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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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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호 [newpotter] 쪽지 캡슐

2003-05-25 ㅣ No.1458

아래의 글은 KBS의 일요스폐셜에서 방영된 법정스님 관련 프로에 관해서 제가 올린 글(법정스님의 착각)의 반론에 대한 답변의 글을 조금 각색하여 올립니다. 종교적인 문제는 민감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읽어 보시면 해가 되지는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님의 확고한 믿음에 경의를 드립니다. 가장 큰 재산을 가지셨군요. 님의 말씀에 반대의 의견을 드리게 되어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여 이해와 실천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은 내가 이해를 못했다는 것뿐이지 비밀의 말씀이 아닙니다. 감히 제가 그것을 밝혀 볼려고 시도하오니 읽으시는 분은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한번 보시면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저의 글을 읽어 보시면 예수님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추호도 없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난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비난하는 것이고, 그것은 진리를 비난하는 것으로 그것은 하늘과 땅 모두에서 영원히 구제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은 유일신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

     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루가 10:27)

 

     “숨은 일도 보시는 (당신)의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오 6:4)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마태오 3:7)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태오 7:21)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태오 4:10)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마르코 15:34)

 

 우리가 알기로는 하느님은 유일신이신데 왜 “(우리)의 하느님”이라 하시지 않고 “(나)의 하느님, (너)의 하느님”이라고 구분지어 부르셨을까요? 그것은 우리 모두 각각에게 하느님이 한 분씩 따로 따로 계시다는 것을 사실대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하느님이 계시고, 철수는 철수의 하느님이 계시고, 영희는 영희의 하느님이 따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실지언정 비밀스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내가 어두운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

     라“ (마태오 10:27)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 아닙니까? 이때까지 하느님이 한분인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온 것은 천차만별의 욕망으로 구분되어온 인간이 회개하면 똑같은 상태의 하나된 모습의 하느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일단은 불교와 연관을 지우지 마시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생각하십시요. 선입견이 가지게 되면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요.”

      (요한 17:11)

 

 몸(나)과 마음(하느님)이 따로 노는 것이 사람입니다. 몸과 마음이 일치하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하느님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 (루가 17;21)

 

 이 말씀은 우리들의 몸 아니면, 의식 속에 하느님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이 인간의 몸일까요, 아니면 의식일까요? 몸은 죄의 형상이니까 의식이 되겠지요. 이 의식도 그냥 의식이 아니라 재산을 버리고, 집안 식구를 버리는(마태오 19:29) 등 모든 사람의 일을 버린 의식을 말합니다.  이 의식을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쉽겠지요.

 

     “모든 사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고, 그리스도의 머리

     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11:3)

 

 수학적인 대입을 해보면 바로 모든 사람의 머리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머리는 마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의 마음이 하느님이라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은 인간의 오만을 막기 위한 방편이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비비꼬인 말을 자기 스스로 이해해서 예수님 말씀의 본래의 뜻을 알았을 때야 오만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라는 말이 문맥에 맞지 않게 끼어있을까요? 이것은 혼란 속에서도 정확히 그 뜻을 진짜 이해했는지를 시험하는 글귀입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가정이나 자식 등등의 사람의 일에 애착심이 더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 됩니다. 예수님의 열둘 제자 중에 여성이 한 분도 없다는 것이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여성을 경멸하셨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성경의 말씀을 잘못 실천하시는 분이시겠지요.        

      

 만일 100개의 장난감이 똑같은 모습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장난감 하나하나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여러분이시지만 그 신들의 이름만 유일할 뿐입니다.

 

 (2) 예수님은 그리스도(구세주)임을 부정하셨다.

