작 염두에 둔 저자는데오필로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루가 복음 자체 안에서 이에 대한 증거를 풍부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요 사료인 마르코 복음과 가상적'예수 어록'(Q)에서 유대적 특징을 강하게 나타내는 부분들을 과감히 삭제하곤 하였다. 유대교의 정결예식과 신심에 관한 기록의 삭제, 정(淨)과 부정(不淨)에 관한 논쟁의 삭제(마르 7,1-23), 그리고 반명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율법적 요소들의 누락(마태 5,21-48) 등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때로는 팔레스티나의 전통이 루가의 편집을 통해서 그리스적 상황에 맞게 변형되기도 하고(마르 2,4에 대한 루가 5,19; 마태 7,24-27에 대한 루가 6,48-49).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이름들이 그리스식으로 바뀌어 소개된다. 곧 랍비와 랍보니가 '스승님' (에피스타테스: 루가 9,33 비교 마르 9,5)과 '주님'(퀴리오스: 루가 18,41 비교 마르 10,51)으로, 카나나이오스가 '열혈당원' (젤로테스: 루가 6,15; 사도 1,13 비교 마르 3,18)으로, 그리고 골고타가 '해골'(크라니온: 루가 23,33 비교 마르 15,22)로 고쳐진다.

  예수의 족보는 마태오 복음과는 달리 다윗과 아브라함에게서 그치지 않고 아담과 하느님에게까지 소급된다. 그가 인용하는 구약성서도 그리스어 역본인 칠십인역이다. 루가가 "유대"라는 이름을 팔레스티나 전체를 가리키는 광의로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루가 1,5; 4,44; 6,17; 7,17; 23,5; 사도 2,9; 10,37) 그가 팔레스티나 밖에 있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집필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루가 당대의 그리스-로마 문헌에 보면 유대를 이처럼 광의로도 해석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도행전과 루가 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사상인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하신 평화의 복음은 유대교의 울타리를 넘어 만민에게 전해진다"(사도 10,36 참조)는 구원의 보편주의가 루가의 집필 대상을 이방계 그리스도인들로 명백하게 규정해 준다.

 

3. 집필 장소, 연대 및 동기

1) 집필 장소

사도행전과 루가 복음의 집필 장소로 가이사리아. 데카폴리스, 안티오키아, 아카이아, 로마 등 여러 곳이 지적되지만, 한마디로 팔레스티나 밖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구체적인 장소를 신빙성있게 제시할 수 없다.

 

