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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전갈-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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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곤 [guevara72] 쪽지 캡슐

2008-07-22 ㅣ No.6537

교황청 신앙교리성

자유의 전갈

LIBERTATIS NUNTIUS

1984. 8. 6.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

강대인 번역

 


차 례

서 론

Ⅰ. 하나의 열망
Ⅱ. 열망의 표현 
Ⅲ. 해방, 그리스도 신앙의 주제
Ⅳ. 성서적 근거
Ⅴ. 교도권의 가르침
Ⅵ. 그리스도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
Ⅶ. 마르크스주의 분석 
Ⅷ. 진리의 의미 전도와 폭력
Ⅸ.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핵심의 신학적 수용
Ⅹ. 하나의 새로운 해석학
XI. 방향 설정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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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의 전갈(Libertatis Nuntius)이며 해방시키는 힘이다. 이 근본 진리는, 최근 기대에 가득 찬 새로운 관심 속에서, 신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어왔다.
    해방은 무엇보다도 먼저 죄의 근본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이다. 해방의 목적과 그 목표는 하느님 자녀들의 자유이며, 그것은 은총의 선물이다. 하나의 논리적인 귀결로서, 자유는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제영역의 온갖 예속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한다. 그 모든 예속은 궁극적으로 죄에서 유래하며, 매우 흔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엄성에 맞갖는 방법으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이러한 문제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결과는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식별하는 일은 해방에 관한 어떠한 신학적 반성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될 조건이다.
    사실, 어떤 절박한 문제들에 직면하여, 일부에서는 지상의 현세적인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려고 한다. 그들은 죄에서의 해방을 부차적인 자리에 두고 있는 듯하여, 죄로부터의 해방이 당연하게 지니는 근본 중요성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 제시 자체 또한 모호하여 혼동을 일으킨다. 다른 이들은, 그들이 종식시키고자 원하는 예속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더욱 정확하게 규명하려는 노력에 있어서, 충분한 비판적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여러 가지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고 거기서 연유하는 도덕적 요구와 상반되는 이데올로기적 영감에서 빌려온 이러한 개념들을 정화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신앙교리성성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광범한 주제를 그 자체로서 다룰 생각은 없다. 다음의 후속 문서에서, 교회 생활과 교리를 위하여 지극히 풍요로운 이 주제를 긍정적인 양상으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 본 성성의 의도이다.
    이 훈령은 극히 제한적이고도 엄밀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즉,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여러 경향으로부터 빌려온 개념들을 충분한 비판 없이 사용하고 있는 일부 해방신학의 형태에 의하여 초래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신앙을 손상시키는 일탈 또는 일탈의 위험에 대하여, 사목자들, 신학자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는 결코 진정한 복음 정신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최우선의 선택”에 헌신적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될 수 없다. 이는 또한 비참하고도 절박한 인간 불행과 불의의 문제에 직면하여 무관심하거나 애매한 태도를 지키는 자들을 위한 핑계로 이용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이 문서가 지적하고 있는 심각한 이데올로기적 일탈이 필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대의를 저버리게 한다는 확신에서 이 문서를 마련하였다. 명확한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교 생활을 온전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빼앗기고 억눌리며 박해받는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에서, 정의와 자유와 인간 존엄성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한층 절실한 것이다. 전보다 더욱더 교회는, 어느 곳에서 일어나든 어느 누가 자행하든, 권력 남용과 불의와 자유 침해를 단죄하고자 한다. 교회는 그 고유한 방법으로 인간 권리의 수호와 증진,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 수호와 증진을 위하여 투쟁하고자 한다.

I. 하나의 열망

1. 해방을 향한 민중들의 강력하고도 억누를 수 없는 열망은, 교회가 면밀히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해명해 주어야 하는, 주요한 시대의 징표들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다.1) 이러한 우리 시대의 주요 현상은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민중들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여 다양한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빈곤의 짐을 걸머지고 있는 민중들 가운데서 그리고 빼앗긴 계층의 한가운데서, 이러한 열망은 거대한 힘으로 드러나고 있다. 

2. 이러한 열망은, 명료하지는 않다 하여도,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 1,26-27)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억압들, 문화적 정치적 인종적 사회적 경제적 억압들, 흔히는 이들이 서로 뒤얽힌 온갖 억압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조소와 멸시를 받고 있다. 

3. 하느님 자녀로서의 인간 소명을 계시하면서, 복음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존중을 받고 정신적 발전은 물론 물질적 발전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는 정의롭고도 평화로운 형제적 삶을 향한 요구와 그 적극적인 의지를 불러일으켜 왔다. 이러한 요구는 의심없이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열망의 바로 그 바탕에 깔려 있다.

4. 따라서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쇠약과 질병과 죽음으로 압도해 오는 빈곤에 무기력하게 굴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러한 비참을 천부의 존엄성에 대한 용납될 수 없는 침해로 여겨 분노하고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에 여러 가지 요인들이 기여해 왔지만, 그 가운데서도 복음의 누룩은 빼놓을 수 없다. 

5. 인류가 과학 기술의 놀라운 발전에 힘입어,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품위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재화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문맹자들 가운데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6. 빈부간의 충격적인 불평등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에서든 또는 한 나라의 사회 계층간에서든, 이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수치이다. 한편에서는 전대 미문의 풍요를 누리며 이를 낭비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무수한 사람들이 기본 생활 필수품을 갖지 못한 채 영양 실조로 고생하고 있는 극도의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7. 국제 교역상의 형평과 연대 의식의 결여는 선진 산업국들의 이익만을 가중시켜,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거기서 제3세계의 민중들은 좌절감을 느끼고, 산업화된 국가들의 경제적 식민주의와 착취에 대하여 비난을 퍼붓고 있다. 

8. 어떤 식민주의가 저지른 죄악과 그 후유증에 대한 기억이 이러한 상처와 폐해를 악화시키고 있다. 

9. 교황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라, 각국 주교회의와 더불어, 엄청난 군비 경쟁의 과오를 끊임없이 비난해 왔다. 군비 경쟁은 평화를 위협할 뿐 아니라, 그 비용의 편린만으로도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도 없는 사람들의 필요를 넉넉히 채워줄 수 있는, 그토록 막대한 돈을 탕진하고 있는 것이다. 

II. 열망의 표현

1. 다른 여러 가지 깊은 열망들이 다 그렇듯이, 정의를 향한 열망과 인간 존엄성의 실질적인 인식에 대한 열망은 명료화되고 계도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2. 실제로 이론적 실천적 측면에서 이러한 열망을 표현하는 단계에서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열망을 위한 진정한 대변자들로 자처하며 폭력 수단에 의지해서라도 민중에 대한 억압과 빈곤을 종식시킬 근본적인 변혁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들이 많기 때문이다. 

