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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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2-21 ㅣ No.2136

 

* 로마서 15장


공동체의 일치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나약한 이들의 약점을 그대로 받아 주어야 하고, 자기 좋을 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2 우리는 좋은 일이 생기도록, 교회의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저마다 이웃이 좋을 대로 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께서도 당신 좋으실 대로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습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4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5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6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8 나는 단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조상들이 받은 약속을 확인하시고, 

9 다른 민족들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칩니다.”

10 성경은 또 말합니다. “민족들아, 그분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여라.”

11 또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그분을 찬미하여라.”

12 이사야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이의 뿌리에서 줄기가 돋아나리니 그가 일어나 민족들을 다스리고 민족들은 그에게 희망을 걸리라.”

13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모든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


바오로의 사도직

14 나의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 자신도 선의로 가득하고 온갖 지식으로 충만할 뿐만 아니라 서로 타이를 능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15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에 힘입어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고, 어떤 부분에서는 상당히 대담하게 썼습니다. 

16 이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18 사실 다른 민족들이 순종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이룩하신 일 외에는, 내가 감히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19 표징과 이적의 힘으로, 하느님 영의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20 이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남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집을 짓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21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에 관하여 전해 들은 적 없는 자들이 보고 그의 소문을 들어 본 적 없는 자들이 깨달으리라.”


바오로의 여행 계획

22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가려 했지만 여러 번이나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23 그러나 이제 이 지역에는 더 이상 내가 일할 곳이 없고, 또 나는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고 싶은 소망을 품어 왔습니다. 

24 그래서 내가 에스파냐로 갈 때 지나는 길에 여러분을 보고, 먼저 얼마 동안 여러분과 기쁨을 나누고 나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그러나 지금은 예루살렘으로 성도들에게 봉사하러 떠납니다

26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신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들의 것을 나누어 주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27 사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지고 있어서 그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영적 은혜를 나누어 받았으면, 그들도 물질적인 것으로 성도들을 돌볼 의무가 있습니다

28 그래서 나는 이 일을 마치고 이 모금의 결실을 그들에게 확실히 전한 다음,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에스파냐로 떠나렵니다. 

29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가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30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나와 함께 싸워 주십시오. 

31 내가 유다의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서 구출되고 예루살렘을 위한 나의 구제 활동이 성도들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지도록

32 내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과 함께 쉴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십시오. 

33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아멘.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4장에 이어서, 15장에서도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에 관하여 다시 언급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일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믿음이 강한 사람들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나약한 이들의 약점을 그대로 받아 주어야 하고, 자기 좋을 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로마 15,1).


로마서 14장에서는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까지 말하였지만(로마 14,21 참조), 15장에서는 그보다 더 나아가 ‘믿음이 나약한 이들의 약점을 그대로 받아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14장에서는 저마다 자기 판단에 자신을 가지라고 하였지만(로마 14,6 참조), 15장에서는 자기 좋을 대로 해서는 안 되고 저마다 이웃이 좋을 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 생기도록, 교회의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저마다 이웃이 좋을 대로 해야 합니다”(로마 15,2). “그리스도께서도 당신 좋으실 대로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습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셨기 때문입니다”(로마 15,3).


‘자기 좋을 대로’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또 예수님은 왜 당신 좋을 대로 하지 않으시고 나약한 사람의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감내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약속, 성경의 기록이 실현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셨습니다”(로마 15,8).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든 민족이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그분을 찬미하여라”(로마 15,11). 바오로 사도가 꿈꾸는 것은 신자 개인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의 구원도 아닙니다. 모든 민족, 모든 겨레의 구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약속이고 계획이며, 반드시 실현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희망하였고, 다른 신자들도 그 희망에 동참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한 희망과 믿음의 열매는 참으로 풍요롭습니다.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모든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로마 15,13). 성령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를 맺어 주시기를 빕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이 아홉 가지 열매를 하나로 묶으면, ‘자기 좋을 대로 하지 않고, 우리에게 좋은 일이 생기고 교회의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이웃이 좋을 대로’(로마 15,1-2 참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요 행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그분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좋을 대로’ 한다는 것은 ‘육의 행실’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갈라 5,19-21)입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갈라 5,21).


