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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8일(3월5일) 왈라키아의 복자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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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5-02 ㅣ No.2097



축일 5월8일(3월5일)
왈라키아의 복자 예레미야, OFM Cap.
Beato Geremia da Valacchia (Giovanni) Kostistik
Tzazo, Valacchia, Romania, 29 giugno 1556 - Napoli, 5 marzo 1625
Blessed Jeremiah of Valachia
Also known as: John Kostistk
Born : 29 June 1556 in Zaro, Romania
Died : 5 March 1625 in Naples, Italy of natural causes
Beatified : 30 October 1983 by Pope John Paul II





카푸친들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왈라키아의 복자 예레미야   

예상한 만큼 약속된 땅이 결코 아니었네!
1578년, 타고 있던 배가 남이탈리아의 바리(Bari) 항구에 입항했던 순간, 22살짜리 루마니아 사람 요한 코스티시트(Costist)는 4년에 걸친 자신의 힘든 여행이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오랫동안 바래왔던 자신의 모든 꿈이 이루어질 그 약속된 땅에 마침내 도착한 것이라고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루마니아의 산골에서부터 이탈리아의 해안까지의 그 머나먼 길 을 그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타고난 그의 불굴의 끈기와 어머니의 말씀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어릴 때, 그는 고향 '짜조(Tzazo)'(현재 몰다비아의 '사스카, Sasca'라는 마을일 가능성이 높음)에서 어머니가 해주었던 '이탈리아'라는 먼 나라에 대한 이야기들로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곤 했다. 그곳에는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많고, 수도승들이 모두 다 성인들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교황께서 살고 계시다."라고 듣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리의 항구도시에서 요한이 맞닥뜨려야 했던 그 '이탈리아'는 어머니의 이야기 내용과는 현저히 달랐다. '바리'라는 그 항구도시에는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많기는커녕 술에 취한 선원들과 창녀들이 즐비했고, 시민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욕설이나 신성 모독을 쉽사리 내뱉곤 했다. 요한이 만난 수도승들과 사제들마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성인답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그 수도자와 성직자들은 나라를 통치하는 귀족계층의 엘리트들과 다르지 않게 부와 정치적 영향력과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고 서로 경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교황이 살고 계시다는 로마마저도 짜조만큼이나 바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보였다. 그러니 요한이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가족의 품 안에서
한편, 고향에서는 노모가 요한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가 엄마 몰래 집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 마르가리타 버르바트(Bărbat)는 유복한 농부 스토이카 코스티스트(Stoica Coastist)와 결혼하여 그들 사이에서 6명의 자녀를 두었다. 1556년 8월 29일, 그들에게서 맏이인 요한이 태어났다. 그 집안은 독실하면서 자선을 잘 베푸는 가정이었다. 요한의 어머니는 자주 추수 후 남은 밀가루로 가난한 사람들을 먹일 빵을 굽곤 했다. 아버지는 머리 위로 날아가는 새들을 요한에게 가리키며 "빠르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저 새들을 보렴. 모든 짐에서 벗어나 주님께로 날아오르는 수도자들 같구나!"라며 새들을 수도자들과 비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꿈꾸었던 그의 유토피아는 악몽이 되어버렸고, 그의 모든 세계는 붕괴되는 것만 같았다. 이제 요한은 가족의 품으로, 천진한 그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바리가 이탈리아의 전부는 아니라오!
그런데, 그가 본국행 배로 내려가는 도중에 어느 노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요한에게 이탈리아에 머무르도록 권하며 "바리가 이탈리아의 전부는 아니라오. 나폴리로 가보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요한은 이탈리아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고, 나폴리로 향했다. 1578년 사순절, 그가 나폴리에 도착했을 때, 그곳 시민들은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적어도 그 도시에는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몇몇 있었고, 그곳에서 만나게 된 카푸친 더욱 작은 형제들은 '성인이 된 수도승들' 같았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했고, 그들 수도회에 입회를 지원하게 되었다.


헌신적인 카푸친 간호사
그러나, 요한의 입회 지원은 두 번이나 관구봉사자에 의해 일언지하 거절당했다. 세 번째로 지원했을 때 결국 받아들여져 1578년 5월, 그는 입회하여 '왈라키아의 예레미야 형제'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579년의 서약 이후 그는 여러 형제회에서 봉사했고, 1588년 새로운 성 에프람(San Eframo Nuovo)의 관구요양원 형제회에 임명되었다. 거대한 그곳 형제회 건물 안에는 120개의 독방들이 있었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은 병자나 연로한 형제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었다. 요양원이 매우 붐빌 때면 때때로 예레미야 형제는 병든 형제에게 자신의 방을 빌려주어야 했고, 계단 밑이나 중환자의 병상 옆에서 몇몇 시간을 간신히 잠을 청해야 하곤 했다. 그러나 에레미야 자신은 방세를 낼 형편이 못 되기에 방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노숙자 됨’을 가볍게 여겨 농담하곤 했다.  