2) 집필 연대

집필 연대는 루가 복음의 경우 로마군의 예루살렘 침공을 비교적 분명하게 암시하는 둣한 기록으로 보아(루가 21,20-24) 70년 이후가 확실하다. 그리고 루가의 기록들이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저서(93년경)와 무관한 점은 사도행전과 더불어 루가 복음의 집필 연대를 최소한 90년대 초반 이전으로 앞당기도록 해준다. 루가 복음서의 출간 후 사도행전의 집필을 위해 저자에게 주어졌을 시간적 여유를 고려하면 루가 복음의 집필 연대는 80년 전후로 잡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사도행전의 경우 바오로의 순교 사실을 보고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70년 네로 황제(54∼68년)의 박해 이전으로 집필 연대를 앞당기는 학자도 있으나 바오로의 순교 기록의 유무로 사도행전의 집필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두 가지 논거를 제시하겠다. 첫째, 바오로의 로마 도착으로 사도행전이 끝나는 것은 "복음이 유다이즘의 중심 예루살렘에서 이방인들의 중심인 로마에까지 전파된다"는 루가의 신학적 구도에서 볼 때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둘째, 루가는 묵시문학의 저자와는 달리 로마 황제의 박해 앞에서 순교하는 것만을 최대의 미덕으로 삼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정치적 질서와 평화를 위협하는 위험한 종교가 아님을 역설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에 바오로의 순교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가가 비록 바오로의 순교에 대한 자료를 입수했다 하더라도 일단 복음이 로마에까지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이상 사도행전이 바오로의 전기가 아닐진대 바오로의 순교에 대하여 반드시 기록해야 할 의무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든가 건강이나 아니면 파피루스 두루마리 지면의 길이가 저자에게 더 이상의 기록을 용납치 않았기 때문 등, 어떤 이유에서든 사도행전의 끝부분이 알뜰하게 마무리가 되지 않은 채 끝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 자체가 사도행전의 중대한 문학적 결함으로까지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루가는 바오로의 로마 전도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신학적 구도를 충분히 작품에 반영시켰고 이로써 애초의 집필 목적이 완성된 셈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집필 연대를 70년 이전으로 보는 또 다른 논거는 사도행전의 저자가 묘사하는 교회가 교계제도와 성사제도가 확립된 "가톨릭주의"(Catholicism: 제도로서 정착된 교회)를 표방하고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소개된 교회는 분명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을 중심으로 제도적인 꼴을 갖추었고 세례, 안수, 성찬 등과 같은 원초적 성사제도를 지니고 있다. 다만 교회의 이 제도적인 모습이 루가의 신학적 전망 때문에 부각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루가는 하느님의 예정된 계획에 따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만민에게 복음을 힘차게 전하는 교회의 선교 활동을 강조하고자 부심하였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제도적인 모습이 성령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의 역동적인 모습에 의해 가리워진 셈이다. 실제로 본격적인 가톨릭주의는 2세기에 들어와서야 교회 안에 정착되었다. 이 사실을 감안할 때 루가가 보여 주는 교회의 모습은 오히려 초세기 말엽의 교회상을 충실히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사도행전의 집필 연대를 더 구체적으로 추정할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가 앞에서 루가 복음의 집필 연대를 70년 이후 80년 전ㆍ후반으로 잡은 만큼, 첫번째 책에 이어(사도 1,1) 데오필로에게 바치는 두번째 책은 80년에서 95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면 무난할 것이다. 하한 연대를 95년으로 잡은 이유는 앞에서 밝힌 대로 루가가 자신의 두 저서 안에 당대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문헌(93년)을 반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대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도미씨아누스 황제의 통치 시대(81∼96년)와 맞물려 있는데 사도행전과 루가 복음 곳곳에 이 박해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습을 그린 2,42-47과 4,32-37이다. 루가의 공동체 안에 박해로 인해 재산이 거덜난 가난한 신도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그들과 새로 입교해서 들어오는 이방인 신도들 사이에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자 그는 자신의 공동체를 진정한 친교의 공동체로 만들기 위하여 스승 예수의 가르침에 입각한 초대 교회의 이상적인 나눔의 공동체상을 제시한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해당 대목의 각주 참조).

 

3) 집필 동기

집필 동기는 저자의 편집 의도와 신학적 전망에 필연적으로 연결되겠지만, 여기서는 저자가 책을 펴내게 된 직접적인 집필 의도만을 밝히고자 한다. 루가는 자신의 집필 동기를 제3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헌정사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루가 복음의 헌정사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정양모 역주 『루가 복음서』1,1-4의 해설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헌정사에서 루가가 밝힌 집필 동기를 요약하면, 루가는 나자렛 예수의 목적 증인이었다가 말씀의 시종이 된 사람들의 대열, 소위 "복음의 제1 세대"와 자신을 구별하고 선임자들(마르코 복음과 Q의 저자들)의 모범을 따라 예수 사건을 다루되 "모든 일을 그 시초부터 정확하게" 순서대로 정리하여 기록했다고 보고한다. 이 표현은 루가가 자기 작품에 바친 세 가지 노력, 즉 온전성과 철저함과 정확성을 각각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루가는데오필로가 이미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나 교리를 기본적으로 들어 알고 있음을 전제하면서 그가 전해 들은 지식이 올바른 전승, 곧 신뢰할 수 있는 목격 증인들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두 권의 책을 쓴 것이다.

  첫번째 책에서 데오필로와 그외 다른 독자들에게 예수께 관한 모든 일을 순서대로 남김없이 보고한 루가는 이제 교회의 이야기를 전하는 두번째 책을 시작하면서 첫 권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한다. "데오필로님, 첫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일을 다루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분이 성령으로 뽑으신 사도들에게 명을 내리시고 승천하신 그 날까지의 일입니다"(사도 1,1-2). 그리고 승천하시기 직전의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히 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첫번째 책의 끝에 두번째 책의 처음을 연결시킨다. 아마도 루가 복음이 씌어진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지각있는 저자로서 루가는 이런 절차의 필요성을 당연히 느꼈으리라.

  앞에서 언급한 대로 루가의 집필 의도는 물론 데오필로 한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고 데오필로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모든 그리스도교 입문자들이나 아직 확고한 신앙을 갖지 못한 갓 입교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 방대한 양의 두 저서가 일 개인만을 위한 보고서일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4. 사료

다른 복음서들과의 대조 연구를 통하여 비교적 용이하게 편집과 사료의 요소들을 가려낼수 있는 루가 복음의 경우와는 달리, 사도행전에 있어서는 저자가 어디에서 사료를 수집했고, 그 사료가 어떤 종류였는지 분명하게 밝힐 수 없다. 19세기 초반부터 제기되기 시작한 갖가지 사료 가설들은 세월과 더불어 퇴색하거나 순수한 가설로만 남아 주석서에서 지나치며 언급될 뿐이다. 그중에 오늘날까지 심심치 않게 몇몇 학자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는 가설로는 아람어 번역설과 여행일지설이다.