 

 국어사전에 구세주는 인류를 구제하는 사람 (기) 예수 (불) 석가모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과 석가모니님이 인류를 구제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 마음이 죽도록 괴롭소.” (마태오 26:38)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려! 하고 한탄하셨다.” (마르코 26:41)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르코 15:34)

 

     “이 일을 치를 때까지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루가 12:50)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마태오 28:18)막강한 존재이십니다.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마태오 17:20)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듯 근심과 번민에 싸여 속물적인 것 같은 고민에 빠지셨을까요? 그냥 듣기엔 이러한 하소연은 인생의 벼랑에 몰린 사람이 절규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전혀 위대하신 하느님의 아들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되지 않지요. 왜 예수님께서 이런 고뇌에 빠지셨을까요? 그 이유를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목자없는 양과도 같이 시달리고 지쳐버린 군중들이 가엾어서” (마태오 9:36)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도록 하여” (마태오 7:21)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같이 완전히 개조하여” (마태오 5:48)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게 하여서” (마태오 5:45)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마태오 7:21)

 

     “회개시키기” ( 마태오 4:17)

 

 위해서 오셨습니다. 회개는 “당신 가운데 있는 하늘나라 (루가 17:21)로 가는 티켓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잡다한 기적은 인간을 회개시키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행해본 고육지책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힘으로 인간을 회개시키는 기적을 행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부자 청년 한명도 회개시키지 못하여 그의 곁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마태오 19:20) 만일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회개시키는 기적의 힘을 가지고 계셨더라면, 아픈 사람을 “나아라” 해서 고치신 것처럼, 부자 청년을 보고 “회개하라”고 하셔서 회개시켜 데리고 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를 보시고 ”사탄아 물러 가거라. 너는 내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16:23)

 

 이처럼 신심 깊기로 제일로 인정받은 베드로님 마져 예수님 마음대로 회개시키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같은 장삼이사야 오죽하겠습니까? 거의 불가능같이 보이지요. 이 회개라는 단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수준의 말씀이 아닙니다. 쉽다면 베드로님이 모르셨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아는데 예수님의 제일계명을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여 평생을 보낸다 해도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회개시키는 기적만 행하실 수 있었더라면 보는 사람마다 “회개하라!” “예. 회개됐습니다.” 하면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을 터인데 인간의 마음만은 그의 권능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사실대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다만 당신들에게 구원을 받게 하려고 하는 것 입니

     다.“ (요한 5:34)

 

 예수님께서 자신이 군중들을 구원해줄 능력이 없으셔서 군중 스스로 구원을 받게 하려고 거들어 줄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신 것입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잘 가르쳐 주어도 공부는 학생 스스로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예수님이 회개의 기적을 행하실 수 없느냐 하면 예수님 가운데의 회개하신 하느님과 내 가운데의 회개하지 못한 하느님의 힘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의 힘이 나의 하느님의 힘보다 더 세다면 예수님의 하느님이 나의 하느님을 굴복시켜 회개시킬 수 있겠지만 두 하느님의 힘이 한점 차이도 없이 똑같기 때문에 예수님도 어찌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마음은 막강합니다. 당신 가운데 있는 마음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스스로 회개하여 하느님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의 일에 빠져 사탄으로 몰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당신들에게 자유를 줄 것 입

     니다.“ (요한 8:32)

 

 우리 스스로가 회개를 알고 실천하여 진리를 알게 되면 그 회개한 마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가르쳐 주실 뿐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욕망에 이끌리어 죽음의 넓은 길로 가는 어리석은 인간을 보고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해 주실 수가 없음이 안타까우셔서 저렇듯 괴로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남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기적만 가지고 계셨더라면 괴로우실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회개한 마음은 가장 위대한 존재입니다. 즉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있는 존재이다. 나는 죽었었다.” (묵시록 1:18)

 

이 말씀처럼 하느님은 인간으로 태어나 회개하시고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계시는 존재이십니다.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씀은 처음이 마지막이고 마지막이 처음이니, 처음도 없고 마지막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즉 항상 변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욕망을 따라 항상 변하지만 하느님은 욕망의 죄를 벗어나셨기 때문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똑 같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구세주임을 부인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단단히 당부하셨다.“ (마태오 16:20)

 

 2편에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숨기는 것이 없으십니다. 이러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하신 뜻은 잘못된 말이 떠도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으신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속아 넘어 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장차 내 이름을 사칭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이다’하고 떠들어 대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갈 것입니다.“ (마태오 24:5)

 

 “아무에게도” 라는 말은 예수님을 포함한 모든 신과 사람을 망라하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다! 혹은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그 말을 믿지 마시오.”