3. 이렇듯 정의를 향한 열망은 흔히 그 의미를 감추거나 왜곡시키는 이데올로기들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자신들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데올로기는 인간 생활의 참다운 목적과 상반되는 목표를 제시한다. 이 이데올로기들은 인격을 존중하는 어떠한 윤리와도 모순되는, 조직적인 폭력 사용을 수반한 행동 방식을 종용하는 것이다. 

4. 그러므로 복음의 빛으로 시대의 징표를 해명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정의를 향한 민중의 이 심오한 열망의 의미를 탐구할 뿐 아니라 이러한 열망이 드러내는 이론적 실천적 표현을 비판적인 분별력으로써 예의 검토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III. 해방, 그리스도 신앙의 주제

1. 해방의 열망은, 그 자체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정신 안에서 전폭적인 형제애의 공감을 얻는다. 

2. 그러기에, 이러한 열망에 부응하여, “해방신학”으로 알려진 신학적 사목적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 운동은 처음에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문화적 유산을 두드러지게 이어받은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시작되었고, 그 다음에는 제3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선진 산업국의 일부 사회에까지 파급되었다. 

3. "해방신학"이라는 표현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의 희생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러한 관심은 정의에의 투신을 낳는다. 이러한 접근에서 출발하여, 가난의 그리스도교적 의미와 그것이 요구하는 정의에 대한 투신의 방식에 있어서, 흔히 서로 모순되는 몇 가지 방법을 식별할 수 있다. 모든 사상 운동이 그러하듯, “해방신학들”은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으나, 그 교의상의 경계는 명확히 규정되지 않고 있다. 

4. 해방을 향한 열망은, 바로 그 용어가 시사하는 것처럼, 신구약 성서의 근본 주제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이라는 표현 그 자체는 전적으로 타당한 용어이다. 즉, 이 말은 해방과 자유라는 성서 주제와 그 실천적 구현의 절박성에 집중되는 신학적 반성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해방에의 열망과 해방신학들의 만남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만남의 의미는 교회 교도권에 의하여 정통적으로 해석되는 계시의 특별한 메시지에 비추어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2) 

IV. 성서적 근거

1. 그러므로 올바르게 이해되는 해방신학은 신학자들로 하여금 중대하고도 절박한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성서의 근본 주제들을 숙고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해방을 향한 이 시대의 열망과 이를 어느 정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해방 운동들이 그러한 문제들을 교회 앞에 제기하는 것이다. 절박한 궁지에 몰려, 신학자들을 향해 외치는 이 물음들을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외면할 수 없다. 

2. 그리스도인의 자유3)에 대한 근본 체험은 여기서 최초의 준거가 된다. 우리의 해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고, 죄에 물든 인류의 처지를 특징짓는 율법과 육체의 예속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따라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의화의 결실인 은총의 새로운 삶이다. 이것은 예속의 근본 형태가 죄에 대한 예속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속의 다른 형태들은 근본적으로 죄에 대한 예속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로 특징지어지는, 온전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자유가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는 방종과 혼동될 수는 없다. 자유는 사랑의 새로운 삶이다. 

3. "해방신학들"은 출애굽기의 이야기들을 널리 이용하고 있다. 출애굽은, 사실, 선택된 백성의 형성에 있어서 근본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외세의 지배와 노예 생활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이다. 이 사건의 독특한 의미는 그 목적으로부터 드러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 해방은 하느님 백성의 창립과 시나이 산에서 거행된 계약의 제사4)를 그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기에 출애굽의 해방은 일차적으로 또 배타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의 해방으로 격하될 수 없다. 더욱이 해방이라는 말이 성서 안에서 흔히 해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구원이라는 말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4. 출애굽의 창립 설화는 이스라엘의 기억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 이후 유다인들이 새로운 해방의 희망 안에서 살아가며 또 그 너머의 결정적인 해방을 기다릴 때에도 그들은 늘 이 출애굽 사건을 상기했던 것이다. 이러한 체험 안에서, 하느님은 해방자로서 인식되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것이다. 새로운 계약은 그분 영의 은총과 마음의 회개5)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5. 계약의 하느님께 충실한 자들이 겪는 수많은 고통과 고뇌는 여러 시편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데, 비탄과 애원과 감사 그 모두는 종교적인 구원과 해방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통은 순전히 그리고 단순하게 빈곤의 사회적 상황 또는 정치적 억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상황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고통은 또한 원수들의 적개심과 불의와 실패와 죽음도 포함하고 있다. 시편들은, 오직 하느님 한 분께만 구원과 치유를 기대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종교적 체험에로 돌아서라고 우리를 촉구한다.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서 고통의 상황들을 변혁시키는 힘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기에 “주님의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섭리6)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여 살아간다. 또한 광야를 건너는 전여정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참다운 해방과 영신적 정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배려하셨다. 

6. 구약성서에서, 아모스 이후의 예언자들은 특별한 열정으로 정의와 결속의 의무를 역설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부자들에 대하여 극히 엄중한 심판을 선포해 왔다. 그들은 과부들과 고아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보호한다. 악을 쌓으면 다만 무서운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자들은 권력자들을 위협한다.
계약에 대한 충실은 정의의 실천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하느님께 대한 정의와 인간에 관한 정의는 불가분의 것이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호자요 해방자이다. 

7. 이러한 요청들은 신약성서 안에서 또 다시 발견되고 있다. “참된 행복”의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요청들은 더욱 근본적인 요구가 되고 있다. 회개와 쇄신은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8. 이미 구약성서에서 선포된, 형제애의 계명은 전인류에게로 확장되어 사회 생활의 최고 규범7)이 되고 있다. 모든 사람을 이웃8)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을 거부할 수 있는 어떠한 한계나 차별은 있을 수 없다. 

9. 하느님 나라를 위한 가난은 찬양을 받는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9) 사람의 아들의 신비스러운 현존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 25장 31-46절에 있는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무궁 무진한 말씀의 근본이다. 우리 주님은 고난받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가 되시며, 모든 고난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고 있다. 

10. 동시에, 정의와 자비의 요구는, 이미 구약성서에서 선언되었으나, 신약성서 안에서 더욱 심화되어 새로운 의미를 띤다.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 박해받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고 있다.10)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완덕(마태 5,18)은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루가 6,36)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의무이다. 

11. 형제애와 자비에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비추어, 부자들은 그들의 의무를 준엄하게 깨달아야 한다.11)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의 혼란에 직면하여, 사랑의 성사에의 참여와 가난한 형제와의 나눔12)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를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다. 