당연한 역겨움에도 불구하고 힘겨운 환자들의 간호를 선호함
사실, 예레미야 형제가 스스로를 위해서 요구했던 유일한 특권은 가장 어려운 환자를 돌보는 특권뿐이었다. 에스파냐인 마르티노 형제는 바로 그러한 환자 중의 한명이었다. 마르티노 형제의 병은 지속적인 통증을 일으켰고, 그의 몸은 진물이 흐르는 상처투성이어서 하루에도 여러 번 씻어내야 했다. 그의 병실은 상처로 인해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고, 예레미야 자신도 포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그 자연적인 혐오감을 이겨낸 예레미야 형제는 마르티노 형제가 4년 후 죽을 때까지 정성껏 간호해 주었다. 마르티노 형제가 죽었을 때에, 무척이나 애정이 들었던 예레미야 형제는 복도를 통해 달려나가 "내 친구가 죽었구나. 마르티노 형제가 죽었구나! 내 동반자이자 내 위로자가 죽었구나!"라며 울부짖으며 애통해했다. 예레미야 형제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환자들이 늘 최선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동냥하는 형제들이 집을 떠나기 훨씬 이전에 일찌감치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질이 좋은 포도주를 구걸하곤 했다. 좋은 포도주를 빼앗겼다고 느끼게 된 동냥자들이 이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예레미야 형제는 스스로 자신의 포도주 부대에 ‘작은 도둑’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는 신나게 환자 형제들에게 그 포도주를 따라주며 "힘내게! 비록 동냥자들의 협박에 맞서야 했지만, 내가 그 '작은 도둑'을 가져 왔다네!"라고 말하곤 했다. 



왕관을 안 쓰신 하늘의 모후님께는, 그분의 아드님이 왕관이시다
예레미야의 지칠 줄 모르는 일과 행복한 인생관의 비결은 그의 기도생활이었다. 밤이면 그는 수 시간 동안 요양원 경당에서 기도하곤 했다. 그는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했고 자주 다음의 말을 반복하곤 했다. "친히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과 우리의 지극히 다정하신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님을 신뢰합시다." 1608년의 어느 날 밤,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를 안으신 눈부신 환시로 예레미야 형제에게 나타나셨다.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한 예레미야 형제는 어린이 같은 단순성으로 성모님께 아뢰어드렸다. "나의 부인이시여, 당신께서는 모후이시면서 왕관을 쓰지 않으시군요!" 그러자 마리아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예레미야 형제야, 내 왕관은 나의 아들이다!" 이 환시에 대한 이야기가 빠르게 퍼져나갔고, 곧이어 도시 전역에서 '예레미야 형제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의 환시'라는 화가들의 스케치 모사화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친분, 기도를 배우는 그의 학교
하지만, 그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형제는  조금도 우쭐거리지 않았다.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할 것입니다. 그들이 단순함과 겸손함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복되신 어머님께 지극히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예레미야 형제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은 단지 자선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기도할 줄을 보여주는 성덕의 스승들이었다.



최후까지 실행 가능한 자선활동에 전념
예레미야 형제의 애덕과 자선은 형제회 건물의 네 벽 사이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막지 못했는데, 그것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때로는 그들이 하층민들에게 가했던 사회적 부당함을 규탄하기 위함이었다. 예레미야 형제는 임종에 임박한 어느 한 유명인사에게 자선을 베풀어주러 가는 도중에 폐렴에 걸렸고, 1625년 5월 5일, 토레 델 그레코(Torre del Greco)에서 선종하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자!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절름발이요, 불구인 형제들을 만나보러 가야만 하네!"

콩은 그에게 주식이자 화장품
그가 선종했을 때 만 69세였는데, 그는 비교적 오래 끈 건강한 생활을 영위해온 상태였다. 젊고 건강한 그의 안색은 그 도시의 귀부인에게 부러움을 샀다. 누군가 이에 대해서 물어보았을 때, 그는 지속적으로 젊고 건강하게 사는 자신의 비결이 바로 콩을 주식으로 먹는 것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사실, 그는 콩류 외에는 다른 것은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는 가끔 은인들에게도 건강 개선을 위해, 특히 좋은 안색을 위해 자신의 콩을 나누어주곤 했다.

거의 400년 만에 귀향한 예레미야 형제
1983년, 그는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어 루마니아의 첫 번째 가톨릭 복자가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민자들의 천상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 나폴리 카푸친들은 루마니아 내에 번창하는 선교 지부를 설립했는데, 그 지부에는 하느님 축복 덕택에 그 지역 출신의 수많은 성소자들이 있다. 나폴리 동료형제들의 너그러움 덕분으로, 왈라키아의 복자 예레미야의시신은 지금 루마니아 오네슈티(Oneşti) 성읍에 설립된 '복자 예레미야의 성지'의 지하경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조국 동포인 예레미야의 유해가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루마니아 카푸친 형제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것인가!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사도들에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도이기이므로 '주님의 기도'를 하십시오. 사랑을 받으실 만한 이 위대하신 하느님을 사랑합시다. 그토록 지극히 좋으시고, 그토록 선하신 보상자를 우리는 불쾌하게 해드리지 맙시다. 과연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너무나 많은 일을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왈라키아의 복자 예레미야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Beato Geremia da Valacchia (Giovanni) Kostistik
5 marzo 
Tzazo, Valacchia, Romania, 29 giugno 1556 - Napoli, 5 marzo 1625