 

1) 아람어 사료 가설

아람어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사도행전의 문체(특히 전반부의 문체)가 아람어 어법을 닮았다고 가정하면서, 적어도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루가가 이미 아람어로 작성된 문헌을 번역한 것이고 후반부에서도 이곳 저곳 번역한 흔적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루가의 그리스어와 칠십인역본의 그리스어를 자세히 비교 연구한 학자들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아람어적 요소들이 오래된 전승 자료의 이용을 가리키기보다는 복고풍을 좋아하는 저자의 편집활동에 기인한 것임을 밝혀냈다. 12 사도의 주관하에 펼쳐지는 초대 교회의 선교 활동을 다루는 대목들에서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리스말을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성서인 칠십인역을 전행적인 모델로 채택한다. 그리하여 루가는 칠십인역에서 성서 구절을 직접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인용할 뿐만 아니라 문체와 용어까지도 본받는다. 이렇게 고풍의 문헌을 본뜨는 문학기법은 루가 당대의 그리스-로마 역사가들이 흔히 사용하던 수법이었다. 칠십인역의 모방은 앞으로 다루게 될 설교의 핵심 내용인 케뤼그마의 고풍화와 더불어 사도행전의 기록들이 교회 초기의 전승을 참신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려는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는데 기여한다. 칠십인역의 모방과 인용은 12사도가 무대에서 사라지는 15장 이후 현저히 줄어든다. 그럴지라도 루가가 사용한 그리스말의 어휘 가운데 70%는 칠십인역에 등장하는 것들이다.

 

2) 여행일지 가설

두번째 가설인 여행일지 기록설은 사도행전의 "우리 대목"(16,10-17; 20,5-15; 21,1-18; 27,1-28,16)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데에서 생겨난다. 이 대목들에서 사도행전 저자는 항해 이야기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뜻으로 "우리"라는 복수 1인칭을 갑자기 주어로 넣었다가 이야기 중간에서 갑자기 증발시킨다. 여기서 "우리 대목"의 바탕이 되는 여행일지는 추측건대, 루가가 바오로와 여행을 같이 하면서 틈틈이 적어 놓은 것일 수도 있고 바오로가 작성하여 루가에게 넘겨 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던 바오로가 이런 여행일지를 기록해 놓았을 리 만무하다. 이것은 바오로의 동반자로서 그에게서 사상적 영향을 받았을 루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언제 파선당할지도 모를 바다에서의 여행 도중에 값비싼 두루마리들을 사들고 다닐 수 있었겠는지도 의심스럽다. 실제로 루가는 자신들이 바다 가운데서 태풍을 만나 화물뿐 아니라 배의 장비까지도 다 내던졌다고 보고하고 있다(사도 27,13-20). 어떻든 이 여행 일지설은 바오로의 동반자 루가가 제3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라고 보는 전통적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매력적인 가설이겠으나 개연성이 희박한 이론이다.

  "우리 대목"의 문체가 사도행전의 다른 부분과 문체가 동일한 점으로 미루어, 복수 1인칭 주어의 갑작스런 출현은 저자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전하는 여행담을 좀더 박진감있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기 위한 단순한 문학적 기교일 가능성이 높다. 루가가 말하는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이 포함된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을 가리키지만, 때로는 바오로가 "우리"에서 분리되기도 한다(사도 16,17; 21,18). 이 같은 모순은 저자가 1인칭 주어의 사용에 그다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런 문학적 기법을 사용한 저자는 루가만이 아니다. 루가에 앞서 구약성서 느헤미야의 저자는 단수 1인칭. 복수 1인칭, 다른 3인칭 주어들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바빌론 귀양이후 예루살렘이 어떻게 재건되었는지를 전해 주고 있다.