12. 신약성서의 계시는 죄가 인격의 핵심에서 인간을 침해하는 가장 근원적인 악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다른 모든 해방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첫째 해방은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13. 의심 없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어, 정치적 자유인이나 노예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신 구원의 근본 성격이 강조되어야 한다. 신약성서는 이러한 자유로 들어가는 필요 조건으로서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생겨난 새로운 자유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차원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사실을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보여주고 있다. 

14. 따라서, 맨 먼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혼란을 빚어내는 죄의 영역을 “사회적 죄”에 한정시킬 수는 없다. 사실, 죄에 대한 올바른 교리만이 죄의 중대한 사회적 영향을 주장할 수 있게 한다. 

15. 또한 악을 일차적으로 또는 일방적으로 불의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 안에 국한시킬 수만은 없다. 여타의 모든 죄악이 거기에서 생겨나므로 “새로운 인간”의 창조는 또 다른 경제적 사회 정치적 구조의 건설에 의존해야 한다고만 말할 수 없다. 확실히, 악을 조장하는 열악한 구조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를 변혁시킬 용기를 가져야 한다. 구조란, 그것이 옳든 그르든, 인간 행동의 산물이며,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악의 근원은 자유롭고도 책임있는 인간 안에 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써 회개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효과적으로 추구하며 자제와 덕행을 실천하는13) 새로운 인간으로서 살고 행동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 관계의 급진적 혁명을 요구하면서 인격 완성의 추구를 비난하는 것은 인격과 그 초월의 의미를 부정하고 선악 구별의 절대 기준인 윤리와 그 근본을 파괴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랑은 진정한 인격 완성의 원리이므로, 타인에 대한 개방과 봉사 정신 없이는 인격의 완성이란 불가능하다. 

V. 교도권의 가르침

1. 억압과 빈곤에 의하여 우리 시대에 밀려드는 도전에 응답하고자, 교회 교도권은 자주 정의감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일깨우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더불어 연대 의식을 불러일으키려는 열망을 표명해 왔고, 또 계시에 내포되어 있는 명령과 가르침이 지닌 현실성과 긴급성을 강조해 왔다. 

2.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개입의 몇 가지 예로 교황 문헌들을 들고자 한다. 「어머니요 스승」, 「지상의 평화」,「민족들의 발전」,「현대의 복음 선교」, 그리고「팔십주년」등을 언급할 수 있겠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사목 헌장에서 정의와 자유의 문제에 정면으로 다가섰다. 

4. 교황 성하는 수많은 기회에 특히 그의 회칙「인간의 구원자」,「자비로우신 하느님」, 「노동하는 인간」에서 이러한 주제들을 강조하였다. 그 수많은 연설들은 인간 권리에 관한 교의를 상기시키며, 온갖 형태의 억압 아래서 희생되고 있는 인간 해방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1979년 10월 2일 국제 연합(UN) 제26차 총회에서 행한 연설14)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해 1월 28일 푸에블라에서 개최된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제3차 총회의 개막 연설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에 관한 완전한 진리는 진정한 모든 해방의 토대라고 천명하였다.15) 이 연설문은 해방신학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문헌이다. 

5. 두 번에 걸친 세계주교대의원회의(Synod)는 해방의 그리스도교적 개념에 직접 관련되는 주제들을 토론하였는데, 1971년에는 세계의 정의를, 그리고 1974년에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완전한 해방 또는 인간 구원의 관계를 다루었다. 1971년과 1974년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성과를 토대로, 바오로 6세는 그의 교황 권고 맛현대의 복음 선교맜에서 복음화와 인간 해방 또는 발전의 관계를 밝혔다.16) 

6. 해방과 인간 발전을 향한 교회의 관심은 또한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의 설립에서도 드러났다. 

7. 각국 주교회의들은 교황청과 함께 진정한 인간 해방의 절박성을 상기시키고 해방을 성취하는 방안을 모색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1968년 메데인에서, 1979년 푸에블라에서 열린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총회 문헌들을 특별히 언급해야 할 것이다. 바오로 6세는 메데인 회의에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는 푸에블라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 기회에 두 교황은 모두 회개와 해방의 주제들을 다루었다. 

8. 신적 기원을 갖는 복음 메시지의 독특한 성격17)을 주장해 온 바오로 6세를 따라,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푸에블라 연설에서 진정한 신학을 떠받쳐주는 3대 지주, 즉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진리, 교회에 관한 진리, 인간에 관한 진리 위에 모든 해방신학이 세워져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18) 

VI. 그리스도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

1. 그리스도인들이, 사목자들이, 사제들이, 수도자들이, 평신도들이 사심 없이 행한 그 광대한 업적을 간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는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에 몰입하여 빈곤으로 초래된 고난 속에서 살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도움과 위안을 가져다 주려고 노력해 왔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시급히 종식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찾으려고 고심한다. 

2. 모든 사목자들이 가슴속에 간직해야 할 열정과 연민은, 어떠한 유혹에든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거슬러 싸우는 빈곤이 그러하듯 인간과 그 존엄성을 손상시키는 활동에로 잘못 들어서게 할 위험이 있다. 

3. 절박한 문제들을 대하는 곤혹의 감정으로, 우리들이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하게 되어서는 안된다. 그로 인하여,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신명 8,3)고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하신 답변(마태 4,4)을 망각할 수는 없다. 빵을 나누어야 하는 절박함에서, 어떤 사람들은 복음화를 보류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우선 빵이고 그 다음에 주의 말씀이라는 식으로, 복음화를 내일로 미루려고 한다. 말씀과 빵을 분리시키거나 더욱이 대립시키는 일은 치명적인 오류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적 전망은 빵과 말씀이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19) 

4.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정치적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 요구되는 투쟁이 구원의 본질이고 그 전부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한갓 지상적인 복음이 되고 만다

5. 한편으로는 메데인 이후 푸에블라 회의20)에서 명확하고도 강력하게 재천명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최우선의 선택”,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의 복음을 지상의 복음으로 추락시키려는 유혹, 그 사이에 여러 가지 해방신학들이 놓여 있다. 

6. 푸에블라 문헌에 규정되어 있는 그 최우선의 선택은 가난한 사람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이중의 선택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21) 젊은이들을 위한 선택이 일반적으로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일이다. 

7. 진정한 해방신학은 올바르게 해석된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신학이어야 한다는 것은 위에서(Ⅳ, 3항 참조) 언급하였다. 

8. 그러나 구체적인 표현의 견지에서, 해방의 “신학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그 말은 수많은 신학적 입장들, 때로는 이데올로기적 주장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견해들은 상이할 뿐 아니라 때로는 서로 병존할 수 없는 것들이다. 