Nato in Romania il 29 giugno 1556, ha sempre sognato di raggiungere l'Italia, convinto che qui si trovino i migliori cristiani del mondo. E i genitori a 19 anni lo lasciano partire. Arriva a Bari e non trova quello che si attende così nella Quaresima del 1578 è a Napoli tra i cappuccini, accolto come «fratello laico». Lasciato il nome nativo di Ion (Giovanni), diventa fra Geremia da Valacchia. Nella Napoli sotto il dominio spagnolo, fra Geremia diventa una specie di patrono della gente derelitta, fa anche il mendicante per loro: raccoglie cibo e vestiti e non si sa cosa mangi, perché la sua razione di pane e verdure sfama sempre qualcun altro. Quando non va in giro per i poveri, si prende cura dei malati, i piagati, i paralizzati, i pazzi. Gli affidano fra Martino, che nessuno avvicina per le piaghe: gli rimane accanto per oltre quattro anni fino alla morte. Muore il 5 marzo 1625. Giovanni Paolo II lo ha beatifica nel 1983. (Avvenire)

Martirologio Romano: A Napoli, beato Geremia (Giovanni) Kostistik da Valacchia, che, religios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ininterrottamente per quarant’anni diede assistenza agli infermi con carità e letizia.

Ha sempre sognato di raggiungere l’Italia, convinto che nel nostro Paese si trovino i migliori cristiani del mondo. E i genitori – Stoika Kostist e Margherita Barbat, che sono agricoltori e anche benestanti – a 19 anni lo lasciano partire. Arriva a Bari quando ne ha già 22, dopo un lento viaggio e un lungo soggiorno ad Alba Iulia (Romania) come servitore di un medico. Non vi trova quello che si attendeva, e nella Quaresima del 1578 è a Napoli tra i cappuccini, accolto come “fratello laico”, senza ricevere gli Ordini sacri. Lasciato il nome nativo di Ion (Giovanni), diventa fra Geremia da Valacchia. Poi passa per vari conventi dell’Ordine e nel 1584 eccolo di nuovo a Napoli in quello di Sant’Eframio Nuovo, dove resterà fino alla morte.
Nella Napoli sotto il dominio spagnolo, fra Geremia diventa una sorta di patrono della gente più derelitta, servendo intanto la sua comunità nei compiti meno gradevoli; un numero crescente di diseredati fa appello alla sua straordinaria capacità di compatire, proprio nel senso di “soffrire insieme”. Lui fa anche il mendicante, per loro: raccoglie cibo e vestiti, e non si sa bene che cosa mangi, perché la sua razione di pane e verdure sfama sempre qualcun altro. Accompagna tutto questo con lunghe preghiere: ama soprattutto il Pater Noster e la Salve Regina. Quando non va in giro per i poveri, è nelle celle e nelle stanze dei malati: quelli senza speranza, con piaghe ripugnanti, o paralitici, o pazzi. L’effluvio delle sue erbe aromatiche combatte la puzza dei corpi disfatti, le sue braccia sostituiscono quelle bloccate dalla paralisi. Sorride agli insulti dei dementi. Poi gli affidano un religioso, fra Martino, che nessuno avvicina più: troppe piaghe. Ci pensa lui, lavandolo ogni giorno anche dieci volte, finché a sua volta crolla: stanchezza, disgusto; non ne può più, cambia convento.
Ma dopo qualche tempo, rieccolo accanto a fra Martino. Dice che il Signore lo vuole lì; che gliel’ha fatto capire mentre pregava. E lì rimane per quattro anni e mezzo; fino alla morte di Martino, che per molti è un sollievo. Lui piange, invece: "Povero fra Martino, era la ricreazione mia...". Al convento, ormai, viene a cercarlo anche gente importante. Dotti teologi chiedono consiglio al “fratello laico” analfabeta, la cui parlata è un miscuglio pittoresco, una sorta di italo-rumeno-napoletano.
Quando fra Geremia muore, bisogna chiamare i soldati e poi seppellirlo segretamente, di notte, dopo un assalto popolare al convento per vederlo, toccarlo, tagliare pezzetti del saio, che sarà cambiato sei volte. Giovanni Paolo II lo ha beatificato nel 1983. I suoi resti mortali si trovano ora a Napoli, nella chiesa dell’Immacolata Concezione.

Autore: Domenico Agasso
Fonte: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03-03-02

 


Blessed Jeremiah of Valachia
Also known as
John Kostistk

Memorial
30 October
Profile
Secular Franciscan religious.
Born
29 June 1556 in Zaro, Romania
Died
5 March 1625 in Naples, Italy of natural causes
Beatified
30 October 1983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p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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