     (마태오 24:23)

 

이것은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 그 자체가 속임수이니 절대로 믿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본래 있을 수가 없으므로 여기에서 예수님은 그 존재 자체를 확실하게 부정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스도라는 말을 따르거나 자칭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행위로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마태오 12:32) 예수님의 몸은 사람의 아들이지만 말씀은 성령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요?’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그

     것은 당신의 말이요‘하고 대답하시고...“ (마태오 26:63)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 위해 꼬투리를 잡으려는 대제관의 물음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임을 부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형을 피하시려고 거짓말을 하셨겠습니까? 그리스도라는 말은 어리석은 당신이 없는 것을 지어낸 말이요 하는 뜻입니다.

 

 이렇듯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그리스도를 만들어낸 이유는 회개라는 것이 너무 어려워 초월자에게 기대어 쉽고 편하게 구원을 받으려는 인간의 자가당착 때문입니다.

 

     “그 여자가 ‘저는 메시야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이 오시면 저희에

     게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시겠지요*‘하고 예수님에게 말하자 예수께서는 ’당신과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셨다.“ (요한 4:25)

 

 여기에서 예수님 방편의 결정판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입으로 그리스도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그 말을 인정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도 “나는 인간 구원의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당신이 말하는 *알려 주는* 그리스도는 내가 해당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기 한점 빠져 나갈 수 없는 완벽한 말씀은 회개한 하느님이 아니면 하실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오 16:6)

 

     “예수께서 이 말을 마치셨을 때에 군중은 그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

     겼다.“ (마태오 7:28)

 

 우리는 이때까지 우리가 편한대로 그리스도를 인간 구원의 구세주로 잘못 해석해 왔습니다. 베드로님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는 선생님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선생님은 선생님인데 일반적인 선생님이 아니고 그 어려운 인간 구원의 방법을 가르쳐주러 오신 특별한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

     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

     다.“ (마태오 7:21)

 

 예수님이 구세주가 아니라고 해서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그것을 아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주실 수 있는 초월자이시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 말씀의 실천 방법은 이러하셨다

 

 예수님의 제일 계명을 보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

     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루가 10:27)

 

 성경(신약)의 말씀은 믿음이 없는 사람부터 믿음의 한계까지 간 사람까지 인간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 속에는 다양한 계층을 포섭하는 내용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의 핵심을 가려내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말씀의 가장 핵심은 이것이다 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실천사항을 알기 쉽게 일러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인간에게 회개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기준으로 실천하게 하여 하늘나라로 이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회개와 그 행동요강에 대하여 자세한 말씀은 해 놓으셨지만 그것으로 회개를 알기에는 언어로서 모자라는 것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셨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나 하느님나라는 자기가 직접 맛을 보아야 알 수 있는 음식의 맛 같은 것인데 자장면의 맛을 비유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자장면의 맛을 보려면 직접 만들어서 먹어야 한다면 그 조리방법을 알아야 하듯이, 회개를 알려면 이러한 방법을 꼭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간곡한 당부의 심정에서 제일 계명이라고 특별히 거명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외의 다른 말씀은 이것이 너무 어려워 실천이 안 되는 사람은 할 수 없으니 이거라도 따르라고 주신 쉬운 숙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뵙기에는 먼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제일 계명을 어떠한 방법으로 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로 세상을 보내다가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뺏기지나 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십시오.“ (루가 21:34)

 

 무엇을 먹고 마시며, 무엇을 입을까하는 생각을 전혀 버리고 (마태오 6:25) 하느님만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마태오 7:7) 것이 제일 계명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있으시오.” (마태오 25:5)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순간도 벗어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둑을 처음배우는 사람조차도 그 깊이가 깊으면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천장을 봐도, 사람들과 대화를 해도, 꿈속에서도 바둑만이 떠오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나라로 갈려는 사람이 이정도로 해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제일 계명을 따라야 하는지 까마득하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이러한 실천을 하고 있는 예를 불교에서 보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화두

     만을 들어라.“

 

  보셨지요. 실제로 화두선을 하시는 불제자의 행동 강령입니다. 화두 공부를 이처럼 간명하게 설명하기도 어렵지요. 스님은 무엇을 먹고, 마시며, 무엇을 입을까 하는 생각을 전혀 버리고 (마태오 6:25) 오로지 깨달으실 때까지 화두만을 들고 계십니다.  