9. 지금 이 문서에서 우리는 “해방신학”이라는 이름 아래서 신앙의 내용과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대한 혁신적 해석을 꾀하는 사조의 발전을 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해석은 교회의 신앙으로부터 크게 일탈하여 있으며 심지어는 이를 실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10.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무비판적으로 빌려온 개념들과 유리주의적 성서해석학의 주제들에 대한 의존이 그 새로운 해석의 바탕에 놓여 있다. 그러한 해석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본래의 헌신적 투신에 있어서 진정한 그 무엇들을 변질시키고 있다. 

VII. 마르크스주의 분석

1. 성과에 대한 소망과 성급함으로 여타의 모든 방법에 절망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마르크스주의 분석에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2. 논리는 이러하다. 긴박하고도 폭발적인 상황이 지체될 수 없는 “효과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효과적인 행동은 빈곤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전제로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바로 그러한 분석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3세계의 상황,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그 분석 방법을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 

3. 제시된 목적을 성취하려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 상황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사회 변혁을 위한 가능성 있는 전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또한 진지한 투신의 증거이다. 

4. 그러나 “과학적”이라는 말은 거의 신화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과학적”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 반드시 과학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접근 방법의 원용에 앞서 신중한 인식론적 비판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비적 비판 연구가 일부 해방신학에서는 결여되어 있다. 

5. 인문 사회 과학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방법과 관점의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 하나하나는 단순하고 일방적인 해명을 허용치 않는 극히 복합적인 현실의 일부 측면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6. 마르크스주의의 경우에서, 특히 이를 이용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예비적 비판이 더욱더 필요하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실재에 대한 전체적인 세계관이어서 관찰과 분석에서 얻은 모든 자료들은 하나의 철학적 이념적 체계 안에 통합되고, 그 체계 자체가 그 자료에 부여되는 의미와 중요성을 미리 결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원리들이 사회 현실에 대한 연구에 선행되고 전제된다. 이와 같이 인식론적으로 단일한 복합체에서 그 일부를 분리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 분석의 일부만을 채택하려 해도 결국엔 그 이데올로기 전체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저술가들에게서 빌려오는 원용에 흔히 이데올로기적인 측면들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그 때문이다. 

7.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리스도인들의 반성과 행동 앞에 여러 가지 독특한 측면들과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바오로 6세의 경고는 오늘날에도 전적으로 유효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여러 면을 본질적으로 묶어주는 긴밀한 연관성을 망각하고, 마르크스주의 분석 요인들을 그 이데올로기와의 관계를 무시하고 받아들이거나, 결국 어떤 유형의 전체주의 사회에로 이끌려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계급 투쟁의 실천과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수용한다는 것은 위험한 망상”22)이 될 것이다. 

8.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그 태동 이래로 그리고 최근에는 더욱더 분열되어 왔으며 극히 상이한 여러 경향을 파생시켜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경향들이, 본래의 마르크스주의로 남아 있는 한, 인간과 사회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개념과 양립될 수 없는 어떤 기본 교조에 계속적으로 얽매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명제들은 중립적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본래의 학설에서 지니던 의미를 보존하고 있다. “계급 투쟁”의 경우가 그러하다. 계급 투쟁이라는 표현은 마르크스의 해석에 젖어 있어서, 이 말은 경험적인 의미에서 “심각한 사회적 갈등”과 동등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그와 유사한 명제들을 사용하고 있는 이들은,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일부 요소만을 취할 뿐이지 그 전체로서의 분석은 배척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적어도 독자들의 마음에는 심각한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9. 무신론과 아울러 인간의 인격과 자유와 권리에 대한 부정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이론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신앙의 진리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오류들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그 해석의 기준이 무신론적 개념에 의존하는 분석을 신학에로 통합시키려는 시도는 스스로 엄청난 모순에 빠져드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영적 본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오류는 결국 집단에 대한 개인의 전적인 예속을 초래하여 인간 존엄성과 부합되는 사회적 정치적 생활의 원리들을 부정하게 된다. 

10. 신학자들은 특별히 다른 학문에서 빌려온 분석 방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 신앙의 빛은 신학에 그 원리들을 제공한다. 신학자에 의한 철학적 입장과 인문 과학의 이용은 소위 “도구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러한 이용은 신학적인 전망에서 비판적인 연구를 거쳐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진리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궁극적인 기준은 그 자체가 신학적인 기준일 수밖에 없다. 오직 신앙의 빛 안에서 그리고 인간의 진리와 그 운명의 궁극 의미에 관한 신앙의 가르침에 비추어, 다른 학문들이 흔히 추측의 방법으로 인간, 인간 역사, 인간 운명에 관한 진리라고 내세우는 바의 타당성 또는 타당성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11. 마르크스주의 사조로부터 빌려온 해석 방법을 오늘날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적용할 때, 그것은 언뜻 보아 상당히 그럴듯하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일부 국가들의 현재 상황이 지난 세기 중반에 마르크스가 기술하고 해석했던 상황과 유사할수록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유사성을 바탕으로 하여, 특수한 본질적 요인을 도외시하기 때문에, 빈곤의 원인에 대한 엄밀한 고찰을 가로막고 혼란을 지속시키는 어떤 단순화가 이루어진다. 

12. 라틴 아메리카 일부 지역에 있어서, 사회 의식을 망각한 소수 지주들의 막대한 부의 독점, 합법적인 정부의 부재 또는 결여, 인간 기본권을 유린하는 군부 독재자들, 권력층 관료들의 부패, 외국 자본의 횡포, 이 모든 요인들은 스스로를 기술, 재정, 금융, 경제 면에서 신식민주의의 무력한 희생자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 혁명의 거센 열정을 키워주고 있다. 불의를 깨닫게 되면 격정이 따르고, 그 열정은 마치 과학적인 언어처럼 잘못 제시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언어를 원용하게 된다. 

13. 모든 분석의 제1차적 조건은 대상 현실에 대한 전적인 개방성이다. 그것은 모든 연구 가설의 채택과 이용에 비판 의식이 수반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특정한 관점에 영합하는 이 가설들은 불가피하게 현실의 일부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다른 면들은 그늘에 덮어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가설에 불과한 것으로 인정된 이론을 내세워, 마르크스의 사상과 같은 하나의 포괄적인 개념에 의존하는 자들은 사회 과학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그러한 한계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VIII. 진리의 의미 전도와 폭력

1. 이러한 포괄 개념은 그 논리를 강요하여, “해방신학”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인간관과 양립될 수 없는 일련의 주장들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빌려온 이데올로기적 핵심은 하나의 결정 원리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는 “과학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필연적 진리로서 서술되기 때문에, 거기에 그러한 역할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핵심 안에서 몇 가지 구성 요소를 판별할 수 있다. 