 

3) 기타 사료

특별한 사료의 제시가 실패로 끝났다고 해서 사도행전의 저자가 아무런 사료 없이 그 책을 집필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고가 "우리 대목"에 관한 고찰에서 복수 1인칭의 사용이 루가의 문학적 기법임을 밝혔지만 루가가 이 대목을 집필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자료를 이용했을 가능성은 그대로 남는다. 제3 복음서의 헌정사에서 스스로 증언하듯 루가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기록 전승이든 구두 전승이든 사료를 모으는데 힘썼을 것이다. 다만 루가의 기술적인 편집 활동 때문에 그가 수집한 사료들을 가려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루가 복음과 공관 복음 전승의 비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만일 마르코 복음이나 마태오 복음이 없었던들 루가 복음 안에서 어느 부분이 사료에 속하고 어느 부분이 그의 편집 활동에 의해서 생겨난 것인지 과연 분간해 낼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있게 확인하고 규명할 수 있는 요소들은 루가가 채택한 구약성서 칠십인 그리스역본(LXX)의 직접 또는 간접 인용문들. 그리고 주로 사도행전의 설교들안에 반복되는 루가 복음의 용어와 신학적 사상들이다. 설교에 대해서는 아래에 따로 다루겠다. 한마디로 루가 복음과 칠십인역본 이외의 사료들에 대해서는 그 성격을 명확하게 규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5. 설교

지난 두 세기 동안 사도행전의 연구가들은 이 책의 4분의 1 정도까지를 차지하는 설교들의 성격을 규정하는데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것은 그들이 설교들 안에서 사도행전의 문학 특성과 메시지가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방법론들을 동원하여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 세 가지 방향으로 갈라진다.

  첫째, 사도행전의 설교들은 초대 교회가 간직해 온 사도들의 설교들이나 초대 교회의 원초적인 전승들을 충실히 전달 또는 반영하고 있다.

  둘째, 이 설교들은 사도행전의 저자가 전승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신의 의도를 표출시키기 위하여 꾸며낸 창작품이다.

  셋째, 이 설교들은 전승과 편집이 함께 어우러진 기록으로서, 초대 교회의 전통을 충실히 살다 간 루가의 원숙한 신학적 사상과 문학적 기량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세 가지 방향 중 어느 것을 취하든지, 사도행전 연구가들은 설교들이 그 기본 구조와 내용에 있어 상호 연관성을 지니면서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사상과 문학적 특성을 대변한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필자는 위의 세 가지 결론 중 세번째 것을 받아들인다. 설교들의 형식과 내용을, 언어학과 성서 신학을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우선 루가의 문체와 문학 기법을 연구한 학자들은 누구나 그가 신약성서의 저자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문장가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휘와 표현이 풍부하고 사건들을 자신의 신학 구도에 따라 순서에 맞게 논리적으로 전개시킨다. 루가의 문학 역량은 크게 두 가지 문헌, 당신의 그리스-로마 역사 문헌과 칠십인역에서 영향을 받아 발전된 것이다.

 

1) 그리스-로마 역사 문헌의 연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가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과거 사건들을 수집하는데엔 별 관심이 없었고 이 사건들의 더 깊은 의미를 밝히는 일에 더 주력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사건들의 얽혀 있는 역사적 진실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왔다. 이 때 그들은 사건들에 얽혀 있는 역사적 진실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왔다. 이 때 그들은 사건들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사건의 주역들로 하여금 연설을 하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연설 속에 그가 보고하는 사건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반영시킨다.

  사건을 기록하는 저자는 연설의 원래 내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연설문이 그 역사가에게 입수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원문 그대로 충실하게 자신의 작품 속에 끼워 넣어야 할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다. 여기서 연설은 저자의 집필 의도와 목적을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 연설을 통하여 역사가는 독자와 더불어 역사적 사건에 얽힌 깊은 의미와 상황 전체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때 역사적 사건의 깊은 의미는 역사적 실제를 뛰어넘고 있다. 역사가는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이야기의 어느 대목에라도 연설을 끼워 넣는다.

  그러면 사도행전의 저자가 이런 그리스-로마 역사가들의 문학적 기법을 따랐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는가? 신약성서의 다른 저자들은 이런 식의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공관 복음 안에서 예수의 강화(講話)들은 일반적으로 말씀의 수집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강화들은 당대의 역사 문헌에 소개된 연설의 범주에 속할 수 없다. 요한 복음의 강화들도 그대 역사 문헌의 연설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 강화들은 질문과 대답, 역설과 대당(對當) 개념들을 동원한 동양문학에서의 설법(說法)과 비슷하다. 바오로 서간의 경우에도 수사학적인 변증법은 있을 망정 역사 문헌에 등장하는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연설은 찾아볼 수 없다.