그러므로 하느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자기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형제의 약점을 짊어지고 이웃이 좋을 대로 곧 이타적으로 살아가면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만일, 기쁨과 평화를 비롯한 아홉 가지 열매 대신에 적개심, 이기심, 질투 따위가 남아 있다면, 그의 믿음과 희망은 보잘것없는 것이요 성령 충만을 말할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어느 공동체에나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이 있고, 진보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므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일치하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집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질적 집단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그리스도인의 일치, 인류의 일치는 예수님의 꿈입니다. 이 꿈은 또한 우리의 꿈이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기도를 열심히 많이 하는 사람일까요? 남모르게 또는 남 알게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일까요? 기도생활과 봉사활동도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겠습니다만, 로마서 14장과 15장을 통해서 나타난 바오로 사도의 생각으로는 인간관계의 성숙도가 믿음의 강도와 직결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풍부한 성경 지식보다 내 형제자매들과 얼마나 성숙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약점이 많고 흠이 많은 형제자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믿음의 중요한 척도입니다. 형제의 약점을 나의 약점으로 짊어지고 감내하려는 사람은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형제의 약점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 지식이 풍부해도 믿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형제를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더 큰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몫을 담당해야 하는지 예수님께 여쭙는 습관을 들이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 부자 청년처럼 예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 친밀한 관계가 없다면 그 어떤 선한 일도 그 값어치가 떨어집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선한 일조차도 형제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고 교만의 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아주 고집불통 딸이 있었다고 합니다. 딸이 장성해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아버지는 걱정이 많습니다. 그런데 괜찮은 청년이 와서 딸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양심상 자기 딸과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버지는 거듭 만류하며, “내 딸 같은 사람과 결혼해서 살려면, 하느님은 되어야 할 걸세.”라고 했답니다. 이런저런 흠을 많이 가진 사람을 감내하려면, 하느님이 아니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지배하는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머무시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약간 느껴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성심이 나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이기적인 마음을 녹이시도록 내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그 마음을 간직한 채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고 하느님처럼 거룩해지려면 성경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날마다 밥을 먹고 매순간 숨을 쉬듯이, 날마다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듣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고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로마 15,4).


사실, 로마서의 본론은 15장 13절에서 끝납니다. 14절부터는 바오로 사도가 사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적이건 공적이건 성령의 감도로 쓰인 성경이기 때문에 귀중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15절에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은총’이란 무엇입니까? 은총은 자격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은총을 받았다 함은 자신이 은총 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사람이 과분한 것을 공짜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거저 의롭게 되고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4).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5,2). 이를 깨달은 바오로 사도는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로마 15,16)을 은총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로마 15,17) 사도직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하느님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오로 사도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로마 1,5). 복음을 전하는 사도직을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는데 그 사도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이 일에는 하느님의 힘, 기적의 힘이 수반됩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징과 이적의 힘으로, 하느님 영의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로마 15,18-19). 거룩하지 않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이 거룩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는 것은 은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예수님 제자로 삼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게 하는 사명은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바오로 사도가 복음의 출발지인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마케도니아 북쪽)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면서(로마 15,19 참조), 매 맞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히면서도 은총과 자랑으로 여긴 이 사도직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어디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요?


사실, 바오로 사도의 예루살렘 선교는 성공적이지 못하였던 같습니다. 무아경에 빠진 바오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어서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라. 사람들이 나에 관한 너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사도 22,18)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가거라. 나는 너를 멀리 다른 민족들에게 보내려고 한다”(사도 22,21). 바오로 사도가 일리리쿰에서 복음을 전한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그리스 영토인 아테네나 코린토에서 복음을 전한 내용은 나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방인 선교는 그리스 지역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도는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가고 싶어 했고, 서쪽 끝인 에스파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나는 이 일을 마치고 이 모금의 결실을 그들에게 확실히 전한 다음,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에스파냐로 떠나렵니다”(로마 15,28).