2.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논리에 따르자면, “분석”은 “실천”(praxis)과 불가분한 것이며, 또한 그 분석은 이러한 실천과 연결된 역사 개념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분석은 또한 비판의 도구이며, 비판은 오직 혁명 투쟁의 한 단계이다. 혁명 투쟁은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은 무산 계급의 투쟁이다. 

3. 따라서,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올바른 분석을 해낼 수 있다. 

4. 진정한 의식은 또한 참여 의식이다. 여기서 진리 개념 자체가 문제되고, 또 완전히 뒤바뀐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투쟁이나 실천(partisan praxis) 안에서 또 그 실천을 통해서만 진리가 성립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5.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실천과 실천에서 나오는 진리는 모두 편파적인 실천이고 진리이다. 역사의 근본 구조가 계급 투쟁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쇄되어야 할 착취 관계의 변증법적 반대 요청인) 계급 투쟁에 가담해야만 하는 객관적 필연성이 따른다. 진리는 계급의 진리이다. 오직 혁명적인 계급 투쟁 외에 진리란 없다. 

6. 역사의買 근본 법칙은 계급 투쟁의 법칙으로, 사회가 폭력을 바탕으로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빈자에 대한 부자의 지배 관계를 이루고 있는 폭력에 혁명의 역폭력으로 맞서, 그러한 지배 관계를 전복시켜야 한다. 

7. 계급 투쟁은 하나의 객관적 필연적 법칙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과정에 들어설 때에, 진리를 “실천”하고 “과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개념은 필연적인 폭력과 정치적인 무도덕주의에 대한 긍정을 낳는다. 이러한 조망 안에서는, 제도와 구조의 과감하고도 근본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윤리적 요청에 대한 모든 언급은 무의미하게 된다. 

8. 계급 투쟁의 근본 법칙은 총괄적이고도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실존의 모든 영역, 즉 종교적 윤리적 문화적 제도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러한 법칙과 관련하여, 독자적인 영역이란 전혀 없다. 그 모든 영역에서 이 법칙은 결정 요인으로 작용한다. 

9. 특히 윤리의 본질 자체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빌려온 이러한 명제들을 받아들일 때에, 근본적으로 의문에 부쳐진다. 사실, 계급 투쟁의 견지에서는 도덕성의 원리인 선악 구별의 초월적 특성까지 함축적으로 부정되고 있다. 

IX.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핵심의“신학적”수용

1. 여기 문제의 견해들은 흔히 “해방신학자들”의 일부 저술에서 글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또 다른 저서에서는, 그들의 전제로부터 논리적으로 그러한 견해가 나온다. 여기에 더하여, 그러한 견해들은 일부의 전례 거행에서도 전제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성찬식”이 투쟁하는 민중들의 축제로 변형되고 있는데, 그러한 전례 거행에 참여하는 자들이 이를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일부에서는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 논리적 전개를 주저하고 있다 하여도, 사실상의 체계에 말려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는 하느님께서 당신 교회에 위탁하신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왜곡시킨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해방신학들”로 인하여 그리스도교의 메시지 전체가 의문시되고 있다. 

2. 이러한 “해방신학들”이 하나의 원칙으로서 받아들인 것은, 모든 불평등과 불의를 지닌 사회의 계층화 “사실”이 아니라, 역사의 구조적 근본 법칙으로서의 계급 투쟁 “이론”이다. 그렇게 이해된 계급 투쟁은 교회 자체까지도 분열시키고 이 계급 투쟁에 비추어 교회 현실들을 판단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한 보편적 사랑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근본 법칙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악의에서 거짓 환상을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3.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계급 투쟁은 역사의 추진력이다. 역사는 그렇게 하여 핵심 개념이 된다. 하느님께서도 스스로 역사가 되셨다고 주장할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역사는 오로지 하나이며 구원사와 세계사의 구분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구분은 “이원론”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역사주의적 내재 사상을 반영한다. 그래서 거기에는 하느님 나라와 그 도래를 인간 해방 운동과 동일시하고, 역사 자체를 그 발전의 주체로 보며 계급 투쟁을 수단으로 하는 인간의 자력 구원 과정으로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동일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재천명한 바와 같이 교회의 신앙에 반하는 것이다.23) 

4. 이러한 노선에 따라,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서 하느님 자신과 역사를 동일시하고 신앙을 “역사에 대한 충실성”으로 정의하기까지 한다. 그 충실성이란, 순전히 현세적인 메시아니즘으로 이해되는, 인간 발전에 적합한 정치 수단의 신봉을 의미한다. 

5. 그 귀결로서, 신앙, 희망, 사랑에는 새로운 내용이 부여된다. 즉, “역사에 대한 충실성”, “미래에의 신뢰”,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 되는 것이다. 이 덕목들로부터 하느님을 향한 차원이 제거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6. 이러한 새로운 개념으로부터, 신앙의 진술과 신학적 판단의 급진적인 정치화가 불가피하게 뒤따른다. 무엇보다도 그 초월의 가치가 존중되어야 하는 신앙 진리들의 정치적 영향이나 결과에 대한 단순한 관심 촉구는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이 새로운 체계 안에서는, 신앙이나 신학의 모든 진술이 정치적 판단 기준에 종속된다. 그 정치적 기준이란 역사의 원동력인 계급 투쟁의 이론에 의존한다. 

7. 그 결과로서, 계급 투쟁에의 참여는 사랑 그 자체의 요구라고 제시되고 있다. 자신의 계급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대화와 설득이라는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고자 하는 소망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그리고 사랑에 반하는 것으로 비난을 받는다. 인간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부자 계급에 속해 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쳐부수어야 할 계급의 적이라고 지목된다. 그리하여 보편적 이웃 사랑과 형제애는 혁명의 승리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종말론적 원리가 된다. 

8. 교회 역시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지배한다는 그 법칙에 예속되는 역사 내부의 실재로서만 파악하려고 한다. 그러한 귀결로 인하여, 하느님의 은총이요 신앙의 신비인 교회는 그 고유의 실재를 상실한다. 마찬가지로, 적대 계급에 속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성찬의 식탁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문제 삼기도 한다. 

9. 긍정적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가난의 형태가 어떠하든, 예외 없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선호를 의미한다. 그 표현은 또한 공동체이자 제도인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복음적 가난의 요구를 우리 시대에 더욱 충만히 의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10. 그러나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는 데에 있어서 예언자들과 복음의 위대한 본문들의 가치를 회복하였다는 공적을 인정받아야 하지만,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과 마르크스의 무산자들을 너무 혼동해 왔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왜곡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싸움을 계급 투쟁의 이데올로기적 조망 안에서 계급의 싸움으로 변형시킨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란 해방을 향한 하나의 단계인 혁명 투쟁의 요구들을 깨닫게 되고 그 전례 안에서 이러한 해방을 경축하는 계급의 교회를 의미한다. 