 

     “고타마의 제자들은 언제나 깨어있고 밤이나 낮이나 부처님을 생각한다.”

     (법구경)

 

 불제자가 깨어있다는 말은 한 순간도 빠짐없이 선정에 들어있다는 말이고, 예수님의 깨어있음도 하느님의 생각에서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이니 같은 말씀입니다. 한순간도 빠짐없이 화두를 들고 있으면 시간과 공간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장소는 화두를 드는 장소일 뿐이고, 시간은 화두를 드는 시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깨어서 하느님만을 생각하라는 예수님의 제일 계명을 실천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성철스님의 말씀을 보면 잠을 잘 때에도 화두를 들고 있는 상태(깨어 있는)가 아니면 아직 까마득하게 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회개를 위한 실천 사항과 부처님의 깨달음을 위한 실천 사항은 이와 같이 똑 같습니다.

 

 화두에 대해서 잠깐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래 화두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모를 때는 선지식이 정해주신 화두만이 화두인가 하지만 알고 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화두가 됩니다. 어느 스님이 스승에게서 “무”자 화두를 받았답니다.

 

 모든 것을 잊고 화두에 모든 사랑을 집중하여 깨달을 즈음에 스승님이 “무”가 아니고 “유”로 화두를 바꾸어 시험을 하셨답니다. 그랬더니 제자스님이 말하길 “스승님은 ‘유’래도 저는 ‘무’입니다.”하였답니다. 화두가 “무”든 “유”든 상관이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화두는 “똥 막대기”든, 나무 한그루든, 부처님이든, 하느님이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즉 불제자가 화두로 하느님을 모신다고 부처님이 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명칭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명칭에 의미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정확한 방법을 따라서 그곳에 도달하여 그 분을 만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줄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마시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

     려 왔습니다.“ (마태오 10:34)

 

     “화두란 얽매인 결박을 풀어주는 날카로운 칼날입니다.” (천목 중봉스님)

 

무엇에 얽매인 결박을 풀어주는 칼일까요?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

     늘에도 풀려있을 것이다.“ (마태오 16:19)

 

 우리가 땅에서 집착하는 모든 매인 것을 풀어서 자유롭게 하는 칼입니다.

 

     “가장 우수한 승려는 승당 안에서 좌선을 하고, 중간쯤 되는 승려는 먹을

     갈아 붓을 들고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가장 못난 승려는 화롯가에 앉

     아 먹고 떠든다.“ (원통 수 선사)

 

 예수님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여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왜 온 정성을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는지 물어 보십시오. 그것만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십시오. (마태오 7:7) 그러면 이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못한 하느님을 분명히 만나실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방법에 염불이라든지, 예불이라든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왜 참선을 하는 화두선을 최고로 치느냐하면 다른 방법은 이렇게만 하면 깨닫는다고 하고는 그것으로 끝이지만, 화두선은 달마스님 때부터 지금까지 깨달음으로 가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기록이 있는 지침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려) 가는 방향과 상태를 이것으로 점검이 가능하기 때문에 길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화두선을 하시는 스님 중에서 부처님이 더 많이 탄생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하느님나라로 가는 방법과 하느님나라는 설명이 되어 있지만 중간 과정이 생략되어 도달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제2의, 제3의 예수 형님이라고 자칭하는 분이 출몰하는 것도 자기를 점검할 수 있는 지침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폄하될 소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 진리를 위한 지침서가 합쳐진다면 새로운 세계가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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