우리가 모두 해외 선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처럼 외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외방 선교사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마땅히 도와야 합니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위하여 낯선 지역, 척박한 환경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깊은 산간 오지에서 수백 명씩 살고 있는 소수 부족을 찾아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생활 풍습을 배워 그들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교사들도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까요? 바오로 사도를 움직였던 그 성령께서 여전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던 당시, 예루살렘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동족에게 배신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당시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 성도들은 몹시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다른 지역 교회 공동체 신자들은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도우려고 했습니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신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들의 것을 나누어 주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로마 15,26). 바오로 사도의 생각으로는, 이방인 신자들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것은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지고 있어서 그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영적 은혜를 나누어 받았으면, 그들도 물질적인 것으로 성도들을 돌볼 의무가 있습니다”(로마 15,27).


우리 한국 신자들도 유다인들에게 영적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바오로도 베드로도 모두 유다인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한국 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프랑스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미국 선교사들, 아일랜드 선교사들 등에게 영적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또한 그 선교사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그 나라 신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교회에 보답을 할 뿐 아니라, 우리도 그들처럼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개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들이 선교 활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스페인,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선교 활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선교 소임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경제적 부유함을 안배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30-40년 동안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룬 우리나라,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선교 소임이 주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영적 감수성을 살려 영적 분별을 해야 하겠습니다. 또 넉넉한 살림은 아니더라도 씀씀이를 줄여 마련한 성금은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3-4). 흥청망청 쓰고 남은 것을 봉헌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성금을 전달하려 가는 것도 무척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신자들에게 기도를 간절히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나와 함께 싸워 주십시오. 내가 유다의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서 구출되고 예루살렘을 위한 나의 구제 활동이 성도들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지도록, 내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과 함께 쉴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십시오”(로마 15,30-32). ‘유다의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다인들, 바오로 사도를 죽이려고 노리는 유다인들입니다. 율법보다 믿음을 강조하는 바오로 사도에게 유다인들이 많이 사는 예루살렘은 참으로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기도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과연 그 큰 죽음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해 주셨고 앞으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2코린 1,10).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바오로의 구제 활동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교회(母敎會) 곧 예루살렘 성도들이 비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하나의 교회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당시에 유다계 그리스도인과 비유다계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을 생각하면, 바오로 사도의 걱정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문제, 할례 문제로 갈등을 겪는 상황에서, 어렵게 마련한 성금이 거절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기도 요청은 오늘날에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성직자들을 온갖 위험에서 구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직자들을 둘러싼 보이는 위험, 보이지 않는 위험이 무척 많습니다. 성직자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거룩한 직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예수성심대축일부터 2010년 예수성심대축일(6월 11일)까지 1년을 ‘사제의 해’로 선포하셨습니다. 비오 11세 교황님은 1929년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1786-1859년, 축일 8월 4일)을 전 세계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신 바 있고, 이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성인의 선종 150주년을 맞이하여 ‘사제의 해’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는 아르스의 본당 신부 요한 마리아 신부의 성덕을 본받아 “사제들이 현대 세계에서 더욱 힘차고 분명한 복음 증거를 위하여 내적 쇄신의 노력을 강화하자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아르스의 본당 신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천상 탄일’ 150주년에 즈음하여 사제의 해를 선포하는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의 서한」 참조).


「아르스의 본당 신부」(Le cure d’Ars. Sa pensee - Son coeur)라는 책에 실린 성인의 몇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사제는 얼마나 위대합니까! …… 사제가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면 죽고 말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사제의 말을 따르십니다. 사제가 몇 마디 하면 그 말을 따라 주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작은 성체 안에 머무르십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사제의 신원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죽게 될 것입니다. …… 사제가 없다면 우리 주님의 수난과 죽음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지상에서 구원 사업을 계속하는 이는 사제입니다. …… 집에 보화가 가득 차 있다 하여도 그 문을 열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제는 하늘의 보물 창고를 여는 열쇠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문을 여는 이가 사제입니다. 사제는 좋으신 주님의 청지기입니다. 주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 20년간 본당에 사제가 없다면 본당 신자들은 결국 짐승을 숭배하게 될 것입니다. …… 사제는 자신을 위한 사제가 아닙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한 사제입니다.”


신자들이 본당 신부님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사제관 주변에 마귀들이 득시글거린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잘 되면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결국 신자들입니다. 신자들이 합심하여 바치는 기도는 무엇이든 하느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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