11. 나아가 민중의 교회라는 표현에 관하여 여기서 한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사목적인 견지에서, 이러한 표현은 복음화의 선호적 대상자들을 의미할 수 있다. 그들의 처지 때문에, 교회는 누구보다도 먼저 그들에게 그 목자적 사랑을 펼치고 있다. 또한 그 말은 하느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새로운 계약의 백성24)인 교회를 뜻할 수 있다. 

12. 그러나 우리가 얘기하는 “해방신학들”에 있어서 민중의 교회는 계급의 교회를 의미한다. 조직적인 해방 투쟁의 관점에서, “의식화”가 필요한 억압받는 사람들의 교회를 뜻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이해되는 민중은 신앙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다. 

13. 민중의 교회라는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교회 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고 있다. 그 비판은 그들의 처신에서 봉사의 복음 정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격분시키는 시대 착오적 권위의 상징과 이어진, 교회 사목자들에 대한 형제적 충고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주님 친히 원하셨던 교회의 성사적 교계적 구조를 문제 삼는 것이다. 교계와 교도권의 구성원들은 지배 계급의 객관적 대표자들로서 배척되어야 한다고 규탄한다. 신학적으로 이러한 입장은, 성직자는 민중에게서 직무를 받으며, 민중은 역사적인 혁명 과업의 필요에 따라서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 직무자들을 지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X. 하나의 새로운 해석학

1. 계급 혁명의 실천에서 볼 수 있는 진리의 편파적 개념은 이러한 입장을 확인한다. “해방신학”의 명제들에 동조하지 않는 신학자들, 성직자들, 특히 로마의 교도권은 억압자의 계급에 속해 있다 하여 “미리부터”(a priori) 불신을 당하고 있다. 그들의 신학은 계급의 신학이다. 그들의 논법과 가르침은 계급의 이익만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그 자체를 고찰해 볼 필요도 없다. 요컨대 그들의 가르침은 원칙적으로 그릇되다는 판정을 받는 것이다. 

2. 여기에서 “해방신학”의 전체적 포괄적 특성이 나타난다. 그 결과로서, “해방신학”은 이러저러한 주장 때문에만 비판될 것이 아니라, 다만 선험적으로(a priori) 채택되어 그 결정 원리로서 기능해 온 계급의 관점을 바탕으로 하여 비판되어야 한다. 

3. 이러한 계급주의적 전제로 인하여, 서로 상대방의 견해를 경청하며 자신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정중하게 토론하는 그런 진정한 대화가 일부 “해방신학자”들과 더불어 이루어지기는 매우 어렵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신학자들은, 다소 의식적으로, 그 자신들의 입장으로 삼는 억압받는 혁명적 계급의 관점이 진리의 유일한 관점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신학적 판단 기준은 이렇게 해서 상대화되고 계급 투쟁이라는 대명제에 종속되고 만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앙의 올바른 규범인 정론(正論, orthodoxy)은 진리의 판단 기준이라는 정행(正行, orthopraxy)으로 대체된다. 이와 관련하여, 사변적 정향(定向)과 한가지로 전통 신학 고유의 실천적 정향을, 어떤 형태의 실천에 지나친 우위성을 부여하는 입장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실천은 신학적 진리의 최대 기준으로 삼는 혁명 실천이다. 건전한 신학적 방법론은 언제나 틀림없이 교회의 실천을 고려하고 거기서 그 토대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실천이 신앙으로부터 나오고 또 신앙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4. 교회의 사회 교리는 경멸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그 가르침은, 역사적 운명을 지니지 못하는 중산층 특유의 타협 성향에서 나온 환상의 산물이라고 한다. 

5. "해방신학들"에 내재하는 새로운 해석학은 근본적으로 성서의 정치적인 재해석에 이른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을 정치적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고 거기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성서 이야기들의 정치적 차원에 관심을 가진다는 데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정치적 차원을 중심적이고도 배타적인 차원으로 삼는 데에 그 오류가 있다. 이것은 성서의 환원적 해석에로 이끌어간다. 

6. 또한 그것은 현세적인 메시아니즘의 전망 안에 놓이게 된다. 이 전망은 하느님 나라의 세속화와 아울러 그 나라가 인간 역사의 내재성 안으로 흡수된다는 주장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7. 정치적 차원에 그러한 우위를 부여하면, 신약성서의 근본적인 새로움을 부인하게 된다. 그리고 참 하느님이시요 참 인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을 오해하고 만다. 또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악의 원천인 죄로부터의 해방으로 이해되어야 할, 그분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해방의 특유한 성격을 곡해하게 되는 것이다. 

8. 더구나 교도권의 유권 해석을 계급주의적인 것으로 비난하고 배격함으로써, 그들은 또한 전통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해석의 근본적인 신학적 기준을 잃게 되고, 거기서 생겨난 빈 자리에, 유리주의적 해석의 극히 급진적인 명제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은 또한 별다른 비판도 없이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를 대립시키고 있다. 

9. 그들은 물론 신앙의 신조들, 특히 칼케돈 신경을 문면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나, 거기에 교회의 신앙을 부인하는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고 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론의 전통 교의를 계급의 이름으로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혁명적인 체험에서 “역사의 예수”를 다시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10. 예수의 체험과 유사한 체험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바로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체험 그것은 예수의 체험이었으며, 오로지 그 체험만이 참 하느님과 그 나라에 대한 지식을 계시해 준다는 것이다. 

11.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 “하느님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25) 육화된 말씀에 대한 신앙이 부정되고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투쟁 요구를 집약시켜 놓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예수에 대한 어떤 “표상”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고 있다. 

12. 그리스도의 죽음에도 전적으로 정치적인 해석이 가해진다. 그렇게 하여, 구원을 위한 그 가치와 구원 경륜 전체가 부정된다. 

13.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이제 그리스도교 신비 전체에 미치고 있다. 

14. 일반적으로 이러한 해석은 이른바 상징의 전도를 초래한다. 그럼으로써, 사도 바오로처럼 출애굽 안에서 세례의 표상을26) 보는 대신에, 극단의 경우, 어떤 이들은 출애굽을 민중의 정치적인 해방의 상징으로 만들고 만다. 

15. 동일한 해석 기준이 교회의 생활과 교계 구조에 적용되어, 성직계와 그 “기층”(민중)의 관계는 계급 투쟁의 법칙에 따르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된다. 교회 직무의 근본에 자리하여 교회를 정신적 실재가 되게 하는 성사성, 그리고 단순한 사회적 분석으로 격하될 수 없는 성사성이 너무 간단하게 무시되고 있다. 