  루가의 경우 자신의 첫 저서에서는 선임자들, 마르코나 Q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랐다. 그러나 두번째 저서인 사도행전을 집필할 때는 모델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문학적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저자는 수집된 자료들을 선택하고 축소시키거나 덧붙이며 때로는 서로 다른 대목을 연결시키기 위해 창작해 넣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고대 역사가들의 특별한 기법, 곧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설화 중간에 연설을 끼워 넣는 방법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아마도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들의 설교를 작성해 넣을 때 사도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보다 자신의 시대와 공동체 안에 발생한 문제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삽입된 설교는 이야기의 실제 상황에 부합하지 않게 된다. 사도행전의 선교 설교들은 대부분 사건들의 전개와 관계없이 책 전체의 기본 주제인 구원의 보편주의를 반영하는데 이바지한다. 물론 이야기의 맥락에 맞춰 설교의 도입부와 결론 부분과 기본 내용을 조금씩 변형시키기는 하지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포하신 평화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민에게 전달된다"는 구원의 보편주의는 그대로 견지한다.

  설교의 첨부 외에 루가가 고대 역사 문헌에서 본따온 또 다른 문학 기법은 앞에 보고한 사건을 거듭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특별한 관심과 의향을 독자에게 주지시키는 것이다.  고대 역사 문헌에서 이 반복 수법은 주로 영웅담에서 자주 발견된다. 그 좋은 예로 사도행전에서 세 번이나 보고되는 바오로의 개종 이야기(9,1-19a; 22,6-16; 26,12-18)와 고르넬리오 개종 과정을 거듭 설명하는 베드로의 예루살렘 설교(11,1-18)를 들 수 있다.

 

2) 구약성서의 영향

저자의 의향과 집필 목적을 부각시키기 위한 연설의 첨부는 고대 그리스-로마 역사가들만의 문학적 기법은 아니다. 우리는 구약성서, 그 중에서도 특히 신명기적 저서들과 역대기 상권과 마카베오 후서 등에서 이 기법을 쉽게 발견한다. 루가의 어휘와 표현이 70% 정도 칠십인역과 일치함을 감안하면 그가 연설의 첨부에 있어서 칠십인역의 사용을 통하여 구약성서 저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도행전 설교들의 내용

고대 역사 문헌들과 구약성서를 본받아 설화의 진행에 설교를 도입하여 저자의 사상을 피력하는 것은 루가의 문학 기법과 편집 활동에 속하는 일이지만, 그가 설교 안에서 전달하는 메시지와 사상의 기반은 전승에 뿌리를 내린다. 특히 사도행전 전반부의 선교 설교들은 루가 복음 24장에 나오는 부활하신 예수의 설교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 예수의 설교는 물론 루가가 초대 교회의 전승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설교의 배분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가 8개(1,16-22; 2,14-40; 3,12-26; 4,8-12; 5,29-32; 10,34-43; 11,5-17; 15,7-11), 바오로의 설교가 9개(13,16-41; 14,15-17; 17,22-31; 20,18-35; 22,1-21; 24,10-21; 26,2-23; 27,21-26; 28,17-20), 그리고 각기 다른 사람들의 설교 7개, 곧 가믈리엘의 설교(5,35-39), 스데파노의 설교(7,2-53), 야고보의 설교(15,13-21), 데메드리오의 설교(19,25-27), 에페소 시청 서기관의 설교(19,35-40), 데르딜로의 설교(24,2-8), 페스도의 설교(25,24-27)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2ㆍ3ㆍ5ㆍ10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선교 설교와 13장에 나오는 바오로의 선교 설교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 설교들은 루가 복음 24장의 부활하신 예수의 설교에 바탕을 두며 기본 요소를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다. 아래에 도표로 기본 요소와 해당 성서 구절을 소개한다.

 

 

  의회에서의 베드로의 설교(4,8-12)에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과 하느님의 역할이 강조된다. 한편 바오로의 다른 두 개의 선교 설교(14장과 17장)는 이방인들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의 생애를 소개하는 대신 이방인들의 다신교를 비판하고 유일신교의 타당성을 강조하는데에 역점을 둔다. 스데파노의 순교 설교를 제외한 그외의 설교는 바오로의 체포와 재판에 관련된 설교이다.

 

  이상의 고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사도행전의 설교들이 그 형식과 문학 기법에 있어서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역사문헌을 모방했고 그 내용과 어휘 및 표현에 있어서는 칠십인역과 루가 복음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설교들은 실제로 당사자들에 의해 발설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세사관을 피력할 목적으로 루가가 편집하여 이야기에 첨부시킨 것이지만 그 세부 내용에 있어서는 칠십인역과 루가 복음을 태동시킨 유대-그리스도교적 전승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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