16. 이러한 상징의 전도는 또한 성사의 영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성체성사는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몸과 피의 선물이라고, 그리고 화해시키는 희생의 진정한 성사적 현존이라고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투쟁하고 있는 민중들의 하나의 축제가 된다. 그 결과로서, 교회의 일치는 근본적으로 부인된다. 일치, 화해, 사랑의 친교는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은총27)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적 계급이 그들의 투쟁을 수단으로 하여 일치를 건설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계급 투쟁은 일치의 길이다. 이렇게 성체성사는 계급의 성찬이 된다. 그와 동시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승리하는 힘이 함께 부정된다.

XI. 방향 설정

1. 일부 “해방신학들”의 심각한 일탈에 대한 경고는 민중들을 비참 속에 얽매는 자들, 그 빈곤으로부터 이득을 보는 자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이를 방관하거나 비참에 무관심한 자들에 대한, 간접적으로나마, 어떤 묵인이라고 받아들여져서는 결코 안 된다. 자비의 복음과 인간 사랑으로 인도되는 교회는 정의를 요구하는 울부짖음을 듣고 있으며,28) 온 힘을 다 기울여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고자 한다. 

2. 교회는 실로 엄청난 호소에 직면해 있다. 수많은 사목자들이 이미 그러해왔듯이, 과감하고도 용기 있게, 먼 안목을 지니고 현명하게, 열정과 강인한 정신으로, 희생을 요구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써, 사목자들은 그러한 외침에 최우선적으로 응답하여야 한다. 

3. 정의를 요구하는 외침에 분연히 일어나, 복음화와 인간 발전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모든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은 그들의 주교와 일치하여 교회와 일치하여, 각자 교회 안에서 받은 자기 고유의 성소에 따라, 그렇게 하여야 한다. 

4. 성소의 교회적 특성을 깨달을 때, 신학자들은 대화의 정신으로 교회 교도권과 더불어 충실하게 협력할 것이다. 신학자들은 교도권 안에서 당신 교회에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총29)을 인식하여, 자녀다운 존경심을 가지고 교도권의 말씀과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5. 복음화를 그 전체성 안에서 이해하고 복음화의 과업에 착수할 때에 비로소 인간 발전과 진정한 해방의 요구들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해방은 그 불가분의 지주로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진리, 교회에 관한 진리, 인간과 그 존엄성에 관한 진리30)를 지니고 있다. “참된 행복” 특히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에 비추어, 전세계를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되고자 원하는 교회는 진리와 정의를 위한 고귀한 투쟁에 봉사하고자 한다. 그러한 이유에서,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한다. 교회는 “보편 교회이다. 육화 신비의 교회이다. 어느 계급이나 한 계층의 교회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진리 그 자체의 이름으로 말한다. 이러한 진리는 현실적인 것이다.” 그 진리는 “인간의 모든 현실, 모든 불의, 모든 긴장 그리고 모든 투쟁”을 빠짐없이 고려하게 한다.31) 

6. 정의의 효과적인 옹호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에로 부름받은 인간에 관한 진리를 그 바탕으로 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인간의 진정한 관계에 대한 인식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정의의 토대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끊임없이 거듭 천명해 온 바 인간 권리를 위한 투쟁은 정의를 위한 진정한 투쟁이 되는 것이다. 

7. 인간에 관한 진리는 인간 존엄성과 일치하는 방법으로 그러한 투쟁을 하여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적이고도 계획적인 맹목적 폭력의 사용은, 어느 편에서 일어나든, 단죄받아야 한다.32) 정의를 회복시키겠다는 희망에서 폭력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치명적인 환상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인간을 타락시킨다. 폭력은 그 희생자의 인간 존엄성을 유린하고, 그 폭력을 자행하는 자의 인간 존엄성도 추락시키는 것이다. 

8. 그 자체가 폭력의 형태이며 빈곤을 낳고 있는 구조의 근본 개혁에 대한 절박한 요구로 인하여, 우리는 불의의 원천이 인간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오직 인격의 도덕적인 힘에 호소하고 내적 회개의 필요를 항구하게 촉구함으로써만, 참으로 인간에게 봉사하는 그러한 사회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33) 오로지 자진해서 그리고 연대 의식 안에서 필요한 변화에 자유롭게 협력할 때에, 민중들은 자신의 책임 의식을 각성하게 되고 그 인간성이 성숙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성과 사회 구조의 전도는 인간에 관한 진리와 양립할 수 없는 유물론적 인간학에 젖어 있는 것이다. 

9. 그러므로 새로운 구조 그 자체가, 인간에 관한 진리에 걸맞는 뜻으로,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킨다고 믿는다는 것 또한 치명적인 환상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진정한 새로움의 원천은 오직 우리에게 부여된 성령이시며 하느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0. 그렇게 볼 때, 불의를 낳는 구조를 혁명적 폭력의 수단으로 제거시킨다는 그 사실 자체가 정의로운 체제의 건설은 아니다. 우리 시대의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은 형제들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성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수많은 우리 동시대인들은 폭력적이고 혁명적인 수단으로써 바로 민중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체주의적 무신론적 체제에 의하여 박탈당한 기본 자유의 회복을 정당하게 갈망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이러한 수치는 결코 외면할 수 없다. 민중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체제들은 전국민을 비인간적인 예속의 상황 속에 얽매어두고 있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을 그러한 예속의 처지로 몰아넣는 일에 가담하고 있는 자들은 자기네들이 도우려고 하는 바로 그 가난한 사람들을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11. 계급이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계급 투쟁은 빈곤과 불의를 악화시키고 개혁을 지체시키고 있는 하나의 신화이다. 이러한 신화에 현혹되어 있는 자들은 그 신화가 이끌어가는 자리에서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쓰라린 교훈을 숙고하여야 한다. 그제야 그들은 우리가 여기서 실천적 효력이 없는 이상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투쟁의 효과적인 수단을 포기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복음과 그 현실적인 힘을 믿고 따르게 될 것이다. 

12. 여기서 요청되는 신학 정립을 위한 하나의 조건은 교회의 사회 교리에 그 고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사회 교리는 결코 폐쇄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에 개방되어 있다. 이러한 전망에서, 세계 도처의 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교회의 반성에 기여하는 일은 오늘날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13.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화와 인간 발전을 위하여 직접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체험은 교회의 교의적 사목적 반성에 필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천이라는 말이 복음의 영감을 간직하고 있는 사목 실천과 사회 활동을 의미한다면, 실천으로부터 시작하여 진리의 어떤 측면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14. 사회 문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윤리적 방향의 주요 노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행동을 인도하기 위해서 교회는 과학적 기술적 견지에서 인문 과학 또는 정치적 분야의 유능한 인재들을 필요로 한다. 복음에 따라 철저하게 살며 그러한 역량을 지닌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에, 사목자들은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사회 건설을 그 고유의 사명으로 하는 평신도들이 가장 먼저 여기에 해당된다. 

15. "해방신학들"의 명제들은 단순화된 형태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는데, 필요한 교리 교육과 신학적 준비나 분별력이 결여된 소위 “기층 집단” 안에서 그리고 교육 과정에서 대중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명제들은 선의의 남녀들에 의하여 어떤 비판적 판단을 거치지 않은 채 받아들여지고 있다. 

16. 그렇기 때문에 사목자들은 교육 또는 교리 교육의 질과 내용에 유의하여, 언제나 구원의 메시지를 온전한 형태로 제시하고, 그 온전한 메시지를 바탕으로 하여 진정한 인간 해방의 명령을 전해야 한다. 

17. 그리스도교 신비를 온전하게 제시하는 데 있어서, “해방신학들”이 특별히 잘못 생각하고 있거나 무시하려고 하는 본질적인 측면들을 강조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 참 하느님이시요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해방은 무상 은총이며 초월적이라는 점, 은총의 주도권 그리고 구원의 수단 특히 교회와 성사들의 진정한 본질을 강조하여야 한다. 또한 선악의 구별을 상대화시킬 수 없는 윤리의 참뜻, 죄의 진정한 의미, 회개의 필요성, 그리고 형제애, 계명의 보편성을 명심하여야 한다. 인간 실존의 정치화를 경계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정치화는 하느님 나라의 의미 전체와 인격의 초월성을 왜곡하여 정치를 신성시하고, 민중들의 종교적 성향을 혁명 과업을 위한 희생물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18. 정통 교리의 옹호자들은 가끔 수동적이라거나 특권층이라는 지탄을 받으며, 무참한 불의의 상황과 그 불의를 지속시키는 정치 체제와 관련하여 공범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영신적 회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강렬한 사랑, 정의와 평화를 향한 열정,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에 대한 복음적 감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고 있으며 특별히 사목자들과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요청되고 있다. 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하려는 노력은, 온전한 향신적 생활 안에서, 이웃을 섬기고 특별히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섬기는 효과적인 봉사에 대한 증거로써 응답하기를 요구한다. 역동적이고도 건설적인 사랑의 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바오로 6세를 따라34) 푸에블라 회의에서 말하였던 바, 이러한 “사랑의 문화”에 토대를 놓아야 할 것이다. 이미 수많은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은 참으로 복음적인 방법으로 정의로운 사회의 창조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 

결 론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안에서, 바오로 6세의 말씀은 교회의 신앙을 완전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신앙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오로지 영신적인 파멸과 더불어 새로운 빈곤과 새로운 형태의 예속을 유발시킬 뿐이다.
“하느님 나라는 여기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시작되지만 사라지고 말 이 세상의 것이 아니며, 그 나라의 성장은 인간 문명이나 과학 기술의 발전과 혼동될 수 없다는 신앙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풍요를 더 한층 깊이 깨달아, 영원한 것을 더욱 강렬하게 바라고,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더 열렬하게 응답하며, 인간들 가운데서 은총과 거룩함을 더욱 널리 전파하는 데에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바로 이 같은 사랑이 교회로 하여금 인간의 현세적이고도 참된 선익에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있습니다. 이곳 지상에 영구히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계속 그 자녀들에게 상기시키면서도, 교회는 또한 그들에게 각자 자신의 소명과 방법에 따라 그들 지상 도시의 번영에 기여하고, 인간들 사이에서 정의와 평화와 형제애를 증진시키고, 특별히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아낌없이 도와주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인류의 필요, 그 기쁨과 희망, 그들의 고통과 투쟁에 강렬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빛으로 그들을 비추어 유일한 구세주이신 그분께 모든 인간들을 결합시키고자 그들에게 위대한 열망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이 세상의 일에 순응하고 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며, 교회가 자신의 주님을 고대하고 영원한 나라를 기다리는 열성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35)
이 훈령은 신앙교리성성의 정기 회의에서 채택되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아래 서명한 장관 추기경에게 허여하신 알현에서 이를 인준하시고 그 반포를 명하셨다.


로마, 신앙교리성성에서,
1984년 8월 6일,
주의 거룩한 변모 축일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차관 알베르또 보보네 대주교



1. 사목 헌장, 4항 참조.
2. 계시 헌장, 10항 참조.
3. 갈라 5,1 이하 참조.
4. 출애 24장 참조.
5. 예레 31,31-34; 에제 36,26 이하 참조.
6. 스바 3,12 이하 참조.
7. 신명 10,18-19 참조.
8. 루가 10,25-37 참조.
9. 2고린 8,9 참조.
10. 마태 25,31-46; 사도 9,4-5; 골로 1,24 참조.
11. 야고 5,1 이하 참조.
12. 1고린 11,17-34 참조.
13. 야고 2,14-26 참조.
14. AAS 71(1979), 1144-1160면 참조.
15. AAS 71(1979), 196면 참조.
16. [현대의 복음 선교], 25-33항: AAS 68(1976), 23-28면 참조.
17. [현대의 복음 선교], 32항: AAS 68(1976), 27면 참조.
18. AAS 71(1979), 188-196면 참조.
19. 사목 헌장, 39항; [사십주년], 37항: AAS 23(1931), 207면 참조.
20. 1134-1165항 및 1166-1205항 참조.
21. [푸에블라 문헌], IV, 2 참조.
22. [팔십주년], 34항: AAS 63(1971), 424-425면 참조.
23. 교회 헌장, 9-17항 참조.
24. 사목 헌장, 39항 참조.
25. 사도 2,36 참조.
26. 1고린 10,1-2 참조.
27. 에페 2,11-22 참조.
28. [푸에블라 문헌], I, 3, 3.3 참조.
29. 루가 10,16 참조.
30. 요한 바오로 2세, 푸에블라 회의 개막 연설: AAS 71(1979), 188-196면; [푸에블라 문헌], II, 1 참조. 
31. 요한 바오로 2세, 리오데자네이로 파벨라 “비디갈” 연설(1980.7.2.): AAS 72(1980), 852-858면 참조.
32. [푸에블라 문헌], II, 2,5.4 참조.
33. [푸에블라 문헌], IV,3,3.3 참조.
34. [푸에블라 문헌], IV,2,2.3 참조.
35. 바오로 6세, Sollemnis Professio Fidei(1968.6.30.): AAS 60(1968), 443-44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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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www.cbck.or.kr/book/book_list6.asp

영문: 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documents/rc_con_cfaith_doc_19840806_theology-liberation_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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